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 이미지를 팔아야지(2)
태수는 이번엔 박철완을 봤다.
“박 사장, 임시 스튜디오에 대한 설계도와 건축에 관련된 제반 사항을 사흘 내로 마무리하죠.”
“네, 네?”
박철완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식겁했다.
“사, 사흘이요?”
“왜? 못하겠습니까?”
“그, 그건…….”
너무 촉박하다.
사흘 밤을 꼴딱 새워도 못할 것 같다.
태수가 말했다.
“이번 연속극은 하늘이 주신 기회입니다. 아파트 분양 성공을 위해 더할 나위 없는 홍보 수단이라는 점을 명심하십시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임시 스튜디오 겸 모델 하우스를 짓는 겁니다.”
아, 회장님이 이렇게 말하면…….
박철완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흘까지 어떻게든 해 보겠습니다. 맡겨 주세요.”
“좋습니다.”
홀쭉이도 주먹을 꽉 쥐었다.
“지금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네. 난 먼저 방으로 돌아가 볼게. 내일 미팅 때 몇 가지 제안할 내용을 검토하려면 준비해야 할 것 같으니까.”
“카메라 지원, 스태프 충원, 소품 및 촬영 장소 제공, 협찬과 광고까지.”
통도 크다.
“추가 제작비 지원까지 할 생각입니다. 태양 아파트 성공과 이번 드라마 성공이 같이 갈 것 같으니 말이죠.”
태수는 이쪽으로 홍보 방향을 확실히 정했다.
홀쭉이는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홀쭉이가 술을 마다하고 등을 돌렸다.
서둘러 뛰어가다가 후다닥 돌아와서 바텐더에게 한마디를 남긴다.
“내가 깐 양주, 루이 13세, 그거 킵해 줘요!”
양주잔에 남은 비싼 술을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입안에 탈탈 털어 넣는다.
그제야 태수에게 제대로 인사하고 다시 후다닥 달려간다.
태수가 박철완을 보았다.
“모델 하우스와 관련돼서 준비할 사항이 많을 겁니다. 할 수 있겠습니까?”
“해야죠! 무조건 해야죠!”
박철완의 눈도 홀쭉이 못지않게 이글이글 불타오른다.
“최고급 신개념 아파트를 표방하는 태양 아파트입니다. 제가 몇 년이나 공들여 기획하고, 구상하고, 도면을 그리고, 꿈을 갈아 넣은 일생의 역작이 될 거예요. 끝까지 밀어붙여야죠.”
이깟 야근 따위!
내가 하루 이틀 야근한 것도 아니고!
사흘 밤낮을 꼬박 새우며 일하는 게 한두 번도 아니고!
“모델 하우스, 반드시 멋지게 지어 보이겠습니다!”
“좋습니다.”
박철완 역시 의욕에 불타서 양주를 한입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 펼쳐 놓았던 도면을 다시 둘둘 말아 가방에 넣는다.
이어 태수에게 정중히 인사한 후 각 잡힌 걸음으로 바 안쪽의 VIP룸으로 걸어간다.
“아버지! 이만 집에 갑시다!”
룸 안에서 남은 위스키를 마시고 있던 박태종이 질질 끌려왔다.
“난 그냥 이대로 내버려 둬. 혼자 남아 전우들과의 옛 추억을 곱씹고 있는데…….”
박철완이 박태종 입에 물려 있는 마른오징어를 뽑아냈다.
“오징어 따위를 옛 추억이라고 우기지 마시고요. 저 바빠요. 아버지 못 기다려요. 할 일이 많다고요.”
“골든 벨 울렸다. 저 위스키는 진짜 괜찮은 놈인데…….”
“작작 좀 드세요! 아버지 지방간 있다고 어머니가 저한테까지 전화해서 잔소리하시잖아요. 지금 당장 포항에 전화 걸어요?”
“…….”
처음 보는 아들의 강경한 태도.
옛 전우들이랑 술자리를 나눠도, 밖에서 끝까지 아버지를 기다리던 순한 놈인데.
아들의 눈이 번뜩이고, 도저히 꺾지 못할 남자의 각오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박태종이 위스키병을 내려놓으며 벌떡 일어섰다.
“누가 우리 아들 가슴에 불 질러 놨어? 순한 놈이 일 얘기만 나오면 눈 돌아간다니까!”
박태종의 눈길이 아주 따가워 죽겠다.
태수는 정중하게 인사했다.
“다음에도 한 잔, 제대로 사겠습니다.”
“흠흠!”
“골든 벨, 까짓것 한 번 더 울리죠. 어떻습니까?”
