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마지막 퍼즐(4)
안정우가 흥미를 보인다.
“어찌할 생각인지 자세히 좀 들어볼까?”
“동방 일보. 여기 있습니다.”
태수가 김상민에게서 받은 서류 더미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동방 일보? 설마 신문사를 이용하여 박정환을 흔들겠다는 뜻인가?”
척하면 척이다.
“선물이냐, 거래냐?”
“동업 제안입니다.”
태수가 공들여 얻은 신문사다.
아무리 동맹이기로서니 날로 내어 줄 수야 있나.
“동업?”
“동방 일보를 나눠 가집시다.”
태양 그룹이 동방 일보를 인수했다는 소리가 나면 여러모로 껄끄러워진다.
하지만 태수는 동방 일보에서 비밀스러운 신문을 찍어 내야 한다.
“저는 투자자로, 어르신은 신문사 사장으로.”
안정우는 턱을 쓸었다.
“굳이 자네를 투자자로 두어야 할까? 내게도 그 정도 돈은 있어.”
“싫으면 마십시오. 동방 일보를 얻어 낸 건 접니다. 동방 기자들 굴리면 신문 못 찍어 낼 것도 없죠.”
“그렇겠지. 애초에 동방 일보는 잘 돌아가고 있는 신문사고, 자넨 그걸 고스란히 얻었으니까.”
안정우가 은근하게 물었다.
“그런데도 굳이 나를 찾아와 동업 제안을 건넨 이유가 뭐냐?”
태수는 이유 없이 나서지 않는 남자다.
“어르신에겐 정보 상인이 있습니다.”
태수가 펴내고자 하는 지라시는 매우 은밀한 이야기를 다룰 예정이다.
동방 일보가 양지에서 모은 자료로는 턱도 없다.
반면 정보 상인은 구한말부터 모은 정보량과 질이 상당하다.
“또한 신문을 통해 세상에 어르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습니다.”
안정우는 웃었다.
“여론으로 내 힘을 키우라는 뜻이구나.”
“어르신, 지금은 일제 강점기가 아닙니다. 시대가 변했습니다.”
태수의 말이 안정우의 가슴을 묵직하게 강타한다.
“음지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양지에서 더 빛날 수 있습니다. 어르신의 뜻에 공감한 지지자들이 어르신 곁으로 모여들 겁니다. 세력은 곧 힘입니다.”
애국지사로선 구미가 당긴다.
안정우가 묘한 눈으로 태수를 본다.
“그래, 자네가 동방 일보를 내게 가져온 이유는 잘 들었다. 그런데 더 중요한 이유는 못 들었어.”
“무엇이 궁금하십니까?”
“자네가 동방 일보를 인수하려는 이유.”
가장 큰 이유라면 역시.
‘태양 그룹의 부족한 정보력을 채우기 위해서.’
태수가 동방 일보를 인수하는 주된 이유다.
‘언제까지 어르신의 정보 상인에게만 기댈 수는 없지.’
홀쭉이가 홍보실을 맡아 정보원들을 굴리고 있다.
하지만 아직 정보 상인과 비교하면 형편없는 정도다.
‘신문 기자들은 훌륭한 정보원이지. 그것도 아주 당당하게 신분패를 깔 수 있는 고급 정보원 말이야.’
재벌 기업들이 뒤로 정보실을 운영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나.
정보가 곧 돈이고 권력이 되기 때문이다.
작은 사업이면 몰라도, 큰 사업에서는 정치를 떼어 말하기 힘들다.
상대의 정보가 협상의 우위를 결정하기도 한다.
‘내가 따로 정보원을 굴리려 한다고 곧이곧대로 말할 수는 없으니.’
동방 일보를 인수하는 또 다른 이유를 댄다.
“동방 일보를 인수하는 이유는 네 가지 정도 됩니다.”
“목적이 네 가지나 된다고?”
태수의 행동은 무겁다.
일을 벌일 때마다 여러 가지를 염두에 두고 진행한다.
“첫째, 여러 가지 의미로 동방 일보를 이대로 잃기엔 아까워서 그럽니다.”
지지하는 독자층이 두터운 신문이다.
시스템이 확고하게 자리 잡혔고, 직원들 질도 좋다.
기존의 신문 판매 유통망도 확실하고, 가지고 있는 인쇄 설비 역시 만족스럽다.
“둘째, 이번 거사를 위해 여론몰이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론몰이라…….”
“절대 권력자인 박정환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이 여론 말고 뭐가 더 있을까요?”
“그렇긴 하지.”
박정환이 유일하게 신경 쓰는 게 여론이다.
