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 이미지를 팔아야지(3)
고석만 CP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배우들 문제가 아니라 촬영지 문제 때문에 기획이 흔들린 것이지 다른 문제는 딱히 없습니다. 극본도 아주 잘 빠졌고요. 믿고 맡겨 주십시오.”
“압니다. 남녀 주인공 후보들 모두 TBS 최고의 간판스타들인 것도 압니다.”
고석만을 비롯해 방송국 관계자들의 얼굴이 환해졌다.
하지만 태수의 표정은 환해지지 않는다.
“전 이 연속극을 반드시 성공시키고 싶습니다.”
“그건 저희도 마찬가집니다.”
일을 기획하면서 망하는 것을 가정하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모두 성공을 위해 달린다.
“이번 연속극의 성패에 따라 우리 태양 아파트의 이미지가 달라질 테니까요. 신경 쓰지 않을 수가 없군요.”
“네?”
“태양 아파트 CF 세 편을 추가 제작 의뢰하겠습니다.”
태수는 방금 일일 연속극 제작에 막대한 투자와 지원을 쏟아부은 참이다.
거기에 태양 아파트 CF를 세 편이나 TBS에 맡기겠단다.
고석만 CP가 깜짝 놀랐다.
“세 편이나요? 태양 아파트 CF만? 아니면 태양 계열사 CF를 각기 따로 제작하는 겁니까?”
“태양 아파트 CF. 올인.”
“……!”
파격적인 투자였다.
불필요한 투자이기도 했다.
“태양 아파트 CF라면 그냥 한 편만 제작해서 방영해도 충분하지 않을까요?”
“시리즈 CF를 제작할 생각이니까요.”
“……!”
이번에야말로 방송국 관계자들이 일제히 입을 떡 벌렸다.
“시, 시리즈 CF요?”
태수가 씩 웃었다.
“이거 대한민국 최초의 시리즈 CF가 되는 건가요?”
70년대에는 시리즈 CF라는 개념이 없다.
보통 CM송과 함께 나오는 CF가 일반적이다.
“태양 아파트는 32평, 48평, 64평형이 있습니다. 그래서 총 세 편의 CF를 찍을 계획입니다.”
세 가지 평형대의 CF를 시리즈물로 만들어 순차적으로 방영한다?
“태양 아파트는 이번 연속극 남녀 주인공을 CF 광고 모델로 낙점할 겁니다.”
“설마…….”
“이번 연속극의 이미지를 차용해 태양 아파트 광고를 내세울 생각입니다.”
다들 눈동자에 지진이 난 것처럼 떤다.
“드라마 진행 속도에 맞춰서 CF 시리즈를 순차적으로 풀 예정입니다. 그걸 전부 TBS에 맡기겠습니다.”
얼떨떨했다.
“드라마의 이미지를 그대로 차용하는 최초의 CF. 드라마와 같이 방영하는 최초의 CF. 시리즈물로 구성된 최초의 CF.”
태수가 손을 내밀었다.
“최초라는 문구를 가지고 갈 태양 아파트의 CF를 TBS 동인 방송과 함께하고 싶습니다.”
“……!”
고석만이 주먹을 쥐었다 폈다 반복한다.
욕심이 생긴다.
구미가 당긴다.
“이건 국장님의 결재가 있어야만 확답을 드릴 수 있는 문제지만…….”
고석만이 태수의 손을 덥석 잡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손을 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방송국 관계자들 모두 격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놓칠 수 없는 제안이었다.
이루고 싶은 욕망이 들끓는다.
“어떻게 해서든 국장님 결재를 받아, 이 프로젝트를 진행해 보고 싶습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태수는 말했다.
“그런 이유로 이번 일일 연속극의 여자 주인공이 태양 그룹 이미지에 큰 영향을 끼칩니다. 저로서는 좌시할 수 없는 문제가 된 거죠.”
드라마에 CF까지 동일 선상에 놓이게 됐다.
모두 태양 아파트 브랜드와 직결되었다.
“제가 무얼 위해 막대한 투자와 지원을 아끼지 않는지 잘 생각해 보십시오.”
태수의 한마디에 다들 입을 다물었다.
태수는 파격적이라고 할 만큼 막대한 투자를 쏟아붓고 있다.
투자금을 많이 유치할수록 투자자의 입김이 세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고민스럽습니다.”
태수가 다시 한번 손끝으로 테이블을 치기 시작했다.
