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마지막 퍼즐(2)
송창준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회장님께서는 굳이 이런 궂은일까지 돌아보실 필요 없습니다.”
“아닙니다. 제가 직접 만나 보겠습니다.”
“회장님, 결국엔 거절해야 하는데 괜한 원성만 살 필요 있겠습니까?”
괜히 저쪽 사정이란 사정은 다 듣고서 거절한다면 오히려 원망만 남는다.
귀한 시간 쓰고, 자존심까지 굽혔는데 돌아오는 건 거절이라면 더 화가 나는 법이니까.
“제 선에서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그러니 회장님께선 모른 척하십시오.”
거절은 칼같이 깔끔하고 단호한 게 낫다.
그리고 거절한 사람에게는 서운한 마음과 원망이 남는 법이다.
“원망과 미움은 제가 받을 테니 회장님께선 멀찍이 떨어져 있으세요. 그게 좋습니다.”
태수를 향한 송창준의 충심이었다.
‘마음은 고맙지만 난 저들을 기다리고 있던 터라.’
태수는 기자들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오랜만입니다.”
태수가 인사하자 동방 일보 기자들이 반색했다.
“회장님!”
“회장님께선 저희를 만나 주실 거라 믿었습니다!”
“여긴 시끄러우니 조용한 곳으로 갑시다.”
태수가 컨테이너 사무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동방 일보 기자들은 서둘러 태수 뒤를 따랐다.
* * *
컨테이너 사무실.
태수가 자리에 앉자 두 명의 기자도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회장님, 정말 감사합니다!”
벌써 아홉 개 기업에서 문전박대당한 기자들은 좋아서 어쩔 줄 모른다.
송창준이 차를 한 잔씩 내주었다.
태수가 차를 한 모금 마시면서 말했다.
“방금 동방 일보를 본 참입니다. 백지 광고가 나갔더군요.”
두 명의 기자가 침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위에서 압력이 들어와서 기업들이 광고를 전부 빼 버렸습니다.”
“그래서 염치없이 여기까지 찾아온 겁니다.”
“도와주십시오, 강 회장님. 이대로라면 우리 동방 일보는 폐간하게 생겼습니다.”
고작 신문에 광고 빼는 것으로 폐간할까 싶겠지만 아니다.
신문사에는 엄청난 위협이다.
광고 수입으로 벌어 먹고사는 신문사로선 치명타를 당한 거다.
‘괜히 재벌들이 광고 뺀다고 으름장을 놓는 게 아니지.’
신문을 만들고 찍어 내고 팔려고 내놓는 모든 일에 전부 돈이 든다.
기자들 월급이며 인쇄비며 사무실 운영비까지 돈 안 드는 곳이 없다.
신문 보는 사람들이 지불하는 구독료 이상으로 돈이 필요하다.
그래서 신문 지면에 기업 광고를 싣고, 광고료로 부족한 돈을 충당한다.
“회장님, 우리 동방 일보 광고는 일주일 예약제라는 거 아시죠?”
“광고 동판을 만들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예약을 받지요.”
당시 신문 광고는 예약제였다.
미리 일주일 치 분량의 광고를 예약받고, 그걸 찍기 위한 동판을 미리 만든다.
그 동판으로 강판하는 과정을 거쳐 광고를 찍었다.
“광고주들이 예약했던 일주일 치 광고를 줄줄이 해약해 버렸습니다.”
“다시 광고 면을 채우려고 해도 동판을 제작하는 데 시간이 걸립니다.”
“동방 일보는 일주일 동안 백지 광고 신문을 내야 합니다.”
사상 초유의 사태였다.
광고란이 백지 상태로 나가는 신문이라니.
국민들도 모두 신문을 받아 들고 기겁했을 터다.
“회장님, 우리 동방 일보에 다시 태양 아파트 광고를 실어 주세요.”
처음으로 대면한 기업 광고주인데 이대로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광고를 따 와야 동방 일보가 산다.
태수는 말없이 차를 마셨다.
‘동방 일보는 얼마간 백지로 광고 면을 내보내지. 하지만 독자들이 사비를 털어 빈 광고 면을 작은 개인 광고로 채워 넣는다.’
신문 한 면을 다섯 단으로 쪼개는데, 아랫단의 5단짜리 광고를 쪼개고 쪼갠다.
한 줄이 간신히 들어갈 만한 크기로 만들어 개인 광고를 실었다.
‘전생에서 자비 광고 1호 독자는 바로 김대준 국회 의원이었지.’
전생에 대통령까지 지냈던 양반이 앞장서서 동방 일보 편을 들었다.
그걸 보고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주머니를 털었다.
‘십시일반(十匙一飯)이었지. 시민들 덕에 동방 일보는 간신히 폐간을 면할 수 있었어.’
당시 고등학생부터 노인까지 많은 시민이 직접 동방 일보에 광고를 접수했다.
