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산 찍고 건설 재벌-157화 (157/230)

157화 내분(2)

청일 그룹 본사.

한청호는 전화기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아니, 왜 계속 대출을 막는 거야? 몇 달째 심사를 기다려 달란 소리만 하는 거 알고 있나?”

-죄송합니다. 우리 은행도 적자가 심해서 부실 채권을 정리해야 하는지라…….

“그 소리가 몇 달째냐고! 우리가 왜 부실 채권이야!”

-청일 정유로 쌓인 적자에 청일 호텔, 청일 축구장, 청일 아파트까지. 양심도 없으십니까? 우린 완전히 발 빼겠습니다.

“이봐! 지금… 야! 최상수!”

전화가 일방적으로 끊겼다.

한청호는 화가 나서 전화기를 부서져라 끊었다.

“청일 호텔이 곧 개장해! 그걸 모르는 놈들이 아닌데 왜 이러는 거야?”

다른 계열사에서 나오는 돈을 끌어 다가 청일 건설에 모조리 집어넣고 있다.

그렇지 않았으면 청일 건설은 진작 도산하고도 남았다.

그때 박 비서가 회장실에 들어왔다.

“회장님, 장수 은행에서도 독촉 전화가 빗발치고 있습니다.”

“알아! 채근하지 않아도 알고 있어!”

장수 은행뿐만이 아니다.

시중 18개 은행이 들고 일어나니 나머지 은행도 슬그머니 숟가락을 얹었다.

“최무룡을 만나야겠다.”

요 몇 달 동안 청일에 대출해 주는 유일한 은행은 초명 은행뿐이다.

어쩔 수 없이 한청호는 나갈 채비를 서둘렀다.

* * *

송 비서가 사무실로 들어왔다.

“송 비서님, 다녀왔던 일은 어떻게 됐습니까?”

“모든 은행장이 일제히 독촉장을 날렸습니다. 이것까지 무시하면 청일 건설은 1차 부도를 피할 수 없을 겁니다.”

“잘했습니다.”

한청호의 자금은 완전히 동났다.

‘아직 박정환의 금고를 열 정도는 아니란 소리지?’

그건 최후의 최후를 감수할 각오로 열어야 하는 판도라의 상자다.

그러니 한청호가 저리 아득바득 버티는 거겠지.

‘버티려면 얼마든지 버텨 봐라. 그렇다면 난 이 틈에 청일의 계열사를 하나 더 가져오면 그만이지.’

태수의 다음 목표는 진즉 정해 놨다.

-청일 자동차.

초명 은행과 한청호의 내분을 이용할 생각이다.

송 비서가 말했다.

“우리는 돈으로 은행을 휘두르고, 치부책으로 은행장들을 쥐고 있지요.”

“그러니 시중 모든 은행이 청일에 대출을 거부하고 있는 게 아닙니까. 수고했습니다.”

“다른 것이 걱정됩니다. 행여 위에서 청일의 숨통을 틔워 주란 명령이 내려오면…….”

송 비서가 말을 흐린다.

태수가 송 비서의 걱정을 왜 모르겠는가.

만일 그런 일이 생기면 은행장들은 박정환의 명령을 거부할 수 없다.

태양 그룹의 숨통을 막으란 명령에 따랐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태수는 자신만만했다.

“그건 걱정할 것 없습니다.”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회장님, 분명 한청호는 박정환을 찾아가 도움을 청할 겁니다. 사과 상자를 들고 가겠죠.”

“그렇겠죠. 그런데 사과 상자가 청와대까지 들어가긴 할까요?”

예전과 상황이 달라졌다.

박정환 근처에 다가가는 사람들을 모두 쳐내고 있는 유능한 골키퍼가 붙어 있기 때문이다.

늦게 배운 도둑질에 밤새는 줄 모른다고, 권력욕에 눈이 뒤집힌 남자가 있지 않은가.

