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마지막 퍼즐(1)
장준용과 이건후가 번갈아 가며 말한다.
“우리에게 경고하더군. 군으로 돈 보내지 말라고.”
“국방비 예산은 넉넉하다며 따로 군자금 들어갈 일이 뭐가 있냐고 하시더군요.”
“돈 보내다 걸리면 반역으로 간주하겠다고 엄포를 놓는데, 서슬이 퍼렇더군.”
“재벌들에게 일일이 확답받으시곤 청와대로 향하셨습니다.”
태수가 차기범에게 부탁했던 두 번째 청이다.
-전두호를 위아래로 압박해 주십시오.
당시 차기범은 흥미로운 얼굴로 물었다.
-어떻게 해 줄까?
-먼저 전두호에게 군자금이 흘러가지 못하도록 기업을 틀어막으십시오.
곳간에서 인심 나는 법이다.
살림이 쪼들리면 조직은 흔들리기 마련이다.
오성회 같은 비밀 사조직이라면 더욱더.
-내가 바라던 바다. 자네 부탁이 아니라도 전두호를 찍어 내기로 이미 작심한 일이야.
전두호의 기반을 흔들었다면 이번에는 위에서도 찍어 낼 차례다.
-또한 육군 참모 총장과 함께 전두호를 차기 육군 참모 총장으로 추대하겠다는 뜻을 은근히 비춰 주십시오.
이번엔 차기범이 안색을 굳혔다.
왜 안 그렇겠나.
찍어 내기로 작심한 전두호를 차기 육군 참모 총장으로 추대해야 한다니.
겉으로 보면 승진이니 지금 이 반응은 당연하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안 그래도 눈엣가시 같은 놈을 내 손으로 출세시키라고?
-이이제이(夷以制夷)라 했습니다. 질투에 눈이 먼 다른 사령관들이 눈에 불을 켜고 전두호를 견제하도록 만드셔야죠.
차기범은 바로 알아들었다.
-그렇군. 아래 기수인 전두호가 육군 참모 총장이 되는 건 윗 기수 선배들이 막아야 할 테니까.
-전두호가 육군 참모 총장이 된다면 관례대로 윗 기수 선배들은 군복을 벗어야죠.
한 자리밖에 없는 육군 최고 지휘관인 육군 참모 총장 자리다.
그 자리에 선배들을 제치고 전두호가 앉으면 다들 강제 은퇴인데?
그 꼴을 두 손 놓고 두고 볼 인간이 어디 있겠나.
-전두호를 견제하기 위해 윗 기수 사령관들이 똘똘 뭉쳐 오성회를 쑤셔 댈 겁니다.
-그렇겠지.
-사령관들이 전두호를 핍박하는 방법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러니 자기 부대에서 오성회 회원들을 색출해 족칠 겁니다.
-아주 좋아.
차기범이 아주 만족스럽게 웃는다.
태수는 한마디 더 덧붙인다.
-이에 관해 각하께도 은근하게 말씀 올리면 될 겁니다.
박정환과 관련되자 차기범의 표정이 신중해진다.
태수는 말했다.
-전두호가 오성회를 몰래 움직이고 있다. 기업을 돌며 엄청난 군자금 상납을 요구했다. 계엄 이후를 염두에 두고 그에 관해 연구한 기록을 입수했다.
이 말을 들으면 박정환은 어떤 생각을 할까?
전두호를 군에 심어 오성회로 견제하던 군 세력이다. 그런데 오히려 오성회가 나쁜 뜻을 품었다는 의심이 들면?
이 말을 듣고 차기범이 얼마나 크게, 오랫동안 웃었는지 모른다.
무뚝뚝하고 무표정한 차기범으로서는 굉장히 드문 일이다.
‘차기범이 기업에서 흘러드는 군자금을 끊는 것과 육군 장성들이 오성회를 견제하는 것, 박정환은 눈감아 줄 것이다. 오성회를 조금 눌러놓을 필요가 있을 테니까.’
한참을 웃던 차기범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즉 자네를 만나 의논을 해야 했군. 이리 내 속을 시원하게 뚫어 주다니.
차기범이 호언장담했다.
-전두호의 위아래를 틀어막는 일은 내게 맡기게. 내 그놈을 납작하게 눌러 줘야겠어.
차기범이 그렇게 돌아갔다.
그리고 그 결과를 지금 이렇게 확인하고 있다.
한경련의 재벌 회원이 태수를 찾아와 차기범의 경고를 전하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금산에서는 어쩌실 생각입니까?”
“어떡하긴 뭘 어떡해? 차기범이 반역까지 거론한 일이야. 미쳤다고 돈을 내줘?”
“삼청도 마찬가집니까?”
“당연한 것 아닙니까? 대통령 측근인 차 실장 눈 밖에 나느니 차라리 군에 틀어박힌 보안 사령관 눈 밖에 나는 게 낫죠.”
힘에 따라 돈이 흘러가는 법이다.
장준용이 말했다.