다수 공모자가 투자하여 모은 펀드와 비슷한 개념이 등장한 것이다.
동방 일보가 이대로 폐간되지 않기를 바라는 국민의 청원이었다.
‘동방 일보는 1년 가까이 시민들의 힘으로 버텨 냈다. 여론을 등에 업고 정권의 철퇴를 간신히 비껴간 셈이었지.’
박정환이 유일하게 신경 쓰는 게 바로 여론이다.
시민들의 성원에 힘입어 75년도 상반기 말엔 기업 광고까지 다시 들어오기 시작한다.
광고 예약이 원래 궤도에 올라 폐간 위기를 간신히 넘긴다.
‘하지만 그때부터 내부 분열이 시작됐어. 결국 두 신문사로 쪼개지고 말아. 그렇게 신문은 점점 변질되지.’
한마음으로 똘똘 뭉쳐 민주화와 군부 독재 반대에 목소리 높였던 동방 일보.
결국 경영진과 기자들이 서로 반목해서 해직 기자들이 새로운 신문을 창설한다.
그게 21세기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한민족 신문이다.
‘그런데 어쩌지. 이번 생에서는 동방 일보, 이대로 되살아나선 안 되겠는데.’
태수는 동방 일보가 여기서 회생하길 원치 않는다.
대신 다른 방법으로 동방 일보를 품을 생각이었다.
‘자비 광고주 1호인 김대준 국회 의원이 나서기 전에 일을 처리한다.’
태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먼저 신문사로 돌아가 계십시오. 곧 뒤따라가겠습니다.”
“네?”
이게 대체 무슨 소리지?
두 기자는 어리둥절했다.
“제가 오후에 동방 일보로 직접 찾아가겠습니다.”
“네?”
“동방 일보 사장님께 좋은 제안을 건넬 생각입니다. 그리 전해 주시길 바랍니다.”
“네에?”
기자들이 얼빠진 소리를 낸다.
정신을 차린 기자들이 벌떡 일어났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그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서둘러 뛰어간다.
어서 동방 일보에 가서 사장님께 이 중요한 이야기를 전달해야 한다.
기자들이 모두 가 버리자 잠시 태수를 멍하니 보던 송창준.
갑자기 엄지를 척 들었다.
“이야, 역시 회장님이십니다. 원망도 사지 않고, 동정도 보이지 않고, 자존심도 꺾지 않고, 광고도 주지 않고.”
뭐지?
이건 욕인가, 칭찬인가.
“그냥 말 몇 마디 묻고, 사정 얘기나 들어 줬는데 일이 풀리다니.”
송창준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굳이 제 선에서 자르지 않아도 된다고 호언장담하실 만하네요. 이렇게 깔끔하게 기자들을 쫓아내실 줄이야.”
송창준이 공손하게 허리를 굽혔다.
“한 수 배웠습니다. 진짜 존경스럽습니다.”
“…….”
왜 송창준은 이런 엄한 데서 존경심이 우러나는 걸까.
태수는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오후 스케줄, 전부 취소해 주십시오.”
“네에?”
송창준도 마찬가지로 얼빠진 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태수는 벌써 외투와 차 키를 챙기고 있었다.
‘동방 일보에 가기 전에 김대준 국회 의원부터 만나야겠어.’
태수가 동방 일보 사장을 오후에 만나겠다는 이유였다.
* * *
동방 일보 사옥.
사장실에선 임원들이 모여 소리를 높였다.
“사장님, 오늘까지 벌써 127개 기업을 돌았는데 전부 현관에서부터 제지당했습니다.”
“우리 동방 일보와 같이 엮이면 곤란하다고 손사래를 치더군요.”
“예비 자금도 열흘이면 동납니다. 도저히 못 버팁니다.”
“이제 어떡하죠?”
동방 일보 사장 김상민.
그가 책상에 앉아 두 손으로 머리통을 감싸 쥐었다.
“그만. 알았으니 이만 나가 보세요.”
어쩔 수 없이 임원들이 사장실 밖으로 나갔다.
동방 일보 사장 김상민은 신음을 흘렸다.
“박정환이 광고 탄압까지 할 줄은 몰랐군. 아니, 중앙 정보부로 나와 기자들을 끌고 가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고 여겨야 하나?”
헛웃음이 나왔다.
“앞이 보이지 않는구나.”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은행들도 대출을 해 주지 않고, 기업들은 광고를 끊고, 신문 구독료로는 턱도 없으니.”
이대로라면 폐간이다.
“버텨 낼 재간이 없어. 박정환이가 독한 수를 뒀구나.”
그때였다.
똑똑.
“사장님, 태양 그룹 총수님 오셨습니다.”
“오!”
기다리던 사람이다.
드디어 태양 그룹 총수 강태수가 왔다.