“셋째, 결혼식에 기자의 신분으로 우리 쪽 사람들을 잠입시킬 생각입니다.”
“취재를 이유로 잠입하여 일을 벌인다?”
“예, 육군 보안 사령관과 재계 순위 13위 집안의 경사입니다. 경비가 오죽 삼엄하겠습니까?”
삼엄한 경비를 뚫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대통령까지 참석할 게 분명한 결혼식이니 하객들이 모두 쟁쟁한 권력층일 것이다.
“보안을 위해 취재진 출입도 막지 않을까?”
“오히려 두 팔 벌려 환영할 한청호입니다. 한청호는 전두호의 위세를 등에 업었다는 것을 만방에 알리고 싶거든요.”
한청호는 과시욕과 권력욕이 대단하다.
한청호가 왜 전두호를 선택했겠나.
전두호와 한청호 가문의 결합을 사람들에게 똑똑히 보여 주고 싶어 할 것이다.
“그러니 결혼식이 더 성대하게, 수많은 사람에게 알려지길 바랄 겁니다. 취재진을 거부할 놈이 아닙니다.”
“아주 좋다. 그렇다면 힘들게 신분을 위장해 가며 잠입할 수고를 덜겠군.”
마지막 이유다.
“넷째, 거사를 치른 이후의 일을 도모하기 위해서입니다.”
“이후의 일?”
“우리가 이 거사를 치르는 이유가 뭡니까?”
태수는 앞날을 방해하는 장애물을 제거하기 위해서 거사를 준비했다.
하지만 안정우는 이 나라의 군부 독재 세력을 뿌리 뽑기 위해 거사를 도모한다.
“결혼식에서 박정환과 전두호를 상잔시킬 예정입니다. 이걸 국민들에게 알릴 생각입니다.”
“신문으로…….”
“예, 군부 독재가 어떻게 무너졌는지 국민들도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주 좋다. 군부 독재 타도와 민주화를 위한 국민들의 열망을 충족시켜 줘야지.”
태수가 삼청 계열사인 중세 일보에 드라마와 태양 아파트 홍보를 맡겼다.
하지만 이렇게 좋은 기회를 삼청에 넘길 필요는 없지 않겠나.
‘이번 일로 동방 일보는 대한민국 최고 신문으로 자리 잡는다.’
태수가 굳이 신문사와 협력에 그치지 않고, 아예 인수하려고 결심한 이유다.
안정우가 매우 만족한다.
“어르신, 파는 무기 중에 도청 장치도 있겠죠?”
“도청 장치? 당연히 있지.”
“그것도 지원해 주십시오. 이왕이면 도청 장치까지 설치해서 제대로 증거를 잡아야지요.”
“하하하!”
“도청으로 빼도 박도 못할 증거를 잡아서 신문과 방송으로 내보냅시다. 이참에 떼돈을 벌어들이죠.”
왜 안 그렇겠나.
대한민국 전역을 뒤흔들 엄청난 뉴스가 될 것이다.
벌써부터 신문 가판대에서 신문 동나는 광경이 생생히 그려진다.
“어떻습니까? 동방 일보, 함께 인수하시겠습니까?”
“해야지!”
안정우가 호쾌하게 대답했다.
그제야 태수는 방문을 직접 열면서 말했다.
“동방 일보 사장님, 이제 안으로 들어오시죠. 새로운 일자리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아예 동방 일보 사장까지 같이 데려왔어?”
안정우는 더욱 크게 웃었다.
‘철두철미한 녀석. 도무지 못 당하겠군.’
그래서 마음에 든다.
안정우는 태수를 보며 웃었다.
“동방 일보 내 몫의 지분은 안소정의 이름으로 하지.”
안소정에게 태양 보험과 태양 증권의 지분 30%가 있다.
그런데 이번엔 신문사 지분 50%까지 소유하게 됐다.
* * *
늦은 밤 금산 호텔로 향하는 길.
운전하던 김광록이 백미러로 태수를 돌아보았다.
“태수야, 너 오늘따라 평소랑 좀 다르다. 좀 들떠 보이는데?”
지라시 발간과 동방 일보 휴간에 대해 의논했다.
동방 일보 사무실 옮기는 것과 취재 및 신문 코너 회의까지.
뜻이 맞는 사람들끼리 의논하는 일은 즐거웠다.
“술 한잔했냐?”
“안 했습니다.”
술자리 권유야 당연히 받았다.
-새로운 일을 함께하게 된 기념으로 술 한잔하고 가.
-동방 일보 사장이랑 앞일을 계획하는데 술이 빠져서야 되나.
