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 세 가지 용건(3)
안정우는 태수를 한참 물끄러미 보았다.
‘거사라……. 이제 보니 한청호와 전두호를 핑계로 조국과 민족을 위해 무거운 짐을 혼자 떠맡을 생각이었군.’
안정우는 취중진담보다 더 확실하게 진심을 알고 싶었다.
그래서 일부러 태수를 도발했다.
“전두호가 집권하면 그깟 기업, 달라는 대로 줘 버려. 다시 세우면 그만이야.”
“제가 왜 그래야 합니까?”
“자네는 돈도 있고, 능력도 있어. 심지어 외국에 기반도 있지. 그런데 왜 굳이 어려운 길을 가려고 하나?”
어려운 길이라고 피해 돌아갈 생각은 없다.
그랬다면 처음부터 한청호와 맞서진 않았을 것이다.
“10만 원짜리 광산 하나로 시작해 재벌까지 고작 2년 밖에 안 걸렸네. 지금은 그때보다 가진 게 훨씬 많아.”
“싫습니다.”
“돈이나 명예보다도 중요한 건 목숨이다. 그 목숨보다도 중요한 게 신념이지. 자네의 신념은 태양 그룹인가?”
“아닙니다.”
그럴 리가 있나.
솔직히 말하면 태양 그룹은 한청호를 박살 내기 위한 수단에 가깝다.
재벌 그룹 힘이 아니라면 개인의 돈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상대이기 때문이다.
한청호를 무찌르려면 돈과 권력, 사람까지 모두 필요하다.
“받은 것 이상으로 갚아준다. 내 앞길을 막는 건 모조리 부순다. 가족과 내 것을 지킨다. 당하기 전에 손을 쓴다. 이게 제 신념입니다.”
태수는 안정우를 똑바로 바라봤다.
“그래서입니다. 절 겨냥해서 선전 포고를 해 오는데, 그럼 도망갑니까? 결론적으로 어르신은 제게 전두호를 피해 도망가라고 권하신 겁니다.”
“으음.”
안정우는 입을 다물었다.
그저 도발하려고 했는데, 따지고 보니 정말 그런 의미가 되었다.
“당하기 전에 먼저 손을 쓸 겁니다.”
시비는 저쪽에서 먼저 걸었다.
“제 앞길을 막으려는 자들을 부숴 버릴 겁니다. 설사 그 와중에 저 역시 부서진다고 해도 그건 감수해야죠.”
태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상처는 훈장으로 남아 죽는 날까지 함께하겠지만 도망은 굴욕으로 남아 죽는 날까지 절 부끄럽게 할 겁니다.”
태수의 각오는 단단했다.
“그러니 말리지 마십시오.”
태수는 씩 웃었다.
안정우도 웃었다.
“자네는 똑똑한 건지 솔직한 건지, 그도 아니면 미련하고 우직한 건지 모르겠군.”
안정우가 술을 단숨에 마신다.
탁 소리가 나도록 놓으며 말한다.
“이 사람아, 난 자네의 동맹이 아닌가.”
안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뒤를 부탁한다던 자네의 마지막 용건, 난 아직 대답하지 않았어. 알고 있나?”
알고 있다.
일부러 이런 술자리를 마련했다는 것도 안다.
“약속하지. 자네 가족들은 내가 안전한 곳으로 보내겠어. 그 흔적을 깨끗이 감추도록 하겠네.”
“감사합니다.”
안정우는 장말동에게 말했다.
“들었나? 미리 준비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소정이도 함께 나가도록 같이 준비하고.”
“네?”
장말동이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아가씨까지 함께요?”
“그래.”
안정우가 태수를 보며 씩 웃는다.
“나 역시 한 힘 보태야지.”
뜻밖의 말에 태수가 고개를 저었다.
“굳이 어르신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습니다. 전두호가 절 겨냥했지, 어르신을 겨냥한 건 아니잖습니까?”
“알아. 하지만 나라의 친일 군부 세력을 척결하는 대업이 아닌가.”
안정우는 태수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자네 홀로 무거운 짐을 지게 두진 않겠네. 조국과 민족을 위한 자네의 뜻을 내가 왜 모르겠나.”
“어르신, 이건 제 개인적인…….”
“아무리 개인적인 이해득실로 포장해도 내용물은 변치 않는 법이지. 그거면 족하네.”
안정우가 자랑스러워한다.
“목숨을 걸어도 아깝지 않은 훌륭한 일이다.”
안정우가 태수의 어깨를 두드렸다.
“앞길을 막는 놈이라면 설사 몸이 부서져도 박살 낸다. 아주 사내다운 다짐이었다.”
“어르신.”
