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한경련(1)
“태양 아파트 CF를 보면 아파트 예쁘다, 아파트 사고 싶단 소리가 절로 나오는데, 우리 청일 아파트 CF만 틀면 사람들이 밥 먹으러 간다며!”
한청호가 쥐고 있던 신문을 던졌다.
박 비서를 맞고 바닥에 떨어진 신문 기사 제목이 눈에 박힌다.
<음식 광고 최고의 스타, 강부지를 말한다!>
<식욕을 부르는 관상! 그녀는 요식 업계의 꽃!>
“강부지가 광고하는 음식 광고만 30개란다! 그런데 거기에 우리 청일 아파트 광고를 얹어?”
그래서 더 울화통이 터진다.
“화려해야 할 청일 아파트 이미지가 시골 밥상처럼 구수해지면 어떡하나!”
박 비서가 고개를 숙였다.
“회장님께서 요구하신 대로 분명히 전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이딴 광고가 나와! 내가 그 CF에 돈을 얼마나 들였는데!”
“말씀하신 대로 이 바닥 최고 몸값의 스타 여배우를 기용했습니다.”
무려 가장 핫한 스타인 강부지를 데려와서 광고를 찍었다.
“거기에 요즘 가장 강렬하다는 태양 아파트 광고 카피까지 슬쩍 넣었고요. 그 와중에 우리 청일 아파트만의 차별성도 강조했지요.”
들을수록 돌아 버릴 것 같다.
“도저히 못 들어 주겠군.”
한청호가 주먹으로 책상을 내려쳤다.
“내가 요구한 대로 전했다고? 지금 이걸 말이라고 하고 있어?”
속 터져서 못 살겠다.
“내가 청일 아파트에 어울리는 가장 화려한 이미지의 여배우 기용하라고 했지, 언제 최고 몸값 여배우를 쓰라고 했어?”
그뿐만이 아니다.
“태양 아파트 광고 카피를 따라 하라는 게 아니라, 그처럼 강렬하게 꽂힐 광고 카피를 뽑아 오라고 했고!”
언제 따라 하라고 했나.
“청일 아파트만의 차별성을 넣으라고 했으면 완전히 다른 분위기를 넣어야지. 어설프게 베끼는 것으로 차별성을 운운해? 거실에서 부엌으로 장소만 바꾸면 다야? 일 이딴 식으로 할래?”
박 비서가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억울하다는 표정은 여전하다.
“그래도 잘못했다는 소리가 안 나와? 뭘 잘했다고 눈 똑바로 뜨고 있어?”
“…최선을 다했습니다. 회장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요.”
“아직도 정신 못 차렸군.”
급기야 한청호가 던진 책이 박 비서의 가슴을 때렸다.
박 비서는 비틀대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시키는 대로만 전했어도 이따위 광고는 안 나와! 최선을 다해? 기대에 부응해? 그런데도 결과가 이거라면 무능하다는 소리밖에 더 돼?”
박 비서가 입술을 깨물었다.
한청호는 매서운 눈으로 박 비서를 노려보았다.
“은행장들은 어디까지 매수했어?”
“매수… 라뇨?”
“은행들이 청일에 독촉장을 보냈다. 내가 앞에서 흔들었으면 네가 뒤에서 옭아매야지. 그러라고 그 자리에 올려놓은 거고.”
“그걸 제가 어찌 처리합니까. 회장님도 처리하지 못한 일인데요.”
“나는 재벌 그룹 총수 체면이란 게 있어.”
아무리 한청호가 협박을 일삼는다고 해도, 은행장들이 한꺼번에 모인 자리에서 협박을 남발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그러니 네놈이 뒤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은행장들을 구워삶았어야지.”
“제가 무슨 수로…….”
“수단과 방법, 가리지 말고. 당근도 좋고, 채찍도 좋고, 할 수 있는 방법은 전부 동원했어야지.”
한청호의 눈이 점점 더 싸늘해진다.
박 비서를 보는 눈길이 얼음장 같다.
