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눈도장(1)
태수는 말했다.
“지난 2년 동안 장 회장님께선 한경련 회장으로서 실적으로 스스로를 증명하셨습니다. 누구처럼 제 세력을 싸고돌며 분란을 일으킬 위험은 없을 것 같군요.”
한청호가 회장이 된다면 제일 우려되는 게 그거였다.
장준용이 한청호의 차기 회장 집권을 막는 이유 또한 그것이었다.
“청일에서 주기적으로 사과 박스를 나른다죠?”
한청호는 윗선에 뇌물을 자주 상납한다.
그건 소문이 아니라 사실이라는 것을 다들 알고 있다.
“그런데 한 회장님께서 한경련 회장이 되신다면 그 사과 박스에 소속 확실히 적어서 보내야겠습니다. 청일이냐, 한경련이냐. 헷갈리실 것 같아 우려되는군요.”
모두 한청호를 보았다.
차가운 눈초리였다.
한청호가 한경련의 공금으로 로비를 벌이면서, 청일의 청탁을 하지 않을까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강태수! 나와 청일을 비방하고 모욕하지 마라!”
“왜요? 정곡이 찔렸습니까? 제가 너무 진실을 후벼 팠나 보군요.”
한청호가 박태종을 저격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받았다.
그런데도 한청호 역시 같은 말로 분개할 수밖에 없었다.
“억측이고, 모함이야! 누명 씌우지 마!”
“타당한 의문이죠. 아까 한 회장님께서 직접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이 정도는 후보 검증 시간에 당연히 물어볼 수 있다고.”
본인이 내뱉은 말이었다.
태수가 웃으며 주변을 돌아봤다.
“문제는 또 있습니다. 청일의 한 회장님께서 차기 회장이 되면 우린 어디서 모입니까?”
어디에서 모이든 지금처럼 호텔 오찬을 만끽할 순 없을 것이다.
이제껏 한경련은 회장이 모임 장소를 제공해 왔다.
폐쇄적인 재벌가 비밀 사모임이라는 성격이 워낙 강하기 때문이다.
“아시다시피 청일 호텔은 아직 완공되지 않았습니다. 그전까지 청일 본사 사무실과 기사 식당을 전전해야겠군요. 아, 실례. 청일은 구내식당을 이용하려나?”
노골적인 돌려 까기다.
박태종은 참을 수 없어서 껄껄 웃었다.
속이 다 시원했다.
“청일 호텔이 곧 완공……!”
“그러니까 그 전까지, 청일 구내식당 놔두고 기사 식당 이용하시게요? 그리고 청일 호텔 착공한지가 언젠데, 도대체 완공은 언제 되는 겁니까?”
돈이 부족해서 청일 호텔 완공이 계속 미뤄지고 있었다.
같은 이유로 차기범이 경고를 전하지 않았던가.
‘기사 식당 운운하며 박태종을 공격하던 수법을 한청호가 그대로 돌려받았군.’
‘솔직히 전부 맞는 말이긴 해.’
한청호는 태수를 매섭게 노려봤다.
“강태수, 네 일도 아닌데 끼어들어 왜 훼방이야! 악의적으로 여론을 선동하는 이유가 뭐야?”
“훼방이라니, 악의적 여론 선동이라니. 오해하고 계시는군요.”
태수가 어깨를 으쓱했다.
“전 금산 호텔 주방장의 음식 솜씨가 마음에 들어서 장 회장님을 추천했을 뿐입니다.”
“…뭐?”
“다음에도 금산 호텔에서 모였으면 해서 말입니다. 그런 이유로는 추천 못 합니까?”
“…….”
다들 피식 웃는다.
‘강태수와 한청호가 앙숙이라더니.’
‘유일하게 한청호를 이겨 먹는 혓바닥이라지?’
박태종이 크게 껄껄 웃었다.
“금산의 장준용 회장이 차기 한경련 회장으로 나올 생각이 있다면 나는 차기 회장을 포기함세. 2년 동안 매달 서울까지 오는 것도 귀찮겠어.”
박태종은 깨끗하게 차기 회장 자리를 포기했다.
‘재밌는 녀석이야.’
삼청의 이병춘이 태수를 보며 흥미로운 눈을 하고 있었다.
럭키 세븐의 구자겸도 마찬가지였다.
‘당돌한 놈이네. 하지만 마음에 들어.’
고작 27살의 녀석이 한청호의 기세를 아주 절묘하게 끊어 놓는다.
삼청의 이병춘과 럭키 세븐의 구자겸은 동시에 같은 생각을 했다.
‘나 역시 청일엔 유감이 많아.’
‘청일보다는 금산이 낫지.’
그래서였다.
삼청의 이병춘이 슬쩍 말을 보탰다.
“우리가 구내식당, 기사 식당 다닐 수준은 아니지 않나?”
누구를 지지하는지 그 뜻이 명백하다.
