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산 찍고 건설 재벌-149화 (149/230)

149화 한경련(2)

장서연은 생긋 웃었다.

“퇴근하는 길에 들러 봤어요. 아버지가 이곳과 똑같은 것으로 제 집을 한 채 장만하신다면서 자꾸 자랑하시더라고요.”

요즘 술주정 레퍼토리가 이거다.

-내가 128평형 태양 아파트를 네 몫으로 예약해 놨다. 거기 엄청 멋지다. 신혼집으로 딱이야. 아빠랑 같이 구경 갈까?

김 비서까지 둘이서 하도 신나게 자랑을 해대니 궁금했다.

“괜찮다면 잠시 구경해도 될까요?”

“그럼요.”

안 그래도 촬영 팀과 배우들은 회식으로 빠졌다.

달칵.

태수가 다시 불을 켰다.

그러자 장서연이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집들이에 온 것 같아요. 정말 여기 세트장 맞아요?”

눈이 초롱초롱했다.

“여기는 태양 아파트 CF에 나오던 그 집이잖아요?”

“맞습니다. 여기서 촬영했죠.”

“게다가 요즘 인기리에 방영되는 연속극에서 나오는 남자 주인공의 집이기도 하고요. 여긴 몇 평형인가요?”

“32평형입니다.”

장서연이 주변을 둘러보며 웃는다.

“원래 스튜디오가 이렇게 생긴 거예요?”

“조금 다를 겁니다. 이건 태양 아파트 모델 하우스거든요.”

“모델 하우스요?”

“견본 주택입니다. 태양 아파트 구조와 똑같이 빠졌죠. 드라마 촬영이 끝나면 시민들에게 무료로 개방해서 태양 아파트 분양 홍보관으로 쓸 예정입니다.”

장서연이 감탄한 눈으로 태수를 봤다.

“그런 식의 홍보는 처음 들어 봐요.”

아마도 그럴 것이다.

모델 하우스를 이용한 홍보는 80년대에나 되어야 유행하니까.

“입장료도 없이 공짜로 개방한다면 많은 사람이 구경하러 오겠어요. 그럼 저처럼 당장 계약하고 싶어지겠군요. 견물생심이라잖아요.”

그녀는 한 번에 핵심을 꿰뚫어 봤다.

“아버지와 김 비서님께서 언제나 극찬하셨어요. 강 회장님은 사업에 남다른 감각이 있으시다더니. 명불허전이네요.”

“과찬이십니다.”

태수는 그녀가 스튜디오를 충분히 돌아볼 수 있도록 내버려 뒀다.

장서연은 32평형을 시작으로 48평형, 64평형을 보았다.

마침내 128평형 현관문 앞에 섰다.

“이곳이 장 회장님께서 계약한 128평형 집입니다.”

달칵.

불을 켜자 장서연이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토했다.

“와아…….”

그녀가 두 손을 마주 잡고 기뻐한다.

“너무 멋져요.”

그녀가 들뜬 목소리로 집안을 종종걸음으로 돌아다닌다.

“세상에. 우리 집보다 더 좋아요.”

금산의 총수 장준용이 보자마자 딸 준다며 계약한 곳이다. 삼청의 후계자 이건후 역시 같은 인테리어로 사겠다며 예약한 곳이다.

그러니 장서연도 넘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장서연은 주방을 보면서 웃었다.

“여자들이 홀딱 반할 곳이에요. 우리 집 주방보다도 럭셔리해요. 어쩜 이럴 수가 있죠?”

주부들의 꿈과 낭만을 자극해야 집이 잘 팔리는 법이 아닌가.

“여기에 와인 셀러 하나만 더 있었으면 딱 좋았겠어요.”

“와인 셀러는 따로 있습니다.”

태수가 냉장고 옆에 있는 작은 냉장고를 열었다.

“와인 전용 냉장고죠. 이번에 태양 전자에서 새로 출시할 한정판 제품입니다.”

70년대라면 자동차는 물론 냉장고도 귀한 시절이 아닌가.

