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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산 찍고 건설 재벌-135화 (135/230)

135화 이미지를 팔아야지(4)

이건후와 태수, 그리고 김광록은 회의실을 나왔다.

마침 고석만 CP와 드라마 국장이 눈썹을 휘날리며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이건후가 그들을 보면서 씩 웃는다.

“강 회장님과 식사하고 오겠습니다. 회의는 이따 재개합시다.”

그리고 드라마 국장을 보면서 아예 못 박는다.

“이번 일, 저도 함께 지켜보겠습니다.”

드라마 국장과 고석만 CP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방송국의 실세 중의 실세인 이건후가 지켜보겠다는 말이 협박처럼 들렸다.

이건후와 태수가 방송국을 나가자 드라마 국장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고 CP.”

“예.”

“방송국 직원 전부 불러. 점심시간 끝나기 전에 이거 어떻게든 처리하자.”

“예?”

이번엔 방송국 직원들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드라마 국장이 벌컥 화를 냈다.

“뭐 하나? 당장 여배우 프로필 전부 올리고, 이리로 집합시켜!”

“예.”

“스튜디오 하나 비워서 카메라 테스트할 준비도 해 놓고!”

“예.”

“태양 그룹에서 의뢰한 CF 건도 빨리 검토해!”

“예.”

드라마 국장이 무시무시한 목소리로 엄포를 내놨다.

“아까 이 이사님이 하시는 말씀 들었지? 점심시간 끝나기 전까지 회의 준비 전부 끝내야 해!”

“…예.”

“한 끼 굶는다고 안 죽어! 하지만 중요한 투자자 앞에서 무능한 모습 보이면 죽는 거야! 알았나?”

“예!”

태수가 오면 방송국 직원들이 앓는 소리를 내게 된 시작이었다.

* * *

삼청 호텔 레스토랑.

홀 구석에서 연주자가 피아노와 바이올린, 첼로 등을 직접 연주한다.

태수와 이건후, 둘이 한 테이블에서 마주 보고 앉았다.

김광록과 송창준, 홀쭉이는 다른 테이블에 앉았다.

클래식 음악에 잠시 귀 기울이던 이건후.

“전 이 호텔 레스토랑을 자주 이용하는 편입니다.”

그렇겠지.

삼청 그룹 계열사 호텔인데.

“이곳 주방장이 생각 외로 솜씨가 좋거든요.”

맛집을 소개한다더니 삼청 호텔에 데려와 홍보한다.

난놈은 난놈이다.

“스테이크에 곁들일 와인도 한 잔 하실까요?”

“아닙니다. 아까 말했듯이 방송국 일로 회의가 잡혀 있어서, 와인은 사양해야 할 것 같군요.”

태양 그룹 회장님이 방송국 일로 회의라니.

“아까 직원을 붙잡고 간략하게 들었습니다. 대대적이고 전폭적인 지원과 투자에 깜짝 놀랐습니다.”

“괜찮은 연속극을 기획한다고 하기에 조금 투자했을 뿐입니다.”

“조금 투자하신 정도가 아니던데요. 투자금 1억에 스튜디오 및 야외 촬영지 제공, 카메라, 스태프, 자재 및 소품, 거기에 CF까지.”

이건후가 회의실까지 방문해 태수를 직접 만난 이유다.

“앞으로도 자주 뵈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방송국에 광고도 많이 넣어 주시고, 후원과 투자도 팍팍 부탁드리죠.”

“저야말로 잘 부탁드려야겠군요. 이번 연속극이 성공할 수 있도록 많은 지원 바랍니다.”

“그거야말로 우리 방송국이 바라는 일인데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건후가 씩 웃는다.

“듣자 하니 신기한 프로젝트를 구상하고 계시더군요.”

“괜찮은 일일 연속극 기획을 발견했다, 그래서 드라마에 투자했다, 하는 김에 CF도 맡겼다. 별로 신기할 일은 아닙니다.”

“그렇게 따로 두고 보면 신기할 구석이 없는데 말입니다.”