딱. 딱. 딱. 딱.
그제야 다들 태수가 왜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렸는지 깨달았다.
여자 주인공이 문제라는 사실을 상기했다.
“문제는 여주인공이 청순가련한 첫사랑이라는 설정 때문입니다.”
“네?”
“지금 여자 주인공 후보 세 명은 모두 청순가련과는 거리가 멀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극본을 전부 뜯어고치라는 말씀인가요?”
엄청난 제작 지원을 약속한 투자가가 원한다면 어쩌겠나.
다만 극본을 쓴 작가는 안색이 창백해진다.
“아닙니다. 태양 아파트의 이미지를 생각할 때 우아하고 청순가련한 여자 주인공 이미지 나쁘지 않아요. 아주 좋습니다.”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태양 아파트 위에 얹을 생각이 아닌가.
대한민국 최고급 아파트 브랜드를 꿈꾸는 태양 아파트다.
“게다가 극본을 뜯어고치기엔 시간이 촉박합니다. 극의 완성도가 떨어져서야 되나요. 극본은 이대로 갑시다.”
극본가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방송국 관계자들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노주혁 씨 46년생, 한진휘 씨 49년생.”
“네.”
“강부지 씨 41년생, 여운경 씨 40년생, 선우옹녀 씨 45년생. 전부 30대군요.”
“아…….”
70년대 당시엔 여자 나이 27만 되어도 노처녀 소리를 들었다.
대부분 25세를 넘기지 않고 결혼했다.
빠른 여자들은 20살에 결혼하던 시절이다.
“아무리 인기가 있어도 남자 주인공보다 나이 많은 여주인공을 쓸 수는 없습니다.”
방송국 내에서도 말이 돌았던 문제였다.
방송국 관계자들은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극본을 확실하게 잘 살릴 수 있는, 태양 아파트를 빛낼 수 있는 이미지가 필요합니다.”
드라마는 이미지를 팔아먹는다.
최대 9살이나 많은 연상녀를 여자 주인공으로 두다니.
그게 곧 태양 아파트의 이미지가 될 것이다.
“대중들이 좋아하는 3B가 있습니다.”
Beauty, Baby, Beast.
“그중에서 우리 태양 아파트 이미지를 책임질 여자 배우. 젊고 아름다운, 새로운 Beauty를 원합니다.”
우아한 미녀가 살고 있는 아파트.
최고급 프리미엄 아파트라는 이미지를 만들어야 한다.
“좀 더 젊고, 청순하고, 아름다운 여자. 시청자들의 눈을 사로잡을 수 있는 예쁜 여배우.”
CF에 예쁜 여자가 등장하는 이유는 하나다.
그 아름다운 이미지를 제품에 덧씌우기 위해서다.
태양 아파트는 태수가 전력투구를 하는 막중한 프로젝트다.
“새로운 얼굴이 필요합니다. 극본에서 말하는 청순가련한 여자 주인공에 어울리는 여배우를 찾아봅시다.”
태수가 고석만 CP를 보면서 물었다.
“TBS 동인 방송 전속 배우들이 탄탄하다고 들었습니다. 혹시 프로필 사진을 볼 수 없겠습니까?”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준비하겠습니다.”
고석만 CP가 눈짓한다.
방송국 직원들이 잽싸게 일어나 우르르 회의실 밖으로 나간다.
고석만 CP가 조금 난감해하면서 말했다.
“제가 이 세 명의 여배우를 이번 연속극의 여자 주인공으로 낙점한 이유는 연기력과 이름값 때문입니다.”
“이해합니다.”
태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일 연속극입니다. 미니 시리즈도 아니고, 오랫동안 극을 이끌어 가려면 기본적인 연기력이 필요하겠죠.”
태수와 말이 통하자 고석만 CP는 한결 마음이 편했다.
“젊고 예쁜 여자를 쓰려고 했죠. 하지만 그녀들은 아직 드라마 촬영 경험이 부족해서 그런지 연기가 영…….”
“그렇겠죠. 신인 배우들은 발연기가 난무하니 제작에 어려움이 많으실 줄 압니다.”
“도저히 몰입하기 힘들다는 항의를 받습니다. 발연기 때문에 시청률이 떨어지는 건 피해야죠.”
“마침 이번 드라마는 남자의 사랑과 야망, 두 가지를 모두 쟁취하는 서사극이죠. 여배우 비중이 적어서 다행이군요.”
