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 한경련(4)
“태양 중장비에서 이번에 레미콘 차와 사다리차가 잘 뽑힌 거 알지? 현재 품절 상태라, 예약을 받은 것만 해도 1,300억.”
태양 중장비에서 나온 레미콘 차와 사다리차가 대박을 쳤다.
요즘 건설 현장에서 태양 중장비가 심심치 않게 보인다.
써보면 다시 재구매를 하게 된다는 태양 중장비다.
“태양 정유, 태양 전자, 태양 전기, 태양 창호, 태양 화학, 태양 목재, 태양 증권과 태양 보험. 그리고 태양 시멘트와 태양 광산 및 상사 등등.”
장준용이 주변을 돌아본다.
“올해 전부 전년도 대비 300% 정도 매출이 증가했다지? 오일 쇼크 때문에 다들 적자로 허덕이는데, 태양 그룹은 치고 올라가는군.”
태양 그룹의 계열사는 인수전부터 탄탄하기로 정평이 난 곳들이다.
오일 쇼크 때문에 흑자 도산한 곳이 대부분이다.
단일 기업만으로도 웬만한 대기업은 명함도 못 내미는 곳인데, 전부 300% 매출 증가라니.
‘태양 그룹의 상승세가 무섭다.’
‘따지고 보면 사업한지 3년 만에 재벌이 된 놈이 아닌가.’
‘내년엔 얼마나 더 클지 모르겠어.’
장준용이 웃었다.
“한경련이 왜 공금을 모아 회장을 뽑는지 다들 알지?”
한경련이 공금을 모으는 이유는 간단하다.
윗선에 뇌물을 바치고, 로비로써 이득을 따내기 위해서다.
박정환 정권이 중화학 공업과 제조업으로 국가 발전을 꾀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라가 추진하는 사업으로 재벌 기업들에게 일거리를 뿌리고 있다.
“강 회장, 그거 좀 구경시켜주지 않겠나? 각하께 하사받은 거 있잖아.”
“이거 말입니까?”
태수가 품에서 은색 라이터를 꺼냈다.
청와대 마크가 크게 찍혀 있는 물건이었다.
그러자 반응이 극명하게 갈렸다.
“그, 그건 각하의 라이터가 아닌가?”
골초인 박정환이 애지중지하는 라이터다.
상석에 앉아 있는 회원들을 평소 박정환과 대면할 기회가 제법 많아서 물건을 알아봤다.
하지만 말석에 앉아 있는 회원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장준용이 태수가 들고 있는 라이터를 가리키며 말했다.
“각하께서 이걸 주면서 뭐라고 했다고?”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찬물을 끼얹은 듯이 조용했다.
한경련 회원들은 이제 이 라이터의 값어치를 똑똑히 깨달았다.
‘단독으로 박정환에게 청탁할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다는 뜻이야.’
‘대단하다, 태양 그룹. 저런 라이터를 어떻게 얻었을까?’
태수를 보는 시선에 감탄과 선망이 어리기 시작했다.
한청호의 마음에 들지 않는 분위기다.
한청호가 코웃음 쳤다.
“각하께 청을 올릴 수 있는 건 나 역시 마찬가지야.”
“그래서 한 회장은 라이터 있어?”
장준용의 말에 한청호는 입을 다물었다.
“있어, 없어?”
없다.
“없으면 말을 하질 마.”
분하다.
“흥, 고작 라이터 따위!”
“그럼 이 라이터를 이용해 한경련 대신 청을 올린다면?”
장준용의 말에 한경련 회원들이 눈빛이 달라진다.
장준용이 회원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아니, 까놓고 말해서 여기서 단독으로 각하랑 대면한 사람이 몇이나 돼? 우리 금산 호텔에 VIP룸에 각하께서 들인 사람 손 들어보라고 해?”
조용하다.
장준용이 태수를 돌아봤다.
“신입 회원에게 못 볼꼴을 보였군.”
“아닙니다. 한 가지만 짚고 넘어가죠.”
태수 역시 한청호를 보며 말했다.
“한 회장님, 자꾸 자격이 없다고 하시는데, 그 말은 절 추천해주신 분들은 자격 없는 사람을 보증했다는 뜻입니까?”
그제야 사람들은 태수를 신입 회원으로 추천한 사람들을 보았다.
삼청, 럭키 세븐, 금산, 대한 정유, 그리고 포항 철강.
모두 표정이 썩 좋지 않다.
한청호는 코웃음 쳤다.
“그러니 다시 물어봐야지. 아직도 태양 그룹을 추천할 마음이 있느냐고.”
삼청의 이병춘이 손을 들어 말했다.