한청호도 바보는 아닌지라 미리 포섭했던 회원들을 돌아보며 눈으로 말했다.
‘고작 이런 일로 흔들리지 마! 내 손에 네놈들의 치부책이 있다는 것을 명심해!’
대다수는 눈빛으로 한청호를 지지한다.
하지만 삼청의 영향력을 크게 받는 몇 명의 회원은 눈치를 보더니 한 명씩 가세한다.
“확실히 금산 호텔 주방장이 요리를 잘하긴 해.”
“끝나고 금산 호텔 바에서 한잔하기도 좋아.”
“장 회장의 수완이야 말해 무엇해.”
럭키 세븐의 구자겸까지 입을 열었다.
“장 회장이 회장직을 맡으면서 분란 없이 편한 2년을 보낸 것 같긴 해. 또 시끄러워지는 건 딱 질색이야.”
구자겸까지 장준용을 지지한다고 대놓고 말하고 있다.
삼청에 이어 럭키 세븐까지 금산의 편을 들자 여론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연회장 입구에서 누군가가 걸어온다.
“회장 선출은 벌써 끝났나?”
차가운 목소리였다.
한경련 회원들이 그를 알아보자마자 일제히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다.
“차기범 경호실장님?”
대통령과 얼굴을 마주할 시간이 길수록 권력이 더 크다는 말이 있다.
대통령 비서실장과 대통령 경호실장은 박정환 정권의 핵심 인사다.
“아직 안 늦었지?”
차기범이 연회장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제일 먼저 손을 뻗어 인사하는 사람.
그 사람은 이 금산 호텔의 주인이자 한경련 현 회장인 장준용이 아니다.
재계 서열 1위인 삼청의 이병춘도 아니다.
심지어 박정환의 심복으로 알려진 박태종 역시 아니었다.
“강 회장, 한경련의 신입 회원이 된 걸 축하하네.”
바로 태양 그룹의 총수 강태수였다.
‘태양 그룹 강태수와 차기범이?’
‘둘이 그 정도 사이였어?’
‘강태수를 신입 회원으로 안 받았으면 어쩔 뻔했나.’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반갑게 인사하는 태수와 차기범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장준용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물었다.
“차기범 경호실장님께서 어쩐 일로 또 오셨습니까?”
“올 만하니까 왔지.”
차기범이 차가운 눈으로 좌중을 둘러봤다.
“내 경고가 우습게 들리던가?”
스치듯 훑어보다가 몇몇 회원의 얼굴에 눈길을 오래 둔다.
그들은 화들짝 놀라 눈을 피하기 급급했다.
“군자금 건네지 말라고 했을 텐데.”
전두호에게 몰래 군자금을 건넨 기업들이다.
모두 슬금슬금 눈치를 본다.
장준용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차 실장님, 지금은 한경련 차기 회장을 뽑을 시간입니다만…….”
“누가 차기 회장이 될지 각하께서 궁금해하셔서 말이야.”
박정환이 보냈다는 뜻이다.
“여기 앉으십시오.”
누가 박정환의 뜻을 거스르겠나.
말 끝나기가 무섭게 장준용이 제자리를 양보했다.
상석은 차기범의 차지가 되었다.
“회의 진행해.”
가시방석이 따로 없다.
‘그동안 김정림 비서실장이 와서 참관하곤 했는데, 갑자기 차기범 경호실장이 참관하다니.’
‘분위기가 너무 살벌한데.’
누군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고 질문했다.
“저기, 그런데 오늘 김 실장님 대신 차 실장님께서 오신 이유가 따로 있습니까?”
차기범은 서늘하게 웃었다.
“오늘부로 김정림 비서실장이 해임돼서 말이야.”
이건 또 무슨 일인가.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그럼 지금 각하 곁에 있는 최고 권력자가 차기범이란 소리잖아?’
대통령 눈에 자주 띌수록 권력이 강한 법이다.
그동안 비서실장과 경호실장으로 대표되는 막강한 권력 중 하나가 사라졌다는 뜻이다.
‘차기 비서실장이 누가 될지 몰라도 경호실장 차기범만큼은 세가 강하진 못하겠지.’
‘텃세가 무서운 법이야. 차기범이 새로운 비서실장을 견제하지 않을 리 없지.’
그때 차기범이 슬쩍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그런데 말이야. 사돈에게 군자금 못 보내겠단 소리는 할 수 있겠나? 한경련 회장을 통해 1원 한 장이라도 그쪽으로 흘러간다면 한경련도 같이 엮이겠는데.”
더할 수 없이 아주 명백한 의도였다.
차기범이 차가운 눈으로 한청호를 주시한다.
한청호는 눈을 질끈 감았다.
‘나더러 회장 되지 말라고 대놓고 고사를 지내는구나.’
대체 저 인간이 한경련 회장 선거에는 왜 나타난 거야!
왜 다 된 밥에 코를 빠뜨려!
