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 눈도장(2)
이병춘을 지금 이 자리까지 오게 만든 말이 태수의 입에서 나왔다.
‘여태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나만의 비밀스러운 다짐을 어떻게……!’
이병춘은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 젊어서 인생을 낭비했었다.
아이들이 태어나고서도 한량처럼 살았었다.
잠든 아이들 얼굴을 보는 순간, 불현듯 허송세월을 자책하며 뜻을 세웠다고 한다.
이후 이병춘은 그때의 그날을 되새기며 이 말을 곱씹었다.
“자네 나이 때는 그저 인생의 성공과 실패밖에 보이지 않을 때인데.”
젊어서 성공한 자들은 오만해지기 쉽다.
어릴 때 쉽게 거둔 성공은 독버섯처럼 자라 사람의 인성을 갉아먹곤 한다.
“젊은이가 뱉을 수 있는 말이 아니야.”
“저 역시 그런 날이 있었으니까요.”
태수 역시 돈 냄새 맡는 능력을 부정하며 허송세월을 산 적이 있다.
부모님과 동생의 걱정을 끼치고, 놈팡이처럼 세월을 좀먹고 살았다.
“자네에게도?”
“네, 인생을 낭비하며 헛살았습니다.”
젊어서는 한량으로 헛살았고, 그 이후에는 청일의 개로 헛살았다.
일 중독에 빠질 정도로 열심히 살았지만 결국 남 좋을 일만 하다 팽 당했다.
지난 인생은 실속이 없었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정신을 차렸습니다.”
회귀했다.
24살의 젊은 시절로.
다시는 그렇게 헛살지 않겠노라 다짐했다.
가진 능력을 최대한 쓰며 나를 위해 살겠노라 결심했다.
“부모님이 늙어 가고 계시더라고요.”
태수의 말은 이병춘의 가슴에 또다시 파문을 던졌다.
이병춘은 아이들이 무럭무럭 커 가고 있다는 사실에 정신을 차렸었다.
그날의 기억이 쏟아진다.
이병춘이 드물게 감정을 드러내며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한다.
“나 역시 그랬던 적이 있지. 자네와 난 닮은 점이 꽤 있군.”
태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 역시 과거를 잊지 않기 위해 곱씹고 되새기곤 합니다.”
전생을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다.
그 분함을 곱씹고 되새겨 청일에 복수심을 불태워 걷고 있다.
“쉽지 않은 일이겠지. 현재와 미래가 희망찰수록 어두운 과거는 쉽게 잊기 마련이니까.”
“과거를 잊는다면 같은 실수를 반복할 뿐이죠. 그렇게 허비하기엔 인생이 너무 짧습니다.”
태수가 달리 보인다.
솔직히 아들 또래인 태수를 아랫사람처럼 가벼이 보았다.
“자네, 다른 사람에게도 이런 말을 하나?”
“그럴 리가요. 그리고 이 말 역시 다른 사람에게는 전하지 않을 테니 걱정할 것 없습니다.”
태수가 씩 웃으며 말했다.
“말하는 걸 배우는 데 2년. 하지만 말하지 않는 법을 익히는 데는 더 오랜 세월을 들였으니까요.”
“으음……!”
말을 가릴 줄 아는 건 어려운 일이다.
상대에 따라, 장소에 따라, 상황에 따라, 권력 관계에 따라, 그리고 의도에 따라.
이병춘은 태수를 새삼스러운 눈으로 보았다.
“자네가 내 아들보다 어리다는 게 믿기지 않아. 자네, 정말 27살 청년이 맞나?”
자네 같은 애늙은이는 여태 본 적이 없어.
마치 재벌 총수 자리를 오랫동안 군림해 온 그림자가 순간 보이는 것 같았다.
세상의 모진 풍파와 맞서 싸우며 사람들을 이끌어 주는 것 같은 단단한 목소리다.
한 점 흔들림조차 없다.
“외려 내가 한 수 배우고 가는군.”
그래 봐야 풋내 나는 철부지 애송이란 생각이 사라졌다.
이병춘이 태수에게 손을 내밀었다.
“우리 악수하지 않겠나?”
흡족한 마음에 아랫사람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하던 태도는 간데없다.
어느새 동등한 재벌 총수 중 한 사람으로서 태수를 보고 있었다.
먼저 악수를 청하는 이병춘.
별로 대수로울 것 없는 악수지만 이병춘에게는 의미가 컸다.
“앞으로도 우리 아들과 좋은 교류를 이어 나갔으면 좋겠군. 자네에 비하면 아직 부족한 아이일세. 많이 가르쳐 주게.”
삼청 그룹의 차기 총수와 좋은 교류를 이어 가는 건 이쪽에서도 환영이다.
‘눈도장을 제대로 찍었나 보군.’
그렇지 않고서야 오만한 이병춘이 이리 나올 리는 없을 터다.
대대로 부잣집 자식이었고, 사업을 한 이후엔 재계 1위 자리를 오랫동안 지켜 온 이병춘이 아닌가.