“삼청의 생각은 변함없어. 태양 그룹은 한경련에 들어올 자격이 충분하다.”
럭키 세븐의 구자겸도 마찬가지였다.
“럭키 세븐도 같습니다.”
당연히 금산의 장준용과 포항 철강의 박태종도 찬성하고 나섰다.
대한 정유의 김동조까지 모두 태수의 가입을 찬성하고 나섰다.
“한 회장, 5명 전원 추천을 철회할 뜻이 없다고 하는군.”
금산의 장준용이 제대로 마침표를 찍었다.
“한청련 내부 규약에 따라 태양 그룹 강태수 총수의 한청련 가입을 허락합니다. 그러니 앞으로 이에 대한 이의는 아예 안 받겠습니다.”
장준용이 한청호를 노려보았다.
“아주 제멋대로구만. 지금도 이렇게 날뛰는데, 회장이라도 되면 얼마나 개판을 칠지 걱정이 될 정도야.”
“그러니 빨리 회장 선거나 치르시지.”
한청호가 말석에 앉는 태수를 보며 이를 갈았다.
“신입 회원 자격은 그때 다시 의논해도 안 늦을 테니까.”
그렇게 한경련 차기 회장 선거가 시작되었다.
* * *
회장 후보자 연설 시간이다.
장준용이 박태종을 추천했다.
금산이 한청호의 대항마로 박태종을 밀고 있었다.
박태종이 일어나서 말했다.
“저 박태종이 한경련 회장이 된다면 각하께 허심탄회하게 기업인들의 고충을 말해드릴 수 있습니다.”
저 장점은 무척 컸다.
박태종은 박정환의 심복 중의 심복이다.
쿠데타를 앞두고 가족을 맡겼을 정도로 믿고 신임하는 자였다.
“저 박태종은 포항 철강을 책임지기 전에 국가재건최고회의의 비서실장이었으며, 공사인 대운중석을 키웠습니다. 또한 청와대 경제 고문을 맡고 있습니다.”
오죽했으면 사우디 왕실에서 골치 아픈 서신을 보냈을때, 박정환이 친히 포항까지 내려와 박태종과 상의했겠나.
“경제인과 기업인으로 산지도 벌써 10년이 넘었습니다. 그러니 기업인의 입장에서 각하께 충언을 드릴 수 있을 겁니다.”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그러자 한청호가 물었다.
“한경련이 왜 만들어졌는지 다들 잊은 건 아니겠죠? 정권의 앞잡이에게 기업인들의 목줄을 내어주겠단 뜻으로 들리는군요.”
한경련은 두 가지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첫째는 박정환이 시장을 통제하기 위해서, 둘째는 재벌 기업들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서.
박수소리가 점점 멎기 시작했다.
“그게 무슨 뜻이지?”
“박 사장이 각하의 심복이란 것을 누가 모릅니까? 그런 스파이를 회장으로 앉혔다가 무슨 일을 당할지, 저는 조금 염려가 되어서 말입니다.”
여기 모인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박정환의 압력을 받고 있는 기업가들이다.
“청탁이랑 스파이는 조금 달리 봐야하지 않을까? 안 그렇습니까?”
박태종이 벌컥 화를 냈다.
“스파이라니! 정권의 앞잡이라니! 목줄이라니!”
“왜 정곡에 찔렸나? 내가 너무 진실을 후벼 팠군 그래.”
“억측이고, 모함이야! 누명 씌우지 마라!”
“타당한 의문이지. 이 정도는 후보 검증 시간에 당연히 물어볼 수 있는 거 아닌가?”
여론이 한청호 쪽으로 기울었다.
박태종이 몇 마디 말을 더 보탰지만, 싸늘해진 여론은 돌아서지 않았다.
금산의 장준용은 한숨을 쉬었다.
‘각하의 심복이란 점이 오히려 족쇄가 되었군.’
박정환이 찍어 누르는 것도 버거운 판이다.
박태종이 박정환에게 한경련을 들어다 바칠 것이란 불안감이 엄습했다.
한청호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또한 포항 철강 박 사장은 좀처럼 한경련 모임에 얼굴을 들이밀지 않았지.”
포항에 틀어박혀 모임에 잘 참석하지 않았다.
“한경련 모임은 보통 회장의 주재에 따라 소유한 건물에서 열게 마련인데, 포항 철강 박 사장이 차기 회장이 된다면 달마다 포항까지 내려가야 하나?”
그런 문제가!
“아니면 매달마다 다른 기업 회의실이라도 빌려서 오찬 모임을 열까요? 기사식당이라도 예약해서?”
그건 싫다!
