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산 찍고 건설 재벌-150화 (150/230)

150. 한경련(3)

장서연은 푸른빛 칵테일을 집어 들었다.

“요즘 한청호 돈줄 막힌 건 알고 있죠?”

한청호 돈줄을 틀어막은 게 태수다.

“시중 11개 은행이 청일에 대출 금지 및 원금 일부 회수를 독촉했어요.”

“그건 알고 있습니다.”

태수가 인수한 해외 은행을 통해서 압박을 넣고 있다.

송 비서가 수완을 부려서 은행장들을 제대로 주무른 결과다.

“사실 아버지께서 추가로 압력을 행사하셨거든요.”

“장 회장님께서요?”

“최근 청일에 시중 7개 은행이 추가로 독촉장을 날렸을 거예요.”

모두 18개 은행이 청일에 원금 회수를 독촉하고 있다는 뜻이다.

‘아주 마음에 드는 소식이군. 한청호, 자금 압박이 상당하겠어.’

태수 역시 장서연과 똑같은 칵테일을 골랐다.

시원하면서도 달콤한 끝 맛이 마음에 든다.

한청호의 소식을 듣고 있는 태수의 마음이 그랬다.

“거기에 청일 자동차와 해운의 적자, 여태 누가 키웠을 것 같아요?”

장준용이 손을 썼다는 소리다.

“그뿐만이 아니에요. 김정림 비서실장과 한청호 사이에 폭탄을 던져 놓으셨지요. 아마 청일 회장님은 요즘 대통령 뵙기 꽤 어려우실 거예요.”

태수는 기분 좋게 웃고 말았다.

마음에 드는 소식에 절로 눈빛마저 부드러워진다.

태수와 장서연이 서로를 마주보며 함께 웃고 있었다.

쨍.

칵테일 잔이 가볍게 부딪쳤다.

장서연이 한 모금 마시더니 말했다.

“청일이 회장이 되면 많은 게 바뀔 거예요. 일단 공금 유용에 관한 권한이 막강해지잖아요.”

재벌 회원들이 매달 내는 공금은 규모 자체가 다르다.

정치권에 로비 자금으로 쓰이는데, 당연히 거액이 들어간다.

“청일은 지금 호텔과 아파트 공사 자금이 부족한 모양이에요. 그런 상황에서 한경련 회장이 되었다고 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한경련 공금 관리 권한.”

“어차피 로비 자금이잖아요.”

일단 공금으로 부족한 건설 자금을 충당하고, 나중에 아파트 분양으로 금고를 채워 넣으려 할 것이다.

고양이 앞에 생선이다.

한청호라면 공금에 손을 대고도 남는다.

“정치권 로비는 한청호의 특기고. 이미 친분이 두터운 정관계 인사들이 넘칩니다.”

“그들과 만나 로비한다는 명목으로 뒤로 빼돌리기 참 좋겠죠?”

장준용이 우려하는 바를 알겠다.

“한 회장님이 차기 한경련 회장을 맡으면 보나마나 개판이 될 거에요. 자기 사람들만 챙기고, 눈 밖에 난 몇몇 기업들은 정권의 제물로 바칠 테죠.”

전생에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다.

“우리 금산과 청일은 앙숙이잖아요. 그리고 태양도 아마 비슷한 신세가 될 거예요.”

금산과 태양을 제일 먼저 정권의 제물로 팔아넘길 거라는 뜻이다.

“아버지께선 한 회장님이 차기 회장이 된다면 금산의 사업을 제대로 방해하실 거라고 걱정하세요.”

한청호라면 그럴 것이다.

“이제 제가 왜 당신을 찾아갔는지 알겠죠?”

한청호 손에 돈 들어가게 놔둘 수는 없지.

“내가 어쩌길 바랍니까?”

“말 그대로에요. 한경련에 가입해서 차기 연합 회장 자리에 한청호가 오르는 것을 막는데 한 힘 보태주세요.”

장서연이 손을 내밀었다.

그 희고 가냘픈 손을 태수가 꽉 잡았다.

“기꺼이.”

장서연은 어째서인지 이번에도 조금 얼굴을 붉힌다.

그녀가 조금 힘을 주어 태수의 손을 잡고 위아래로 흔든다.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군요. 아버지께서도 좋아하실 거예요.”

한경련이라.

전생에 태수는 한 번도 발 들이지 못한 재벌 모임이다.

‘한 번 가보지.’

언제나 그렇듯 고민은 짧았다.

* * *

2주후.

금산 호텔 연회장에서 한경련 정기 오찬 회동이 열렸다.

커다란 홀 가운데 70명이 둘러앉을 수 있도록 탁자가 줄줄이 이어졌다.