그는 악수를 쉽게 청하지도, 받지도 않는다고 들었다.
“참, 자네가 아직 미혼이라고 했던가? 혹시 자네 결혼 상대자는…….”
“이만 가 봐야겠습니다.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
눈도장이고 나발이고, 냅다 튀는 태수였다.
* * *
한청호의 서재.
불 꺼진 서재엔 숨소리조차 들려오지 않았다.
한청호는 어둠 속에서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똑똑.
서재 문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한일권이 들어왔다.
“나가.”
“뭘 그리 상심하세요?”
“한경련 공금은 물 건너갔다.”
“어쩌다가요?”
“나가. 말하고 싶지 않다.”
한일권이 달칵, 하고 불을 켰다.
형광등 불빛에 한청호는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하지만 한일권은 개의치 않고 말했다.
“확실한 일이 어그러졌다는 건 누군가 변수를 만들어 아버지 뒤통수를 쳤다는 거잖아요.”
“그래.”
강태수!
“분한 만큼 갚아 주면 되는데, 왜 이리 속을 끓이세요?”
한일권이 속삭였다.
“제가 나서서 해결해 볼까요?”
나쁜 일이라면 자신 있다.
은밀하게 해를 끼치는 건 즐거운 유희가 아니던가.
“함부로 건들 수 없어. 그놈을 건드렸다간 나와 청일까지 위험해져.”
박정환이 알면 청일이 공중 분해될 약점이다.
그놈이 그걸 가지고 있다.
“가족을 족치면 제까짓 게 어쩌겠어요?”
“가족을 족치면 그 즉시 박정환과 언론에 터뜨린다고 했다. 고작 그딴 놈들을 죽이겠다고 같이 죽기엔 청일과 내가 너무 아깝다.”
태수를 처치하지 못했던 이유였다.
덕분에 강태수 그놈이 마음 놓고 활개 치고 다니는 꼴을 보아야만 했다.
“아이참, 아버지도. 왜 이리 정직하실까.”
뇌물과 로비를 일삼으며 수작질로 청일을 꾸려 온 한청호가 아닌가.
정직은 한청호와 가장 거리가 먼 단어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한청호마저도 나쁜 짓으로는 한일권에게 한 수 접어줘야 한다.
“우리가 했다는 것만 숨기면 그만이잖아요.”
“허…….”
“국빈관 놈들을 부르죠.”
“하하하!”
좋은 방법이었다.
아들의 말만 들어도 속이 뻥 뚫리는 것 같다.
“국빈관 놈들을 이용해서 어찌할 셈이냐?”
“일단은 아주 가볍게 경고만 해 주죠.”
“경고?”
“누군가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던가.”
한일권은 번들거리는 눈알을 굴렸다.
“아니면 그냥 모르고 죽던가.”
머릿속에 수십 개의 범죄 방법이 떠올랐다 사라진다.
한일권은 비릿하게 웃었다.
“지켜보세요. 그놈도 이젠 두 다리 뻗고는 못 살 겁니다.”
원래 드러난 적보다 숨어 있는 적이 더 무섭다고 했다.
독일 속담에 열 사람이 한 도둑 막기 어렵다고 했다.
“원래 지켜야 하는 놈이 약자예요.”
* * *
금산 호텔 바의 VIP룸.
장준용은 회장 턱으로 크게 한턱냈다.
호텔 레스토랑에서 시작한 오찬 후 술자리가 이어졌다.
적당히 어울리던 사람들이 하나둘 떠나고, 장준용의 심복들도 마저 떠나 보냈다.
이 VIP룸엔 장준용과 태수, 그리고 김 비서만 남았다.
“오늘 차 실장이 한경련을 찾아온 덕분에 내가 그 덕을 봤어.”
대통령 경호실장의 한마디는 무거웠다.
한청호가 매수한 회원들이 많다는 것을 알기에 더 그렇다.
“차 실장이 오지 않았다면 한경련 차기 회장은 아마 한청호가 되었겠지.”
그랬을 것이다.
그래서 일부러 불렀다.
“자네 솜씨지?”
태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장준용이 그걸 모를 리가 있나.
차기범은 지금껏 한경련에 딱 두 번 나왔다.
그리고 나올 때마다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차 실장답지 않은 과감한 행보였네.”
차기범이 박정환의 곁에 심복으로 붙어 있는 이유는 다른 게 아니다.
권력을 제대로 휘두르는 것보다 충심으로 보필하는 데 온 신경을 다 쓰는 남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차기범은 흔치 않게 권력을 제대로 휘둘렀다.
누군가의 귀띔이 있지 않고서야.
“오늘 고마웠네. 덕분에 한청호 표정 구겨지는 것도 보고. 하하하.”
체면 때문에 분한 마음을 애써 억누르던 한청호.
장준용은 그런 한청호를 떠올리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전부 태수 덕분이다.
“이거 받게.”
장준용이 품속에서 황금 명함을 꺼냈다.
번쩍번쩍한 황금 명함이 장준용의 두 손가락 사이에 집혔다.
