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세 가지 용건(5)
송 비서가 말했다.
“치부책입니다.”
의아했다.
“그거라면 이미 사우디에서 받았습니다만.”
조금은 허술했던 장부였다.
하지만 태수는 그걸 써먹어 한청호를 궁지에 몰아넣었다.
덕분에 청일 정유와 중장비까지 날로 먹지 않았던가.
또한 한청호를 협박해서 가족의 안전까지 담보받았다.
하지만 송 비서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한청호를 겨냥한 치부책이었죠. 이건 다릅니다.”
“그럼 뭡니까?”
송 비서가 씩 웃었다.
“은행장들 목을 죌 치부책입니다.”
은행장들 맞춤형 치부책이라…….
“혹시 한청호가 은행장에게 먹인 뇌물을 말하는 겁니까?”
“아뇨, 그거라면 한청호가 저보다 더 확실하게 쥐고 있으니 상대도 안 됩니다.”
그럼 대체 무얼 가지고 치부책이라 하는 것인가.
“말 그대로 치부책입니다. 은행장 놈들이 뒤로 받은 돈으로 어떻게 놀았겠습니까?”
송 비서가 의미심장하게 웃는다.
“한청호가 더럽게 나올 게 뻔하니 저도 더러운 걸로 준비했죠.”
송 비서가 아주 작심한 모양이었다.
“송 비서님, 이런 건 어떻게 준비했습니까? 외국에 나가 있어서 여의치 않았을 텐데요.”
“이쪽 전문가가 따로 있던데요?”
전문가?
순식간에 태수의 머리가 팽팽 돈다.
말 끝나기 무섭게 태수가 씩 웃는다.
“송진구는 언제 구워삶으셨습니까?”
“어떻게 아셨습니까?”
송 비서가 입을 딱 벌린다.
송 비서에게 들어서 이미 알고 있던 한수 역시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송진구는 입도 뻥긋하지 않기로 약속했는데요. 실제로 제가 말 꺼내기 전까지 모르셨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바로…….”
“방금 송 비서님이 힌트를 주셨잖습니까.”
“아니, 그러니까 어떻게 알았냐고요.”
사람들이 다들 궁금해한다.
어쩔 수 없이 태수가 설명했다.
“첫째, 죽었다고 알려진 송 비서님이 접촉할 수 있는 정보원 루트는 한정됐습니다.”
청일 그룹에서 활동하던 정보원들과 차단됐다는 뜻이다.
“둘째, 사우디에서 송 비서님은 송진구는 만났습니다. 셋째, 송진구는 정보 상인 장말동의 부하입니다. 넷째, 송 비서님은 사우디 공사 총괄자입니다.”
다른 사람들도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다섯째, 사우디에서 일하고 있어야 할 송진구가 한국에 있습니다.”
장말동의 집에서 만났다.
태수가 간단하게 결론을 냈다.
“결론. 송진구와 송 비서님은 정보를 두고 거래했다. 아닙니까?”
“기가 찰 정도군요. 대단합니다. 완벽합니다.”
송 비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대체 그 짧은 시간에 어떻게 저리 정확히 추측하는지 그저 감탄만 나올 뿐이었다.
“회장님 말 그대롭니다. 이쪽 정보를 제대로 캐 주는 대신 송진구를 한국으로 보내 주겠다고 거래했습니다.”
“잘했습니다.”
태수는 노트를 흔들며 웃었다.
“송 비서님이 시키지 않았더라면 제가 시켰을 일입니다. 사우디에 있는 사람을 송환해서라도.”
“…….”
“안 그래도 송진구에게 전두호와 오성회 뒷조사를 시킨 참입니다. 이것까지 시키기 미안했는데, 아주 잘됐습니다.”
“…….”
송진구가 들었다면 뒷목을 잡았을 이야기였다.
“치부책이라면 막강한 무기가 될 겁니다. 돈이 은행을 휘어잡고, 치부책이 은행장을 옭아맨다. 아주 좋습니다.”
송 비서가 허리를 굽혔다.
“은행장들 목줄 틀어쥐는 건 제게 맡겨 주십시오. 밑바닥 진흙탕 싸움은 제가 전문입니다.”
한청호와 한일권의 뒷수습으로 단련된 송 비서다.
무척 든든하다.
“더러운 싸움은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 강 회장님께선 회장님의 길을 가십시오. 제가 뒤에서 보조하겠습니다.”
더할 나위 없다.
그런데 송 비서는 덧붙였다.
“제가 한국에 온 또 다른 이유입니다.”
송 비서가 가방을 열어 노트 몇 권을 더 꺼냈다.
“회장님께서 지시하신 사항입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뭘요. 이렇게라도 보탬이 될 수 있다면 다행이지요.”
태수가 노트를 파라락 넘기며 본다.
한수는 물론 송소리와 김광록까지 전부 노트에 시선을 집중한다.