이건후가 태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한다.

“그걸 합쳐 놓으니까 참 신기한 기획이 되더란 말이죠. 대한민국 최초란 단어가 몇 개나 붙는지 기가 찰 정도였습니다.”

태수를 바라보는 눈에는 호의가 가득하다.

하지만 호의 속에 순간 번뜩이는 날카로움.

태수에 대한 궁금증과 감탄, 그리고 놀람까지.

“강 회장님에게서 혁신이란 단어를 떠올렸습니다.”

혁신(革新).

기존에 있던 생산 요소를 새로이 결합하는 것을 말한다.

“기존에 있던 드라마, CF, 아파트, 스튜디오. 이걸 한데 얽어서 새로운 포장지를 사용했단 말이죠. 태양 아파트 홍보.”

태수가 나이프를 조용히 내려놨다.

그리고 냅킨으로 입가를 닦았다.

“태양 아파트 홍보 수단으로 동인 방송을 이용했다는 점이 불쾌하십니까?”

“아뇨, 전혀요. 최대한 효율적으로 활용했다는 점이 오히려 존경스러울 따름입니다. 진심입니다.”

이건후가 태수를 물끄러미 본다.

“강 회장님은 여러모로 참 신기한 분인 것 같습니다.”

“뭐가 그리 신기합니까?”

“말 그대롭니다. 몸에 줄줄 흐르는 교양도 그렇고, 혁신적인 일을 아무렇지 않게 추진하시는 것도 그렇고, 젊은 나이에 재벌 총수가 되신 것도 그렇죠.”

그래 봐야 아직 삼청 그룹의 아성에는 비벼 볼 수도 없다.

이건후는 장차 삼청 그룹을 물려받을 자다.

“저는 따라 하고 싶어도 따라 할 수 없는 노련함이 느껴집니다. 어떻게 그렇게 거침없이 앞으로 쭉쭉 치고 나가는지…….”

태수를 보고 있는 이건후의 눈에는 호감이 듬뿍 묻어났다.

“저는 고작 방송국 이사 자리에도 허덕이고 있거든요.”

삼청 그룹의 셋째 아들에게 주어진 건 언론이다.

삼청 그룹 회장 이병춘은 장자 승계를 기본으로 정하고, 굵직한 사업들은 장남에게 몰아줬다.

그다음은 차남에게.

“위에서 때리고, 광고 따낸다고 밑에서 구르고, 시청률 사수한다고 전전긍긍하고, 동네북이 따로 없죠.”

3남인 이건후에게 맡겨진 역할이 그것이다, 매품팔이.

삼청 그룹과 형들 대신 매를 맞는 일이었다.

“그에 반해 강 회장님은 많이 다르더군요. 옆에서 지켜보면 이런 게 재능인가, 참 대단한 사람이다, 이런 감탄밖에 나오지 않더군요.”

언론사 탄압이 극심할 때다.

정권의 입맛에 맞게 여론을 선동하지 않으면 뭇매를 두들겨 맞았다.

이미 동인 방송은 박정환에게 밉보여 거듭 제재를 당하고 있었다.

“정권의 눈치 보고, 재벌들 눈치 보고, 시청자들 눈치 보고, 기획했던 일들은 대부분 엎어지고, 실적은 바닥이고. 매일 쩔쩔매고 있습니다.”

34살의 이건후는 고민이 많아 보였다.

‘의외로군. 세계에서도 인정받던 삼청 그룹 총수에게도 이런 애송이 시절이 있었다니…….’

태수는 25년 가까이 재벌 총수 노릇을 해 왔다.

태수와 대한민국 재계 1위를 놓고 오랫동안 경쟁을 이어 온 남자가 이건후였다.

“저와 다르게 강 회장님은 대통령 각하와 직접 면담하고, 오일 쇼크 때 석유 공급권을 따내고, 청일 정유와 중장비를 인수하고, 훌륭하게 재벌로 나아가셨죠.”

