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난장판을 위하여(4)
박태종은 기가 차서 위스키 잔을 거칠게 테이블에 쾅 올렸다.
“10억? 1억도 아니고, 진짜 10억이나 군자금으로 요구했단 말인가?”
“네, 그렇습니다.”
“이 새끼가 미쳤나. 군인한테 그 많은 돈이 왜 필요해?”
말이 되지 않는 금액이었다.
그것도 초면인 재벌 총수를 따로 불러 요구하기엔 너무 과하다.
이세호가 위스키를 한입에 털어놓고 물었다.
“다른 용건은?”
“태양 그룹을 박살 내겠다고 하더군요. 동생의 결혼 예물로 한청호 회장에게 주겠다고 했습니다.”
“이런 미친!”
박태종은 참지 못하고 욕을 뱉었다.
위스키를 물처럼 마신 후 태수를 다시 한번 본다.
“그게 사실인가?”
“네.”
“전두호가 진짜 그런 개소리를 내뱉었다고?”
“네.”
“태양 그룹을 박살 내겠다는 이유가 뭔가?”
“저 때문에 군자금이 줄었다더군요.”
장군들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다.
제1 야전 사령관 정승환이 침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두호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뛰는군요.”
이세호가 주먹을 꽉 쥐었다.
“각하의 비호를 등에 업고 저리 오만방자하게 구는 게 하루 이틀인가.”
장태원이 분개했다.
“사방에 오성회 사람들을 심어 놓고 핫라인을 가동한다고 들었습니다.”
박태종이 태수를 돌아보았다.
“듣자 하니 아까 전두호가 차기범과도 한판 붙었다던데, 아는 게 있나?”
박태종과 장군들은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전두호와 차기범이 한 판 붙은 사실에 대해 자세히는 모른다.
“전두호가 차기범한테 먼저 시비를 걸었다지?”
“보안 사령관의 보고를 차기범 경호실장께서 받는 것이 불만이라고 하셨습니다.”
“으음.”
장군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거야 전임 보안 사령관이 각하를 두려워해서 직접 대면하길 꺼려 했던 탓이지.”
“차라리 차기범에게 보고하기로 서로 합의를 봤던 일이야.”
“그러니 새로 보안 사령관이 된 전두호로서는 불만이 있을 수 있지.”
박태종이 물었다.
“그래서 차 실장은 뭐라고 하던가?”
“계엄 선포 시 보안사가 어떻게 정국을 바로잡고 수습할 수 있을지에 대한 ‘시국 수습 방안 연구’를 시켰다던데, 왜 계엄 선포 이후를 연습하는 거냐고 물으셨습니다.”
장군들의 안색이 변했다.
태수가 차기범이 했던 말 그대로 쐐기를 박았다.
“각하께 무슨 일이라도 생긴 이후를 대비하는 것 같다 하시며 이래도 반역 모의가 아니라고 잡아뗄 셈이냐고 물으셨지요.”
룸에는 정적이 흘렀다.
한참이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간혼 낮은 탄식 소리나 마른침 삼키는 소리만 들려올 뿐이다.
박태종이 위스키 한 잔을 벌컥벌컥 마신다.
쾅 소리가 나도록 술잔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다.
“이게 다 무슨 소리야?”
이세후 육군 참모 총장이 휘하 장군들에게 물었다.
“오성회가 그런 것을 모의하고 있었나? 이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 없나?”
정승환이 대답했다.
“오성회가 무슨 일을 꾸미는지 알 방도가 있겠습니까? 정보는 전두호가 꽉 잡고 있고, 아래로는 끼리끼리 비밀 결사대처럼 움직이는데.”
장태원이 한숨을 쉬었다.
“오성회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숨어들었는지도 모릅니다. 누가 오성회 회원이고, 누가 아닌지도 모르는 판에 오성회가 하는 일을 우리가 어찌 알겠습니까?”
장군들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경각심이 바짝 들었다.
“군에 사조직이 이토록 기승을 부리다니.”
전생엔 모른 척 넘어갔던 일이다.
하지만 지금은 오성회 문제가 육군 참모 총장 앞에 수면 위로 떠올랐다.
이세후 육군 참모 총장이 이를 갈았다.
“진짜 반란 모의를 했다고 해도 까맣게 모를 뻔했지 않나. 정작 군대를 움직이는 우리보다 차기범이 정보가 더 빨랐다는 게 말이 돼?”
이세후 육군 참모 총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자 다른 장군과 박태종이 놀라서 물었다.
“어쩌시려고요?”
“당장 전두호 새끼를 잡아다가 족쳐야지!”
태수가 위스키를 한 모금 마시면서 물었다.
“무슨 일로 잡아다가 족치실 겁니까?”
“군대 내 사조직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잖나! 반란을 모의했어!”
“증거는 있으십니까?”
장군들이 멈칫한다.
태수는 계속했다.
“전두호 보안 사령관은 각하의 총애를 듬뿍 받아 초고속 승진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군대 내 사조직인 오성회 역시 각하께서 눈감아 주고 계시죠.”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래서 이토록 문제가 큰 것이고.