-자네 술 잘 마시더군. 내가 좋은 술을 많이 준비해 놨지.
안정우의 주량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겪어 봐서 안다.
술독에 빠진 것처럼 푹 절여질 때까지 술을 먹이지 않던가.
다음 날까지 정신을 못 차려서 업무를 못 볼 정도였다.
‘내가 그 양반이랑 다시는 같이 술 안 마신다.’
태수가 잽싸게 줄행랑을 한 이유였다.
‘동방 일보, 그리고 지라시.’
마침내 마지막 퍼즐인 동방 일보까지 손에 넣었다.
태수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 했다.
‘필요한 준비는 끝났다. 이제 서서히 몰아붙일 시간이군.’
남은 건 시간을 들여 물밑에서 일을 진행하는 것뿐이다.
피가 끓어올랐다.
‘빠져나가지 못하게 틀어막아야 한다.’
숨통을 조일 것이다.
* * *
금산 호텔 태수의 방.
똑똑.
“태수야, 나 들어간다.”
홀쭉이가 들어오더니 TV를 켠다.
“갑자기 TV는 왜?”
“청일 아파트 CF가 나오는 거 몰랐지?”
“청일 아파트 CF?”
“한번 봐 봐. 우리 아파트 광고랑 느낌 완전 달라.”
홀쭉이가 채널을 몇 번 돌린다.
마침 태양 아파트 CF가 나온다.
“이거 끝나면 청일 아파트 광고 나올걸? 청일 아파트 CF는 꼭 태양 아파트 CF 끝나고 나오더라?”
듣자마자 한청호의 그 고약한 의도를 알겠다.
‘한청호가 일부러 태양 아파트 CF 다음에 청일 아파트 광고를 넣으라고 압박했겠군. 태양 아파트 CF와 비교되도록. 주인공은 나중에 나오는 것이니까.’
전생에서도 한청호가 즐겨 쓰던 수법이다.
태수가 그 의도를 어찌 모르겠나.
CF를 보던 홀쭉이가 호들갑을 떤다.
“이야, 우리 태양 아파트 CF는 암만 봐도 잘 나왔어. 정윤아 진짜 예쁘지 않냐?”
“태양 아파트 홍보하라고 CF 만들었지 정윤아 홍보하라고 CF 만든 게 아닌데.”
“아, 겸사겸사지. 정윤아가 예쁘니까 덩달아 우리 CF까지 뜬 거라니까.”
젊고 예쁜 여자 광고 모델의 이미지를 태양 아파트 이미지에 덧씌우는 거다.
정윤아가 예쁘게 나올수록 태양 아파트도 그런 이미지를 얻게 된다.
아파트 거실이 화사하게 나오는 가운데, 하늘하늘한 드레스를 입은 정윤아가 돌아본다.
그녀가 예쁘게 웃으며 속삭인다.
-당신과 함께 살고 싶어요. 여기서. 어때요?
홀쭉이가 헤벌쭉 웃으며 좋아한다.
“예쁘다. 정윤아랑 살 수만 있다면 난 아파트부터 당장 산다.”
아주 바람직한 반응에 태수는 피식 웃었다.
“나온다! 태수야, 청일 아파트 CF다!”
태수도 집중해서 청일 아파트 CF를 보았다.
“광고 모델이 강부지?”
“요즘 제일 잘나가는 인기 스타잖아.”
강부지는 텔레비전 틀면 안 나오는 데가 없는 톱스타다.
“태수야, 청일이 광고비 많이 썼겠다. 흐흐흐.”
보글보글 음식 조리가 한창인 부엌이 나오는 가운데, 후덕한 30대 강부지가 앞치마에 국자까지 들고 있다가 돌아본다.
아줌마 웃음을 터뜨리며 친근하게 말한다.
-아이구, 같이 더불어 살자고요. 여기 청일 아파트에서. 어때요?
태양 아파트 광고 카피까지 고대로 베꼈는데, 어찌 이리 느낌이 다른가.
아주 구수하다.
최고급 프리미엄 아파트를 표방한 청일 아파트 광고에서 시골 청국장 냄새가 폴폴 풍긴다.
“…….”
홀쭉이가 광고를 보면서 군침을 닦았다.
“태수야, 출출한데 우리 나가서 야식으로 국밥 한 그릇 때릴까?”
“…….”
최고급 프리미엄 아파트 광고를 보고 다른 의미의 욕구가 생기면 어쩌란 말인가.
* * *
한청호의 서재.
한청호가 화가 나서 TV를 껐다.
“청일 아파트 광고, 어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