“차기범이 중간에 손을 썼습니다.”

차기범은 태수의 두 가지 요구를 확실하게 들어주었다.

-첫째, 청일 호텔에서 결혼식을 열도록 한청호를 압박해 줄 것.

-둘째, 전두환을 압박할 것.

두 번째 부탁은 차기범이 더욱 원하던 바였다.

“차기범이 직접 은행에 압박을 넣고 있는 상태죠.”

차기범이 손을 써서 군자금을 지급하는 기업들의 대출부터 틀어막았다.

그러한 일련의 과정으로써 은행에 압력을 넣어 기업 대출 요건 자체를 까다롭게 만들었다.

특히 전두호와 사돈이 되는 청일은 요주의 대상이 아닌가.

‘덕분에 전두호로 흘러가던 군자금이 막히고, 오성회는 불만이 쌓일 대로 쌓였지.’

사조직을 운영하려면 부하들을 달랠 돈이 필요한데 말이다.

군자금이 부족해지자 오성회 전력들이 이탈하고 있다.

‘전두호는 지금 진퇴양난의 상태다.’

육군 참모 총장 이하 사령관들이 전두호를 전 방위로 압박하고 있다.

그들이 오성회 분자를 색출하니 다들 잔뜩 몸을 사리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차기범이 경호원 내, 그리고 수도 경비 사령부에 숨어 있는 오성회 회원을 전부 색출했다.’

전생과 다르게 차기범이 먼저 칼을 휘둘렀다.

그로 인해 지금 전두호는 수세에 몰렸다.

‘오성회가 무너지기 전에 전두호는 결정을 내려야 한다.’

돈을 충분히 끌어올 수 있다면 오성회 내부 불만도 잠잠해지리라.

송 비서가 물었다.

“회장님, 초명 은행만 빼고 일을 진행하는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요?”

일부러 초명 은행에 투자를 하지 않았다.

“초명 은행은 한청호와 끈이 깊어서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더욱 초명 은행을 공략해서 청일에서 발을 빼도록 만들어야 하는 게 아닙니까?”

그래야 한청호가 더 궁지에 몰리지 않겠나.

하지만 태수는 고개를 젓는다.

“아뇨. 몰이 사냥의 기본은 도망갈 곳 한 곳만 남고 다른 길을 막아 버리는 데 있습니다.”

살기 위해 정신없이 달리다 보면 끝내 외통수에 몰리는 법이다.

“한청호를 굳건히 지탱하고 있는 초명 은행입니다. 막아 봤자 뒤로 주고받을 테죠.”

전생에서 청일과 초명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긴밀한 관계였다.

태수는 웃었다.

“한청호가 타고 있는 배에 최무룡까지 강제로 태울 겁니다.”

지난번에 초명 은행은 서구 석유 회사 배에 태워 침몰시키려 했었다.

그런데 중간에 한청호가 대뜸 초명 은행을 구조선에 태워 버렸다.

사우디 장관에게 먹일 뇌물 때문에 달러를 구한 것이 초명 은행을 살리고 만 것이다.

그러니 이번엔 확실하게 둘을 같은 배에 태우려고 한다.

“어디 초명 은행이 한청호의 대출금을 등에 이고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지켜봅시다.”

“아, 청일엔 무지막지한 적자가 쌓여 있지요.”

오일 쇼크 때문에 쌓인 적자를 청일 정유에 얹어 놓으려 다가 도로 떠맡게 되었다.

거기에 돈 들어갈 일만 많은 호텔과 아파트 건설까지 함께 진행하고 있다.

그러니 그새 적자 폭이 더 커졌을 것이다.

“한청호와 최무룡, 그 의리가 어디까지 갈까요?”

아주 기대된다.

전생에선 둘은 끝까지 함께 갔다.

‘전생에선 한청호가 승승장구했지. 초명 은행은 자본금이 많았고. 하지만 이번에도 그럴까?’

