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산 찍고 건설 재벌-154화 (154/230)

154. 눈도장(3)

장서연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지금 애먼 사람 붙들고 뭐 하시는 거예요?”

“그야 우리 사윗감이 자꾸 도망가려고 하니까…….”

사윗감?

장준용이 헤벌쭉 웃으며 태수의 팔을 잡고 흔들었다.

“아빠는 이놈이 마음에 드는데, 넌 어떠냐?”

“아버지.”

“딴소리는 하지 말고 대답해 봐라. 좋아? 싫어?”

장서연이 당황해서 김 비서를 돌아봤다.

“김 비서님, 아버지 너무 취하셨어요. 얼른 집에 가요.”

“아, 네.”

바닥에 떨어진 황금 명함을 줍던 김 비서가 벌떡 일어났다.

호텔 바 종업원 둘을 불러 장준용을 부축한.

태수도 호텔 로비까지 장준용과 김 비서를 배웅했다.

‘이제 끝이군.’

지긋지긋한 술자리였다.

‘그러게 이기지도 못할 술, 양주 스트레이트로 쉬지 않고 달리니 이 모양이지.’

저 술부심을 어찌 막나.

장서연이 태수에게 다가왔다.

“호텔 바에서 오래 계시던데요. 술 많이 드셨어요?”

“꽤 마셨습니다.”

“꿀물이라도 드릴까요?”

“괜찮습니다.”

괜찮다고 하는데 태수의 몸에선 양주 냄새가 폴폴 풍긴다.

장준용과 함께 마셨으면 과음했을 게 분명한데, 태수는 별로 취한 것 같지 않다.

장서연은 물끄러미 태수를 올려다봤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신기해서요.”

“뭐가 그렇게 신기합니까?”

“당신이 그런 식으로 한 회장님을 확실하게 막을 줄은 상상도 못했거든요.”

보통 다수결에 따라 회장을 선출하기에 한경련 회원을 사전에 포섭하는데 열을 올린다.

그게 회장 선거의 기본 룰이다.

그런데 태수는 변칙에 가까운 방법으로 전세를 역전시켰다.

“어째 한경련 회원을 포섭하는데 무심하다 했더니. 색다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셨네요.”

“새로 갓 들어온 신입 회원이 기존 한경련 회원을 어찌 포섭합니까?”

회원 포섭은 장준용으로 족하다.

장준용이 나서서 포섭되지 않을 사람이라면 한청호가 옭죄어 풀어주지 않는 사람이란 뜻일 테니까.

장서연이 방긋 웃으며 말했다.

“이제 보니 강 회장님은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수완이 좋으시네요.”

태수는 씩 웃었다.

“과찬입니다.”

장서연은 잠시 멍하니 태수를 봤다.

작게 웅얼거리는 말.

“반칙이에요.”

그 작은 소리를 용케도 알아듣고서 태수는 어리둥절했다.

“뭐가 반칙이라는 겁니까?”

“…술 잘 마시는 남자는 진짜 별로라고 생각했거든요?”

장준용이 주당 중의 주당으로 통한다.

1주일에 적어도 5일은 술을 마신다고 알려질 정도다.

매일 술 냄새 풀풀 풍기며 밤늦게 들어오는 아버지가 못마땅했던 그녀다.

“당신은 좀 다르네요. 이렇게 술을 많이 마셨는데…….”

“많이 마신 거 티 납니까? 술 냄새 많이 나요?”

태수가 문득 팔을 들어 제 몸에서 나는 술 냄새를 확인했다.

전에 안정우와 과음했을 때, 직원들이 하나같이 술독에 절여진 것 같다고 등 떠밀었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오늘도 장준용에게 휘말려 양주를 스트레이트로 달려야 했다.

“술 냄새보다는 오히려 분위기 쪽이…….”

“분위기?”

“아, 아니에요. 오늘 하루 고생했겠어요. 제가 너무 오래 잡고 있었나 봐요.”

장서연이 재빨리 등을 돌렸다.

그녀의 귀가 조금 붉어져 있었다.

“지난번엔 제가 좋아하는 칵테일을 마셨으니, 다음엔 당신이 좋아하는 술로 마셔요. 당신은 어떤 술을 좋아하죠?”

“술 안 좋아합니다.”

“…….”

태수의 철벽은 굳건하기만 했다.

* * *

다음날 밤.

늦은 시각에 태수의 호텔 방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있었다.

김광록이다.

“광록이 형님.”

“어, 태수야.”

안 그래도 경호실 문제로 김광록을 만날 생각이었다.

그런데 태수가 말 꺼내기 전에 김광록이 다급하게 말했다.

“널 찾아온 사람이 있어.”

의아했다.

“저를요?”

“일단 내 방으로 들여서 기다리고 있는데…….”

“누굽니까?”

“어, 그…….”

김광록이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네가 직접 만나서 물어봐라.”

