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세 가지 용건(4)
태수와 송소리가 탄 지프차가 출발했다.
태수가 말했다.
“금산 호텔로 가는 길에 태양 계열사에 관한 전반적인 중간 보고를 듣고 싶습니다.”
“지금 여기서요?”
“시간이 아깝잖습니까.”
송소리는 헛웃음을 흘렸다.
“회장님께선 정말 지독한 일 중독자예요.”
“어차피 길바닥에 버리는 시간이잖습니까.”
운전하던 김광록이 껄껄 웃었다.
“태수야, 송 실장님 난처하게 하지 마라. 지금 손에 아무것도 안 들고 있잖냐. 보고서가 있어야 보고를 하든 말든 하지.”
김광록이 틀렸다.
송소리는 보고서가 없다고 보고를 못할 사람이 아니다.
“보고드리겠습니다.”
이것 봐라.
“태양 정유부터 보고 시작하겠습니다.”
“영동대로 교차로 진입하기 전에 주유소를 세우기로 한 일은 어떻게 됐습니까?”
“그곳 부지를 매입했고, 구청 허가도 받았습니다. 내일부터 주유소를 만들 예정입니다.”
“좋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서울 시내 10개 곳에 주유소 허가를 받았습니다. 그것도 같이 진행할 계획입니다.”
“추진하세요.”
“정유차가 좀 더 필요하다고 하는군요.”
“태양 중장비에 연락해야겠군요.”
송소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태양 중장비에 정유차를 비롯해 건설 현장에 필요한 중장비를 추가 주문한 참입니다.”
“좋습니다.”
“크레인 세 대, 포클레인 여섯 대, 덤프트럭 열 대, 레미콘차 네 대, 로드롤러 네 대, 사다리차 다섯 대.”
태수가 손을 올렸다.
“잠깐, 사다리차라고 했습니까?”
“네, 무슨 문제라도…….”
송소리가 의아한 얼굴로 본다.
“사다리차 안전장치가 케이블밖에 없지 않습니까?”
“네, 그렇습니다만.”
90년대 중반까지 사다리차 안전장치는 고작 케이블 하나밖에 없었다.
“안전장치를 보강하는 쪽으로 추가 개발합시다.”
“알겠습니다. 태양 중장비에 그리 전하겠습니다.”
“케이블 하나에 의지하는 건 인부들에게 너무 위험합니다. 케이블이 풀리거나 끊어지는 날엔 그대로 탑승구가 자유낙하 하잖습니까.”
전생엔 실제로 그런 사건이 일어나곤 했다.
“엘리베이터는 19세기 중반부터 안전장치를 달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고층 작업을 담당하는 사다리차는 안전장치가 고작 케이블뿐이라니, 너무 부실합니다.”
사다리차 금속 와이어가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끊어지는 사례가 많다.
바람이 부는 악조건에서 작업하다 붐대가 부러져 넘어가는 사례도 너무 많다.
“사다리차는 사람을 높은 곳으로 올려 작업하는 데 씁니다. 타일과 시멘트, 목재 등 자제를 올리고, 건물 외벽 페인트를 칠합니다. 인명 사고가 나기 쉽습니다.”
“네.”
“안전에 관해서는 언제나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제대로 된 안전장치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알겠습니다.”
잔소리는 이만하면 충분하다.
송소리는 이어서 태양 계열사에 대해 계속해서 보고했다.
태양 시멘트부터 시작해 몰리브덴과 석회 광산, 창호와 금융, 보험, 전기, 전자 목재까지 이어졌다.
“이상으로 계열사 중간보고를 마치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송소리가 물 흐르듯이 보고를 끝내자 김광록이 입을 떡 벌렸다.
“아니, 어떻게 20분 내내 쉬지 않고 보고를 올려? 이 정도 양은 보고서를 보고 읽어도 헷갈리는 게 정상이지 않냐?”