장서연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지하실을 이용한 와인 셀러가 아니라 와인 전용 냉장고요? 그런 제품은 처음 들어 봐요.”

당연히 그럴 것이다.

21세기에나 유행하는 제품이니까.

태수가 슬쩍 냉장고 옆에 마련된 가전들을 소개한다.

“여기 이번에 새로 태양 전자에서 출시한 한정판 김치 냉장고와 냉동고도 있습니다.”

“그건 뭐 하는 제품이죠?”

“김장독 대신 김치를 신선하게 보관할 수 있는 냉장고와 급속 냉동이 가능한 큰 냉동고죠.”

“그러니까 한 제품은 냉장 시설만 다른 제품은 냉동 시설만 들어갔다는 뜻인가요?”

“맞습니다.”

“대단해요. 아직 가정마다 냉장고조차 보급되지 못한 상황이니 상업성은 장담할 수 없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군요.”

장서연이 태수를 돌아본다.

“태양 전자의 독보적인 기술력은 제대로 눈도장을 찍겠어요.”

태수가 일부러 한정판으로 이런 제품들을 만든 이유다.

‘21세기만큼 기술력이 받쳐 주지 못해서 아직 제대로 된 제품은 아니야. 하지만 몇 대 만들어서 태양 전자의 기술력과 아이디어를 뽐낼 제품들이지.’

이걸 협찬으로 넣었더니 극본가가 눈이 돌아가서 대본을 고쳐 왔다.

이참에 제대로 볼거리로 만들어 넣겠다나 뭐라나.

“드라마에서도 에피소드로 방영될 예정입니다.”

“사람들이 이걸 보면 무슨 생각을 할까 벌써부터 기대되는군요.”

장서연이 생긋 웃는다.

“어쩌면 아파트를 보면서 김장독 묻을 데 없어서 쓸모없다는 소리는 안 나올 것 같은데요?”

거기까지 바라지는 못한다.

아직 국민소득이 5천 달러 정도밖에 안 된다.

이런 가전을 구매하기에 경제력이 부족한 게 현실이다.

하지만 잘 사는 집은 어떨까?

“내가 이 아파트에 살게 되면 같은 제품으로 채워야겠어요. 와인 셀러에 김치 냉장고, 냉동고까지. 이건 너무 탐나요.”

장준용과 이건후는 남자라서 주방 가전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장서연은 제일 먼저 주방 가전 욕심부터 낸다.

“어떻게 이런 제품들을 구비해 놓을 생각을 했는지 그저 감탄밖에 안 나와요.”

“태양 전자는 냉장고를 생산해 내고 있습니다. 그 기술을 응용한 제품입니다. 아이디어를 조금 다르게 변형한 것뿐이죠.”

모두 냉장고 만드는 기술을 응용한 제품들이다.

장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건후 오빠가 강 회장님께 혁신에 대해 한 수 배웠다고 했어요.”

삼청 호텔에서 같이 점심 식사를 할 때 그런 대화를 한 적 있다.

“이걸 보니 건후 오빠가 어째서 당신을 그토록 높이 평가하는지 알 것 같아요.”

* * *

128평형 응접실 의자에 앉은 태수와 장서연.

태수가 커피포트로 물을 끓이며 말했다.

“단순히 집을 구경하려고 온 건 아닐 테고, 따로 용건이 또 있습니까?”

“어떻게 알았어요?”

장서연이 눈을 동그랗게 뜬다.

‘그게 아니라면 응접실 의자에 앉을 리가 없지.’

대화를 원하니 자연스레 응접실 의자에 앉은 거다.

“커피가 떨어져서 차밖에 없는데, 그래도 괜찮습니까?”

“차 좋아해요.”

태수가 티 포트까지 꺼내 차를 우린다.

태수가 건네는 찻잔을 받아 장서연이 한 모금 마셨다.

그녀는 깜짝 놀랐다.

“차를 정말 잘 우리시는군요. 수준급인데요?”

“별말씀을.”

