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내분(1)
한일권이 차에서 내린다.
“돈 주고 일을 시켰으면 결과 보고는 올려야지. 깡패 새끼들 일 처리 하고는, 쯧.”
기다리다 못해 여기까지 왔다.
한일권은 불쾌한 표정을 숨기지 않으며 차 문을 거칠게 쾅 닫았다.
그런데 국빈관이 이상하다.
한창 개장 준비로 바빠야 할 시간에 조용하기 짝이 없다.
“뭐야?”
위화감이 든다.
번화가인 종로에서도 노른자위 땅을 가지고 있는 국빈관이다.
그런데 어째 파리 새끼 한 마리 얼씬대지 않느냔 말이다.
한일권은 굳게 닫힌 국빈관 정문에 붙은 종이쪽지를 보았다.
<폐점. 그동안 국빈관을 사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기가 찼다.
“이렇게 갑자기?”
<새 나라 새 일꾼이 되어 나라에 충성하겠습니다.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애국!>
“애국?”
국빈관 깡패들에게 애국이 다 무슨 소린가.
한일권은 종이쪽지를 북 뜯어낸 후 문을 잡아당겼다.
덜컹덜컹.
꽉 잠겨 있다.
“이 새끼들이 미쳤나? 이거 안 열어?”
덜컹덜컹.
쿵쿵쿵.
종로에서 악명을 날리던 국빈관은 그렇게 깔끔하게 사라지고 말았다.
* * *
명동 장말동의 집.
사우디 무기 공장을 둘러보고 귀국한 안정우에게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태양 그룹 경호실에서 국빈관을?”
안소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태양 그룹 경호실 사람들이 들어간 후 10분 만에 상황 종료됐어요.”
“허……. 강태수가 뭘 몰랐구나. 그놈들 함부로 건들기엔 뒷배가 만만치 않은데.”
안정우가 헛웃음을 흘렸다.
깡패 주제에 종로의 터줏대감을 자처하는 놈들이다.
고위직 경찰과 전국구 폭력 조직까지 뒤를 든든히 받쳐 주니 무서울 게 없다.
어설프게 건드렸다가는 이쪽이 위험해지는 지뢰다.
그러기에 안소정이나 안정우도 호시탐탐 결정적인 기회만 엿보고 있던 참이다.
“뒤탈은 걱정 없을 거예요. 중앙 정보부에서 대대적으로 나섰으니까요.”
안소정은 웃었다.
“무려 중앙 정보부 차장이 진두지휘한 일이에요. 그러니 누가 감히 이 일에 토를 달 수 있겠어요?”
“확실하게 처리했구나.”
박정환의 칼이라는 중앙 정보부 권력은 얼마나 막강한가.
누구도 중앙 정보부의 권력에 맞설 수 없을 것이다.
검찰마저 한 수 접어주는 곳이 아닌가.
장말동이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강태수, 그놈 수완이 참 대단합니다. 국빈관 놈들을 이렇게 일거에 쓸어버리다니요.”
뒷배 중의 최고 뒷배라는 중앙 정보부를 동원한 일이 아닌가.
“김재국은 쉽게 부릴 수 있는 자가 아닌데 말이야.”
김재국은 압력에 굴하기보다는 외려 제 뜻을 관철시키는 타입니다.
박정환이 싫어하는 기색을 내비쳤음에도 끝까지 최태문에 대해 보고를 올린 자다.
박정환의 눈치도 안 보는데 다른 누구의 눈치를 보겠나.
“동방 일보 사장에게 듣자니 동방 일보 식구들을 구해 준 것도 강태수였다지?”
“그게 아니라면 김재국이 보고서까지 조작하면서 동방 일보 사람들을 풀어 주지 않았겠죠.”
“대체 어떻게 김재국을 흔들었는지 이해할 수 없구나.”
안정우의 웃음소리가 길게 이어진다.
“소정아, 솔직히 말해 난 그놈이 탐난다.”
“만나 보니까 알겠더군요. 그는 확실히 대단한 남자예요.”
국빈관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안소정이 몇 달이나 뒤를 캤는데, 태수는 고작 하루 만에 국빈관을 정리해 버렸다.
그렇다고 안소정이나 안정우 휘하의 세력이 태수보다 약한 것도 아니었다.
차이가 있다면 수단과 방법이랄까.
“뒷배 때문에 건들지 못하는 국빈관을 그보다 더 강한 뒷배를 불러서 처리하다니.”
안소정이 탄복한 이유였다.
“수완이 좋아요. 거기에 받은 것 이상으로 확실하게 갚아 주는 점도 마음에 들어요.”
“강태수는 독한 놈이다. 사내가 그 정도는 되어야지.”
받은 것 이상으로 되돌려 주는 일은 철저하다.
그게 호의라면 호의로, 악의라면 악의로.
화끈하게 배 이상 더 얹어 준다.
그래서 마음에 든다.
안소정도 마찬가지였다.
“청일은 이번 반격에 타격이 커요. 경고 한 번 한답시고 국빈관이란 귀한 패를 잃었잖아요.”