여기 모인 재벌 총수들이 어디 보통 사람들인가.
빌린 사무실과 기사 식당 예약은 생각만 해도 불쾌했다.
한청호의 말재간에 여론이 바뀐다.
장준용은 속으로 탄식했다.
‘이렇게 되면 박태종은 힘들겠어.’
차기 회장 후보자인 한청호가 일어나 말했다.
“이제 제 차례인가요? 말하지 않아도 청일의 위상은 다들 알 것이라 생각합니다.”
청일의 올해 재계 서열은 13위다.
“그리고 이 한청호의 특기도 다들 인정하고 있잖습니까?”
한청호의 특기는 인재 보는 안목, 그리고 뇌물로 로비하는 것이다.
“제 별명이 뭡니까?”
한청호는 별명이 많다.
정치하는 재벌 총수, 사업보다 로비를 더 잘하는 사업가, 정권의 기생충, 뇌물의 스페셜리스트, 정치권의 마당발, 이권 강탈자 등등.
“대부분 사업보다는 정치가 더 뛰어나다는 평가를 듣는 것으로 압니다. 그게 과연 한경련 회장으로서 단점이기만 할까요?”
한경련 회장으로서는 오히려 장점이다.
한경련이 공금을 모아 추구하는 게 로비가 아닌가.
“제가 누구보다 뇌물을 잘 쓴다는 것은 여러분이 더 잘 알 겁니다.”
오죽하면 청일은 뇌물로 세운 기업이라는 소리가 나오겠나.
한청호는 그 점으로 다른 재벌 기업들에게 눈총을 받곤 했다.
“한 가지 약속드리겠습니다. 제가 회장으로 있는 한 제가 뒤를 확실하게 커버해드리겠습니다. 제가 뭘 갖고 있는지는 여러분들도 잘 알고 있겠죠.”
한청호에게 치부책이 존재한다.
이미 한경련 모임에 들어오기 전에 한 차례 협박을 받은 후다.
“차기 회장으로 누가 더 어울릴지는 여러분들의 판단에 맡겨야겠군요. 나 한청호냐, 저기 정권의 개 박태종이냐.”
환호성이 울렸다.
장준용은 눈을 질끈 감았다.
‘끝났군. 대항마가 없어. 과반수를 겨우 채웠다고 생각했는데.’
그때였다.
태수가 말석에서 슬쩍 손을 들었다.
“신입 회원은 회장 후보 추천 못 합니까?”
한청호에게 열광하던 분위기가 멎었다.
“안 되긴. 회원이 되었으니 후보 추천뿐만 아니라 회장 선거에도 참여할 수 있지. 왜? 자네가 차기 회장이 되어 보려나?”
모두 태수에게 집중했다.
‘내 일하기도 귀찮아 죽겠는데, 한경련 뒤치다꺼리까지 떠맡는 건 사양하지.’
그런 거 맡아 봤자 일만 많아지고, 똥파리만 더 꼬일 뿐이다.
태수는 딱 잘라 말했다.
“전 금산의 장준용 회장의 연임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연임?”
다들 어리둥절했다.
지금껏 회장 연임은 없었다.
“자네가 몰라서 그러는 모양인데, 관례처럼 2년 임기를 채우면 물러난다네.”
초대 한경련 회장인 삼청의 이병춘도 깔끔하게 2년 임기를 채우고 물러났다.
그 이후도 마찬가지다.
“관례? 내부 규약에도 없는 관례가 기준입니까?”
태수가 저쪽에 방치 되어 있던 한경련 내부 규약서를 가져왔다.
아까 태수가 품안에서 꺼냈던 바로 그 서류였다.
“한경련 내부 규약엔 연임 금지 규정이 없더군요.”
태수가 가져왔던 내부 규약서가 다시 한번 조명 받았다.
“미국 대통령도 연임하고, 우리나라 대통령도 연임하고 있는데, 왜 한경련 회장님은 연임 못 합니까?”
그러게.
왜 연임할 생각을 못 했을까.
박정환은 헌법까지 뜯어 고쳐가며 연임하고 있다.
“확인해 보십시오.”
이번에도 누군가가 잽싸게 내부 규약서를 채가서 바쁘게 읽는다.
“확실히 연임 금지 조항은 없습니다.”
“그러네요. 그저 <한경련 회장의 임기는 2년으로 한다.>고 적혀 있습니다.”
장준용이 끌어 모은 지지자들이 많다.
박태종의 패배가 짙어지자 안색이 어두워졌던 그들의 안색이 다시 밝아진다.
그들은 한청호가 한경련 차기 회장이 되는 것을 반대하는 자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