전생에 청일 비서가 되기 위해 공들여 교육받은 솜씨다.

태수가 응접실 의자 맞은편에 앉는다.

찻잔을 들고 한 모금 마시는 태수의 모습에 장서연은 잠시 넋을 놓았다.

“차 식습니다.”

“아…….”

태수의 말에 정신을 차린 장서연이다.

그녀의 얼굴이 조금 붉어져 있었다.

장서연은 괜히 딴말을 했다.

“다도 수준이 상당히 높으시네요. 차 마시는 법을 따로 배우셨나요?”

“조금.”

“아버지와 김 비서님이 당신 칭찬을 하더라고요. 제대로 마시는 법을 안다더니 역시 그랬군요.”

“그건 차가 아닐 겁니다. 술이겠죠.”

“술?”

장서연이 늘씬하게 뻗은 다리를 꼰다.

무용으로 다져진 몸매에 긴 팔다리가 시원시원한 미인인지라, 절로 눈길이 간다.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 나랑 술 한잔하기로 했던 약속, 기억하세요?”

기억한다.

“오늘 한잔하는 거 어때요? 긴히 할 얘기가 있거든요. 아무래도 차를 두고 나눌 이야기는 아닌 것 같아서요.”

“이걸 어쩌나. 제가 오늘 회식비 쏜다고 지갑째 줘 버렸습니다.”

“이렇게 돌려 거절하시면 섭섭한데요.”

장서연이 차를 마시며 웃었다.

“이대로 손 놓고 한 회장님의 숨통을 틔워 주실 작정인가요?”

이런.

한청호가 걸린 이야기라면 안 들어 볼 수가 없겠는데.

“어떤 술을 좋아하십니까?”

“칵테일이요.”

“좋습니다. 칵테일 마시러 가죠.”

장서연이 방긋 웃는다.

“금산 호텔 바텐더가 칵테일을 잘 만든다고 소문났는데, 아시나요?”

삼청의 이건후는 맛집을 안다며 삼청 호텔 레스토랑으로 데려가더니.

금산의 장서연은 칵테일 마시자고 금산 호텔 바로 데려가려고 한다.

장서연이 괜히 흠흠 헛기침하며 차를 홀짝인다.

“…그래서 싫어요?”

“아뇨, 싫지 않습니다.”

태수가 싱긋 웃었다.

“갑시다.”

장서연이 멍하니 태수를 보았다.

찻잔을 든 상태로 꼼짝도 않는 그녀.

태수가 일어나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일어나시죠.”

“…아, 네…….”

장서연이 조심스레 태수의 손을 잡았다.

* * *

금산호텔 바의 VIP룸.

바텐더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화려한 색깔의 칵테일이 나왔다.

색색의 칵테일이 종류별로 테이블에 2열 종대로 쭉 늘어섰다.

“금산 호텔 바에서 만드는 모든 종류의 칵테일을 전부 내온 것 같군요.”

“뭘 좋아하실지 몰라서요. 마음에 드는 걸로 골라 마셔요. 오늘 술값은 제가 낼게요.”

장서연이 윙크했다.

“미처 이름표까지는 준비 못했네요. 바텐더를 부를까요?”

“상관없습니다.”

태수는 그냥 아무 칵테일 잔이나 골라 들었다.

“술 이름 모른다고 못 마시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화끈하시네요. 마음에 들어요.”

장서연도 같은 칵테일을 골라 들었다.

“한경련이라고 알아요?”

“한국 경제인 연합회가 아닙니까?”

“맞아요. 지금 아버지가 회장을 맡고 계시죠. 제가 당신에게 하고 싶은 말은… 혹시 뭔지 짐작하세요?”

그녀가 장난스럽게 웃는다.

“신입 회원 가입 권유. 맞습니까?”

그녀가 인형같이 커다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연신 깜빡인다.

“…맞아요. 어떻게 알았어요?”

“일전에 장 회장님께서 똑같은 권유를 하셨습니다.”

“아…….”

장서연이 칵테일을 마시며 말했다.