송 비서만이 싱글벙글 웃을 뿐이다.
송소리가 슬쩍 물었다.
“회장님, 그건 뭔가요?”
“스카우트 명단입니다.”
“네?”
어째선지 송 비서까지 깜짝 놀란다.
“스카우트 명단이라고요? 제게 청일의 인사 평가서를 만들라고 하셨잖습니까?”
“네, 전 그걸 스카우트 명단으로 쓸 생각입니다.”
태수가 그들의 궁금증을 풀어 주었다.
“청일에서 인재들을 빼돌리려고 합니다. 그들을 우리 태양의 인재로 받아들일 겁니다.”
다들 입을 떡 벌렸다.
“태양은 너무 빠르게 덩치가 커졌습니다. 아직도 인원 부족으로 허덕이고 있죠.”
고작 2, 3년 만에 재벌이 되었고, 계열사가 무려 16개나 된다.
“태양 아파트가 세워지면서 더 많은 인재가 필요합니다. 앞으로 추진할 사업은 더 많습니다.”
태수가 추진하는 일들은 한두 개가 아니다.
엄청난 업무량을 빠른 시간에 소화해야 한다.
다들 과로로 시달리고 있다.
“우리는 인재를 발굴하고, 육성하고, 적재적소에 써야 합니다. 인재는 한 명이 열 명의 몫을 해냅니다. 기술 개발과 업무 효율 향상에 중요한 요소죠.”
“그래서 회장님께서 기술 유학을 보내 주신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태양 그룹 자체 내에 인재 양성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덧붙여 이미 만들어진 인재까지 끌어오려고 합니다.”
태수는 인재에 대한 욕심이 많다.
기업을 제대로 경영한 사람이라면 안다.
제대로 된 인재가 기업에 끼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지 말이다.
“사업도 결국 사람이 하는 일입니다. 좋은 인재들이 많아야 기업이 쭉쭉 클 수 있습니다. 양보다는 질이 좋아야 합니다.”
삼국지에서 조조가 가장 큰 힘을 발휘한 이유가 무엇이겠나.
황실을 등에 업고 우수한 인재를 독점하다시피 공급받았기 때문이다.
“한청호 회장이 그동안 모아 놓은 인재들이 많습니다. 그들이 청일을 든든하게 떠받들고 있습니다.”
왜 아니겠나.
청일 중공업의 쌍두마차라 불리던 이창원과 노일국만 하더라도 일을 잘한다.
“한청호는 정권에 달라붙어 뇌물과 로비를 뿌리고 다니기도 바쁩니다. 그런데도 청일이 잘 크는 이유는 뒷받침하는 사람들이 일을 잘하기 때문입니다.”
태수가 한일권 대신 청일을 운영해 봐서 잘 안다.
한일권이 사업을 말아먹을 때도 청일의 임원들이 열심히 제 몫을 다해서 구멍을 메워 놓았다.
“한청호는 확실히 인재 보는 안목이 좋습니다. 달콤한 말로 스카우트도 잘하죠.”
전생에선 포항 철강 박태종의 아들을 청일 건설 사장으로 앉혀 놓은 한청호가 아니던가.
이창원과 노일국도 한청호가 발탁한 인재들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도 그에 못지않은 인재가 있습니다. 바로 송 비서님입니다.”
모두 송 비서를 본다.
“직접 청일의 인재를 뽑고, 키우신 전문가입니다. 청일의 인재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아시는 분이기도 하죠.”
인재 양성소 소장을 맡아도 될 정도의 전문가다.
“청일을 무너뜨리려면 안팎으로 두들겨 대야 합니다.”
이제야 이해가 간다.
“외부에서 은행을 통해 자금줄을 압박하고, 내부에서 인재들을 빼돌려 휘청거리게 만들 겁니다.”
태수가 송 비서를 돌아본다.
“그래서 청일의 속사정을 잘 알고 있는 송 비서님께 부탁드렸습니다.”
“인사 평가서를 만들라고 하신 이유를 잘 알겠습니다.”
“그걸 기준으로 빼 올 사람, 쳐낼 사람, 청일에 남겨야 할 사람을 골라야 하니까요.”
송 비서가 고개를 끄덕인다.
“청일의 인재들을 능력과 특기, 성장 가능성과 인품 등을 따져 인사 평가를 내렸습니다. 시간을 좀 더 주신다면 몇 가지 항목을 추가하도록 하겠습니다.”
태수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스카우트 우선순위를 매겨 주시길 바랍니다. 추가로 공략법이나 약점이 있었으면 좋겠군요.”
척하면 척이다.
스승과 제자는 옛날부터 그처럼 쿵짝이 잘 맞았다.
하지만 송 비서는 그저 감탄뿐이었다.
‘대단하구나. 내가 말하지 않아도 어찌 이리 척척 잘하는지. 대체 누가 이런 거물을 키워 낸 걸까? 존경스럽다.’