“원래 더러운 일은 비서가 도맡아서 하는 거야. 그게 아니면 비서가 왜 필요하겠어?”
생각할수록 마뜩찮다.
‘못 쓰겠군.’
저 눈치 없는 자식을 비서랍시고 데리고 다녀야 하다니.
이쯤 했으면 송 비서는 덜덜 떨면서 어떻게든 살 궁리를 해댔을 텐데.
저건 생각이 없는 건지, 겁이 없는 건지.
‘암만 찰떡같이 말해도 개떡같이 알아듣는구나. 송 비서의 빈자리가 이리 클 줄이야.’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던 송 비서가 있을 땐 참 편했더랬다.
한청호가 책상 위에 쌓인 독촉장을 힐끔 내려다본다.
“마지막 경고야. 이 독촉장부터 처리해. 이러다가 청일 건설 부도나게 생겼다.”
박 비서는 눈앞이 깜깜했다.
한청호도 못하는 일을 윽박지른다고 어찌할 수 있겠나.
은행장들이 박 비서에게 했던 말이 메아리처럼 머릿속을 맴돌았다.
-거액의 외국 은행 투자자가 위험 수준의 기업 대출 적자를 털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은행은 당분간 담보 대출 외에 기업 대출, 신용 대출은 금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청일도 빨리 원금 상환하세요. 이자도 이번 달 이후로 올릴 겁니다.
망설이는 박 비서를 보자, 한청호는 헛웃음까지 났다.
‘그러고 보니 박 비서는 매운 맛을 한 번도 보지 못했군. 그러니 저리 천지분간을 못 하지.’
송 비서를 쓸 때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그동안 너무 풀어져 있었나 보다.
그때였다.
똑똑.
“아버지, 들어갑니다.”
한일권이 웬일로 서재를 찾아왔다.
청일 아파트와 호텔 때문에 요즘 도망가느라 바쁘던 놈이었다.
“무슨 일이야?”
“아버지 목소리가 밖까지 쩌렁쩌렁해요. 뭐 하러 혈압 높이세요? 그냥 치워버리면 그만이지.”
한청호는 눈알만 돌려 박 비서를 노려보았다.
그 눈초리가 하는 말을 한일권이 어찌 모를까.
“처리할 놈들이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안으로 들여요?”
마음 같아서는 저 쓸모없는 비서 놈을 당장 치워버리고 싶다.
하지만 아직 쓸모를 다하지 못했다.
“국빈관으로 보내.”
그럼 정신이 번쩍 들겠지.
“에이, 아버지도 참 무르셔. 사람 고쳐 쓰는 거 아니에요.”
한일권이 투덜댄다.
한청호 마음이라고 다를까.
“알아. 하지만 명심해라. 화장실 휴지도 똥은 닦고 버려야 하는 거다.”
박 비서를 버릴 때 버리더라도 제대로 쓰고 버려야 한다.
“국빈관 몇 번 들락거리고도 정신 못 차리는 놈이라면…….”
한청호의 입매에 비정한 웃음이 걸렸다.
그제야 한일권이 키득대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이, 박 비서. 너 오늘 운 좋았다. 클클클.”
한일권이 박 비서의 넥타이를 콱 잡고 끌고 간다.
“야, 들어와서 이놈 데리고 가. 국빈관으로.”
어어, 할 새도 없이 서재 문이 열리고, 건장한 남자 둘이 박 비서를 좌우로 포박했다.
박 비서는 사색이 되어 한청호를 돌아봤다.
“회, 회장님!”
“시끄러우니까 입부터 틀어막고 끌고 가.”
한청호는 숨통이 막히는 것 같아서 넥타이를 거칠게 잡아당긴다.
“대체 어떤 새끼가 은행 대출을 틀어막았지? 이렇게 대담하게.”
돈 나올 구멍이 없다.
“이대로는 안 돼. 청일 호텔과 청일 아파트 지을 자금이 부족해.”
없다.
