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난장판을 위하여(3)
금산 호텔 바에서 혼자 술을 마시고 있는 남자는 박철완이었다.
김광록이 껄껄 웃었다.
“도통 전화를 안 받더니 여기 있었네.”
태수가 그쪽으로 다가가자 박철완이 뒤를 돌아보고 놀랐다.
“어? 회장님이 여긴 어쩐 일이세요?”
“술 한잔하러 왔죠. 그러는 박 사장은 여긴 어쩐 일입니까?”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박철완이 금산 호텔 바 안쪽 룸을 힐끔 본다.
박철완의 아버지라면 포항 철강 사장 박태종이다.
“포항 철강 박 사장님께서도 오셨습니까? 홀에 있지 않으시고 왜…….”
금산 창립 30주년 기념행사에 초대장을 받은 건 당연한 일일 터다.
거기서 아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을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따로 이 시간에 바에서 회동을 하는지 궁금했다.
“오랜만에 옛 전우를 만나셔서 신이 나셨어요. 남들 눈치 보지 않고 따로 술 한잔 마신다고 여기 왔죠.”
“전우?”
“아버지는 대통령 각하를 따라 군복을 벗었지만 아직 군에 남으신 인연이 꽤 됩니다.”
의아했다.
박태종의 전우라고 한다면 군에서 꽤 높은 직위에 있을 터다.
함부로 근무지를 이탈해서 모이기도 어려울 텐데.
“박 사장님의 인연이라면 지금쯤 별을 달고 계실 것 같군요. 쉽게 뵙기 어려운 분이겠습니다.”
“이번에 각하께서 부르셔서 한달음에 달려왔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아버지께서 저리 좋아하시며 따로 술 한잔하자고 청하시게 된 겁니다.”
“각하께서요?”
이제야 이해가 간다.
보안 사령관 전두호에 중앙 정보부 부장과 차장까지 부른 박정환이다.
다른 별들도 한자리에 불렀을 수 있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박철완이 다시 한 번 더 힐끔 룸을 본다.
“차마 집에 가자고 방해할 수가 없어서 본의 아니게 저도 여기서 한잔하고 있죠, 뭐.”
누굴까?
저 룸 안에서 박태종과 함께 술을 마시고 있는 옛 전우는.
‘궁금한데.’
들어가고 싶다.
하지만 들어갈 수 없다.
“안에 계신 분들이 누군지 물어봐도 됩니까?”
“이세후 육군 참모 총장, 정승환 제1 야전군 사령관, 장태원 수도 경비 사령부 참모장입니다.”
화려하다.
그야말로 별들의 회동이라고 할 수 있다.
자연스럽게 태수의 눈이 룸으로 꽂혔다.
‘지금 육군 참모 총장이 이세후로군. 이후 육군 참모 총장이 되는 사람은 정승환인데.’
전생에 정승환 이야기는 유명하다.
육군 참모 총장 재임 시절 10.26 정변이 터진다.
대통령인 박정환과 경호실장 차기범이 한 자리에서 암살당하고, 암살범으로 중앙 정보부 부장인 김재규가 지목된다.
덕분에 중앙 정보부는 대통령 암살의 주범이 되어서 모든 활동이 일시 정지된다.
그때 급부상한 자가 바로 보안 사령관 전두호다.
‘중앙 정보부가 완전히 먹통이 되니 보안 사령부가 정보를 통제하고, 대통령 암살 주범을 잡는다는 이유로 모든 권력을 한 손에 틀어쥐게 됐었지.’
전두호는 이후 12.12 군사 반란을 일으킨다.
정보를 통제하는 유일한 기관의 수장이고, 오성회를 이용해 군을 장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전두호는 참모 총장인 정승환을 납치하고, 수도 경비 사령관이 된 장태원은 끝까지 정승환을 구출하기 위해 노력했지.’
정승환은 전두호가 오성회를 육성하는 걸 늘 탐탁지 않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전두호가 박정환의 총애를 등에 업고 오성회를 묵인하자 차마 손을 댈 수 없었다.
그것이 화를 불러일으키고 만 것이다.
‘전생에 정승환은 이를 두고 땅을 쳤다고 하지.’
전두호보다 계급이 높으면 무엇을 하나.
이미 전두호의 오성회가 실질적으로 군대를 장악해 버리고 만 것을.
육군 참모 총장이 납치를 당했을 때 이미 게임은 끝났다.