송소리가 고개를 팩 돌린다.
“이 정도 양도 못 외워서야 일을 어떻게 처리해요?”
아마도 송소리를 모르는 사람은 신기할 것이다.
전생에 태수도 처음엔 마냥 신기하기만 했었다.
그녀는 보고서가 가져올 필요가 없을 만큼 암기력이 좋다.
‘송 비서님이 평생을 쏟아 만든 필생의 역작이라고 하시더니.’
전생에선 태수가 송 비서 최고의 제자였다.
하지만 이번 생에선 송 비서를 스승으로 모시지 못했다.
‘그녀는 당장 어느 분야 실무에 투입되어도 너끈히 기업을 이끌어 갈 수 있을 정도로 잘해.’
아주 만족스러운 인재였다.
그녀는 실력으로 반발을 잠재웠다.
태양 그룹 계열사 16개를 넘나들며 업무를 조정하고, 계열사 연계 업무를 기획한다.
송 비서가 아주 자랑스러워할 만했다.
태수가 보기에도 그녀는 훌륭하다.
‘전생에선 한청호와 얽히지 않으려고 꽁꽁 숨겨 뒀던 보물이 이번엔 태양에서 빛을 발하는군.’
그녀의 능력은 태수가 잘 안다.
그래서 그녀를 과감하게 스카우트했다.
태수는 밀려드는 업무의 상당 부분을 그녀에게 맡겼다.
‘송소리가 없었으면 난 과로로 죽었을지도 모르겠군.’
태수가 할 일은 아직도 차고 넘친다.
전생에 청일 그룹을 맡았을 땐 이미 기업 시스템이 잘 갖춰진 상태였다.
게다가 한청호가 발탁해 쓰던 인재가 무척 많았다.
하지만 태양 그룹은 아니다.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하는 태양엔 전천후로 업무를 볼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해. 바로 그녀처럼.’
송 비서가 전 분야에 걸쳐 이것저것 가르쳐 준 티가 난다.
덕분에 태수의 짐이 한결 가벼워졌다.
“도착했다.”
태수와 송소리가 먼저 차에서 내렸다.
김광록을 주차를 하고 뒤따라올 것이다.
* * *
금산 호텔 1107호.
송 비서가 머물고 있는 방이다.
똑똑.
한수가 문을 열고 나왔다.
“형, 왔어?”
“그래, 반갑다. 오는 데 별일 없었지?”
“당연하지. 뭐 별일 있으려고.”
“송 비서님을 왜 말리지 않았어? 여긴 위험하니까 너만 오라고 그리 당부했는데.”
“고집을 꺾지 않으셨어.”
태수와 송소리가 급하게 방 안으로 들어간다.
방 안에는 뒷짐을 진 채 노을 지는 창밖을 보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누구십니까?”
“접니다.”
뒤를 돌아보는 남자.
그가 선글라스와 중절모를 벗자 태수는 깜짝 놀랐다.
“송 비서님?”
사람이 완전히 달라서 못 알아볼 정도였다.
5년이나 태수와 매일 붙어 있던 사람이라고 보기 힘들 정도로 다른 외모였다.
송 비서가 두 팔을 활짝 펼치며 웃었다.
“이 정도면 못 알아보겠죠?”
“완전히 딴사람이 된 것 같습니다.”
정말 못 알아보겠다.
보고 있으면서도 믿기지 않는다.
“많이 탔습니다. 대체 얼마나 찐 겁니까? 머리는 또 왜 이렇게 풍성해지셨어요?”
“하하하, 사우디 땡볕이 좀 독해야 말이죠. 그리고 알고 보니 이게 유전이 아니라 다 스트레스 때문이었지 뭡니까?”
송 비서가 제법 풍성해진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송 비서는 탈모가 꽤 심한 편이었다.
그러니 10년은 회춘한 것 같다.