안 그래도 지금 청일은 구조 조정하고 있다.
“돈 잘 나오던 알짜 계열사인 청일 정유와 청일 중장비를 뜯겨 나간 출혈이 이리 클 줄이야.”
싸게 들여와 쓰던 석유가 없으니 비싸게 웃돈 주고 석유를 들여와 쓰고 있다.
덕분에 석유 화학 분야를 비롯해 계열사 전 방위로 경영 상태가 악화되었다.
석유 안 들어가는 공장이 없더라.
“계열사라도 하나 팔아야 할 것 같은데.”
현재 적자가 제일 많이 나는 곳은 자동차와 해운이다.
“아버지, 청일 계열사를 내놔도 안 사겠다잖아요.”
청일 정유 인수 합병 이후로 청일 계열사 인수는 번번이 무산되고 있다.
국내에 청일의 쓰레기 짓거리 소문이 파다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내가 안 되면 외국에 팔면 그만이다.
“외국 회사를 알아보라고 했는데. 저 무능한 놈은 뭘 시켜도 제대로 하는 일이 없다. 쯧.”
“진짜 파시게요?”
솔직히 아까워서 못 팔겠다.
정권에 빌붙어 어떻게 주워 모은 계열사인데!
“청일 호텔이냐, 청일 아파트냐. 마음 같아서는 아파트부터 지어 팔아서 그 돈으로 청일 호텔을 짓고 싶은데. 그렇기엔 차기범의 경고를 무시할 수 없고.”
진퇴양난이다.
“아버지, 좋은 생각이 있어요.”
한청호가 혹했다.
“그게 뭐냐?”
“아버지가 잘하는 거 있잖아요.”
“내가 잘하는 게 어디 한두 개야? 못하는 것 대는 게 더 어려워. 그러니까 속 시원하게 까 봐.”
“청일이 여기까지 어떻게 컸어요?”
그야 정권에 빌붙어서.
뇌물 먹여 로비하고 기생충처럼 달라붙어 이권을 뜯어냈다.
“아버지가 언제 사업으로 재벌 됐어요?”
솔직히 사업은 한청호가 아니라 유능한 아랫사람들이 꾸려 왔다.
“위기는 특기로 뚫어야죠. 괜히 엄한 짓을 하면 뭐해요?”
한청호의 특기라면 인재 보는 안목, 그리고 뇌물로 시작하는 정치질이다.
한청호가 눈썹을 찌푸렸다.
“차기범 이 빌어먹을 새끼가 아주 대놓고 방해를 하니…….”
차기범이 전두호를 잔뜩 경계하고 있으니 예비 사돈인 한청호까지 견제한다.
“차기범, 그 새끼가 대통령 근처에 붙여 뒀던 놈들을 전부 색출해서 제거해 버렸다.”
사우디에서부터 시작된 첩자 색출 작전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었다.
“오성회 출신까지 전부 뽑혀 나가고 있어.”
한일권이 슬쩍 물었다.
“각하께 한번 청을 올려 보면 어때요?”
“각하께서 요즘 날 만나 주질 않으신다.”
믿었던 박정환이 모른 척하고 있다.
“게다가 국내 은행도 아니고, 각하께서 어찌 외국 은행 투자자까지 이래라저래라 하실 수 있겠느냐.”
“김정림 비서실장을 통해서 연락해 봐요. 그놈은 아버지 수족이나 다름없잖아요.”
“그놈도 연락을 받지 않는다.”
한청호가 책상을 내려쳤다.
“김정림! 내 그 자식 뒤로 먹인 돈이 대체 얼만데!”
도움이 안 된다, 도움이!
한일권은 번들거리는 눈알을 하고서 키득키득 웃었다.
“아버지가 언제부터 그놈들 믿었다고 이래요? 그런 놈들은 단물만 빨고 버리는 거지.”
“그야 그렇지.”
“딴 데로 눈 돌려봐요. 돈 나올 구멍이 있으니까.”