“우리가 돈을 안 보낸다고 해도 전두호가 당장 뭘 어찌할 수 있겠나?”
전두호로서는 이를 박박 가는 수밖에.
“그러니 자네에게도 군으로 군자금 보내지 말라고 말해 주려고 왔지. 괜히 대통령 경호실장 눈 밖에 나지 말고. 군대 쪽은 쳐다보지도 말아야 돼.”
이로써 전두호의 군자금을 끊어 놨다.
‘전두호, 오성회에 돈 뿌리면서 충성을 사고 있던데, 군자금이 끊겼으니 이젠 어떡할래?’
돈 냄새 맡고 똥파리가 꼬이지, 돈 없는 곳엔 거지도 얼씬대지 않는다.
‘이제 돈 나올 데라곤 한청호밖에 없을 텐데, 한청호 돈줄은 내가 말려 놓을 것이다. 어디 한번 둘이 잘해 봐라.’
태수는 웃었다.
* * *
청일 그룹의 본사 회장실.
한청호는 신문을 와락 구겼다.
“드라마까지 이용해서 태양 아파트 이미지를 바꿔 보려고? 그게 어디 네 맘처럼 쉬울 줄 알아?”
한청호는 구긴 신문을 내던졌다.
벽에 맞고 떨어진 신문을 박 비서가 허리를 굽혀 주웠다.
중세 일보부터 시작하던 드라마 이야기를 요즘 모든 신문에 다루고 있다.
박 비서는 연예면 1면으로 나온 기사 제목들을 읽었다.
<일일 연속극 최강자가 된 ‘불꽃처럼 타오르다’ 상승세는 어디까지?>
<동시간대 시청률 1위! 장안의 화제! 유행을 선도하는 하반기 최고의 히트작!>
<모든 기록을 갈아 치우고 있는 드라마! 세트장이 더욱 화제!>
연일 시청률을 갱신하고 있다.
TBS 동인 방송국은 안 그래도 드라마와 예능으로 유명한 방송국이다.
그런데 이번에 ‘불꽃처럼 타오르다’로 대박이 났다.
“이번 드라마 성공으로 태양 그룹만 덕을 봤어. 아주 노골적으로 제품 홍보를 한다지?”
“드라마 방영 이후 태양 전자 매출이 230%나 올랐다고 합니다.”
“뭐? 20%나 30%도 아니고 230%? 그게 말이 돼?”
한청호가 입을 떡 벌렸다.
아무리 드라마 홍보가 대단하다지만 어떻게 고작 방영 한 달 만에 매출이 230%가 오를 수 있나.
“태양 그룹 제품은 기업 인지도가 워낙 낮았잖습니까.”
태양 그룹은 신생 재벌 그룹이다.
태수가 오리온 전자를 인수해 태양 전자로 탈바꿈했다.
고작 중소기업이었던 오리온 전자의 인지도가 얼마나 되겠나.
기술과 제품은 수준 높지만 대기업 제품과 같은 브랜드 효과는 보지 못했었다.
“이번에 회장님이 쓰는 제품들이라는 이미지가 덧씌워져 불티나게 팔린다고 합니다. 디자인도 워낙 세련되게 나와서.”
이번에 태양 전자는 사람들의 눈길을 톡톡히 사로잡았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태양 화학에서 나온 화장품은 없어서 못 판다고 합니다.”
“화장품은 또 왜?”
“여배우들이 워낙 예쁘게 나와서…….”
“뭐야?”
드라마에서 노골적으로 화장대를 보여 주곤 한다.
태양 화학에서 협찬한 화장품은 로고까지 선명하게 보인다.
그걸로 여자 배우들이 바르고 나면 좋은 피부가 더 좋아 보이는 거다.
반사판의 효과였지만 여자들 구매욕에 불을 지폈다.
“태양 화장품은 아예 품절 상태라서 공장을 하나 더 지어야 할 정도라고 합니다.”
듣고 있자니 신경질 난다.
“일일 연속극이 떴는데, 왜 태양 그룹이 수혜를 받아?”
“드라마 투자자이자 협찬사인데, 당연한 거 아닙니까? 더구나 이번 태양 아파트 광고가…….”
“광고는 또 왜?”
열 받아서 듣고 싶지 않은데, 안 들을 수도 없다.
“우리도 신문 광고 냈잖아!”
“태양 아파트는 CF를 제작해서 내보냈잖습니까. 이 광고가 엄청 떠 버려서요.”
“젠장!”
“안 뜰 수가 없었습니다. 요즘 톱스타로 떠버린 정윤아가 광고 전면에 등장해요. 드라마랑 똑같이. 거기에 광고 카피가…….”
“됐어! 듣기 싫으니까 그만해!”
한청호가 주먹으로 책상을 내려쳤다.
“우리 청일 아파트도 CF 찍어! 그러면 돼!”
“저기, 광고 예산이 올해 배정된 금액에서 진즉 초과된 상태인데요.”
