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산 찍고 건설 재벌-143화 (143/230)

143화 차기범의 보답(3)

태양 아파트 건설 현장 공터엔 방송국 사람들로 북적였다.

스튜디오에서 한창 연속극 촬영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고석만 CP가 대본집을 두들기며 크게 외쳤다.

“자자, 조용! 촬영 시작합시다! 스태프들 전부 뒤로 빠지고, 배우들 앞으로.”

촬영 감독, 음향 감독, 조명 감독부터 자리를 잡는다.

분장을 마친 배우들도 속속 들어왔다.

촬영이 시작을 선언하자, 스태프들은 입을 다물고 집중한다.

“촬영 1팀은 야외 촬영하러 나가고, 촬영 2팀은 제3스튜디오, 촬영 3팀은 제1스튜디오로.”

스태프들이 분산되어 각자 맡은 신을 촬영하기 위해 간다.

그 모습을 태수와 송창준이 멀리서 보고 있었다.

송창준이 싱글벙글 웃는다.

“아까 CF 촬영하는 거 봤어요? 여자 주인공 진짜 너무 예쁘지 않아요?”

정윤아가 방금 CF촬영을 마쳤다.

지금 배우 대기실로 마련한 컨테이너 안에서 옷을 갈아입고 분장을 고치고 나올 예정이다.

“우리 태양 아파트 광고 카피랑 정윤아 이미지가 너무 잘 맞아요.”

-당신과 함께 살고 싶어요. 여기서. 어때요?

“정윤아, 너무 아련하지 않아요? 진짜 첫사랑이 떠오르더라고요.”

그때 배우 대기실에서 옷과 화장을 바꾸고 나온 정윤아.

태수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가 활짝 웃으며 손을 높이 들고 크게 흔들었다.

“와, 진짜 너무 예쁘다. 봤어요? 절 보고 손 흔들어줬잖아요.”

호들갑을 떠는 송창준도 손을 높이 들고 마주 흔들어준다.

정윤아가 깜짝 놀라 재빨리 손을 내린다.

그리곤 뒤도 안 돌아보고 촬영장으로 돌아간다.

“요즘 제가 정윤아 보는 맛에 삽니다. 현장 오는 게 이리 즐거울 수가 없어요. 인부들도 다들 정윤아 예쁘다고 난리가 아니에요.”

태수는 무심하게 말했다.

“송 실장님에서 정윤아로 갈아타셨습니까?”

“윽! 그, 그게 아니라······.”

“송 비서님이 저기 보고 계시는 것 같은데요.”

“헉!”

진짜로 송 비서가 멀리서 오고 있었다.

태수에게 은행장을 만난 일에 대한 보고를 올리기 위해서.

송창준은 서둘러 변명했다.

“첫사랑은 원래 이뤄지지 않는 겁니다. 지나간 첫사랑 떠올리는 게 죄는 아니잖아요?”

“정윤아 얼굴을 보고 떠오르는 첫사랑이라니. 어떤 여잔지 궁금하군요.”

“···정윤아처럼 생겼으면 제가 지금까지 첫사랑에 목을 맸겠죠. 참, 송 실장님과 송 비서님께는 비밀입니다. 흠흠.”

송 비서가 다가온다.

아무리 봐도 저 뒤뚱뒤뚱한 걸음걸이는 적응이 안 된다.

중절모와 선글라스, 거기에 지팡이까지 하나 들고 있는 송 비서.

“해외 은행 투자 및 인수로 은행장들에게 당근을 듬뿍 먹였습니다.”

“좋습니다.”

“투자 대가로 주식을 제법 많이 얻어냈습니다. 시장에서 조금만 더 거둬들이면 대주주가 될 겁니다.”

“좋습니다. 자금이 부족하지는 않겠습니까?”

“충분합니다.”

송 비서가 뿌듯한 얼굴로 말한다.

“회장님이 어마어마한 돈을 보내주셨잖아요.”

박정환의 비밀 금고와 사우디 재경부 장관의 지하 금고를 턴 돈이다.

“회장님께서 콕 짚어 인수하도록 한 은행들이 튼실합니다. 구조조정하고, 시스템을 조금 손 본 것만으로도 흑자로 돌아섰습니다.”

일부러 그런 곳만 골랐다.

제일 돈 냄새가 황홀하게 나는 곳을 고르면 된다.

돈 냄새 덕분에 태수는 전생에서도 인수 합병 분야에서는 자타 공인 1인자였다.

“한수가 투자를 제법 잘합니다. 오일 쇼크 때 바닥을 치던 회사 주식을 골라서 사들이더니, 벌써 몇 배나 가격이 올랐습니다.”

흐뭇하다.