“이런 상황에서 오성회 구성원이 누군지도 모르고, 어떤 일을 하는지도, 어디까지 진척되었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족칠 생각입니까?”
그런 이유로 이제껏 보고도 못 본 척, 알고도 모르는 척 눈감아 오지 않았던가.
장군들도 바보는 아니다.
섣불리 전두호를 건드렸다가 박정환과 척을 질까 두려울 뿐이다.
“차라리 먼저 차기범 경호실장을 한번 만나 보면 어떠십니까?”
“차기범을?”
“오성회가 무슨 일을 꾸미는지 제법 많이 알고 계시는 것 같던데요.”
확실히 자신들보다 차기범이 한발 빨랐다.
육군 참모 총장 이세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생각이야. 차기범을 만나 보지. 말 나온 김에 지금 가는 게 어떤가.”
“좋습니다.”
각자 주둔지에서 멀리 나오기 힘든 처지다.
박정환이 불렀다는 이유로 함께 모였을 때 차기범과 한번 만나 보는 게 좋을 터다.
“만나서 반가웠네.”
태수에게 악수를 내미는 육군 참모 총장 이세후.
태수는 악수할 때 몰래 손바닥에 미리 적어 놓은 쪽지를 숨겨 건넸다.
이세후의 눈동자가 잠깐 커졌다 본래대로 돌아온다.
그는 내색하지 않았다.
“다음에 또 만나지.”
따로 연락하겠다는 뜻이다.
장군들이라 그런가 실행력 하나는 끝내준다.
말 끝나기가 무섭게 주섬주섬 옷을 챙겨서 그대로 룸을 나갔으니까.
박태종은 두 손을 뻗었지만 차마 옛 전우를 붙잡지 못했다.
“이렇게 인사도 없이…….”
장군들이 떠났다.
차기범 경호실장을 만나러.
‘차기범은 이번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박정환의 총애를 두고 전두호와 암투를 벌이는 차기범이다.
멍청하게 전두호를 누를 수 있는 장군들을 그냥 떠나 보내진 않을 거다.
‘차 실장님, 제가 당신의 등에 날개를 달아 드린 겁니다.’
차기범이 이들과 함께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 * *
태수와 김광록이 룸에서 나왔다.
김광록이 넋이 반쯤 나간 얼굴로 태수를 본다.
“인사만 하고 온다더니, 아주 일을 거하게 치더라.”
“전 인사만 하려고 했습니다.”
“…….”
그건 그렇다.
태수는 장군들을 처음 만난 인사로 골든 벨을 울렸을 뿐이다.
장군들이 크게 기꺼워하며 태수를 앉힌 것이지 태수가 자청해서 읍소를 올린 게 아니다.
“못 당하겠다. 넌 머리가 왜 이렇게 잘 굴러가냐? 옆에서 보면 진짜 기가 찬다, 기가 차.”
김광록이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었다.
“무슨 놈의 인사 한 번 하는데 이 나라 장군들이 저리 심각한 얼굴로 청와대까지 쳐들어가냐고.”
“제 잘못은 아니죠.”
“…….”
그것도 그렇지.
김광록은 말문이 턱 막혀서 고개를 다시 한번 절레절레 저었다.
말로는 도저히 상대가 안 된다.
“골든 벨을 울렸는데, 어째 술 한 잔도 못 얻어 마셨다. 쩝.”
김광록이 입술을 핥는다.
비싼 양주가 눈에 아른거리니 이대로 나오는 게 아까워 죽겠다.
밖에서는 홀쭉이와 박철완이 함께 술을 마시고 있었다.
분위기가 좋아 보였다.
“무슨 얘기를 그리 재밌게 해?”
“어? 태수야, 인사는 잘하고 왔어? 생각보다 좀 늦었다.”
장군들을 부추기느라 잠시 앉아 있었지.
“태수야, 아까 누군가가 골든 벨 울렸다? 너도 앉아서 실컷 마셔. 흐흐흐.”
누가 골든 벨을 울렸는지 알고 있는 김광록이 홀쭉이 옆자리에 털썩 앉는다.
그러더니 홀쭉이가 마시고 있는 양주병을 살펴보고 기겁을 한다.
“이거 진짜야? 레미 마르땡 루이 13세 코냑이라니! 금산 호텔이 이런 비싼 술도 들여왔어?”
“예전에 이곳 호텔에 사우디 왕자가 왔었는데, 싸구려 와인밖에 없어서 부끄러웠다나 뭐라나. 그 이후 호텔 바에 최고급 술을 비치하기로 결정했다지 뭐야.”
“…….”
루이 13세라면 한정판으로 나오는 초고가 술이다.
무려 세계 5대 코냑 회사의 제품이다.
설마 아니겠지.
“흐흐흐, 이번에 특별히 한국에 딱 세 병 들여왔대. 벌써 두 병은 채갔고, 마지막 한 병을 내가 땄지.”
“…….”