“우리 모두를 위한 최고의 결말을 함께 꿈꾸고 싶군. 전력을 다해 자네를 돕겠어.”
안정우는 이미 결심을 굳혔다.
태수는 말없이 술잔을 들어 올렸다.
*
햇살이 밝았다.
머리가 깨어질 것처럼 아팠다.
숙취였다.
“윽.”
속도 안 좋았다.
태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협탁 옆에 놓인 물컵엔 마시다 만 물이 반쯤 들어 있었다.
물을 따르다가 엎질렀는지, 바닥에도 조금 흘렸다.
“음?”
태수의 옷이 얌전히 개어져 테이블 위에 올려 있다.
“어떻게 된 거지?”
필름이 끊겼다.
어제 술자리가 어떻게 끝났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현재 시각은 오전 8시 12분.
태수는 옷을 입고 문을 열었다.
드르륵.
밖으로 나오니 알겠다.
‘장말동의 집이군.’
술에 취해 여기서 하룻밤 묵은 모양이다.
마당을 쓸던 송진구가 태수를 보고 손을 들었다.
“어이, 일어났어?”
“네, 신세 졌습니다.”
“아침 식사 준비했어. 같이 먹자.”
“아뇨, 전 그만 가 보겠습니다.”
숙취 때문에 도저히 뭐가 넘어갈 것 같지 않다.
송진구가 말했다.
“어르신에게 정보를 부탁했다면서?”
전두호와 관련된 오성회 정보를 부탁했다.
“한청호 뒤도 캐라고 하시더라. 덕분에 내가 또 발바닥에 땀 나게 뛰어다니게 생겼다.”
“부탁드립니다.”
“당장 오늘 밤부터 자료를 들고 찾아갈 거야. 앞으로 자주 보게 될 테니까 그리 알아.”
“감사합니다.”
태수가 장말동의 방을 보며 물었다.
“어르신은 안에 계십니까?”
“출근하셨지.”
“그럼 인사는 못 드리고 가겠군요.”
“해장국으로 준비했어. 우리 아가씨 솜씨가 좋아. 먹고 가.”
“괜찮습니다. 일이 바빠서요.”
태수는 서둘러 장말동의 집을 빠져나왔다.
기분이 영 이상했다.
‘여자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았다.
바로 아파트 현장으로 향했다.
*
태양 아파트 공사 현장.
태수가 들어서자 박철완이 반갑게 맞이한다.
다크 서클이 턱밑까지 내려온 상태였다.
“피곤해 보입니다. 또 밤을 새웠습니까?”
“어쩔 수 없죠. 도면은 거의 다 끝났습니다. 회장님도 오늘따라 영 컨디션이 좋지 않아 보입니다.”
“과음했습니다.”
박철완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술 냄새가 진동합니다.”
“많이 납니까?”
“아주 술독에 빠졌다 나온 것처럼 납니다.”
“호텔에 들렀다 나올 걸 그랬군요.”
“오늘 하루는 그냥 쉬시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그래야겠습니다. 체크할 것만 하고 들어갈 생각입니다.”
후회막심이다.
할 일이 많은데 고작 술 때문에 하루를 날리게 됐다니.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숙취로 인해 정말 죽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철골조로 짓는군요.”
“공사 기간을 단축하기 위해서죠.”
만족스럽다.
벌써 하루 만에 뼈대가 잡혔다.
“의외로 시간을 많이 잡아먹는 기초 공사가 이미 끝났으니 골조 올리는 건 순식간이죠. 미리 판넬을 제작하고, 창호 공사도 의뢰했습니다.”
“목공 팀은?”
“철골조 작업 속도에 맞춰 투입될 겁니다. 그 전에 기본적인 치수는 빼 놨으니 오늘부터 미리 재단하고 있습니다.”
현장을 둘러보고 있으니 비서 송창준이 달려왔다.
“회장님, 태양 전자에서 보일러 개발을 끝냈다고 합니다. 개별 계량기도 문제없다고 합니다.”
“태양 전자에 가 봐야겠군요.”
예정대로라면 어제 둘러봐야 했던 태양 전자다.
방송국에 가는 바람에 오후 스케줄을 비워 버렸다.
그때 홀쭉이가 태수에게 다가왔다.
“태수야, 드라마 여자 주인공도 정해졌다.”
“누군데?”
“정윤아.”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다.
“동인 방송국 이사 이건후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드라마 제작을 추진하고 있다더라. 일 처리 하는 속도가 굉장히 빨라.”
“잘됐군.”
이건후라면 일은 잘할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삼청 그룹을 세계적인 기업으로 키워 내진 못했을 테니까.
“서두릅시다. 할 일이 많습니다.”
일은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송창준이 코를 잡았다.