“그래도 찍어! 우리 청일 아파트가 그놈 들러리 꼴이 될 수는 없어!”
평소라면 ‘알겠습니다.’ 한마디를 하고 물러갈 박 비서다.
그런데 박 비서가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왜 그러고 서 있어?”
“여기 이것 좀 보십시오.”
“그게 뭐야?”
“은행에서 보낸 독촉장입니다.”
“뭐?”
박 비서가 내놓는 독촉장.
한두 장이 아니다. 너무 많다.
“어느 은행이 감히 청일에 독촉장을 보내?”
“장수 은행, 한세 은행, 대홍 은행, 세광 은행, 토건 은행, 정일 은행, 미주 은행, 도경 은행, 광명 은행, 태상 은행과 목마 은행까지, 총 11개 은행에서 독촉장이 왔습니다.”
11개 은행이나?
그것도 짜고 친 것처럼 일제히?
한청호의 안색이 순식간에 심각해졌다.
짜증만 내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는다.
“은행장들을 만나 봐야겠군.”
이 새끼들이 갑자기 왜 지랄이야.
누군가 작정해서 일을 벌이고 있음이 분명하다.
“어떤 새끼가 날 엿 먹이려는 건지 내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해야겠다.”
한청호는 급히 외투를 걸쳐 입었다.
“은행장들에게 연락 돌려. 성북동 대운각, 30분 후.”
“30분은 너무 촉박한데요.”
“그렇게 전해. 늦는 놈은 내가 눈여겨볼 것이란 소리도 빼놓지 말고. 알았어?”
한청호가 회장실 문을 부서져라 쾅 닫고 나간다.
* * *
태양 아파트 건설 현장.
태수와 박철완이 현장을 둘러보고 있는데 송창준이 달려왔다.
“회장님, 동방 일보 기자들이 찾아왔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동방 일보 기자들이 무슨 일로 왔습니까?”
“광고를 부탁하러 왔다고 합니다. 대신 지난번처럼 태양 아파트에 호의적으로 신문 기사를 보내겠다고 하는군요.”
“그럽시다.”
태양 아파트 홍보는 아무리 해도 부족하다.
그런데 송창준이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회장님, 이번엔 모른 척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송창준은 이런 일을 말리는 사람이 아니다.
태수가 발걸음을 옮기다 말고 송창준을 돌아봤다.
그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동방 일보에 광고를 싣지 말라고 위에서 압력이 내려왔습니다.”
송창준은 동방 일보 신문을 내밀었다.
“이걸 보십시오.”
“광고 면이 백지로 나갔군요.”
“위에서 압력이 들어오는데 어쩔 수 없죠. 광고주들이 너도나도 광고를 해지하고, 등을 돌렸습니다.”
올 것이 왔다.
언제쯤 터질까 기다리고 있었다.
‘동방 일보 광고 탄압 사건이군.’
전생에도 똑같은 일이 있었다.
동방 일보 광고 탄압 사건.
이른바 동방 일보 백지 광고 사태라고도 불리는 일로, 1974년에 시작된 초유의 언론 탄압 사건이다.
동방 일보와 계약된 광고들이 일제히 해약되어 광고 면이 백지로 나갔다.
신문 2면에 걸쳐 광고하던 태양 아파트 광고도 보이지 않는다.
“우리 태양 아파트 광고까지 전부 뺐습니까?”
“예.”
“왜 보고하지 않았습니까?”
“어차피 동방 일보에 싣던 우리 태양 아파트는 광고 기간이 끝났으니까요. 보고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여 생략했습니다. 죄송합니다.”
확실히 태양 아파트 광고 기간은 끝났다.
이번엔 2면까지 광고를 낼 생각은 없었기에 광고 규모를 조금 줄일 생각이긴 했다.
하지만 아예 빼 버렸는지는 몰랐다.
“동방 일보 기자들이 그래서 절 찾아왔군요.”
“예. 그러니 안 만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저쪽에서 안절부절못하는 기자 둘이 보인다.
전에 만났던 기자들이었다.
“만나 보겠습니다.”
“회장님.”
송창준이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대통령 각하께서 칼을 뽑으신 일입니다. 괜한 동정으로 태양 그룹까지 밉보일 수 있습니다.”
태수가 그걸 왜 모르겠나.
“압니다. 광고를 싣지 말라고 노골적으로 명을 내린 이상, 그걸 무시했다면 이쪽까지 불똥이 튈 것을 제가 왜 모르겠습니까.”
“그럼 왜…….”
태수는 지금 주먹을 쥐었다 펴고 있다.
흥분으로 인해 심장 박동이 빨랐다.
‘덫을 놓을 마지막 퍼즐까지 왔구나.’
태수가 전두호를 잡을 덫을 놓기 위해 염두에 두었던 마지막 퍼즐이다.
차기범, 김재국, 육군 장성들, 은행장, 동인 방송국, 그리고 동방 일보까지.
‘동방 일보라면 이렇게 나올 줄 알았지.’
이미 예상했던 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