송 비서는 조심스럽게 건의했다.
“회장님, 회장님을 교육하신 분께 인재 양성을 맡기시는 게 어떻습니까? 그분이 저보다 전문가이신 것 같습니다만.”
“그러니 부탁드리는 겁니다.”
태수는 송 비서를 보며 빙그레 웃었다.
“앞으로 우리 태양의 인재들도 잘 부탁드립니다.”
스승님.
* * *
송 비서와 한수의 환영회가 열렸다.
태양을 떠받드는 임원진들의 회식이 되고 말았다.
1차에서 소고기를 배터지게 먹고, 2차로 생맥주를 실컷 마셨다.
그리고 이제 금산 호텔 바 VIP룸에서 3차를 벌였다.
태양 그룹 임원들의 관심은 모조리 홀쭉이의 키핑 양주에 쏠렸다.
“이게 말로만 듣던 그 비싼 술이야?”
“레미 마르땡 루이 13세라니. 코냑 중에서 손꼽히는 명주잖아?”
“우와, 이걸 대체 어디서 구한 거야? 나도 딱 한 잔, 아니 한 모금만 마셔 보면 안 될까?”
홀쭉이는 갈비뼈가 드러나는 가슴을 쭉 내밀었다.
양주병을 들고 아주 의기양양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한 병에 집 한 채 값이 나가는 술이야. 어딜!”
술부심이 대단했다.
태수는 송 비서의 잔에 술을 따라 주며 슬쩍 물었다.
“송 비서님, 한국에 오신 마지막 용건을 듣지 못했습니다.”
“아, 이건 개인적인 용건이라서 말입니다.”
송 비서가 양주에 정신이 팔린 딸 송소리를 보며 웃었다.
“혼기 놓치기 전에 우리 딸의 혼처를 찾아야지 않겠습니까.”
송 소리가 화들짝 놀랐다.
“아빠!”
송 비서는 흐뭇한 얼굴로 주변을 돌아보며 웃었다.
“이 중에서 사위를 고를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순간 모두 얼음이 되었다.
안 그래도 여기에 총각들이 잔뜩 있다.
남자들이 다들 송소리를 바라본다.
‘우리 송 실장이 예쁘긴 하지.’
‘능력도 있고, 딱 부러지고, 똑똑하고.’
‘차가운 도시의 커리어 우먼. 철벽을 치는 것까지 매력 터지지.’
송소리가 정색하면서 고개를 저었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예요? 아빠도 주책이셔.”
“왜? 여자 나이 23살이면 한창 시집갈 때지. 더 늦으면 결혼하기 힘들어. 뭐가 못나서 노처녀 소리를 들으려고?”
70년대엔 다들 시집 장가를 빨리 가곤 했다.
“딸은 나이가 들어가는데, 한청호 집안 망할 때까지 마냥 손 놓고 기다릴 수 없잖아. 귀국한 김에 상견례까지 끝내고 돌아가련다.”
“아빠!”
송소리가 벌떡 일어섰다.
송 비서의 팔을 잡아끈다.
“취했어요? 일어나요. 창피하게 이게 뭐예요.”
“창피하긴 뭐가 창피해? 여기 있는 사람들, 내가 한 번씩은 다 만나 봤어. 다들 네 신랑감으로 손색이 없어.”
갑자기 홀쭉이가 벌떡 일어나서 가슴에 품고 있던 양주병을 쭉 내밀었다.
“따님을 제게 주십시오, 장인어른!”
반쯤 남은 레미 마르땡 루이 13세를 조공으로 바치는 홀쭉이다.
송 비서는 크게 기꺼워하며 웃었다.
“용식이는 사람 좋아서 진국이지. 잔정 많고, 세심하고, 유쾌해. 친구처럼 좋은 남편, 좋은 아빠가 될 거야.”
“아빠!”
갑자기 송창준이 벌떡 일어난다.
그가 갑자기 제 앞에 있던 과일 안주 접시를 끌어 다 바친다.
“장인어른, 따님에겐 제가 더 잘 어울립니다.”
송비서가 역시나 고개를 끄덕인다.
“창준이는 집안이 좋아. 더구나 성정이 부드럽고, 눈치가 빠르지. 여자가 좋아하는 말도 잘해 주고, 집안도 살뜰히 잘 돌볼 거야. 자상한 남편으론 최고야.”
“아빠, 자꾸 무슨 소릴 하는 거예요?”
송 비서가 이번엔 한수를 본다.
“한수는 잘생겼어. 날카롭고 예리한 만큼 안목도 좋고. 속이 깊고, 강단이 있어서 배신할 줄을 몰라. 평생 바람 안 피우고 한 여자만 보고 살 거야.”
“아빠, 그만해요!”
송 비서는 마지막으로 태수를 보았다.
“잘나도 너무 잘났어. 이쪽은 포기해. 죽어도 네 몫은 안 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