“……뭐, 젊은 사람들이 일하느라 바쁘다는데 내가 이해해 줘야지.”
박철완이 순간 숨을 들이마셨다.
“설마 그 골든 벨…….”
홀쭉이가 남긴 양주병과 배를 잡고 웃던 김광록, 그리고 씁쓸하게 술잔을 기울이던 태수.
모든 퍼즐이 맞아떨어졌다.
* * *
서울 서소문동에 위치한 중세 매스컴 센터.
중세 일보와 한 건물을 쓰고 있는 TBS 동인 방송이다.
미팅으로 마련된 회의실 룸에서 방송국 관계자들이 먼저 기다리고 있었다.
태수와 홀쭉이 뒤로 김광록과 송창준이 들어선다.
방송국 관계자가 일제히 일어섰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일단 앉으시죠.”
태수를 사이에 두고 송창준과 홀쭉이가 옆에 앉았다.
김광록이 태수의 뒤에 섰다.
“어제 갑자기 연락 드려서 당황하셨죠?”
“아닙니다. 협찬 전화라면 언제나 두 팔 벌려 환영하지요. 고민하지 마시고 연락 주시면 됩니다. 하하하.”
돈 준다는데 자다가도 일어나서 버선발로 달려가야죠.
홀쭉이는 방송국 관계자와 이미 안면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들은 전혀 어색해하지 않았다.
‘하여간 홀쭉이, 마당발이라니까.’
대체 언제 방송국까지 드나들었는지 모르겠다.
시청과 구청을 들락거리기도 바빴을 텐데 말이다.
그런데 다짜고짜 저쪽에서 본론으로 훅치고 들어왔다.
“김 실장님, 일일 연속극에 갑자기 관심을 보이시는 이유가 따로 있습니까? 아무래도 제작이 어려울 것 같다고 제대로 설명했던 것 같은데요.”
“여기 우리 회장님께서 관심을 보이셔서 말이죠.”
“저기, 회장님이라면…….”
방송국 관계자들이 자연스레 눈을 돌려 회장을 찾는다.
재벌 회장 정도 나이가 지긋한 사람이 아무도 없다.
그렇다고 김광록을 보자니 너무 살벌해서 감히 눈을 마주칠 수도 없다.
다들 혼란스러운 눈을 하고 있었다.
태수가 웃으며 말했다.
“태양 그룹의 강태수입니다.”
다들 놀라는 눈치였다.
아무리 봐도 20대 초중반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믿기지 않는 눈으로 태수를 보았다.
솔직히 젊은 나이에 홍보실장을 맡고 있는 홀쭉이보다도 나이가 어려 보인다.
“이번에 CF까지 같이 제작하신다기에 CF 모델로 데려오신 분이신 줄 알았습니다.”
저 얼굴로 그룹 회장이라니!
놀람도 잠시, 방송국 관계자들은 재빨리 인사를 했다.
“태양 그룹의 회장님을 만나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회장님께서 직접 오실 줄은 아무도 상상을 못해서요.”
태수가 웃으며 눈짓했다.
그러자 송창준이 준비해 온 자료를 한 부씩 돌렸다.
방송국 관계자들은 자료를 읽기 시작했다.
다들 놀라 눈이 동그래진다.
“스튜디오를 제공하신다고요?”
“외부 촬영을 위해 중장비와 인부 및 공터도 함께 지원해 주신다니 정말입니까?”
“방송용 카메라와 세트에 필요한 자재까지?”
“거기에 협찬에 광고까지 맡긴다니…….”
조건이 너무 좋다.
이런 조건은 받아 보기도 처음이다.
태수가 손가락 하나를 들어 올렸다.
“이것과 별도로 1억. 추가 투자하겠습니다.”
사람들은 입을 떡 벌렸다.
홀쭉이와 인사를 나눴던 사람이 제대로 자신을 소개한다.
“TBS 드라마 CP(Chief Producer) 고석만입니다.”
CP는 최고 책임 프로듀서로 보통 국장급, 부장급 PD를 일컫는다.
해당 제작국에 할당된 프로그램을 맡은 PD들을 조율하고, 제작 인력 및 기술진과 출연진의 인사를 관리하고, 프로그램 기획을 맡는다.
한마디로 프로그램 전반에 책임을 지는 총책임자다.
“안 그래도 촬영 장소 때문에 엎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고민했던 연속극입니다.”
야심 차게 준비했던 드라마다.
촬영이 힘들어 엎던 그 심정은 아무도 모른다.
“이렇게 태양 그룹에서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면 다시 논의해 볼 여지는 충분합니다.”
고석만 CP가 눈짓한다.