“그때 태양 그룹 단합 휴가 간다면서 황금 명함을 썼지?”
황금 명함과 바꿔서 전세 버스, 여객기, 제주도 리조트, 식당 등등을 잘 이용했다.
그 이후 태양 그룹의 사기가 하늘을 찔렀다.
“이번엔 좀 더 어려운 일로 쓰라고.”
“감사합니다.”
태수가 황금 명함을 품에 넣었다.
장준용은 물끄러미 태수가 하는 양을 보았다.
“왜 박태종이 아니라 나를 추천했나?”
태수는 말없이 술만 마신다.
박태종 역시 한청호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건 마찬가지다.
그래서 장준용은 왜 태수가 박태종이 아니라 자신을 밀었는지 의아했다.
‘박정환, 전두호, 한청호를 함께 엮을 때 혹시라도 정보가 새어 나갈 틈은 막아 둬야지.’
거사가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장준용이 한경련을 맡아 주는 게 더 낫다.
태수가 대답하지 않자 장준용은 화제를 돌렸다.
“요즘 차 실장이 아주 물 만난 고기처럼 날아다닌다던데.”
비서실장 김정림을 몰아내고, 한경련에 찾아와 압박하고, 육군 참모 총장과 사령관들을 만나 힘을 모으고 있다.
“차 실장은 그런 수완이 없는 사람이었단 말이지. 대체 무슨 수로 그 묵직한 작자를 흔들었나?”
이해관계로.
전두호라는 공동의 적을 두고 있으니 그의 협력을 얻어 내는 건 쉬웠다.
“조심하게. 나도 눈치챈 일을 한청호가 모르겠나.”
장준용이 양주를 마시며 말했다.
“그쪽에서 자네를 가만두지 않을 거야.”
태수는 양주잔을 기울이다가 멈췄다.
‘그럴 때가 되긴 했지.’
세 번째 증거가 태수에게 있다.
그런데 한청호는 박정환이 아니라 전두호 집안과 사돈을 맺는 것을 택했다.
배를 갈아타기로 결심했다는 뜻이 아니고 뭔가.
‘전두호를 들쑤셔 거사를 계획하고 있는 놈이 박정환의 눈치를 어디까지 볼까?’
박정환을 두고 협박하는 것도 유효 기한이 얼마 남지 않았다.
서로 눈치 보기의 시간이 도래한 것이다.
‘보나 마나 인내심이 짧은 한일권이 먼저 나설 테지.’
전생에 한일권과 45년을 함께 보냈던 태수다.
‘광록이 형님이 경호실을 어찌 꾸렸는지 한 번 확인해 봐야겠군.’
설마 그에 대한 대비도 없을까.
* * *
“우리 태수 또 어디 가려고? 이렇게 도망가면 섭섭해.”
장준용이 태수의 팔뚝을 부여잡았다.
술 취한 정신에 눈치도 빠르지.
몰래 튀려다가 그만 붙들렸다.
태수의 눈썹이 꿈틀댔다.
“자꾸 이러시면 다음엔 같이 술 안 마십니다.”
“아, 왜 또 이리 까칠한가. 참, 자네 황금 명함 없지?”
술주정이다.
그 황금 명함, 아까 줬다.
저 소리가 대체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장준용이 헤벌쭉 웃으며 품속에서 황금 명함을 꺼냈다.
“아까 다 봤어. 품에서 삼청의 푸른 명함, 럭키 세븐의 흰 명함이 나오더라? 우리 금산의 황금 명함만 없더라?”
회장 선출 직후 삼청의 이병춘과 만나 잠시 이야기를 나눴다.
그때 슬쩍 명함을 꺼내며 화기애애한 시간을 가졌더니, 술자리 내내 저 타령이다.
“이거 황금 명함, 우리 태수 가져! 다 가져! 막 가져! 우하하하!”
장준용이 황금 명함을 태수의 주머니에 마구 쑤셔 넣는 게 아닌가.
‘이 양반 술버릇이 명함 주는 거였나? 지난번에도 황금 명함을 못 줘서 난리더니.’
이번에도 금산의 김 비서가 소스라치게 놀란다.
그가 재빨리 장준용을 붙들고 늘어진다.
“죄송합니다. 우리 회장님이 과음하신 모양입니다.”
“우하하하! 우리 태수 황금 명함 다 가져! 자네 덕분에 나 또 회장 됐다. 한청호 표정 봤나? 우하하!”
허공에 황금 명함을 꽃종이 날리듯 날린다.
그럴수록 인내심이 뚝 끊기기 직전인 태수.
입꼬리엔 차가운 웃음이 걸렸다.
그때였다.
“아버지.”
허리에 두 손을 얹고 있는 미녀가 VIP룸에 모습을 드러낸다.
장준용이 그녀를 보며 헤벌쭉 웃었다.
“아이고, 우리 공주님 왔어?”
체면 차린답시고 서둘러 제정신인 척 행색을 정돈하더니, 딸을 보고 도로 얼굴이 헤실헤실 풀어진다.
“아빠 보고 싶어서 왔어? 아니면 우리 태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