가장 상석에 앉아 있는 사람은 한경련 회장인 장준용이었다.

“제가 연합회 회장이란 중임을 맡아 한경련 살림을 꾸려온 지 벌써 2년이 되었습니다.”

한경련 회장의 임기는 2년이다.

“이렇게 올해 마지막 모임을 치르게 되어 감개가 무량합니다. 2년간 부족한 이 사람을 잘 따라주어서 고맙습니다.”

한경련 회원들이 장준용에게 박수를 보냈다.

장준용은 고개 숙여 감사를 표했다.

“다들 아시다시피 임기 마지막 달엔 차기 연합 회장을 뽑는 게 관례입니다. 그 전에 앞서 오늘 새로운 신입 회원부터 먼저 받겠습니다.”

회원들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신입 회원?”

“누구의 추천으로?”

장준용이 말했다.

“금산, 삼청, 럭키 세븐, 대한 정유, 포항 철강. 이렇게 다섯 분의 회원께서 추천해주셨습니다.”

호명된 추천 회원들이 손을 들었다.

그러자 다른 한경련 회원들은 깜짝 놀랐다.

올해 발표된 재계 순위는 1위 삼청, 2위 럭키 세븐, 6위 금산, 7위가 대한 정유다.

‘맙소사. 10대 재벌 기업들의 추천을 받아서 들어오는 신입 회원이라고?’

‘말도 안 돼. 함께 엮일 조합이 아닌데.’

‘포항에 틀어박혀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 박태종까지 참석했어?’

포항 철강의 박태종은 웃으며 회원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포항 철강은 단일 제철 기업으로 아직 재계 서열을 논하기 힘들다.

하지만 무지막지한 속도로 기업이 커 나가고 있다.

세계 제철 역사상 발족한 첫해에 흑자를 낸 유일한 기업으로 기록된 포항 철강이 아닌가.

‘박태종은 박정환의 심복 중의 심복이다.’

‘그가 고작 회원 추천을 위해 일부러 상경했다니.’

얼마나 박정환의 신임을 받았는지 단적으로 알 수 있는 일화가 있다.

5.16 군사 정변 때 박정환은 박태종에게 남은 가족들을 부탁했다.

또한 정앙정보부 요원들이 정치 자금을 걷으러 다닐 때, 포항 철강은 빼라고 박정환이 직접 엄포를 놓기도 했다.

“한경련의 신입 회원이 될 태양 그룹의 강태수 회장입니다. 모두 박수로 맞아주시길 바랍니다.”

장준용이 연회장 입구를 향해 손을 뻗었다.

짝짝짝.

회원들의 박수 소리와 함께 입구에서 태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고작 27살의 젊은 청년이 걸어 나온다.

오늘따라 신경 쓴 외모가 유독 깔끔했다.

‘태양 그룹의 젊은 총수 강태수구나.’

‘박정환 대통령이 그리 마음에 들어 한다는 그 친구.’

‘강태수라면 한경련 회원 자격은 충분하지.’

태수의 명성은 알음알음 재벌 세계에 퍼진지 오래다.

한경련 회원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환영합니다.”

“어서 오게.”

그 모습을 차가운 눈으로 보는 한청호.

‘강태수······!’

장준용이 박수를 치며 태수를 제 옆으로 불러 들였다.

“신입 회원은 한경련 회원 가입에 대한 소감 한 말씀 해주게.”

태수가 주변을 돌아보자, 한경련 회원들이 모두 태수를 주목했다.

“이렇게 한경련에 가입할 수 있게 되어 영광입니다. 모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짤막한 소감이지만, 다들 힘차게 박수쳐 환영했다.

그때 한청호가 입을 열었다.

“언제부터 한청련이 시장 바닥의 상인들까지 열린 단체가 됐지?”

박수소리가 뚝 끊기고, 삽시간에 좌중이 얼어붙었다.

한청호는 개의치 않고 말했다.

“태양 그룹 재계 서열이 고작 200위쯤 됐던가?”

실제로 그랬다.

재벌 그룹으로 출범한 후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본 조건부터가 수준 미달인데?”

뼈 있는 일침에 회원들은 한청호와 태수를 번갈아 보았다.

태수가 피식 웃었다.

“이런. 한경련 규약에 그런 조건 따윈 없던데요.”

태수가 품에서 한경련 내부 규약서가 나왔다.

이럴 줄 알고 미리 준비해온 서류였다.

“다들 한경련 내부 규약서에 어떤 내용이 있다는 것쯤은 아실 것으로 압니다. 확인하고 싶으신 분은 직접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태수가 테이블 위에 규약서를 내려놓았다.