“악덕 회장 밑에서 목숨 걱정하면서 전전긍긍하며 살다가 풀려나니 이렇게 됐습니다.”
풍성해진 정수리는 아주 좋다.
그런데 살은 좀 심하다.
예전엔 꼬챙이라 할 정도로 말랐던 송 비서가 아닌가.
“실례지만 지금 몇 킬로나 나가십니까?”
“130킬로 정도 나갑니다.”
“전엔 몇 킬로쯤 유지하셨죠?”
“56킬로쯤 됐었죠.”
“…….”
송 비서가 두둑한 이중 턱과 볼살을 흔들며 웃었다.
“마음이 편해지니까 입맛이 돌더라고요. 역시 미국 음식들은 살이 잘 찌네요. 하하하.”
“…….”
태수는 말없이 곁에 서 있는 한수를 보았다.
이쪽은 하나도 안 쪘다.
오히려 탄탄한 근육질이 되어서 왔다.
“아, 미국에 간 김에 전문적인 용병 훈련을 받도록 했습니다. 제법 잘 따라오더라고요. 기본적으로 몸을 잘 쓰는 친구더군요.”
왜 아니겠나.
한국에서도 싸움으로 이름을 날리던 한수가 아닌가.
한수가 제 근육을 불끈 보여 준다.
그 의기양양한 태도에 괜히 짜증이 난다.
‘나도 송 비서님 아래서 배울 땐 각종 경호 무술과 무기술 연습하고 살았는데.’
전생에서도 늘 운동엔 소홀하지 않았던 태수였다.
70이 넘도록 매일 1시간 근육 운동은 빼먹은 적이 없다.
회귀한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한수 쪽이 어째 좀 더 근육질인 것 같으니 짜증이 날 수밖에.
“사우디의 베두인족 훈련이 훨씬 거친데, 그 뺀질뺀질한 놈은 어째 근육은 안 붙고 뼈다귀만 강해지는지 모르겠더군요.”
홀쭉이를 말하는 거다.
“사우디에선 그나마 강제로 금주라도 했건만. 그놈은 한국에 들어왔으니 또 술배가 나왔겠죠?”
“…하는 일이 그렇다 보니 어쩔 수 없죠.”
차마 부정할 순 없었다.
홀쭉이는 술배만 볼록 튀어나오고 있으니까.
태수는 자리에 앉으면서 말했다.
“송 비서님, 한국은 너무 위험합니다. 그만 돌아가십시오.”
“할 일이 있어서 왔습니다. 제가 필요하시잖습니까.”
은행장들을 틀어쥐려면 해외 은행의 막대한 힘이 필요하다.
하지만 송 비서가 감수해야 하는 위험이 너무 크다.
“송 비서님을 알아보면 큰 화를 당하실지도 모릅니다.”
“절 알아보는 자가 있을까요? 외모부터 신분, 국적, 과거까지 전부 바꿨지요.”
송 비서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사우디 국왕께 도움을 좀 받았습니다. 미국 CIA가 나서야 캘 수 있으려나? 한청호나 국내 정보력 가지고는 어림도 없을 겁니다.”
사우디 국왕이 뒤를 봐줬다면 확실할 것이다.
그래도 일말의 불안함 때문에 태수는 고개를 저었다.
송 비서가 위험해지길 원치 않았다.
“눈썰미가 날카로운 사람이 있을 겁니다.”
“그래 봤자죠. 고작 비서 나부랭이였던 제가 1년 만에 갑자기 은행 거부가 되어서 나타날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요?”
마른하늘에 날벼락 맞아 죽을 확률보다 낮다.
송 비서가 갑자기 일본어 억양이 강하게 섞인 영어를 쓰기 시작한다.
[앞으로 절 로버트라고 불러 주십시오.]
송 비서는 영국 영어를 매우 유창하게 쓰는 남자였다.
하지만 이 정도로 일본 억양이 강한 영어라면 송 비서인지 몰라볼 것 같기도 하다.
