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마지막 퍼즐(3)
태수는 말했다.
“동방 일보를 인수하겠다는 제안은 다시 받기 어려울 겁니다.”
알다 뿐인가.
박정환은 동방 일보를 향해 철퇴를 휘둘렀다.
그러니 동방 일보 때문에 같이 찍힐까 봐 무서워서 광고까지 꺼리는 상황이다.
태수가 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낸다.
<태양 그룹 총수 강태수>
테이블에 명함을 올린 채 동방 일보 사장 김상민 앞까지 손가락으로 쭉 밀어 넣는다.
김상민은 제 앞까지 배달된 태수의 명함을 멍하니 보았다.
“동방 일보의 결정을 기다리죠.”
그 말을 끝으로 태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상민이 고개를 숙인 채 비장하게 물었다.
“만일 동방 일보를 인수한다면 우리 식구들은 어찌 됩니까?”
“사장님과 기자들의 안전, 동방 일보를 만드는 식구들, 그리고 동방 일보를 이끌던 정신까지 전부 보호할 수 있도록 돕겠습니다.”
“구조 조정은? 인원 감축은?”
“없을 겁니다.”
김상민은 눈을 감았다.
‘이대로라면 나와 임원진, 기자들 몇 명은 중앙 정보부에 끌려가서 취조받게 될 것이다. 신문사는 경영난으로 파산하고, 직원들은 실직하고, 내겐 빚더미만 남겠지.’
태수가 폐간 후 인수하겠다는 뜻은 동방 일보 직원과 빚을 대신 떠안겠다는 소리다.
‘침몰하는 배를 모는 선장의 심정이 이와 같겠지.’
태수는 김상민을 물끄러미 보다가 등을 돌렸다.
“어려운 결정이란 건 압니다. 정권의 압력에 굴복하지 않기 위해 여태 기를 써서 버텨 왔다는 걸 제가 왜 모르겠습니까.”
그래서 동방 일보를 염두에 두었다.
“태풍이 치고 있습니다. 뻣뻣한 나무는 부러지지만 부드러운 풀은 뽑히지 않습니다. 당신 자존심을 지키다가 소중한 식구들을 잃고 나서 후회하지 않길 바랍니다.”
동방 일보와 딸린 식구들을 지키고 싶다면 어찌해야 할까.
태수가 사장실을 나서려 할 때였다.
똑똑.
중앙 정보부 차장 김재국과 중앙 정보부 요원들이 문밖에 서 있었다.
태수와 김재국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태수의 등 뒤에서 김상민이 벌떡 일어났다.
“아, 아니, 중앙 정보부 차장께서 여기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몰라서 묻나?”
올 것이 왔구나!
김상민은 눈을 감았다.
“누, 누구를 끌고 가려고 오셨습니까?”
“사장, 부사장, 편집장, 해당 기사 작성한 기자와 사진사까지.”
김재국의 차가운 말에 김상민은 털썩 소파에 주저앉았다.
“끌고 가.”
김재국이 동방 일보 사장실 앞으로 들어오려 할 때였다.
“잠깐만. 한 가지만 물어봅시다.”
태수가 한 팔로 김재국의 앞을 막았다.
“김 차장님, 각하께선 동방 일보를 어쩌실 셈이십니까?”
“폐간.”
박정환은 기어이 동방 일보를 폐간할 생각인 모양이다.
김재국이 김상민을 차갑게 보았다.
“또한 책임자를 중앙 정보부에 끌고 가야지. 각하께서 그리 명하셨으니 벗어날 방법은 없다.”
김재국이 뒤에 선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끌고 갈 놈들 전부 이리로 잡아 와.”
“예!”
“김상민 잡아.”
“예!”
중앙 정보부 요원 둘이 김상민을 좌우로 포박했다.
태수가 서둘러 말했다.
“김 차장님, 잠시 저와 얘기 좀 하십시다.”
태수의 눈빛이 단단하다.
“5분이면 됩니다.”
“…그러지.”
김재국이 고개를 끄덕였다.
“옥상에서 담배 한 대 피울까?”
김재국이 먼저 몸을 돌려 옥상으로 향했다.
태수가 뒤따르자 김상민이 서둘러 외쳤다.
“강 회장님!”
태수가 뒤돌아보자 그가 90도로 정중하게 몸을 굽힌다.
“일이 이렇게 되어서 면목 없습니다.”
동방 일보를 위해 태수가 김재국의 앞을 막아설 줄이야.
행여 불똥이라도 튈까 두려워 광고까지 빼는 다른 기업들과 다르다.
“어쩌면 이게 마지막 인사가 될지도 모르니 도저히 말하지 않을 수가 없군요.”
