160화 내분(5)
차기범이 탐욕을 드러낸다.
그걸 보고 한청호가 더욱 부추긴다.
“비서실장 김정림이 떨어져 나가고 실감하지 않으십니까?”
실감한다.
당장 장차관들부터 차기범의 눈치를 보며 몸을 사린다.
그동안 차기범을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자들이 특히 전전긍긍하더라.
“보안 사령관 전두호를 밀어내니 어떠십니까?”
세상이 모두 내 것 같다.
육사 출신이 아니라고 무시하던 육군 참모 총장 이세후가 먼저 전화를 걸어온다.
제1 야전 사령관부터 시작해 수도 경비 사령관까지.
모두 차기범 앞에 고개를 조아린다.
“누가 있어 차 실장님의 자리를 위협할 수 있겠습니까? 정앙 정보부?”
어림도 없다.
중앙 정보부 부장 신지수는 차기범의 전화 한 통에 버선발로 달려오는 형국이다.
“차 실장님의 세상이 온 겁니다. 그걸 제가 도와드렸고요.”
짜릿하다.
이게 과연 권력의 맛인가 싶다.
차기범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한 회장이 힘을 많이 썼지.”
차기범은 한껏 기분이 좋아졌다.
어느새 자네에서 한 회장으로 호칭부터 바뀌었다.
“앞으로도 이렇게 쭉 도와주게.”
“물론이지요.”
주거니 받거니 술잔이 오간다.
한청호가 웃으며 말했다.
“각하의 눈치는 어떠십니까?”
은근슬쩍 박정환의 동태를 파악하려는 속셈을 차기범이 왜 모를까.
“각하는 왜? 아직도 헛된 희망을 품고 있나?”
“아, 아닙니다.”
박정환은 한청호의 면담 요청을 번번이 거절하고 있다.
아니, 차기범이 면담 요청을 번번이 막아서고 있다.
“내가 미덥지 못하다는 소리로 들리는데?”
차기범의 눈살이 찌푸려질 때 한청호는 재빨리 술잔을 채워 주며 비위를 맞췄다.
“오해하셨습니다. 제 말은 혹시 각하께서 거사의 낌새를 눈치챈 건 아닌지…….”
“아, 그 말이로군.”
차기범이 피식 웃었다.
“인(人)의 장막(帳幕)이라는 게 생각보다 무서운 거야.”
김정림을 밀어낸 후 차기범이 권력을 독점할 수 있는 이유였다.
삼인성호(三人成虎)가 괜히 나온 말이 아니다.
“박정환의 귀에 들어가는 정보를 내가 선별하고 있어. 그런데 어찌 알겠나.”
어느새 각하란 소리까지 사라져 있었다.
“그렇다면 안심입니다. 차 실장님이 언제까지나 몸을 낮추실 분이 아니란 것을 압니다.”
차기범은 부정하지 않았다.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술을 마실 뿐이다.
“솔직히 각하께서 뛰어난 영웅이어서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그렇지.
“차 실장님께서 목숨 걸고 각하를 보호하지 않았으면 조만간 그 자리에서 끌어내려지지 않았겠습니까?”
그 역시 그렇지.
차기범이 만족스럽게 웃으며 술을 한입에 털었다.
한청호가 재빨리 술잔을 채웠다.
“강태수는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한청호가 은근히 묻자 차기범이 의미심장하게 웃는다.
“왜? 내가 그놈 편을 들었다고 섭섭해?”
“그럴 리가요. 차 실장님께서 일부러 그 애송이의 응석을 들어주신다는 것을 누가 모릅니까.”
강태수.
“그놈, 똑똑한 놈이야.”
“지나치지요. 안 그렇습니까?”
“배짱이 두둑하고, 수완 역시 보통이 아니지.”
“이 한청호를 이렇게까지 궁지로 몬 놈이니 난놈은 난놈이지요. 하지만 말입니다.”
한청호는 비릿하게 웃었다.
“나이는 공으로 먹는 게 아닙니다. 그래 봐야 애송이. 아직 차 실장님이나 제 상대가 될 수는 없지요.”
차기범 역시 비릿하게 웃었다.
“똑똑한 것 하나 믿고 나대는 어린놈을 어찌 자네에 비하겠나.”
차기범이 처음으로 한청호에게 먼저 술을 내어준다.
한청호는 재빨리 공손히 잔을 들어 올렸다.
쪼르륵.
“강태수, 그놈이 아니라 절 택한 것을 결코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아무렴.”
후회할 것 같으면 지금 이 자리에 나오지도 않았다.
“박정환은 인정했을지 몰라도 난 인정 못한다. 그놈의 뻣뻣한 무릎은 내가 꿇려 주지.”
박정환은 그깟 10억으로 놈의 무릎을 봐줬을지 몰라도 난 달라.
담배가 당긴다.
차기범이 품에서 담배를 꺼냈다.
한청호가 재빨리 차기범의 담뱃불을 놓아줬다.
차기범이 한청호의 손에 들린 라이터를 보며 피식 웃었다.