태수는 말없이 술잔을 내밀었다.
홀쭉이가 듬뿍 따라 주었다.
“많이 마셔. 이럴 때 비싼 술 마셔야지 나중에는 제 돈 주고 절대 못 마신다. 흐흐흐.”
“…….”
제 돈 주고 마시는 술이다.
그 모습을 보고 김광록이 잇몸을 드러내며 웃었다.
“어디 나도 한 잔 넘치도록 따라 봐라, 홀쭉아.”
“아, 물론 광록이 형님도 많이 드셔야죠.”
김광록이 휘파람을 불었다.
“이야, 골든 벨 울린 사람이 누군지 몰라도 속이 꽤 쓰리겠는데?”
“흐흐흐, 그렇죠? 최고급 술이라기에 이번 기회 놓치면 다시는 못 마실 것 같아서 눈 딱 감고 이거 땄거든요.”
홀쭉이가 실실 웃는다.
“제가 이번에 집을 엄청 비싸가 팔았잖아요. 에라, 모르겠다, 하고 오늘만 산다고 마개를 딱 따는 순간, 하늘이 도와서 골든 벨이 딸랑딸랑 울렸다니까요.”
“크하하핫!”
김광록이 배를 잡고 웃는다.
태수는 순식간에 한 잔을 비우고, 술잔을 내밀었다.
“한 잔 더.”
“좋지. 내가 태수 네 덕에 집 팔았잖아. 엄청 비싸게. 흐흐흐. 넌 마셔도 돼. 마셔!”
“…….”
태수에게 한 잔 더 따라 주면서 홀쭉이가 고개를 갸웃댄다.
“태수야, 너 오늘 표정이 이상해.”
“크하하핫!”
“하는 일마다 잘 풀리는데, 왜 오늘따라 이런 표정을 지을까?”
“크하하하하하!”
김광록이 도저히 못 참고 테이블 위로 엎드려 주먹을 쿵쿵 치며 웃었다.
“광록이 형님은 또 왜 이래? 아까부터 정신 나간 사람처럼 웃어 대네.”
영문을 모르는 홀쭉이만 고개를 갸웃댈 뿐이었다.
태수는 박철완을 보며 말했다.
“이번에 아파트 건설 변경에 대해 들으셨습니까?”
일 얘기가 나오자 박철완이 자세를 바로 한다.
“들었습니다. 총 58개 동 중에 12개 동을 먼저 올리려고 하신다고요.”
“계획이 변경된 경우 어떤 문제가 있는지, 또한 주민 공동 시설과 관련하여 최우선 순위로 둘 시설이 있는지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박철완이 늘 들고 다니는 서류 가방을 테이블 위에 올린다.
금산의 기념행사에 오면서도 중간에 시간이 날 때마다 확인하기 위해 일부 서류를 가지고 다니는 박철완.
박철완이 가방에서 돌돌 말린 도화지를 꺼내 편다.
아파트 전체에 대한 건설 계획도였다.
“1단지를 어느 쪽부터 짓느냐 결정해야겠군요. 회장님 생각은 어떠십니까?”
“아파트 단지를 끼고 돌아가는 도로 공사와 함께 생각해야겠죠.”
“예, 모두 3면에 큰 도로를 끼고 있으니까요.”
“지도 좀 봅시다. 영동대로가 이쪽이고…….”
도면을 가운데 두고 태수와 박철완이 머리를 맞댄다.
홀쭉이와 김광록이 술을 들고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여기에서까지 이러고 싶나 몰라. 술 마실 때는 술을 마셔 줘야지. 이러려고 최고급 꼬냑을 딴 게 아닌데. 술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르겠네.”
“크하하, 내비 둬라. 나는 눈 뜨고 봐도 모른다. 머리에 쥐 나니까 우린 술이나 마시자.”
“역시 광록이 형님. 나랑 통하는 게 있으시다니까.”
“크하하핫!”
태수가 차가운 눈으로 홀쭉이를 보았다.
“내일까지 CF 광고 계획서 올리는 건 잊지 않았겠지?”
“…….”
“비싼 술 마신 값은 해야지.”
“…….”
홀쭉이는 슬그머니 술잔을 내려놨다.
홀쭉이가 투덜댔다.
“벌써 전화 다 돌렸어. CF 모델도 결정했고. 내일 모델이랑 미팅도 잡았어.”
“음?”
“드라마도 알아봤어. 일일 연속극 협찬을 위해 내일 당장 방송국 관계자들과 미팅하기로 약속했고.”
빠르다.
지시를 내린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저번에 홍보실 예산 늘려 줬잖아. 덕분에 네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여기저기 골고루 기름칠해 놨어.”
홀쭉이가 생각보다 일을 잘해 주고 있었다.
“어느 방송국이랑 미팅하는데?”
“TBS 동인 방송국.”
“동인 방송? 삼청 그룹 계열의 방송국?”
훗날 삼청 그룹의 총수가 될, 이병춘 회장의 3남 이건후가 현재 맡고 있는 방송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