나쁜 짓에는 꽤 머리가 잘 돌아가는 아들이 아닌가.
“그래, 어쩌면 좋을까?”
“이번에 한경련이 차기 회장을 뽑는다면서요?”
“옳거니!”
한일권은 단번에 알아들었다.
“한경련 회원들이 매달 내는 거액의 공금!”
“바로 그거죠.”
한일권이 떠올린 방법은 공금 유용과 횡령이다.
그도 그럴 것이 한경련은 재벌들의 이익을 위해 공금을 모아 정치권 로비로 사용하곤 했다.
기업이 개별로 로비하는 것보다 싸게 먹히고, 더 윗선까지 로비가 가능해졌다.
“공금을 잠깐 빌려 쓰고 도로 채워 넣으면 그만이야.”
한경련 회장 임기는 2년이다.
1년에 한 번뿐인 감사는 어떻게든 무마시킬 자신이 있다.
아니, 그전에 청일 아파트 분양이 끝내서 도로 메울 수 있다.
“한경련 공금이라면 청일 호텔과 청일 아파트를 동시에 짓고도 남지. 큭큭큭.”
“한경련 회장이라는 직함도 달고, 재벌들 모아서 세력도 만들고, 돈도 쓰고. 클클클.”
부자는 나쁜 일에 이리도 쿵짝이 잘 맞았다.
“그 공금이라는 게 어차피 정치인들에게 먹이기 위한 건데, 아버지가 또 그걸 잘하시잖아요. 적당히 빼돌려도 티도 안 나고.”
“그래, 이번 한경련 회장은 내가 해 먹어야겠다.”
살길이 보인다.
* * *
태양 아파트 모델 하우스이자 임시 스튜디오.
일일 연속극 촬영을 끝내자 고석만 CP가 크게 외쳤다.
“이따 저녁에 회식 있습니다! 집에 도망가지 말고 모이는 것으로!”
사람들이 박수를 치며 환호성을 울렸다.
“시청률도 잘 나왔고 광고도 완판됐는데, 비싼 거 먹죠.”
“쇠고기가 먹고 싶어요!”
고석만 CP가 웃으며 말했다.
“오늘은 특별히 태양 그룹에서 회식을 지원해 주셨습니다. 쇠고기는 제 소관이 아닌지라.”
“회장님 최고!”
“회장님 멋집니다! 쇠고기! 쇠고기!”
“쇠고기! 쇠고기!”
스튜디오 뒤에서 촬영을 참관하던 태수가 웃었다.
“좋습니다. 이왕 먹는 거 소갈비로 먹죠.”
“우와, 소갈비!”
사람들이 좋아서 난리가 났다.
태양 그룹 홍보실장이 주관하는 회식이었던지라 홀쭉이가 황당해한다.
“아니, 내가 주관하는 회식인데 환호는 왜 저쪽으로 보내죠?”
“돈은 회장님께서 내시잖아요. 쇠고기! 아니, 소갈비! 소갈비!”
“소갈비! 소갈비!”
사람들이 너도나도 들떠서 외쳤다.
“오늘은 회장님도 참석하시는 거죠?”
“회장님, 같이 한잔하시죠!”
태수가 지갑을 통째로 홀쭉이에게 넘긴다.
“우리 김 실장이 화끈하게 대접할 겁니다.”
두둑한 지갑을 받은 홀쭉이가 지갑 든 손을 번쩍 들었다.
“에, 보셨죠? 지갑은 제 손안에 있습니다. 소리가 작습니다, 뭘 먹겠다고요?”
“소갈비! 소갈비!”
“갑시다! 소갈비 먹으러!”
사람들의 환호성을 받으며 홀쭉이가 앞장섰다.
* * *
촬영 팀과 배우 팀이 빠져나가자 스튜디오가 조용해진다.
태수가 소등하고 있을 때였다.
똑똑.
누군가 스튜디오 문을 두드린다.
태수가 나가 보니 장서연이 문밖에 서 있었다.
“이 시간에 여기까진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