한일권 대신 더러운 일을 도맡아 해 주던 국빈관이 한순간에 몰락했다.
“김재학은 치를 떨며 도망갔어요. 그만두자고 한일권을 뜯어말리지만 들을 한일권이 아니죠.”
한일권은 평생 강자였다.
약자 따윈 가볍게 죽일 수 있는 강자 말이다.
“손발이 되어 줄 다른 놈들을 찾는 모양인데, 여의치 않아요. 무엇보다 태양 그룹 경호원들이 보통이 아니에요.”
“군에서도 위명을 날렸던 특수 부대원들이다.”
이번에 군에서 대거 인원을 받아들인 태양 그룹 경호실이다.
“24시간 밀착 경호를 할 뿐만 아니라 매일 차량을 점검해요. 심지어 한일권의 차에 똑같은 짓으로 되돌려 줬다는군요.”
“강태수답군.”
안정우는 입꼬리를 끌며 웃었다.
“참, 지라시는 어떻게 됐느냐?”
“두고 보세요. 한청호와 박정환은 속만 끓이게 될 테니까요.”
그녀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안소정의 정보 상인들이 은밀하게 지라시를 유통하고 있었다.
* * *
처음 동방 일보 폐간 소식이 전해졌을 때 세상은 발칵 뒤집혔었다.
신문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앞다투어 이를 보도했기 때문이다.
<유서 깊은 동방 일보, 폐간인가 휴간인가!>
<백지 광고 사태가 일파만파!>
<군부 독재 정권은 언론 탄압을 중단하라!>
<국민의 목소리를 막아도 민심은 막을 수 없다!>
그런데 독하기로 소문난 동방 일보 기자들은 외려 잠잠했다.
언론 투쟁에 앞서던 자들이 시위 한 번을 안 벌였다.
이직했다는 소문도 안 들리고, 작심하고 물고 늘어진다는 소식조차 안 들린다.
박정환의 바람대로 동방 일보는 사라졌다.
그런데 이상한 신문이 하나 생겨났다.
-지라시.
새로 생긴 신문의 이름이었다.
그리고 그 신문은 색다른 방법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공짜 신문!
지하철역과 기차역, 그리고 버스 정류장 앞에서 무료로 배포되고 있었다.
공짜라면 양잿물도 먹고 보는데, 하물며 신문이 공짜라니!
-없어서 못 봐!
-재밌어서 계속 봐!
모든 기사가 대부분 익명으로 처리되는데, 섬뜩할 정도로 세세한 정보가 실렸다.
친일파, 뇌물 수수, 문란한 사생활 등이 속속 퍼져 나갔다.
그런데도 누구도 이 지라시가 어디서 어떻게 발행되는지 몰랐다.
광고 한 점 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 * *
“지라시다!”
남은 지라시를 보고 중년 남자가 달려들었다.
그런데 젊은 여자가 더 빨랐다.
“내 거!”
“그거 내가 먼저 찜해 둔 신문인데.”
“찜이 어디 있어요? 먼저 집은 사람이 임자죠. 공짜잖아요.”
“…….”
그건 그렇다.
한발 늦은 중년 남자가 탄식했다.
“지라시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네. 우리 딸이 학교에서 돌려 보니까 꼭 구해 오라며 신신당부했는데.”
“요즘 지라시 구하기가 어디 쉽나요.”
오늘도 지라시 쟁탈전에서 패배했다.
허탕을 친 아줌마가 동의했다.
주로 신문을 보는 독자층은 중년의 남자들이었다.
그런데 지라시는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인기 만점이었다.
“지라시가 재밌긴 재밌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연예, 스포츠.
어느 한 군데도 기사가 뒤지지 않는다.
“내용은 알차고, 코너는 다양하고. 워낙 자극적인 내용들을 잘 엮어 만들었잖아요.”
익명을 기본으로 하는 신문이다 보니 신문을 작성한 기자와 사연 투고까지 익명이다.
그러니 사람들이 열광하면서 너도나도 사연을 보내고 있었다.
“그중에서 제일 인기 있는 코너는 소설이래요.”
“나도 그게 제일 재밌더라고요.”
“그렇죠? 진짜 있었던 일을 쓴 것 같죠?”
“누가 썼는지 몰라도 제대로 된 음모론이던데. 요즘 회사 가면 다들 그 말뿐이에요.”
이게 과연 소설일까 싶을 정도로 자세하다.
풍부한 고증과 자료를 바탕으로 쓴 게 아닐까 추측할 뿐이다.
“지라시가 제대로 발간됐으면 대한민국 최고 인기 신문이 되었을 텐데.”
“아직도 어디서 누가 발행하는지 모른대요.”
지라시 때문에 들끓는 여론.
그 여론의 끝은 청와대까지 향했다.
* * *
청와대 대통령 집무실.
박정환은 지라시를 책상에 내려놨다.
“청와대 내부 극비 사항을 어찌 알고 지라시에 실었을까?”
기가 찰 일이다.
“우스갯소리로 꾸며 실은 모양인데, 아는 사람이 보면 뜨끔하겠어.”
