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산 찍고 건설 재벌-159화 (159/230)

159화 내분(4)

안소정은 그저 속으로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똑똑한 남자야.’

하나를 알려 주면 열을 유추하는 남자.

순식간에 상황 파악을 끝내는 남자.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가 없어서 좋네.’

마음에 든다.

안소정이 태수를 지그시 보았다.

‘그러니 금산의 금지옥엽이 홀딱 넘어간 거겠지.’

장서연은 재계 서열 6위인 금산 그룹의 딸이다.

그것도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는 막내딸.

‘절벽 위의 꽃’이란 별명처럼 고고한 자태로 뭇 남성들의 마음을 훔쳐 간 그녀가 아닌가.

그런 그녀가 태수를 보던 눈빛은 어떻던가.

호감, 호의, 관심, 동경.

‘마음에 안 들어. 장서연의 그 눈빛.’

그래서였다.

그녀답지 않은 짓을 해 버렸다.

‘흐음, 솔직히 장 할아버지가 자꾸 결혼하라고 밀어붙일 땐 거부감부터 들었는데.’

장말동이 세뇌하듯 침을 튀겨 가며 말했다.

칭찬도 한두 번이지 볼 때마다 결혼 얘기를 꺼내니 울컥했었다.

그런데 태수를 직접 보면 볼수록 왜 그리 장 할아버지가 안달복달했는지 알 것 같다.

‘이 남자, 탐난다.’

이런 마음은 처음이었다.

독점욕, 소유욕, 아니면 질투.

그게 어떤 감정인지는 알 수 없다.

‘장서연에게 뺏기고 싶지 않아.’

안소정은 지그시 태수를 보기만 한다.

그러니 밥이 제대로 넘어갈 리가 있나.

태수가 고기반찬을 하나 집어 안소정의 밥그릇에 넣어 주었다.

“배고플 텐데 왜 안 먹습니까?”

“아…….”

“많이 드십시오.”

태수가 안소정이 따라 준 청주를 마신다.

안소정은 청주 주전자를 들어 태수의 잔을 다시 채웠다.

“상을 물리고 주안상으로 내올까요?”

“당신이 마저 먹는 거 보고.”

태수가 무심하게 대답하면서 안소정의 밥그릇 속에 전을 하나 더 넣어 준다.

“음식 솜씨가 아주 좋습니다.”

안소정은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대운각 음식은 모두 그녀의 손길을 거쳐 간다.

이게 뭐라고 괜히 마음이 간질거렸다.

안소정은 어쩔 줄 모르고 청주를 홀짝 마셨다.

“술 좀 합니까?”

“잘 못해요.”

“그럼 천천히 마십시오. 음미하며 마시는 따뜻한 술 한 잔은 약이지만 급하게 마시는 술은 독입니다.”

태수가 웃으며 술잔을 들어 향기를 맡았다.

“향이 아주 좋습니다. 덕분에 호강하는군요.”

대운각은 모든 것이 최고급이다.

이번에 내온 술도 최고급 전통주였다.

안소정은 잠시 말을 잊지 못하고 태수를 멍하니 봤다.

그녀가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주안상을 들일게요. 술을 마실 줄 아는 남자와 마시는 술이 밥보다 더 좋을 것 같으니까요.”

그녀가 부르자 대운각 종업원들이 순식간에 상을 내간다.

그리고 작은 주안상이 대신 들어왔다.

주안상을 내놓고 물러나면서 종업원이 안소정의 귀에 말을 전하고 간다.

안소정은 태수의 술잔을 채워 주며 말했다.

“한청호가 도착해서 이리로 오고 있다고 하는군요.”

* * *

한청호는 주안상을 받아 들고 초조한 마음에 연거푸 술잔을 비웠다.

‘차기범.’

지금껏 박정환 대통령과의 만남을 차단하고 있는 남자다.

‘지라시 때문에 내가 얼마나 곤란한지 뻔히 알면서도 모른 척하더니.’

그뿐만이 아니다.

‘또한 전두호를 압박하면서 군자금을 핑계로 기업 대출까지 막아 버렸어.’

덕분에 청일까지 자금줄이 막히고 말았다.

더구나 차기범이 한경련에 나타나 압력을 행사하는 바람에 한경련 차기 회장 자리마저도 물 건너갔다.

‘강태수와 짜고 날 구석에 몰아넣는 이유를 내가 왜 모르겠어. 알면서도 괘씸한 건 어쩔 수 없구나.’

그런데 한청호가 어째서 이 시간에 차기범을 만나는 것일까.

그때였다.

“먼저 와 있었군.”

드르륵.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차기범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청호를 보는 눈빛에는 감정이 실리지 않았다.

한청호는 마른침을 삼켰다.

“앉으십시오.”

“긴말 할 필요 있나? 용건만 간단히 하지.”

싸늘한 태도였다.

하지만 한청호는 웃음을 지었다.

공손한 태도로 종이 한 장을 건넨다.

“부탁하신 인명록입니다.”

“음.”