김광록이 성큼성큼 걸어간다.

태수 옆방 방문을 벌컥 열자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보인다.

‘누구지?’

여자 한 명에 남자 네 명.

도합 다섯 명의 불청객이었다.

그런데 그중 한 명은 온몸이 청테이프로 묶인 채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모르는 사람들입니다만.”

“당신 얘기는 많이 들었어요. 제대로 대면하는 건 처음인가요.”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여자가 꼬았던 다리를 풀고 의자에서 일어선다.

도저히 동양권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잘 빠진 몸매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실례. 엄한 놈을 잡는 바람에 방 밖에서 기다리기에는 좀 곤란해서요.”

나른한 분위기에 늘어지는 말투.

퇴폐적이란 느낌까지 들 정도로 섹시했다.

그런데도 어째서인지 고고하고 정갈하다는 느낌이 드는, 묘한 분위기의 여자였다.

“당신 차에 수작을 부리던 작자를 잡아 왔어요. 그 정도면 연락 없이 찾아온 무례를 눈감아 줄 수 있지 않을까?”

김광록이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확인했다. 타이어 공기 주입 뚜껑이던가, 그걸 반 이상 열어 놓던 놈이야.”

타이어 공기 주입 뚜껑을 열면 어떻게 될까?

서서히 바람이 빠지다가 도로 한복판에서 퍼져 버리게 된다.

타이어에 못을 박는 것과 비슷한 효과를 내지만 더욱 음험한 짓이다.

그건 누군가가 고의로 한 짓인지 장비 점검 불량인지 아니면 운이 나쁜 사고인지 알지 못한다.

“내가 차에 나머지 여섯 명을 똑같이 만들어서 실어 놨다. 같이 가서 확인해 볼래?”

“잡아 온 이놈은 샘플이란 소립니까? 아니면 우두머리?”

김광록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차가 꽉 차서.”

“…….”

탑승 인원 초과로 부득이하게 데려왔다는 소리다.

“이왕 바꾸는 김에 차 좀 더 큰 거로 바꾸자.”

“…….”

그때 여자가 말했다.

김광록이 더 중요한 사실을 놓쳐 말했기 때문이다.

“브레이크.”

“아! 먼저 자동차 브레이크 선을 교묘하게 끊어 뒀더라. 도로를 달리다 언제 사고 날지 모르는 시한폭탄 상태로 만들어 버렸던데. 이 새끼들, 아주 악질이다.”

“국빈관 깡패예요.”

태수는 그제야 바닥에 쓰러진 놈을 다시 봤다.

“국빈관?”

태수도 알고 있는 이름이었다.

‘국빈관이라면 전생에서 한일권이 어울리던 깡패였지?’

태수가 비서 수업을 마치고 청일 그룹에 정식으로 입사했던 때가 1980년이다.

한일권의 비서가 되어서 몇 번 그들을 본 적이 있었다.

‘꽤 질이 안 좋아 보이던데.’

깊이 얽힐 일은 없었다.

송 비서의 가르침대로 한일권의 비밀을 캐내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이후 반년이 채 지나지 않아 국빈관은 사라졌다.

‘전두호의 삼천 교육대에 끌려가는 바람에 강제 해산되었었지.’

그때 한일권이 어찌나 아쉬워했던지.

하지만 한일권은 그들의 빈자리를 다른 놈들로 금세 채웠다.

세상은 넓고 질 나쁜 놈들은 많았다.

“국빈관은 우리가 늘 예의주시하고 있어요. 여자와 약을 팔거든요. 은밀하게 인신매매와 장기 밀매도 하죠.”

여자의 말에 태수가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이제 보니 국빈관 깡패들이 쓰레기 같은 짓을 하고 있었다.

‘한일권은 그런 놈들과 어울려 다녔단 말인가?’

태수의 생각 이상으로 바닥이었다.

여자는 턱을 들었다.

“이 사람부터 치워요.”

그러자 그녀 뒤에 섰던 두 명의 남자가 국빈관 깡패를 번쩍 들어서 문밖으로 치워 낸다.

그녀는 의자에 앉아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운이 좋았어요.”

“그게 무슨 뜻입니까?”

“우리는 인신매매 정보를 입수해서 국빈관 깡패 뒤를 쫓고 있었죠.”

“그 말은…….”

“밀매업자 잡으러 나왔다가 살해 미수범을 잡게 됐다는 뜻이죠.”

그 정도라면 확실히 운이 좋다고 말할 만하다.

여자는 그저 생긋 웃었는데, 요염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김광록은 아예 넋을 놓을 정도였다.

“어때요? 이 정도면 생명의 은인이 아닌가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당신은 누굽니까? 경찰입니까?”

“아니요.”

그녀가 태수에게 손을 내밀었다.

“안소정이에요.”

익숙한 이름이었다.

“강태수입니다.”