오전에 태양 그룹에 광고 받으러 갔던 기자 두 명이 헐레벌떡 돌아왔다.
-오후에 태양 그룹 총수께서 동방 일보로 오신답니다!
-사장님께 좋은 제안을 드리겠다고 말을 전하라던데. 대체 무슨 제안을 할까요?
동방 일보 사장 김상민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너무 긴장되어 손까지 작게 떨렸다.
“드, 들어오시라고 해요.”
사장실 문이 열렸다.
두 명의 기자가 문을 열었다.
사장인 김상민의 눈치가 아니라, 태양 그룹 회장 태수의 눈치를 본다.
“회장님, 안으로 들어가시죠.”
그들이 문을 열어 주며 비켜선다.
태수가 열린 문으로 뚜벅뚜벅 걸어온다.
김상민이 벌떡 일어나 태수를 맞았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처음 뵙겠습니다. 동방 일보 사장을 맡고 있는 김상민입니다.”
“태양 그룹의 강태수입니다.”
“이리로 앉으시지요.”
김상민이 소파를 권한다.
태수가 소파에 앉자 김상민도 소파에 앉는다.
“태양 그룹 회장님께서 동방 일보엔 어쩐 일이십니까? 듣자 하니 좋은 제안을 하러 오셨다지요?”
김상민은 태수가 어떻게 난관을 극복하며 재벌 총수까지 올랐는지 잘 안다.
그 일화를 취재한 동방 일보가 아닌가.
그렇기에 김상민은 기대감이 부풀었다.
눈앞의 이 남자라면 기가 막힌 방법을 제시해 주지 않을까?
“동방 일보를 인수하려고 합니다.”
“인수라니…….”
부푼 기대가 풍선 바람 빠지듯이 빠져나간다.
김상민이 구겨지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회장님께서 우리 동방 일보 사정을 들으시고 후원을 해 주러 오신 줄 알았는데요. 아니면 이 난관을 극복할 묘수를 알려 주실까 기대했습니다.”
“저라고 대통령 각하의 철퇴를 비켜 갈 수 있겠습니까?”
맞는 말이다.
김상민이 지금 상황을 왜 모르겠는가.
“폐간이냐, 인수합병이냐. 다른 방법이 있습니까?”
없다.
“전 동방 일보가 폐간해도 상관없습니다. 그때는 더 헐값에 인수할 수 있겠군요.”
결국 인수하겠다는 소리다.
“동방 일보의 간판이 바뀌면 대통령 각하 역시 철퇴를 그만 거두어 갈 겁니다.”
김상민은 파르르 떨리는 눈을 감았다.
‘동방 일보는 기업들 광고가 끊겼고, 은행 대출도 끊겼다.’
동방 일보의 상황은 최악이다.
‘그간 쌓인 부채도 많고, 딸린 식구들도 많은데. 이대로라면 한 달을 못 버티고 폐간할 거야.’
동방 일보의 마지막이 눈에 선하다.
‘폐간하여 이대로 뿔뿔이 흩어지느냐, 아니면 인수되어 태양 그룹 밑에서 동방 일보 식구들이 새로 자리를 잡느냐. 선택지는 이것뿐이란 말인가.’
동방 일보 사장 김상민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광고가 없이 버틸 수 있는 동방 일보의 재정은 빈약하기 그지없다.
동방 일보를 살릴 방법이 도무지 보이지 않으니 김상민은 눈앞이 깜깜했다.
태수는 조용히 김상민을 기다려 주었다.
‘박정환이 작심하고 철퇴를 휘둘렀으니 누구도 벗어날 수 없다. 예외가 있다면 전생에서처럼 여론을 등에 업고 버티는 것뿐이지.’
절대 권력자 박정환이 유일하게 눈치를 보는 게 여론이다.
전생이라면 시민들의 자비 광고로 표현된 여론 덕분에 겨우 비껴간 것이다.
‘하지만 이번 생에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미 김대준 국회 의원을 만나고 온 참이다.
‘전생과 달리 김대준 국회 의원은 동방 일보에 자비 광고 1호를 내지 않을 테니까.’
동방 일보가 어떻게 기사회생하는지 뻔히 아는데, 태수가 그걸 손 놓고 보고 있겠나.
‘이에 대한 얘기는 이미 끝났어. 미안하지만 동방 일보는 박정환을 흔들기 위해 따로 해 줘야 할 일이 있다.’
태수는 여론으로 박정환을 공략하려고 한다.
‘동방 일보가 음지에서 발행해야 하는 신문이 있다. 이름은 지라시.’
지라시.
선전을 위해 만든 종이쪽지 낱장 광고, 전단지라는 뜻의 일본어다.
증권가에서 떠도는 소문에 온 국민이 귀를 기울이듯, 지라시란 이름을 달고 나올 신문은 아주 은밀한 방법으로 박정환을 자극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