방송국 직원이 태수 쪽에 자료를 돌린다.
“저희 쪽에서 준비한 자료입니다.”
태수는 처음으로 일일 연속극의 제목을 보게 되었다.
<불꽃처럼 타오르다>
태수가 극본을 넘겨본다.
기획 의도와 줄거리가 적혀 있었다.
제작 담당자들의 이름도 함께였다.
고석만 CP는 말했다.
“국장님 선까지 올라가서 다시 논의해 봐야 확실하게 제작 여부가 결정될 겁니다.”
“으음.”
“하지만 이 정도 지원이라면 아마 수월하게 통과될 것 같습니다.”
고만석은 이미 입이 귀에 걸려 있었다.
당장 달려가고 싶어서 엉덩이가 자꾸만 들썩일 정도였다.
왜 안 그렇겠나.
스튜디오 사정 때문에 무산될 기로에 놓였던 작품이 부활하게 생겼다.
그것도 엄청난 지원과 투자를 받으면서 날아오를 것 같다.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극본은 이미 나와 있습니다. 제작을 담당할 자들도 미리 추린 이후고요.”
태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까지 온 김에 간단하게나마 연속극에 대해 소개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지요. 자, 여기 보시죠.”
고석만은 기획 의도와 줄거리를 보여 주며 말했다.
그 바로 밑에는 남자 주인공 배역에 대한 설명이 나와 있었다.
<명석한 두뇌와 끈질긴 집념, 두둑한 배짱으로 거침없이 일을 처리하는 야심가.>
<야망을 위해 여자를 이용하고, 사랑은 믿지 않는다고 외치지만 결국 사랑을 놓지 못하는 로맨티스트.>
“남자 주인공으로는 노주혁과 한진휘, 둘 중 한 명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70년대 TBS 간판 남주 투톱이 노주혁과 한진휘였다.
KBC에는 이영한이, MBS에는 이정기와 박규형 투톱 시대였다.
당시는 방송사에서 전속 탤런트를 뽑아 운영하던 때로, 남자 간판 스타가 드라마의 성패를 좌우하곤 했다.
‘70년대 드라마와 예능에서는 워낙 TBS 위상이 높았지. 70년대 최고의 스타로 다들 노주혁과 한진휘를 꼽곤 했으니까.’
이때 당시 노주혁과 한진휘의 인기가 얼마나 높았는지 모른다.
21세기의 장동건, 원빈, 정우성만큼이나 유명한 꽃미남 스타였다.
“우리 TBS 연속극의 간판 스타죠. 이번 연속극은 남자의 이야기를 다룰 예정이기 때문에 남자 주인공에 특별히 신경 쓰겠습니다.”
“아주 만족스럽습니다.”
“이번엔 여자 주인공입니다.”
태수는 여자 주인공의 설명을 읽었다.
<청순하고 가련한 첫사랑의 그녀.>
<이용당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랑하는 남자를 위해 끝내 목숨까지 바치는 순애보.>
만족스럽다.
주부를 비롯한 여성 시청자와 남성 시청자를 동시에 공략하려면 사랑과 야망, 어느 쪽도 빠져선 안 된다.
“우리 TBS 간판 스타인 강부지, 여운경, 선우웅녀 세 명 중 한 명은 써야 회장님께서도 면이 좀 살지 않겠습니까?”
여자 주인공 후보들의 이름을 듣자 반사적으로 헛웃음이 나왔다.
‘후덕한 어머니상의 강부지, 날카롭고 뾰족한 얼굴의 여운경, 맹하면서도 잔소리를 잘할 것 같은 선우웅녀?’
이건 아니잖아!
태수의 속도 모르고 고석만은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여자 주인공 후보들이 쟁쟁하죠? 연기력과 이름값, 두 가지를 모두 갖췄으니 흥행 보증 수표로는 딱이죠.”
안다.
그녀들이 지금 TBS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는 것을.
오죽하면 강부지 같은 경우엔 한 달 동안 방송을 30개나 한다는 말이 나올까.
일일 연속극을 틀면 안 나오는 데가 없고, 라디오 방송까지 하는 스타 중의 스타다.
‘하지만 청순가련형 여자는 아니지. 우리 태양 아파트의 이미지와도 너무 안 어울려.’
남자 주인공을 내놓을 땐 반색하던 태수가 아닌가.
그런데 여자 주인공 후보를 보자 태수가 한참이나 말을 하지 않는다.
딱. 딱. 딱. 딱.
태수가 손끝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며 생각에 잠긴다.
방송국 관계자들은 서로 눈치만 보고 있다.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지금 태수가 여자 주인공을 매우 못마땅해하고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