그 뜨끔한 사람이 바로 박정환이다.
그가 눈썹을 꿈틀댄다.
“특히 이거 말이야. 정황상 이 소설은 청일의 한청호 얘기인 것 같지?”
차기범은 아무 말 없이 서 있다.
무뚝뚝하고 무표정한 놈은 말대꾸도 별로 하지 않는다.
박정환이 날짜 지난 지라시 신문을 꺼내 책상 위에 올린다.
“이게 진짜일까, 아니면 소설일까? 왜 나는 이게 사실인 것만 같지?”
박정환이 지라시를 들고 생각에 잠겼다.
“지어낸 소설이라기엔 앞뒤 정황이 너무 딱딱 들어맞아.”
차기범은 대답하지 않았다.
“마누라의 부탁으로 청일에 해 준 일까지 전부 일치해. 분명 알고 쓴 거야.”
박정환은 손을 들어 가볍게 머리를 짚었다.
“제대로 속이려면 90%의 진실에 10%의 거짓을 섞어야 한댔다. 내가 지금 10%의 거짓에 농락당하고 있는 건가?”
차기범은 늘 그렇듯 묵묵부답이다.
“제길!”
언제부터인가 이 지라시라는 신문이 박정환을 자꾸 자극한다.
아주 은밀하고, 자극적이고, 노골적인 방법으로.
‘호기심, 의심, 노파심, 관심. 별별 것들이 다 튀어나오는군.’
박정환은 지라시를 볼 때마다 평정심이 흔들리는 것을 느껴야 했다.
그렇지만 자꾸만 눈길이 가는 것을 어쩌랴.
한청호와 죽은 제 아내 사이에 있었던 비밀스러운 이야기가 주제이거늘.
“한청호에게 넌지시 물어봤지만 시치미만 떼었지. 하지만 낌새가 영 수상하단 말이야.”
박정환이 책상 위에 올린 지라시 뭉치를 노려보았다.
“궁금해서 못 견디겠군.”
“…지라시를 쓴 놈을 잡아 옵니까?”
“아니, 하지 마.”
뜻밖에 박정환이 고개를 저었다.
“나서서 들쑤시다가 비밀을 알고 있는 놈이 도망가 버리면 어쩌나.”
붙들고 물어볼 아내는 이미 세상을 떠나고 없다.
박정환이 지라시를 건들지 못하는 이유였다.
“신문을 통해 내게 비밀을 전하는 놈은 따로 숨어 있다는 생각밖에 안 들어.”
“…….”
“지라시를 잡는다고 그놈을 잡을 수 있다는 보장이 없어. 그럼 나는 이 뒷이야기를 죽을 때까지 모르는 거야.”
박정환이 인내심을 발휘해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이유였다.
아라비안나이트의 세헤라자드가 이렇게 목숨을 구걸했던 것이군.
다음 이야기 때문에 여자의 목을 칠 수 없었던 왕의 심정에 공감하는 박정환이다.
“다음 편을 읽어야겠어. 오늘 자 지라시는 왜 없지?”
“가져오겠습니다.”
“그래.”
박정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5월 18일에 마지막 화가 나온다고 예고했지.”
이제 한 달 후면 소설이 완결 난다는 뜻이다.
“그것까지 전부 읽어야겠어. 그 이후에 이 신문사의 처우를 결정하겠다.
“알겠습니다.”
차기범이 조용히 대통령 집무실 문을 닫고 나왔다.
무뚝뚝한 차기범이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웃고 있었다.
‘각하께선 자각하지 못하시는 것 같군.’
요즘 들어 박정환은 한청호에게 부쩍 냉담해졌다.
지라시가 심어 놓은 의심은 점점 확신으로 변하고 있었다.
‘의심이 씨앗을 내렸고, 자랐고, 이제는 눈까지 멀게 만들었다.’
한청호에 대한 의심을 숨기지 못할 정도다.
박정환은 이미 평정심을 잃은 지 오래다.
‘한청호를 두둔하는 비서실장 김정림까지 자른 마당에야 더 말해 무엇할까.’
한청호의 청탁을 대신 올리다가 박정환의 눈 밖에 났기 때문이다.
지금 이 청와대엔 대통령 경호실장 차기범과 견줄 권력자는 없다.
‘오직 나만이 각하를 대면하고, 신임을 독차지하고 있지.’
새로 뽑은 비서실장조차 차기범에게 보고를 올리고 있었으니까.
차기범은 지금 상황이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지라시, 절대로 폐간되어서는 안 돼.’
차기범이 지라시를 묵인하고 있다.
심지어 지라시의 정체를 보호하고 있었다.
지라시를 들쑤시겠다는 놈들은 차기범이 힘으로 찍어 눌러놨다.
‘전두호가 완전히 무너지기 전까지, 이대로 각하의 관심을 붙들어 맸으면 좋겠군.’
누군지 몰라도 대단한 놈이다.
고작해야 신문 쪼가리 하나로 박정환을 완전히 홀려 놓고 있으니까.
차기범의 마음속에서도 전에 없던 욕망이 꿈틀꿈틀 자라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