이건후는 물을 한 모금 마시더니 말했다.

“나이도 저보다 어린 걸로 알고 있는데, 참 대단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성공하는 비결이 따로 있나 봅니다. 하하하.”

성공한 사람들은 다들 자신만의 비결이 있는 법이다.

태수가 아무리 제 비결을 알려 준다 한들 그게 의미가 있을까.

하지만 태수는 전생에 그가 입버릇처럼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마누라, 자식 빼고 전부 바꿔라.”

“네?”

“혁신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바꿀 수 있는 건 전부 바꿔서 새로움을 주면 됩니다.”

“혁신이라…….”

나이프로 스테이크를 썰던 이건후.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움찔대더니 움직임을 멈췄다.

그가 나이프와 포크를 내려놓고 잠시 생각에 빠졌다.

“생각을 바꾸면 길이 보인다. 좋은 조언, 감사합니다.”

이건후가 정중하게 고개 숙여 감사를 표한다.

태수 역시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받았다.

“귀중한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뼈에 새기도록 하겠습니다.”

이건후의 눈이 빛났다.

고민이 많아서 흔들리던 눈빛이 아니었다.

이건후는 굳건하게 그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번 연속극, 반드시 성공합시다. 우리 TBS 동인 방송은 총력을 기울여 아낌없이 투자하겠습니다. 새로운 방법, 새로운 시도로, 시청자들에게 새로운 충격을 안겨드리죠.”

아주 든든하다.

태수가 슬쩍 밥상에 한 숟가락 얹었다.

“중세 일보에서도 홍보 기사를 많이 써 주길 부탁드립니다.”

“당연히 그래야죠.”

동방 일보에 부탁할 예정이었던 홍보 기사가 중세 일보로 넘어갔다.

동방 일보보다 중세 일보 독자층이 더 두텁다.

게다가 같은 삼청 그룹 계열사라 더 믿음이 간다.

드라마 홍보를 위해 열성적으로 호의적인 기사를 쏟아 낼 것은 자명한 일이다.

‘아주 좋아. 한 번에 두 가지 일을 끝냈군.’

만족스럽다.

그렇게 식사가 끝났다.

* * *

TBS 스튜디오.

비어 있는 스튜디오에 카메라와 조명이 준비되었다.

방송국 직원들이 분주히 오가며 자리를 만든다.

태수와 이건후가 참관할 자리였다.

대기실에 있다가 연락을 받고 TBS 전속 여자 배우들이 속속 몰려들었다.

“갑자기 이게 웬 소집 명령일까?”

“방송국 이사님과 투자자가 여자 주인공을 새로 뽑는대.”

그때였다.

스튜디오로 태수와 이건후가 들어온다.

그 뒤에 김광록과 송창준, 홀쭉이가 따랐다.

방송사 직원이 자리를 안내한다.

“여기 앉으세요. 곧 카메라 테스트를 시작하겠습니다.”

이건후와 태수가 앉은 자리는 카메라 옆이다.

엄청나게 거대한 카메라를 보자 태수는 새삼 신기할 정도였다.

‘21세기엔 방송사 카메라도 참 다양해지는데. 70년대 카메라는 참 후졌구나.’

고석만 CP가 카메라맨 옆에 섰다.

방송사 직원이 준비했던 자료를 준다.

사진, 입사 원서, 프로필이 적힌 여배우 명단이었다.

태수는 페이지를 넘겨 봤다.

‘확실히 TBS 전속 배우들이 화려해. 잘나가는 배우들은 전부 동인 방송 출신이었나 싶을 정도야.’

여배우 명단 제일 위에 있는 건 역시 강부지.

그 후로 선우웅여, 여운경, 오현자 사미정 등 이름난 배우들이 줄줄이 뒤따른다.

페이지를 넘기던 태수가 신입 여배우 명단에서 멈칫했다.

‘정윤아, 유지연에 장미현까지?’

70년대 트로이카로 불리는 세 명의 여배우가 모두 동인 방송 전속 배우라니.