몇 명이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테이블 위에 올린 규약서를 집어 읽는다.

“확실히 내부 규약서에는 그런 조건은 없습니다.”

“신입 회원과 관련되어서 <기존 회원 5명의 추천이 있을 시>라는 규정만 있습니다.”

태수는 한청호를 보며 웃었다.

“청일 회장님께서도 확인해보시겠습니까?”

한청호도 지지 않았다.

“이건 규약 이전에 한경련 수준의 문제인데.”

한청호가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돌아본다.

“다들 한경련에 들어오고 싶어도 들어오지 못합니다. 왜? 여긴 대한민국 최상류 기업의 전당이거든.”

한경련 회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도 쉽게 들어오지 못했다.

“한 번 소속된 이후에도 재계 순위에 따라 회원 자격이 박탈되는 곳입니다. 그래서 고작 회원이 채 70명이 되질 않지.”

말 그대로였다.

한경련은 박정환이 상위권 기업을 통제하여 시장을 틀어쥐기 위해 만든 단체다.

그러니 매년 정부에서 발표되는 재벌 기업 순위에 사활을 건다.

3년 연속 100위권 밖으로 밀려나면 회원 자격이 강제로 박탈된다.

“극소수를 위한 최상위 프리미엄 재벌 단체. 그게 우리 한경련의 기본이에요.”

한경련 회원들이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이유기도 했다.

“강태수, 한경련에 가입하고 싶으면 일단 100위권 기업 안에 들어온 다음에 문을 두드려.”

한청호의 말에 회원들이 수군대기 시작했다.

몇 명 한청호의 말에 동조하는 자들이 생겨난 것이다.

태수가 입을 열려하자, 장준용이 팔로 슬쩍 막았다.

-한청호 수작에 넘어가서 첫인상을 망쳐서는 안 돼.

한청호의 고약한 의도를 어찌 모르겠나.

-첫인상에 두 번의 기회란 없다네.

사람들은 대부분 첫인상으로 그 사람을 분류하곤 한다.

그리고 이미 각인된 인상을 바꾸기 위해선 무척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나만 믿게.

태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장준용이 말했다.

“한 회장, 나 아직 임기 안 끝났어. 5명이 기존 회원이 한 사람을 추천했고, 막 승인된 참인데 지금 왜 딴지를 거는 거지?”

“자격 미달이니까. 안 그런가?”

한청호가 여론을 선동한다.

“내부 규약 바꿀 생각이라면 회장부터 되고, 총회 열어서, 투표함 열어서, 제대로 바꿔.”

장준용이 한경련 내부 규약서를 가리켰다.

“그 전까지는 규약대로 하자고.”

“좋지, 규약. 추천한 사람들 중에 마음을 바꾸는 사람이 생기면 신입 회원 자격이 안 되는 거잖아.”

“자격? 차고 넘치지.”

장준용이 헛웃음 지었다.

“아, 그러고 보니 다들 지금 태양 그룹 규모를 모르나 보군.”

그러니 이리 어수선하지.

“올해 재벌 순위가 아직 산정되지 않아서 아쉬워. 태양 그룹은 전년도 기준으로 합계를 매겨서 200위권이야. 실제로는 올해 100대 기업에는 충분히 들어.”

“태양 그룹 출범한지 얼마나 됐다고?”

타당한 의문이었다.

아무리 빨리 회사가 큰다고 해도 한계가 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이 그걸 모를 리가 있나.

“한 회장은 잊었나 보지? 태양 그룹의 주베일 산업항 공사. 10억 달러.”

웅성거림이 멎었다.

10억 달러라면 이 나라 전체의 반년 치 예산이었다.

“태양 그룹은 운 좋게 그걸 올해 안에 전부 받았어. 추가로 사우디 해군 기지 건설과 병참 기지 건설, 고속도로와 항만 정비 공사를 따냈기 때문이지.”

김우진이 공격적으로 공사 입찰을 따냈다.

물론 라흐만이 전심전력으로 밀어주고 끌어줬기 때문이기도 하다.

“태양 건설에 들어온 올해 수주액은 최소 20억 달러라는 소리야.”

그게 대체 다 얼마야.

요즘 오일 쇼크 때문에 환율이 올라서 1달러에 400원이 넘는다.

‘최소 8천억?’

‘태양 건설만 올해 8천억 원 이상의 매출을 올렸다는 소리잖아?’

투덜대던 몇 개 기업의 총수들.

그들의 입술이 조개처럼 앙 다물렸다.

오일 쇼크 때문에 몇 개 계열사가 부도난 기업들이다.

“그뿐만이 아니야.”

장준용이 아주 작심한 것처럼 말을 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