“수도 경비 사령부의 오성회 회원은 그들로 끝입니다.”

“좋아.”

한청호가 오성회 인명부를 차기범에게 넘겼다.

차기범은 한 장밖에 되지 않는 종이에 적힌 인원은 모두 12명.

차기범이 오성회 회원만 골라서 색출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이것으로 수도의 안전은 보장되었군요.”

“애초에 군대 내 사조직이 기승을 부리는 것이 말이 안 되는 일이지. 수도를 지켜야 할 자들이 수도를 위협하다니, 언어도단(言語道斷)이다.”

차기범은 매서운 눈길로 종이에 적힌 이름과 직위를 읽어 내려갔다.

한청호가 은근하게 말했다.

“이번에 중앙 정보부에 잡혀갔던 깡패 놈들 말입니다.”

“중앙 정보부 차장 김재국이 잡아 온 놈들?”

중앙 정보부는 국빈관 깡패를 소탕하고, 범죄의 증거물을 모조리 입수했다.

차장 김재국이 직접 나서서 국빈관 깡패들을 취조하고 있다.

“예, 그놈들이 제 아들을 물고 늘어져서 귀찮아 죽겠습니다. 차 실장님께서 손 좀 써 주십시오.”

“자네 아들 뒤를 덮어 달라?”

“그놈들 하는 말은 전부 모함입니다. 제 아들이 뭐가 아쉬워서 그런 놈들과 어울려 다닙니까? 회사 일 배우기 바빠서 허둥대는 녀석입니다.”

“김재국이 없는 말 지어내는 놈이 아니란 건 자네가 더 잘 알 텐데.”

맨입으로?

한청호의 귀에는 그렇게 들렸다.

“누가 깡패 말을 믿어 준답니까? 오성회 12명과 내 아들을 향한 모함 정도는 바꿀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차기범이 12명의 오성회 회원들 이름이 적힌 종이를 접어 품에 넣었다.

“그러지.”

청와대에서 중앙 정보부로 명령이 떨어질 것이다.

국빈관 깡패와 관련된 취조는 그만하고 마무리하라고.

한청호가 품에서 종이를 한 장 더 꺼냈다.

“이것은 전두호 보안 사령관에게 이번에 군자금을 건넨 사람들의 목록입니다.”

“또 무슨 청탁을 하려고 이러나.”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차기범은 손을 내밀었다.

한청호는 두 손으로 공손히 종이를 올렸다.

“하…….”

군자금 명부에 적힌 이름을 확인하고 차기범이 헛웃음을 지었다.

“김정림이 전두호에게 돈을 건네? 이 새끼는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군.”

전 청와대 비서실장 김정림의 이름을 제일 위에서 발견한 것이다.

차기범이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패배자는 말이 없어야 하는 법이지. 이렇게 은혜도 모르고 뒤에서 수작을 부리면 몸 성히 보내 준 의미가 없는데 말이야.”

싸움에 진 개는 꼬리를 말고 도망가야 하는 법이다.

김정림은 비서실장 자리에서 쫓겨났을 때 야망을 접었어야 했다.

이렇게 전두호 근처에서 알짱댈 게 아니라.

차기범이 종이를 접어 품에 넣었다.

한청호가 슬쩍 말한다.

“요즘 각하께서 이상한 신문 때문에 마음이 영 복잡하신 모양입니다.”

“자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야.”

“제가 어찌 신경을 쓰지 않겠습니다. 그 이상한 신문이 저와 영부인을 모함하고 있는데.”

차기범이 차갑게 웃었다.

“모함?”

그가 술을 다시 한입에 털어 넣으며 비웃었다.

“모함이 아니란 것은 각하만 모르지.”

차기범이 은근하게 말했다.

“강태수가 전해 준 결정적인 증거가 각하께 들어가지 않았는데, 각하께서 어찌 아실 거야?”

“하하하, 차 실장님께서 손을 제때 써 주신 덕분이지요. 그건 지금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청호는 예전에 박정환과 태수를 이간질한 적이 있었다.

태수의 그룹 출범 전, 은행 대출과 투자를 전부 틀어막기 위해서였다.

-강태수가 사우디 국방부 장관에게 각하의 약점을 전한 공로로 석유 권리증을 받았다.

-한청호는 강태수의 협박으로 각하의 약점을 덮기 위해 청일 중장비까지 내놨다.

-강태수는 한청호의 말이 거짓이란 결정적인 증거를 차기범에게 건넸지만 박정환은 끝내 태수를 만나 주지 않았다.

태수는 이렇게 알고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한청호와 차기범은 다르게 말하고 있었다.

차기범이 술을 마시며 웃었다.

“자네, 강태수가 내게 그걸 주지 않고 다른 이에게 넘겼다면 각하께서 어찌 나오셨을까?”

“차 실장님이 안 계셨더라면 어쩔 뻔했겠어요. 청일의 은인이십니다.”

한청호 역시 호쾌하게 술을 마시며 웃었다.