전생과 많은 것이 달라졌다.

‘나 때문에 한청호는 전생과 달리 적자에 허덕이고, 초명 은행은 자본금이 1/4토막으로 줄었다.’

코너에 몰린 두 욕심쟁이가 어찌 나올까 볼만 할 것이다.

‘초명 은행을 통해 청일 계열사를 얻는다.’

더할 수 없이 좋은 기회가 아닌가.

태수는 씩 웃었다.

“이참에 태양 그룹도 자동차 회사를 하나 거느릴 생각입니다.”

“설마…….”

눈치 빠르고 영민한 송 비서가 태수의 속내를 금방 눈치챘다.

송 비서가 기쁨으로 크게 웃었다.

“회장님께서 유일하게 초명 은행을 건드리지 않은 이유를 이제야 알겠군요.”

몰이 사냥의 기본이 아닌가.

하지만 둘 사이가 단단했다면 결코 뜻하는 바를 이룰 수 없었을 것이다.

“난 청일 자동차를 빼앗아 올 생각입니다.”

한청호가 그 꼴을 보고 어떤 표정을 지을지 기대된다.

한청호의 것을 빼앗는 것은 언제나 짜릿하다.

* * *

초명 은행 은행장실.

벌컥 문이 열리면서 한청호가 들어왔다.

초명 은행장인 최무룡은 표정을 잔뜩 구겼다.

“노크 좀 합시다. 여기가 형님 집 안방이요?”

딱딱.

“됐냐?”

한청호가 성큼성큼 걸어와 소파에 앉는다.

냉수부터 벌컥벌컥 마시는 한청호.

탁 소리가 나도록 물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는다.

“거두절미하게 부탁 좀 하자. 대출 좀 해다오.”

“못 합니다.”

거두절미하게 거절하는 최무룡이다.

“왜? 이제 우리 청일 아파트 분양이 코앞이야! 이번 위기만 넘기면…….”

“그 위기 넘기려 다가 우리 초명 은행이 먼저 도산하게 생겼습니다.”

청일의 적자를 떠안은 초명 은행이다.

안 그래도 힘들어서 허덕대는데, 또 대출을 해 달라니.

“청일 주식을 담보로 잡자.”

“난 이제 담보는 취급 안 할랍니다! 지금 초명 은행이 먼저 죽게 생겼다니까요?”

계열사도 안 팔리니 돈 나올 구멍이 없다.

한청호는 그동안 청일 주식을 담보로 많이도 빌렸다.

그런데 밑 빠진 독처럼 들어가기만 들어가지 나오지를 않는다.

“주식을 담보로 맡기지 말고, 그냥 시중에 팔아서 여유 자금을 만들면 되잖아요?”

“안 돼! 이 이상으로 주식을 팔았다간 경영권 방어가 힘들어!”

이미 청일 주식은 시중에 많이 풀렸다.

그래서 한청호는 주식을 담보 삼아 돈만 빌려 쓰기를 원했다.

“청일 호텔이 곧 완공이야. 청일 호텔 담보 잡으면 되잖아.”

“흥! 그래 봐야 푼돈 밖에 안 나오는 청일 호텔 따위. 싫습니다!”

“그다음은 청일 아파트야. 아파트 분양만 시작하면 한 번에 갚아. 한꺼번에 떼돈 버는 거 알잖아.”

“그 아파트 분양하려면 몇 달은 더 기다려야 되잖아요. 나도 더는 못 버팁니다.”

최무룡이 전에 없이 단호했다.

“할 말은 다 한 것 같으니까 이만 합시다.”

“우리 사이에 이러기냐?”

“우리 사이가 무슨 사이인데요? 형님이 절 일방적으로 이용하는 사이? 내가 호구 잡힌 사이?”

최무룡의 말이 뾰족해진다.

“그런 거 아니라면 작작 좀 합시다.”