“반가워요.”

둘은 악수했다.

안소정의 손은 얼음장보다 차가웠다.

“지라시 때문에라도 한 번 만나려고 했어요.”

안소정이 툭, 하고 방문 용건을 말한다.

안정우의 딸이자 태양 증권과 보험, 그리고 동방 일보 지분 50%를 가지고 있는 여자다.

“내 정보원들이 필요하다고 했나요?”

안소정이 정보원들을 부리고 있었다는 소리였다.

장말동은 사채업자, 안정우는 무기 상인, 그리고 안소정이 정보 상인들을 맡고 있었다.

“마침 우리 정보원 중에 음모론을 전문적으로 쓰는 소설가가 있어요.”

안소정이 손을 들자 뒤에 서 있던 자가 허리 굽혀 인사했다.

“이분이 아주 그럴싸한 소설을 써 줄 거예요. 당신이 원하던 대로.”

박정환과 한청호를 이간질할 소설을 펴낼 것이다.

지라시에, 익명으로.

동방 일보를 인수한 이유였다.

“앞으로 종종 만나게 되겠네요.”

“잘 부탁합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적어도 한청호는 확실하게 엿 먹일 테니까요.”

찡긋 윙크한 안소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흑장미 문양의 카드를 내밀었다.

“앞으로 이런 카드를 보면 제가 보낸 줄 아세요.”

태수에게 정보를 제공하겠다는 뜻이었다.

그녀는 확실하게 눈도장을 찍었다.

* * *

안소정이 돌아가고, 태수는 김광록을 돌아봤다.

“경호실 인원은 다 채웠습니까?”

김광록이 자신만만하게 씩 웃었다.

“군대에서 내 밑에 있던 쓸 만한 놈들을 전부 빼 왔지.”

만족스럽다.

“몇 명이나 빼 오셨습니까?”

“응? 넉넉하게 빼 오라기에 한 30명 빼 왔는데?”

“그걸로 되겠습니까? 받고 더블로 가죠.”

“60명이나?”

“100명도 상관없습니다. 강원도에도 보내려고요.”

“아…….”

강원도 광산에는 태수 부모님과 홀쭉이 할머니가 살고 있다.

하지만 김광록은 팔짱을 끼며 고민하는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건 너무 과한데.”

“과유불급이란 단어가 제일 쓸모없는 분야가 바로 안전에 관해서입니다.”

안전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하나뿐인 목숨과 건강을 돈으로 살 수 있다면 싼 거다.

“하지만 내가 빼낸 놈들은 일당백이야. 북한 간첩을 상대하는데 잔뼈가 굵은 놈들이라고.”

적습에 관한 눈치는 백단이요, 실전 격투는 초일류 수준급인 놈들로만 뽑았다.

거기에 오성회에 물들지 않은 김광록의 사람들로만 불러들였다.

“교대 근무도 해야 합니다. 경호 인원도 저 하나가 아니라 사장단 전체가 될 겁니다. 앞으로 경호실이 많이 바빠질 텐데요.”

“…연봉 엄청 세게 불렀는데.”

“괜찮습니다.”

그런 데 쓰라고 버는 돈이다.

“저 돈 많습니다.”

재벌이 어디서 돈 자랑이야?

김광록은 크게 웃었다.

“너 돈 많은 거 누가 몰라? 알았어.”

김광록이 벌떡 일어난다.

“군에서 빼 올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아. 그래서 지금 정도의 수준급 애들로는 그 인원수 못 채워. 그래도 괜찮겠어?”

“괜찮습니다.”

“좋아, 부족한 놈들은 선배들이 가르치면 그만이니까 싹수 있는 새싹들도 데려온다.”

“좋습니다.”

김광록이 잇몸을 드러내며 씩 웃었다.

“기다려. 내가 대통령 경호실보다 더 화려하게 채워 줄 테니까. 제대로 굴려서 쓸 만하게 만들어 보이지.”

“기대하겠습니다.”

김광록이 의욕을 불태우니 그에 보답해 주어야겠지.

“저쪽에서 공격을 시작했으니 우리도 손 놓고 당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물론이지!”

청일이 뒤에 서서 국빈관 깡패를 움직였다는 것을 태수가 모르겠나.

‘이건 단순한 경고가 아니야.’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선전포고였다.

선전포고엔 응전해 주는 게 도리가 아닌가.

“일단 국빈관부터 털까요?”

털어서 먼지 안 나는 곳은 없다.

“이참에 한일권의 먼지까지 죄다 털어 봅시다.”

한일권이 자주 드나드는 곳이니 분명 지우지 못한 흔적들이 남아 있을 터.

김광록이 눈에 불을 뿜었다.

“그게 우리 특기야. 맡겨만 둬. 북한 간첩 새끼들 잡듯이 잡아 처넣으면 되는 거지?”

아주 믿음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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