“차 실장님께서도 제 공을 알아주셔야지요. 김정림의 옷은 제가 벗겼습니다.”

“알아.”

차기범과 김정림.

대통령 경호실장과 대통령 비서실장.

양쪽 배에 한 발씩 타고 줄을 대던 한청호는 김정림의 배가 기울자마자 완전히 갈아탔다.

그동안 들인 공이 아깝지만 어쩌겠나.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는 절대 매몰 비용을 고려해서는 안 되는 법이지.’

매몰 비용을 아까워하다가는 생각하지 말고 침몰하는 이에게 엮여 몰락하게 될 뿐이다.

‘정치에는 적도 없고 친구도 없다. 들인 돈을 회수한다는 생각으로 나섰다간 필패(必敗)한다.’

한청호는 과감하게 김정림을 버렸다.

그리고 차기범과 손을 잡았다.

전두호와 동료 기업들의 이름을 팔아 가면서.

“은행들을 움직여 청일의 대출 제한을…….”

“안 돼.”

차기범이 딱 잘라 거절한다.

“각하께서도 동의하신 일이야.”

박정환을 등에 업고 차기범이 한 일이란 것을 한청호가 어찌 모를까.

하지만 한청호는 나무라지 않았다.

오히려 더 은근하게 말했다.

“청일 호텔을 지을 자금이 부족합니다. 차 실장님의 명을 이행하려면 숨통을 틔워 주셔야 하지 않습니까?”

“내가 알 바 아니지.”

차기범은 딱 잘랐다.

“자네 입으로 각하께 약속한 일을 이행하라는 거야. 토 달지 말고 진행해.”

씨알도 안 먹힌다.

한청호는 차기범이 왜 이렇게 나오는지 알고 있다.

“차 실장님, 청일 길들이기는 이만하면 되지 않았습니까.”

태양 그룹 강태수와 손을 잡고 차기범이 벌이는 일련의 짓.

박정환이 강태수 길들이기를 위해 한청호의 청을 들어주었던 것과 완전히 똑같은 일이라는 소리다.

-차기범은 왜 한청호를 길들이려고 하는가.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였다.

-차기범은 한청호를 중히 쓰고 싶어 한다.

박정환이 굳이 압력을 가해 태수의 기를 꺾으려 했던 이유였다.

만일 태수가 아니라 다른 재벌 기업이 출범한다고 박정환이 저리 나올까?

아니다.

미리 기를 꺾어 곁에 두고 쓰기 위해서 공을 들인 것이다.

차기범도 마찬가지였다.

“전 이렇게 차 실장님 앞에 납작 엎드렸지요. 그러니 사정을 봐주십시오.”

차기범이 술잔을 딱 소리가 나도록 내려놨다.

“경호실에 감히 첩자를 심어 놔?”

차기범이 한청호에게 싸늘하게 대하는 이유였다.

“날 얼마나 무시했으면 그런 짓거리를 저질러?”

“오해하고 계시는군요.”

한청호는 뻔뻔했다.

차기범의 빈 잔에 술을 채워 준다.

“저는 그저 눈앞에서 미끼를 흔들었을 뿐입니다. 충성 시험은 그렇게 하는 겁니다.”

달콤한 혓바닥이 악마처럼 속삭인다.

“저한테 넘어가 마음을 바꾼 자가 다른 이에게 넘어가지 말란 법이 있습니까?”

그래도 괘씸하다.

“저는 배신한 놈들을 따로 추려 다가 차 실장님께 기꺼이 바쳤지요. 다른 기업 중에 저처럼 자진납세한 놈들이 또 있을까요?”

없다.

오로지 한청호뿐이었다.

한청호는 차기범의 입안에 든 혀처럼 굴었다.

차기범이 무엇을 원하는지 한청호보다 더 잘 아는 자는 없었다.

“경호실에 눈과 귀를 심고 싶어 하는 자들은 많습니다. 능력이 없어서 못하는 거지 욕심이 없어서 안 하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박정환과 가까울수록 권력이 커지는 세상이다.

박정환과 밀착하는 경호원들을 노리는 자들이 나오는 건 당연한 일이다.

“이참에 제 덕분에 차 실장님께 충성하는 놈들로만 추려졌으니 이제 차 실장님은 아무것도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오직 딱 한 명만 바라보면 됩니다.”

차기범이 걱정해야 하는 사람은 이제 한 명밖에 없다.

절대 권력자 박정환.

차기범의 마음에 욕심이 꿈틀대었다.

‘한 명이라. 내가 언제까지 박정환만 보고 살아야 하나?’

남자라면 응당 최고의 자리를 차지해 보기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하는 법이다.

박정환의 자리가 탐난다.

“거의 다 왔습니다. 이제 그 누가 차 실장님을 견제할 수 있겠습니까?”

없다.

오로지 박정환뿐이다.

하지만 차기범의 생사여탈은 결국 박정환에게 달린 것인가.

차기범의 눈에 기이한 열망이 비친다.

독차지한 권력이 너무 달콤해서 정신을 차릴 수 없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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