“다음 달에 당신을 한경련 신입 회원으로 추천하려고 해요. 어때요?”

“기존 회원 다섯 명의 추천을 받아야 한다던데요.”

“그거야 쉽죠. 당신에게 석유 공급 권리증을 받은 그룹만 네 개예요. 거기에 포항 철강 박 사장님까지 합세하면 벌써 다섯 명을 다 채웠군요.”

금산, 삼청, 럭키 세븐, 대한 정유, 그리고 포항 철강.

태수가 한경련에 가입한다면 손을 들어 줄 만한 사람들이다.

“재계 서열이 고작 200위 근처인 태양 그룹을 한경련 신입 회원으로 받는다면 내부에서 반발이 있을 것 같습니다만.”

가입하고 싶어도 쉽게 들어올 수 없는 극소수의 모임이 한경련이다.

한경련 회원은 보통 100대 재벌 정도는 되어야지 들어갈 수 있다.

21세기까지 가면 덩치가 훨씬 커질지 몰라도, 70년대 현재로선 소수의 재벌가만으로 이뤄진 이익 단체였다.

“한경련이 왜 만들어졌는지 아세요?”

“한경련은 재벌들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 창설했다고 하지만 실상은 대통령 각하께서 재벌들을 통제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압니다.”

“그래요. 그러니 재계 서열 100위권 기업만 골라서 받고 있죠. 적은 수의 재벌 기업을 틀어쥐는 것으로 시장을 통제하는 데 수월해지니까요.”

군대를 통제하기 위해 전두호를 필두로 한 오성회를 만들어 통제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박정환은 사업가들을 통제하기 위해 한경련을 만들어 시장을 통제하고 있다.

“다른 의미로 본다면 각하께서 통제를 생각해야 할 정도로 영향력이 막강한 단체란 소리죠. 우리는 정권을 떠받치는 기둥 중 하나거든요.”

재벌들이 움켜쥐고 있는 건 돈이다.

박정환이 아무리 독재자라고 해도 절대 무시할 수 없는 힘이다.

“막말로 각하께 청탁하기 위해 만들어진 단체예요. 그러니 다들 당신이 한경련에 들어오는 걸 두 손 들어 반길 거예요.”

재벌들이 모여 회장을 선출하고, 공금을 걷는다.

정권에 공금을 뇌물로 바치고, 재벌들의 이익을 얻어 내기 위해서.

“당신은 특별해요. 당신은 직접 각하와 대면할 수 있고, 당신의 의견을 말하기도 해요. 혼자서도 청탁이 가능한 사람이잖아요.”

박정환과 대면할 수 있다는 것부터가 권력이자 힘이다.

그리고 태수는 박정환과 의외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건 재계 서열 200위는커녕 100위, 50위 기업조차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니 당신을 누가 무시할 수 있을까요? 한경련에 가입해 주세요.”

태양 그룹의 위상이 달라졌다.

금산 30주년 기념행사에서 이미 그걸 눈으로 확인했다.

태수는 한입에 칵테일을 마셔 버리며 웃었다.

“다른 사람을 설득하는 이유로는 그걸로 충분합니다. 하지만 나를 설득하기엔 부족하군요.”

“그래서 말했잖아요. 한청호 회장님.”

장서연 역시 칵테일을 한 번에 마셨다.

“한 회장님이 차기 한경련 회장 자리를 노리고 아주 공격적으로 회원 포섭에 나서고 있어요.”

“그게 저와 무슨 상관입니까?”

“상관은 없나요? 하지만 관심은 있으실 텐데요.”

장서연이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들기며 웃었다.

“그러니까 지금 저와 술을 마시고 있는 거고요.”

“서두는 이걸로 족합니다.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장서연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버지께서 한경련의 힘을 이용해 간신히 막아 놓은 청일의 숨통이에요. 그러니 한청호 회장이 한경련을 등에 업고 기사회생하길 바라지 않아요.”

이건 무슨 뜻이지?

흥미로운 소리였다.

“그 말을 좀 더 자세히 듣고 싶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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