이대로 중앙 정보부에 끌려가면 내일이란 없을지 모른다.
그래서 꼭 말해야겠다.
“감사합니다. 우리 동방 일보 식구들을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김상민이 죽음을 각오하고 비장하게 말한다.
태수는 웃으며 등을 돌렸다.
“그 마음, 변치 않길 바랍니다.”
태수는 김재국을 따라 동방 일보 옥상으로 향했다.
* * *
동방 일보 옥상.
김재국이 옥상 난간에서 담배를 물었다.
태수가 슬쩍 청와대 마크가 찍힌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여 주려 하자 김재국이 손사래를 쳤다.
“그런 귀한 물건을 어디 들이미나? 각하께서 아셨다간 경을 칠 일이야.”
“갖고 있는 라이터가 이것뿐이라서 말입니다.”
“라이터는 나한테도 있어. 그건 도로 넣어 두게.”
김재국이 제 품을 뒤져 라이터를 꺼낸다.
담뱃불을 붙이고, 한 모금 깊이 빨아들이는 김재국.
후- 내뱉는 숨에 한숨이 섞였다.
“자네가 왜 동방 일보 대신 나서는 거지? 내가 안 왔으면 자네까지 중앙 정보부에 잡혀 가도 할 말이 없어.”
“차장님이 오셨으니 나선 거죠.”
태수는 씩 웃었다.
“저도 누울 자리는 보고 발을 뻗습니다.”
김재국은 담배를 한 모금 빨았다.
“각하께서 철퇴를 내리시는 곳에 어슬렁대는 걸 보니 그리 누울 자리를 잘 찾는 타입은 아닌 것 같은데.”
“동방 일보 인수 때문에 왔습니다.”
“흐음.”
김재국이 묘한 표정으로 태수를 본다.
“그만둬. 동방 일보는 이미 각하의 눈 밖에 났어. 차라리 다른 신문사를 찾아보는 게 어떤가?”
태양 그룹까지 철퇴가 떨어질 거란 경고였다.
“동방 일보를 이대로 강제 폐간하게 되면 여론이 들썩일 겁니다. 각하께서 굳이 강제 탄압이 아니라 광고 탄압이란 우회적인 방법으로 압박한 이유를 생각해 보십시오.”
일리 있는 말이었다.
“각하께서 중앙 정보부를 이용해 책임자에게 경고를 주는 이유가 뭡니까?”
앞으로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뜻이다.
“동방 일보는 각하의 뜻대로 폐간될 겁니다.”
“그래야지.”
“동방 일보 폐간이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테니 각하께서도 더는 문제 삼지 않으실 겁니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러니 사람들은 봐주실 수 없겠습니까?”
“으음.”
김재국이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태수는 한마디 덧붙였다.
“차장님께서는 동방 일보의 덕을 보고 계십니다.”
“내가?”
“잘 생각해 보십시오. 영애의 발을 누가 묶었는지, 각하께서 왜 차장님을 불러 동방 일보 사건을 맡겼는지.”
동방 일보가 이번에 터뜨린 기사는 최태문 사기 사건이다.
그런데 신문 기사 제목이 과했다.
<청와대 영애가 사기에 가담했나?>
기사 내용은 최태문의 사기 사건에 초점을 맞췄는데, 그 와중에 박경혜까지 엮어 어그로를 끌었던 게 문제였다.
안 그래도 정권에 비판적인 동방 일보가 광고 탄압을 당한 결정적인 이유였다.
김재국은 웃었다.
“자네 말이 맞아. 동방 일보 덕분에 영애의 발을 묶었어. 각하께서 여론이 잠잠해질 때까지 영애의 바깥 활동을 금지하셨네.”
한청호 손에 영부인의 유산이 흘러들어 가는 것을 이렇게 틀어막았다.
“더구나 각하께 내게 최태문에 대한 보고를 다시 올리라 하셨네. 겸사겸사 내가 이 사건을 떠맡게 됐지.”
김재국이 기쁜 마음으로 동방 일보까지 직접 나온 이유였다.
박정환이 김재국을 불러 보고를 받겠다고 하며 이 일을 김재국에게 맡겼다.
“내가 어떻게 해 주길 바라나?”
“다른 건 안 바랍니다. 중앙 정보부에 끌고 가는 사람들, 몸 성히 돌려보내 주십시오.”
그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내가 이번 동방 일보 담당인 것이 다행인 줄 알아.”
김재국이 잇새로 담배를 문 채 씩 웃는다.