하지만 비극적인 사랑이 큰 줄기를 이루는 드라마다.
드라마에서 남녀 주인공의 역할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다.
“연기가 부족한 건 감수하겠습니다. 이미지가 깨끗하고 좋으면 됩니다. 결국 드라마에서 제일 중요한 건 이미지 아닙니까?”
“…그렇긴 하죠.”
“연기는 하다 보면 늘 테니 최악의 발연기만 피하도록 타협해 봅시다.”
“그래야겠습니다. 어지간하면 쓰죠. 휴우…….”
고석만 CP가 한숨을 내쉬었다.
“젊고, 예쁘고, 청순가련하면서, 연기까지 잘하는 여배우가 하늘에서 뚝 떨어졌으면 소원이 없겠습니다.”
그런 사람이 없으니 이 고생을 하는 거 아닙니까.
태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찾아봅시다. 정 안 되면…….”
태수는 품속에 든 지갑을 만지작거렸다.
지갑 속에는 정윤아의 연락처가 잠들어 있다.
정윤아가 주었지만 한 번도 태수가 먼저 연락해 본 적 없는 그것.
‘정윤아에게 연락을 해 볼까?’
고석만 CP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먼저 국장님께 이 사실을 보고하고, 이야기를 마저 진행해 보도록 하지요.”
“좋습니다. 좋은 소식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태수 역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고만석 CP가 황급히 손을 흔들며 만류한다.
“아뇨, 잠시만. 아주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됩니다. 이대로 가 버리시면 어떡합니까.”
“충분한 회의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잠깐 차 한 잔 마실 시간 정도만 기다려 주십시오. 잠깐만!”
그 정도야.
그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
“좋습니다.”
태수가 승낙하자 고만석 CP가 부리나케 달려 나간다.
“난 국장님께 다녀올 테니까, 자네는 차를 준비하고.”
홀쭉이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한번 알아볼게.”
“홀쭉아, 이거.”
태수가 지갑을 열어 정윤아의 연락처를 건넸다.
홀쭉이가 연락처와 태수를 번갈아 보았다.
“누구 연락처야?”
“있어. 한번 연락해 봐.”
이 시간에 집에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연락 닿으면 여기로 올 수 있겠냐고 한 번 물어보고.”
송창준은 스케줄 표를 확인한다.
“회장님, 점심 약속은 어떡할까요?”
그러고 보니 점심 약속이 잡혀 있었다.
“누구와 약속이 잡혀 있죠?”
“태양 전자 사장님입니다. 오후에 태양 전자 개발부와 미팅을 갖고, 이후 생산 시설을 함께 둘러보기로 하셨죠.”
다행이다.
다른 외부 일정이 잡혔으면 취소하기 난감했을 수도 있었다.
“취소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그렇게 연락하고 오겠습니다.”
송창준도 밖으로 나갔다.
회의실에 태수와 김광록, 둘만 남았다.
김광록이 그제야 태수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난 여자 주인공 나쁘지 않던데. 인기 많은 톱스타들이잖아. 연기도 잘하고, 말도 잘하고.”
그때였다.
똑똑.
누군가가 회의실 문을 두드린다.
문이 열리면서 웃고 있는 젊은 남자가 보인다.
“태양 그룹 회장님께서 우리 방송국까지 찾아와 주실 줄은 몰랐는데요.”
태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반갑습니다. 태양의 강태수입니다.”
“반갑습니다. 동인 방송의 이건후입니다.”
삼청 그룹의 차기 총수가 태수를 만나러 왔다.
이건후가 성큼성큼 회의실 안으로 걸어온다.
“점심 식사는 하셨습니까?”
“아직 안 했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저와 함께 식사하시지 않겠습니까?”
호의가 넘치는 제안이었다.
“회의 중이었습니다. 잠시 기다리는 중입니다만.”
“밥 먹고 합시다.”
이건후가 자신만만하게 씩 웃었다.
“제가 전부 책임지지요.”
아, 그렇다면 먹어야지.
이 방송국의 실세 중의 실세인 이건후가 책임진다는데.
그렇다면 드라마는 무조건 통과되겠지.
“좋습니다. 갑시다.”
태수도 자신만만하게 씩 웃었다.
“회사 근처에 잘하는 식당, 압니까?”
이건후가 크게 웃었다.
“이 근방 맛집은 제가 다 꿰고 있습니다. 가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