“강태수가 받은 라이터는 세상 아쉬울 것 없는, 박정환이 애지중지하는 물건이다.”
박정환의 라이터.
차기범에게는 주지 않는 라이터를 강태수에게는 내줬다.
박정환이 유독 아끼는 것이라서 몇 년이나 맡아 두며 소중히 보관했다.
“박정환이 그걸 전두호도 아닌 강태수 손에 들려줄 줄은 몰랐다.”
박정환 총애의 상징과도 같은 물건이었다.
차기범은 제 품에서 라이터를 꺼낼 때마다 자부심을 느끼곤 했다.
그런데 박정환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그에게서 라이터를 빼앗아 강태수에게 줘 버렸다.
얼마나 이를 갈았는지 모른다.
“난 그 건방진 애송이가 천둥벌거숭이처럼 날뛰는 꼴은 더 보고 싶지 않아.”
질투였다.
위기감이었다.
태수가 박정환에게 인정받으면 받을수록 차기범의 마음은 뒤틀렸다.
‘지금껏 목숨을 걸고 충정을 다 바쳤건만 그깟 놈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박정환에 대한 섭섭함은 어느새 원망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 원망은 이제 탐욕으로 변하고 있었다.
“후-”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회상에 잠긴다.
“박정환이 그러더군. 일단 손대면 끊을 수 없는 게 담배와 권력이라더니.”
차기범 역시 권력 맛을 알게 되었으니 어쩌겠나.
권력은 부모와 자식 간에도 나누지 않는 것이니 어쩌겠나.
“10년이나 해 먹었으면 박정환도 이제 그만 내려와야지.”
차기범이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아직 반도 채 태우지 못한 담배가 우악스럽게 짓눌렸다.
“차 실장님께서 각하의 집무실 자리에 앉아 그 라이터로 담배 한 대 피우면 맛이 참 좋겠습니다.”
“그래야겠다.”
웃음이 가득한 술자리가 이어졌다.
* * *
태수는 말없이 술을 마셨다.
안소정은 술을 따르다 말고 도끼눈으로 옆방을 노려봤다.
얇디얇은 장지문이 눈빛으로 뚫릴 지경이다.
-박정환 다음은 강태수다. 곱게 끌어내진 않겠어. 처참하게 짓밟아 주지.
-하하하, 그거 기대되는군요.
화가 난 그녀가 술 주전자를 내려놓고 일어나려 했다.
그런데 태수가 그녀의 손목을 붙들었다.
조용히 고개를 젓는 태수.
옆방에서 인기척을 듣고 먼저 장지문을 열어서는 안 된다.
‘들켜서야 득보다 실이 많지.’
기왕 중요한 정보를 엿들었으니 정보의 우위를 포기할 생각은 없다.
‘호의는 호의로, 악의는 악의로, 배신은 배신으로. 받은 것 이상으로 되갚아 주면 그만이다.’
어차피 처음부터 이해득실로 엮인 관계가 아닌가.
이 바닥에 배신은 차고 넘친다.
이 정도 일로 일일이 흥분할 태수가 아니었다.
‘오랜 고민을 끝낼 수 있게 되었군. 오히려 속이 홀가분할 지경이야.’
-차기범은 어찌해야 하는가.
태수를 고민하게 만든 주제였다.
‘전두호는 내게 직접 시비를 걸었지만 차기범은 몇 번 날 도와주었다.’
태수는 종종 차기범의 처우에 대해 고민하곤 했다.
박정환과 전두호를 표적으로 삼는 거사가 아닌가.
박정환의 충복인 차기범이 휘말릴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를 어떻게 무사히 빼내 오기 위해 따로 조치를 취해야 하나.
아니면 차기범이 휘말린다 하더라도 모른 체 수수방관할 것인가.
그도 아니면 전생의 행적을 이유로 차기범까지 적극적으로 제거할 것인가 등등.
‘모두 쓸모없는 고민이었군.’
포항 철강 사장실에서 처음 차기범을 만났을 때가 생각난다.
박태종, 장준용, 태수가 한 편에 앉았고, 맞은편에는 김정림과 한청호가 앉았다.
그 가운데 상석에는 박정환이, 그 뒤로는 차기범이 서 있었다.
‘난 늘 궁금했었지. 과연 차기범이 어느 쪽에 서 있는 사람인가를.’
선뜻 사우디에 특수 요원을 파견할 사람들을 정해 준다고 할 때부터 의문을 품었다.
그 이후 태수에게 호의를 비친 적은 있었지만 대부분 차기범과 이해관계가 같을 때뿐이었다.
그는 태수에게 무언가를 적극적으로 요구하지도, 그렇다고 반대되는 행동을 취하지도 않았다.
‘박정환의 뒤에 서 있던 차기범이 박정환 대신 상석에 앉길 택한 것뿐이군. 차기범의 오른 자리를 한청호에게 약속하고서.’
결과가 깔끔해서 더 좋다.
‘뒤로 딴 꿍꿍이를 품고 있었어. 한청호와 내 사이를 지켜보며 박정환의 뒤에서 일을 조종하는 것으로는 성에 차지 않게 되었나?’