“걱정할 것 없어. 약속대로 동방 일보 사람들은 중앙 정보부 취조실에서 차 한 잔 내어 주고 곱게 돌려보낼 테니까.”
“감사합니다.”
“각하께 올릴 보고서도 내가 알아서 하지.”
“감사합니다.”
김재국이 태수의 어깨를 툭툭 두드린다.
“거기에 영부인의 유품이 한청호의 손에 들어가는 걸 막게 되었군.”
태수가 바라던 바였다.
“이번 일 때문에 최태문은 물론 한청호까지 꼼짝없이 몸을 사릴 수밖에 없게 되었어.”
김재국이 담뱃재를 툭툭 털었다.
“난 먼저 들어가 볼 테니까 자넨 나중에 내려오게.”
김재국의 충고다.
“보는 눈이 많아. 괜히 각하께 자네가 개입했다는 소리를 들려줄 필요는 없지.”
“감사합니다.”
김재국이 계단을 내려가며 한 손을 들어 인사한다.
“나중에 술이나 한 잔 사.”
“거하게 한턱 대접하겠습니다.”
“기대하지.”
동방 일보 사람들 목숨값으로 술 한 잔이면 싸게 먹히는 거지.
* * *
다음 날 동방 일보 사장 김상민이 찾아왔다.
“약속 지키러 왔습니다.”
김상민이 서류를 내밀었다.
동방 일보와 관련된 여러 권리증과 직원 명단 등 서류 더미가 두툼했다.
“동방 일보 식구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김상민이 90도로 허리를 굽혔다.
“중앙 정보부 차장님께 들었습니다.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죽을 때까지 잊지 않고, 반드시 보답하겠습니다.”
“인수 금액은?”
“동방 일보 식구들 목숨값을 빚졌습니다. 그러니 인수 금액까지 챙길 염치는 없어서 말입니다.”
김상민이 인사를 마치고 돌아가려고 할 때 태수가 웃으며 말했다.
“어디로 가십니까?”
김상민이 피식 웃었다.
“이제 백수가 되었으니 먹고살려면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봐야겠죠.”
“마침 잘됐군요. 새로운 일자리, 제가 소개해 드릴까 하는데요.”
“……?”
“따라오십시오.”
태수가 외투와 차 키를 챙기고 성큼성큼 걸어간다.
김상민은 얼빠진 얼굴로 태수의 뒤를 따라갔다.
* * *
태수와 김상민이 도착한 곳은 명동의 으리으리한 대저택 앞이었다.
태수가 대문을 두드리자 송진구가 문을 열어 줬다.
“어이, 오랜만이야. 장말동 어르신은 은행에 가 계신데.”
“압니다.”
지금 시간에 은행장이 은행에서 일 보는 거야 당연하지.
아까 전화해서 직접 통화했다.
“장 어르신이 아니면 왜? 설마 우리 아가씨 보러 온 거야?”
“안정우 어르신 말입니다. 집에서 보자고 하셨는데, 안에 계십니까?”
“어? 장 어르신이 아니라, 우리 큰 어르신을 만나 뵈러 온 거야?”
“네.”
그러고 보니 아까 큰 어르신이 들어오며 한 말씀 하셨다.
-들여보내.
이게 그 소리구나.
“안에 계시다. 따라와라.”
송진구가 안정우가 있는 곳으로 태수를 안내한다.
“큰 어르신, 태양 그룹 강태수 강 회장이 왔습니다.”
“들어 와라.”
드르륵.
송진구가 미닫이문을 열어 준다.
“들어가 봐.”
태수가 대청마루에 성큼 올라섰다.
그런데 방 안으로 들어가서는 뒤를 돌아본다.
“동방 일보 사장님께선 밖에서 잠시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예.”
김상민이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20평짜리 너른 방 안 비단 보료 위에 앉은 안정우가 물었다.
“그래, 나를 보자고 한 연유가 무엇인가?”
“어르신, 양지로 나올 좋은 기회가 생겼습니다.”
동방 일보를 맡을 적임자는 따로 있다.
휘하에 무수한 정보 상인을 거느리고 있는 숨은 실세.
조국과 민족을 위해 아직도 음지에서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는 애국자.
그리고 태수와 거사를 함께하기로 결심한 든든한 우방이다.
“어르신, 저와 같이 박정환을 한번 흔들어 보지 않으시겠습니까?”
태수가 솔깃한 제안을 꺼냈다.
“이참에 박정환과 한청호의 그 끈끈한 사이를 찢어 놔야겠습니다.”
안정우의 눈이 조금 커진다.
“그러는 김에 친일파 놈들 속도 뒤집어 놓고 말이죠.”
안정우가 씩 웃었다.
“그거 아주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