“위기는 기회라더니, 이번 오일 쇼크 덕분에 돈이 돈을 벌어들여서 은행 금고가 아주 두둑해졌습니다.”

“좋습니다.”

“그러니 자금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더구나 사우디에서도 목돈이 들어왔잖습니까.”

주베일 산업항 공사로 10억 달러 중에서 절반이 들어왔다.

무려 한 나라 국정 운영 총 예산의 1분기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당근은 충분히 뿌렸습니다. 회장님께서 명하시면 주식과 치부책을 사용해 은행장들을 압박하겠습니다.”

“좋습니다.”

“인수한 은행들 구조조정을 시작하겠습니다.”

그래야겠지.

오일 쇼크 때문에 기업들이 부도나면서 은행까지 휘청거리는 것을 3개 인수했다.

곪은 자리를 이대로 두면 안까지 죄다 썩어 들어갈 것이다.

“부실 채권을 정리하고, 회수해야 할 대출금을 거둬들입시다.”

“경영 악화를 막기 위해서는 그것 외에도······.”

“인원 감축을 하겠다는 뜻입니까?”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태수가 잠시 생각에 잠긴다.

“인원 감축에 대해서는 다시 생각해봅시다. 우선 부실 경영에 따른 문제부터 해결합시다.”

“칼을 빼들었다면······.”

태수가 손을 들어 송 비서의 입을 막았다.

“칼을 빼들었다면 확실하게 처리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압니다. 하지만 인원 감축만큼은 최대한 피했으면 합니다.”

“인원 감축을 꺼리시는 이유가 뭡니까?”

“외벌이 가정이 많습니다. 딸린 식구들도 많고요. 가장이 실직하면 가정이 파탄 납니다. 될 수 있으면 거기까지는 안 갔으면 합니다.”

송 비서는 빙그레 웃었다.

“철두철미하신 분이 이런 일에는 참 자상하십니다.”

태수에겐 따끔한 훈계로 들렸다.

송 비서는 늘 사업에 있어서 이성적인 결단, 거시적인 안목, 이해득실에 따른 우위 선점에 대해 강조하곤 했다.

하지만 이번 일은 이성적인 결단이 아닌지라 마찰을 각오했다.

“사업가는 냉정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압니다. 감성적인 우유부단으로 보일 수도 있겠죠. 하지만 거시적인 안목에서 보면 이 편이 유리합니다.”

송 비서는 말없이 그저 웃기만 한다.

혼 낼 때는 칼같이 혼내던 스승의 모습이 조금 낯설다.

“태양 그룹은 지금 인재난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새로 인재를 뽑는 것도 좋지만, 있는 인재를 잘 쓰는 것도 좋지요. 태양에서 흡수할 수 있도록 합시다.”

송 비서가 입을 열었다.

“사업가는 냉정한 머리도 필요하지만, 따뜻한 가슴도 필요한 법입니다. 결국 사업은 사람이 하는 일이니까요.”

평소보다 더욱 온화한 목소리였다.

혼날 각오를 했던 태수가 얼떨떨할 정도로 자랑스러움이 듬뿍 담긴 말투였다.

“돈에 매몰되지 않고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기업. 직원을 기업의 이윤 창출 요건으로 보지 않고, 한 가족의 가장으로 보는 지도자. 아주 멋지군요.”

송 비서가 고개를 끄덕인다.

“앞으로도 쭉 이렇게 돈과 사람을 함께 가져가시길 바랍니다.”

태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송 비서님의 기업 운영 철학과 많이 다를 텐데, 못마땅하시지 않으십니까?”

송 비서는 누누이 태수에게 그것을 강조해왔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태수의 철학을 높게 쳐주니, 의아했다.

“못마땅하기는요. 너무나 자랑스럽습니다. 회장님의 스승이 누군지 몰라도, 정말 제자를 잘 키우셨습니다.”

스승님.

저는 스승님의 가르침에 반해서 결정을 내렸는데요.

어째서 절 칭찬하시는 겁니까.

“만일 제가 청일에서 키워진대도 이리 나오셨을까요?”

“아닙니다. 그 경우라면 엄히 질책했을 겁니다.”

실제로 전생에 송 비서는 태수의 이런 점을 늘 염려했었다.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만일 회장님이 청일에서 키워진다면, 이런 철학을 입 밖에 내었다간 한청호 회장 손에 먼저 제거됐을 테니까요.”

태수는 눈을 감았다.

‘그래서 송 비서님이 늘 내게 당부하셨구나.’

송 비서는 언제나 태수가 오래도록 살아남길 바랐다.

차기 총괄 비서로 내정된 태수를 재벌 총수로 키운 이유도 그것이었다.