‘차기범이 찍어 누르는 것을 찍소리도 못하고 받아들여야만 하다니.’
장준용, 한청호, 이병춘, 구자겸.
네 명이 동시에 태수를 돌아보았다.
‘이게 우연일 리가 없어.’
‘회장 선거의 판을 흔들었구나.’
‘기가 차는군.’
판을 이렇게 만든 태수는 태연하게 물을 마시고 있을 뿐이었다.
차기범의 재촉이 떨어졌다.
“뭐 하나? 회장 선출 안 하나?”
당연히 몰표를 받고 장준용이 한경련 회장에 연임되었다.
목적을 달성한 차기범은 회장 선거 끝나기가 무섭게 유유히 떠났다.
* * *
한청호는 제일 먼저 금산 호텔 연회장을 박차고 나갔다.
그 뒷모습을 보면서 박태종은 혀를 찼다.
“거 성질머리는. 밴댕이 소갈딱지가 따로 없네.”
“그냥 둬. 차기 회장이 되려고 오죽 열을 올렸나.”
삼청의 이병춘이 태수에게 다가왔다.
“오랜만이야. 자네 덕분에 오일 쇼크는 수월하게 넘기게 되었어. 고맙네.”
그 빚을 잊지 않고 있기에 한경련 신입 회원 추천을 선뜻 맡아 준 이병춘이 아닌가.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우리 셋째 아들이 신세를 졌다지?”
삼청 그룹의 셋째 아들이라면 차기 그룹 총수가 될 이건후다.
“신세는요.”
“겸손은. 자네 만나고 우리 애가 의욕을 불태우고 있는데, 무척 보기 좋아.”
동인 방송을 맡고 있는 이건후는 요즘 물이 올랐다.
태수와 함께 제작한 일일연속극 ‘불꽃처럼 타오르다’는 연일 시청률 최고 기록을 갈아 치우고 있다.
또한 이건후가 새로 기획한 새로운 예능 프로그램, ‘코미디 만만세’ 역시 기대 속에서 승승장구하고 있다.
덕분에 올해 TBS 동인 방송국은 역대 최고 실적이란 호평을 듣게 되었다.
“우리 애와 자네가 혁신에 대해 논했다지.”
이건후가 꽂힌 단어였다.
이병춘 역시 아들의 입에서 그 단어를 들었다.
“태양 아파트 견본 주택이 그리 대단하다며?”
“과찬이십니다.”
“우리 아들이 오자마자 열변을 토하며 신나 하더군. 차분한 애가 그리 목소리를 높인 건 오랜만이었어.”
이건후가 그랬다는 건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아내가 재벌 사모 모임에서 태양 전자에서 새로 나온 가전제품에 대해 들었다던데. 그 뭐냐, 냉장고가 여러 개, 냉동고가…….”
“와인 냉장고, 김치 냉장고, 급속 냉동고 말씀이십니까?”
“그래, 그거 말일세.”
이병춘이 눈빛을 빛내며 묻는다.
“삼청 전자도 냉장고를 만들고 있어. 하지만 기술을 가지고 있음에도 용도를 정해 따로 만들 생각 같은 건 해 보지 못했지. 이게 바로 혁신이 아니고 뭔가?”
이병춘이 태수에게 흥미를 가진 이유는 바로 새로운 형태의 가전제품 때문이었다.
“난 우리 삼청 전자를 세계적인 기업으로 이끌 생각이야.”
알고 있다.
전생에서도 이병춘이 제일 공을 많이 들인 것이 삼청 전자와 삼청 물산이다.
“자네의 그 혁신적인 제품에 대해 관심이 아주 많아. 그래서 언제 한번 태양 전자를 찾아갔으면 싶은데…….”
은근히 욕심을 드러내는 이병춘이다.
하지만 태수가 그 욕심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환영한다.
태양 전자의 기술력을 뇌리에 박아 줄 절호의 기회가 아닌가.
“언제든지 오십시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하하하, 고맙네.”
이병춘이 크게 기뻐하며 태수의 어깨를 두드렸다.
“혁신이 자네가 지향하는 기업 목표인가?”
“아닙니다.”
“음? 그럼 자네를 지금 이 자리에 오게 만든 한마디는 무엇인가?”
복수.
하지만 그걸 솔직하게 말할 수는 없다.
‘대신 저 양반이 가슴에 새겨 두고 있는 말이라면 알지.’
에라, 모르겠다.
태수는 전생에서 이병춘이 이건후에게 몰래 강조했다는 말을 떠올렸다.
“어떠한 인생에도 낭비란 것은 없다. 문제는 그 경험을 어떻게 살리느냐에 있다.”
“……!”
“지난날의 실패를 딛고 일어났을 뿐입니다.”
“……!”
이병춘의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렸다.
태수의 말에 뒤통수가 얼얼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자네……!”
충격적이었다.
믿을 수 없었다.
이병춘이 태수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다 말고 꽉 움켜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