담보로 대출하긴 글른 것 같다.

‘최무룡, 이 욕심 많은 놈. 그래도 어쩌겠어. 다른 은행들은 전부 대출 금지 원금 상환부터 외치고 보는데.’

돈 빌릴 곳이 초명 은행밖에 없다.

이놈이 이렇게 뻣뻣하게 나오는 이유였다.

‘주식이 시중에 풀리는 것보다 이놈이 거둬들이는 게 낫지. 위급할 때는 날 지지해야 콩고물이 많이 떨어질 거란 사실은 아는 놈이니까.’

한청호의 로비 실력은 최무룡이 제일 잘 안다.

둘은 사채 때부터 지금까지 돈독한 관계를 오랫동안 유지해 왔다.

“대신 돈 들고 오면 내가 내놨던 주식은 도로 줘야 한다.”

말이 매매지 실상은 주식을 담보로 돈을 꾼 것이다.

최무룡도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럽시다.”

“진짜지?”

“나 몰라요? 내 것은 시중가로는 못 가져갑니다. 웃돈 얹어서 팔 겁니다.”

최무룡 욕심에 어련하랴.

‘그렇게 말해 주면 더 안심이지.’

역시 어려울 때 기댈 곳은 최무룡뿐이다.

한청호가 초명 은행을 찾아온 이유기도 하다.

“실랑이는 이쯤 하자. 톡 까놓고 말해. 어떤 거로 주랴?”

마침내 한청호가 손을 들었다.

“청일 주식, 어떤 거 눈독 들였어?”

“자동차.”

“또?”

최무룡은 이번에도 자동차를 요구한다.

“자동차는 벌써 몇 번이나 가져갔잖아?”

“싫으면 말고요.”

어쩔 수 없다.

디데이는 이미 잡혔다.

차기범에게 약속했다.

‘딸의 결혼식은 청일 호텔에서 열어야 한다. 청일 호텔 완공이 시급해.’

돈 없다고 제대로 단장하지 못하면 비웃음만 산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최고로, 호화롭게, 번쩍번쩍 꾸며야 한다.

“좋다. 청일 자동차를 주마.”

“좋습니다.”

한청호는 청일 자동차 주식 7%와 돈을 바꿨다.

* * *

초명 은행장실에 두 사람이 들어섰다.

선글라스를 쓰고 있는 젊은 여자와 흉악한 기세를 풍기는 남자였다.

“어제 한청호가 왔다 갔다면서요?”

선글라스를 쓰고 있는 젊은 여자가 물었다.

여자는 뾰족한 힐을 신고 빨간 립스틱을 바르고 있었다.

최무룡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와우 씨, 이년은 다시 봐도 몸매가 예술이네.’

몸매뿐만이 아니다.

‘흐흐, 환장하게 이쁜 것. 어디 한 군데 안 예쁜 구석이 없네.’

최무룡이 음흉한 눈으로 그녀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려는데, 남자가 최무룡을 삐딱하게 보면서 험악한 기세를 흘린다.

“죽고 싶지 않으면 눈깔 간수 잘해.”

남자가 끌고 온 여행용 트렁크를 구둣발로 툭툭 쳤다.

“돈 필요 없어?”

최무룡은 그제야 남자가 돈다발이 든 트렁크 두 개를 가져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최무룡이 별수 없이 깍듯하게 인사했다.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번엔 얼마나 얻었나요?”

그녀가 소파에 앉아 다리를 꼬며 말했다.

“청일 자동차 주식.”

“여기 있습니다. 7%입니다.”

한청호에게서 뜯어낸 주식은 전부 정체 모를 이 여자에게 흘러들어 갔다.

‘나를 통해 몰래 모은 청일 자동차 주식만 벌써 13%쯤 되나? 아니, 15%였던가?’

대체 정체가 뭘까.

사채업 할 때 부리던 놈들을 풀었는데도 정체를 알아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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