그것도 이번 해에 뽑은 신인 여배우로 나란히 이름을 올렸다.

“카메라 테스트 시작합니다. 호명된 사람들은 한 명씩 앞으로 나와 주십시오.”

스튜디오 구석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있는 여배우들은 모두 이쪽을 보고 있었다.

태수는 그녀들 사이에서 아는 얼굴을 발견했다.

단발머리에 유독 도드라지는 흰 피부와 얼굴을 가득 메운 화려한 이목구비.

여배우들 사이에서도 독보적으로 눈에 띄는 미인이었다.

‘정윤아도 있었군.’

그녀가 깜짝 놀란 얼굴로 태수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 * *

카메라 테스트라고 하지만 실상은 오디션이었다.

‘확실히 고석만 CP가 제안한 세 명의 여배우가 연기를 잘하긴 해.’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빼어났다.

고작 대사 몇 마디만 했을 뿐인데도 극에 몰입하게 만드는 능력이라니.

그녀들이 어째서 TBS 간판 스타인지를 확실하게 증명했다.

‘그에 반해 젊은 탤런트들은 부족함이 많군.’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잘하는 사람이 더 많은 기회를 갖는다.

연예계도 당연히 빈익빈 부익부가 생겨나는 법이다.

강부지만 하더라도 한 달에 소화하는 프로그램이 30개나 된다.

반면 신인 여배우들은 단역 자리조차 얻기 힘들다.

그러니 경험 차이가 더욱 벌어진다.

‘시간에 쫓기며 제작하는 일일 연속극에서는 기회가 더 제한되지. 더구나 지금은 필름 값이 비쌀 때야. NG 한 번 내면 손해가 얼마나 크겠어.’

그런 까닭에 연속극 연출자들은 연기가 되는 배우들을 원한다.

‘하지만 70년대 트로이카는 확실히 다르긴 다르더군. 독보적인 외모뿐만 아니라 연기력까지 제법이었어.’

청순가련하면서도 은근히 섹시한 정윤아.

도도하고 화려한 팜므파탈의 장미현.

순진하고 발랄한 유지연까지.

‘지금은 신인 배우지만 조만간 셋 다 크게 날아올라 톱스타가 된다.’

고석만 CP가 말했다.

“새로운 여자 주인공 후보는 세 명으로 추려 봤습니다.”

예상과 같았다.

외모와 연기력, 이미지와 개성까지 고려해 뽑았으니 결국 70년대 트로이카가 뽑힌 것이다.

“이 중에서 여자 주인공을 뽑을까 하는데, 어떠십니까?”

“좋습니다.”

태수가 동의하자 다들 반색한다.

태수가 말했다.

“그 세 명 모두 이번 드라마에 출연했으면 좋겠습니다.”

“네?”

그녀들의 이미지와 인기를 태양 아파트에 얹어야겠다.

태수는 극본을 짚었다.

“복수의 대상인 회장의 딸이자 청순가련한 여자 주인공, 남자 주인공과 정략 결혼하는 얌전한 은행장의 딸, 주인공을 과감하게 유혹하는 동맹 기업의 딸.”

태수가 말했다.

“이 세 명의 여배우 비중을 조금 더 높여서 남자 주인공을 두고 치열한 사랑싸움을 한 번 하죠.”

자고로 드라마는 역시 치정극이 최고다.

그렇게 노주혁, 한진휘, 정윤아, 유지연, 장미현까지.

세상에 다시없을 비주얼 몰빵 드라마가 기획되었다.

* * *

이건후의 배웅을 받으며 방송국 건물을 빠져나왔다.

비서 송창준이 물었다.

“어떻게 할까요? 예정보다 조금 늦었습니다만 태양 전자로 가시겠습니까?”

“아뇨.”

태수는 고개를 저었다.

“명동으로 갑시다.”

장말동을 만나야겠다.

‘위험한 부탁을 해야겠군.’

어려울 때 믿을 수 있는 건 역시 장말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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