“회장님, 술 냄새가 너무 납니다. 태양 전자는 포기하시죠.”
“…….”
적당히 마실 걸 그랬다.
*
금산 호텔로 돌아왔다.
호텔을 감독하는 여자가 보인다.
그녀가 태수를 보며 생긋 웃었다.
“안녕하세요?”
장서연이었다.
금산 장준용의 딸이다.
“금산의 금지옥엽께서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제가 이 호텔 부사장이거든요.”
장서연가 웃는다.
“아버지께서 제 몫으로 주셔서 열심히 일 배우고 있어요.”
태수도 장준용에게 직접 들은 적 있다.
그녀의 몫으로 호텔과 골프장, 리조트, 백화점을 주겠다고 했었다.
“몇 달이나 매일 오다가다 마주쳤는데도 눈길 한 번 주시지 않더니. 이제야 절 알아보았다고 하니까 왠지 섭섭한데요?”
솔직히 그녀가 호텔에서 근무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오늘부터는 우리 인사하기로 해요. 알았죠?”
그녀가 생긋 웃는다.
태수에게서 풀풀 풍기는 술 냄새도 맡았는지 그녀가 덧붙인다.
“다음엔 저랑 한잔해요. 우리 호텔에 아주 좋은 술을 들여왔거든요.”
그녀가 윙크한다.
그런데 그녀가 태수의 셔츠를 유심히 본다.
“흐음.”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태수를 보더니, 몸을 돌린다.
‘왜 저러지?’
태수는 방에 돌아와 옷을 벗었다.
얼른 샤워하고 푹 자고 싶었다.
“음?”
와이셔츠에 립스틱이 묻어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
며칠 만에 외부 스튜디오 골조 작업이 끝났다.
그사이 목조 작업 팀이 도면에 맞게 자재들을 재단한 터라 작업 속도가 눈부시게 빨랐다.
덕분에 태양 창호만 죽어났다.
현장을 돌던 태수는 박철완에게 말했다.
“미장 팀 부르죠.”
“안 그래도 미장 팀은 오후부터 투입될 예정입니다.”
“타일은 어떻게 됐습니까?”
“고급스러운 타일 고르는데 시간이 조금 더 걸렸다고 합니다.”
“확실히 눈을 사로잡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타일이 주방 분위기에 큰 역할을 하니까요.”
타일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주방 분위가 확 달라진다.
주부들이 가장 신경 쓰는 부분이 주방과 화장실이다.
그리고 집을 구매할 때 여자들의 목소리가 큰 법이다.
“벽지와 마루는 결정됐습니까?”
“벽지와 마루는 사흘 후로 잡아 놨습니다.”
“싱크대와 선반 제작은 멀었습니까?”
“싱크대와 상하부장 선반은 제일 나중에 들어가도 충분합니다. 하지만 해당 공정을 바로 들어갈 수 있도록 미리 주문은 끝낸 상태입니다.”
“좋습니다.”
아주 마음에 든다.
역시 박철완이 꼼꼼하게 일을 잘한다.
이후 태수는 각 팀에 따로 지시를 내렸다.
태수의 말을 받아 적는 직원은 땀을 뻘뻘 흘린다.
할 일이 너무 많다.
“회장님.”
태수 앞으로 음료수를 내미는 사람이 있었다.
기획 조정실장 송소리였다.
“한 잔 마시고 잠시 쉬어요.”
“괜찮습니다.”
“숨 좀 돌리자고요.”
어쩔 수 없이 음료수 컵을 받아 들었다.
태수는 한 번에 쭉 들이켰다.
빈 컵은 송소리에게 도로 내밀었다.
“자, 됐습니까?”
“지금 무슨 사약 마셔요?”
송소리는 황당했다.
“할 일이 많습니다. 한가하게 티타임을 가질 시간은 없어서 말입니다.”
“티타임을 가지려고 온 게 아니에요.”
그럼 무슨 용건으로 찾아온 걸까.
“미국에서 귀국하여, 지금 금산 호텔에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았어요.”
“누구 말입니까?”
“강한수 씨와 아버지가 함께 오셨다는군요.”
미국에서 귀국하길 기다리던 사람들이 왔다.
하지만 뜻밖이었다.
“송 비서님까지 오셨습니까?”
한청호는 송 비서가 죽은 것으로 안다.
만일 살아 있다는 것을 알면 큰 화를 면치 못할 것이다.
“송 비서님이 아직 한국에 들어올 때가 아닙니다.”
“저도 말렸습니다만 고집을 부리시더군요. 이유를 모르겠어요.”
송소리가 모르는 이유라니.
태수는 안전모를 벗었다.
“바로 만나 봐야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