차기범은 이미 권력에 물들어 눈이 뒤집힌 상태였다.
전생에서는 그래도 박정환에 대한 충성을 놓진 않았었다.
하지만 한청호와 대화하는 것을 들어 보니 이번엔 충성을 택하지 않을 모양이다.
‘차기범이 날 적대하기로 작심한 이상, 나 역시 제대로 응해 줘야겠군.’
마음을 정했으니 자연히 속이 후련하지 않겠나.
하지만 안소정은 아닌 모양이다.
예쁜 입술을 짓씹으며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아름답게 다듬어진 긴 손톱이 벌써 살을 파고드는 것 같다.
‘저러다 상처 나겠어.’
태수가 말없이 그녀의 주먹 쥔 손가락을 일일이 펴 주고, 깨무는 입술을 빼냈다.
안소정이 놀란 표정으로 태수를 본다.
턱.
태수는 그녀의 손에 도자기 술잔을 쥐여 주었다.
아까 그녀가 태수에게 따라 줬던 술이었다.
태수와 술잔을 잠시 번갈아 보던 안소정.
그녀가 단숨에 술을 마셨다.
탁.
태수의 손에서 술 주전자를 빼앗아 상 위에 도로 내려놓는다.
안소정이 무릎걸음으로 태수에게 다가온다.
그녀가 두 손으로 조심스레 태수의 두 귀를 막는다.
차가운 손이었다.
“듣지 마세요.”
태수의 귓가에 작게 속삭이는 그녀.
“우리 같이 실컷 마셔요. 저도 오늘은 제대로 마시고 싶어요.”
태수가 고개를 들어 안소정을 본다.
그녀는 씁쓸하게 웃고 있었다.
짓씹던 입술이 유독 붉었다.
* * *
밤이 깊었다.
차기범과 한청호은 물론 주안상을 치우는 사람들까지 모두 물러갔다.
태수와 안소정이 자리한 국빈관 룸은 적막하기 그지없다.
탁.
안주도 없이, 대화도 없이.
빈 술잔은 안소정이 조용히 채워 준다.
-방해하지 않겠어요. 충분히 생각하세요. 중요한 일이잖아요.
그녀가 먼저 이렇게 말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내내 옆에서 태수의 술잔을 채워 주고, 태수의 속도에 맞춰 술을 마셨다.
덕분에 태수는 생각에 집중할 수 있었다.
문득 태수가 술잔을 내려놓았다.
“괜찮습니까? 많이 취한 것 같습니다.”
“조금. 그래도 괜찮아요.”
사실 안소정은 굉장히 취해 있었다.
태수의 주량을 따라가기 벅찼기 때문이다.
그제야 태수도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다.
“그렇게 무리하지 않아도 됩니다.”
“같이, 실컷, 제대로, 마시기로 했잖아요.”
“적당히 마십시다.”
다른 일로 머릿속이 복잡했기에 안소정 생각까지는 못했다.
태수가 안소정의 손에서 술잔을 빼앗았다.
그녀가 물끄러미 태수를 보았다.
술기운이 올라오자 이제야 용기가 생겼다.
“기분이 영 좋지 않죠?”
태수가 고개를 들어 안소정을 보았다.
그녀는 무척 가라앉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제 말을 안 믿으실 것 같아 이런 자리를 마련했어요.”
“잘했습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인 법이다.
차기범이 한청호와 손을 잡았다고 대뜸 보고하면 대두분의 사람들은 믿지 않았을 터다.
-그럴 리 없어!
-증거는? 증인은?
-대뜸 이간질부터 하다니. 아주 악질이네.
배신에 대해 보통 이런 반응을 보이기 마련이니까.
마침 좋은 기회가 있어서 안소정은 일부러 태수를 이곳으로 데려왔다.
직접 보고 들어서 판단하라는 뜻이었다.
그게 설득보다 훨씬 효과적이다.
“하지만 당신의 그런 표정을 보니 괜한 짓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 표정이 어떻습니까?”
“매우 복잡하고 무서운 표정을 짓고 있어요. 차기범과 한청호를 죽이기라도 할 것처럼.”
그런 생각을 하긴 했다.
거사를 어떤 식으로 더 효과적으로 진행할지 고민했으니까.
아마 많은 사람이 죽고 다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솔직하게 얘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당신이 술을 이리 오랫동안 마실 정도로 괴로워할 줄 몰랐어요. 배신의 상처는 누구에게나 아픈 법인데. 제가 경솔했어요.”
태수는 피식 웃었다.
“배신?”
배신(背信).
신의를 등진다는 뜻이다.
“애초에 믿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니 배신이라고 할 수 있을까?
“제가 차기범을 믿었다면 동맹 제안을 했을 겁니다.”
라흐만 장준용, 안정우에게 했듯이.
하지만 태수는 차기범에게 동맹 제안을 건네지 않았다.
‘차기범이 증거 자료를 박정환에게 건네지 않았다는 사실은 진즉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