“청일과 태양은 다릅니다. 회장님은 지금처럼 태양의 길을 가십시오. 높이 떠서 멀리 비추고 모든 것을 따뜻하게 감싸주는 태양처럼 말입니다.”

“명심하겠습니다.”

가슴이 뜨거워졌다.

* * *

태양 아파트 공사 현장.

송창준이 다가와 태수에게 말했다.

“회장님, 금산 그룹의 총수 장준용 회장님께서 오셨습니다.”

“장 회장님께서요?”

“뿐만 아니라 동인 방송국의 이건후 이사님도 오셨습니다.”

“둘이 함께 오셨습니까?”

대체 무슨 일로 둘이 함께 이곳에 온단 말인가.

태수가 안전모를 벗었다.

들고 있던 도면까지 송창준에게 내밀며 말했다.

“어디 계십니까?”

“스튜디오를 구경하고 계십니다.”

“갑시다.”

태수는 서둘러 스튜디오로 향했다.

스튜디오 앞에는 방송국 촬영 팀이 모여 있었다.

그 가운데 정윤아를 비롯한 배우진도 보인다.

“촬영 안 하고 여기서 뭐하고 있습니까?”

“아, 저흰 촬영 10분만 중단하고 좀 쉬려고 합니다.”

“방송 시간에 맞출 수 있겠습니까?”

“걱정 없습니다. 간식 먹고 바로 시작할 겁니다.”

고석만 CP가 저쪽을 힐끔 본다.

스태프들이 먹거리가 담긴 바구니를 들어 보인다.

“회장님은 들어가 보십시오. 안에서 이사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태수가 스튜디오 안으로 들어갔다.

이건후의 안내를 받으며 장준용과 김 비서가 스튜디오를 구경하고 있었다.

128평형을 보고 장준용이 감탄했다.

“이야, 여기는 진짜 기가 막히구나. 무슨 아파트가 이렇게 으리으리해?”

빈민들의 주거 대체재, 닭장 아파트란 인식이 단번에 깨질 정도였다.

“처음에 강 회장이 최고급 프리미엄 아파트를 짓는다고 해서 말렸는데, 괜한 짓을 했어. 난 놈은 난 놈이라니까.”

“저도 처음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래서 한 채 팔아달라고 예약해 놓은 참입니다.”

“이 정도면 나도 한 채 장만해야겠는데? 우리 공주님 몫으로 사 줘야지.”

“8채 밖에 없다고 합니다. 경쟁이 치열할 텐데요.”

태수가 들어오며 인사했다.

“장 회장님, 이 이사님, 어쩐 일로 두 분이 같이 오셨습니까?”

“응. 같이 왔지. 점심을 같이 먹었거든.”

“한경련 모임에 다녀오는 길입니다.”

한경련.

한국 경제인 연합회.

한국 재벌들의 모임이고, 연합회장이 장준용이다.

오늘이 정기 오찬 모임이 열리는 날이었다.

“자네 우리 한경련에 신입 회원으로 들어오지 않겠나? 회원 다섯의 추천을 받으면 들어올 수 있어.”

“한경련 회원 가입 때문에 오셨습니까?”

“아니, 그건 아니네만.”

장준용이 고개를 저으면서도 은근하게 말한다.

“자네도 슬슬 한경련에 가입할 때가 되지 않았나? 태양 그룹 출범식까지 마쳤는데, 어째 한경련 들어오겠다는 소리를 안 해?”

“생각해 보고요.”

“내 임기 기간 동안에 빨리 들어와. 차기 연합 회장 자리를 한청호가 노리고 있어.”

뒷말은 듣지 않아도 알겠다.

한청호가 차기 연합 회장이 되면 태수의 한경련 가입을 필사적으로 막을 것이란 뜻이다.

“한청호가 한경련을 주도해 태양 그룹에 해를 끼칠 수도 있어. 다구리에 장사 없다. 그 꼴을 당하기 싫으면 자네도 얼른 한경련에 자리 잡아야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뭘 자꾸 생각해? 들어와서 손해 볼 건 없어. 남들은 들어오고 싶어도 못 들어오는 모임이야.”

이건후도 고개를 끄덕였다.

“강 회장님께서 가입하실 마음이 있다면 삼청도 한 손 보태 추천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한경련 가입 권유 때문이 아니라 다른 용건 때문에 오셨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자네 역시 알아야 할 일이 있어서 왔지.”

장준용이 안색을 굳혔다.

“차기범이 한경련 모임에 얼굴을 비쳤어.”

이건후도 고개를 끄덕였다.

“대통령 경호실장께서 한경련 모임에 모습을 드러낸 건 처음입니다.”

이유는 짐작한다.

태수가 한 부탁 때문일 터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