태수는 한숨을 쉬었다.
“송 비서님, 굳이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한국에 온 이유가 뭡니까? 대리인으로 한수를 보내도 충분하다고 연락드렸는데요.”
못마땅했다.
송 비서가 얼마나 자유를 그리며 살아왔는지 알기 때문이었다.
한청호를 얼마나 두려워했는지도 잘 안다.
“저는 송 비서님이 안전하고 자유롭게 살길 바랐습니다. 하다못해 한국 땅에 돌아오더라도 박정환이나 한청호가 죽은 이후를 생각했습니다.”
“제가 한국에 온 이유는 세 가지 용건이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 태수의 스승이 아니랄까 봐 손가락 세 개를 편다.
송 비서가 입술을 깨물었다.
“한청호가 망하는데 한 손 보태려고요. 지금까지 당한 게 서럽고 분한 만큼 저도 되돌려 주려고요.”
송 비서 역시 한청호 가문의 피해자였다.
태수가 복수를 불태우는 것처럼, 송 비서 역시 복수를 꿈꾸고 있었다.
“이번에 큰일을 계획하신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은행을 통해 한청호의 자금줄을 틀어막으려 하신다면서요?”
태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회장님께서 제게 은행을 맡기셨잖습니까. 그러니 그 일에 제가 빠져서는 안 되겠죠. 그래서 왔습니다.”
태수는 송 비서에게 해외 은행을 인수하도록 했다.
“한수가 대리인으로 나서서 칼을 휘둘러도 충분합니다.”
“제 걱정은 하지 마십시오. 남자가 걱정이 많아서야 큰일을 그르치는 법입니다.”
송 비서가 인자하게 웃는다.
“목표를 정한 사람은 장애물 따윈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랜만에 듣는다.
전생에서도 송 비서가 태수에게 가르쳐 준 말이다.
“계획은 멀리 보되 실천은 한 걸음부터. 조급함은 실수를 부르는 법.”
뒷말은 태수가 받았다.
“상대의 목에 칼을 꽂을 때는 망설여서도, 조급해서도 안 된다. 언제나 명심하고 있습니다.”
송 비서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송소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제가 그런 말을 회장님께 했던가요?”
전생에서 들은 말이다.
“회장님께서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습니다.”
“제 마음이 조급해질 때면 가끔 스스로에게 들려주곤 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아직도 태수의 가슴 속에는 송 비서의 가르침이 깊이 새겨져 있다.
-멀리 내다보고 판을 짜라.
-목표를 향해 달려갈 때 밀려드는 불안함과 조급함은 인내하라.
-일을 벌였을 때는 확실하게 조져라.
송 비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각오가 섰다면 그대로 밀고 나가면 됩니다. 잘 해내시리라 믿습니다.”
전생의 스승은 이번에도 태수를 지지해준다.
그는 언제나 그랬다.
“회장님의 계획에 제 복수를 함께할 수 있으니, 전 두렵지 않습니다. 부디 절 내치지 마시고 중히 써 주십시오.”
송 비서를 만류하지 못했다.
대신 태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송 비서님의 역할이 클 겁니다.”
그제야 송 비서가 만족스럽게 껄껄 웃는다.
태수가 본 송 비서의 모습 중에서 손가락에 꼽히는, 기분 좋은 웃음이었다.
“은행장들을 움직여 청일에 대출과 투자를 금지로 압박하려면 돈만 가지고선 어림도 없습니다.”
한청호가 벌인 더러운 일들을 수습하면서 닳고 닳은 송 비서다.
“그놈들이 어떻게 발을 뺄지 눈에 선해서, 그냥 속 편하게 외국에 있을 수가 없더군요. 이왕 한청호 숨통을 막아서 죽일 거, 확실하게 죽입시다.”
송 비서가 눈짓했다.
그러자 한수가 가방을 하나 꺼내온다.
“이게 뭡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