‘현재 수도 경비 사령부 참모장인 장태원. 정승환의 신임을 받던 충직한 군인이었다지.’
육군 참모 총장이 된 정승환 덕분에 장태원은 수도 경비 사령관으로 승진시키게 된다.
‘장태원 휘하 수경사 전투 병력을 운용하는 장교들이 전부 오성회 출신이라 직속 상관인 장태원을 배신하고 반란군에 가담했었지.’
수도 경비 사령부는 5.16 군사 정변 직후 서울을 장악한 정변 세력의 보호를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또한 대통령 경호실 소속 장교들도 오성회 출신이기에 경호 부대까지 반란에 가담한다.
순식간에 국무총리의 공관을 불법적인 무력 형태로 장악하게 된다.
‘반란이 성공하자 수경사 우두머리인 장태원은 쫓겨나고 그 자리를 노태오가 차지했다.’
장태원과 노태오가 원수가 된 이유였다.
‘흠, 전생에서 전두호의 반대 세력이 오늘 한자리에 모였구나.’
구미가 당긴다.
한번 만나고 싶다.
‘어떻게 접촉하지?’
태수가 생각에 잠겼다.
홀쭉이가 박철완에게 술을 따라 주며 물었다.
“그런데 굳이 이렇게 밖에 나와 혼자 술을 마시지 않아도 될 텐데요. 아버지 친구들이 술 한잔도 안 주시나 보죠?”
“군사 기밀이라고 내쫓으시더라고요.”
아들인 박철완도 쫓겨나는 자리가 아닌가.
태수는 김광록을 보며 씩 웃었다.
“광록이 형님, 인사 좀 다녀와야겠습니다.”
별생각 없이 술 마시면서 웃던 김광록이 의아해한다.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눈을 동그랗게 뜬다.
“나?”
“네.”
“인사를 간다고? 어디에?”
“박태종 사장님께서 형님을 제게 보내 주셨지 않습니까. 감사 인사를 드려야 하는데 포항까지 한 번을 못 내려갔잖아요. 이참에 인사드리죠.”
태수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김광록은 얼떨떨하게 본다.
“태수야, 못 들었냐? 우리가 낄 자리가 아닌 것 같은데.”
“언제 그 자리에 낀답니까?”
태수는 뻔뻔하게 웃었다.
“인사만 하고 나올 겁니다, 인사만. 뭐 합니까? 일어나세요.”
김광록이 머리를 긁적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까마득한 별 잔치에 내가 어떻게 막무가내로 들어가? 군복 안 벗었으면 나 영창 갔어, 인마.”
마지못해 휘적휘적 따라오는 김광록이었다.
* * *
금산 호텔 바의 VIP룸 앞에 선 태수와 김광록.
태수는 수첩에 펜으로 뭔가를 휘갈겨 적는다.
“너 뭐 하냐?”
“쪽지 씁니다.”
“무슨 쪽지? 전화번호 교환이라도 하려고?”
“어떻게 아셨습니까?”
“…….”
무슨 농담을 이렇게 끔찍하게 하느냐는 표정으로 태수를 보는 김광록.
태수는 수첩을 북 찢고 두 번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들어가겠습니다.”
“자, 잠깐만.”
평소와 달리 눈에 띄게 긴장한 표정을 짓고 있는 김광록.
그가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흠흠, 하고 목청까지 고른다.
비장한 표정으로 태수를 돌아보고, 고개를 끄덕인다.
똑똑.
그러자 룸 안에서 목소리가 들린다.
“뭐야?”
“박 사장님, 태양 그룹의 강태수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오, 강 회장 왔나?”
잠시 뜸을 들인 후 안에서 허락이 떨어졌다.
“들어오게.”
태수가 문을 열었다.
제일 먼저 보이는 건 뿌연 담배 연기였다.
그 후에 위스키와 안주가 올린 테이블을 따라 둘러앉은 네 명의 전 현직 군인이 보인다.
다들 박태종과 비슷한 또래이고, 같이 군 생활을 했던 전우이기도 하다.
박태종이 태수를 보고 반가운 표정으로 손을 들었다.
“강 회장, 오랜만이네. 안 그래도 오늘 찾았는데 안 보여서 실망한 참이야.”
“절 찾으셨습니까?”
“지난번에 태양 그룹 출범식 때도 축하한단 인사 한번을 못했지 않나.”
태양 그룹 출범식에 박철완과 함께 오느라 좀 늦었다.
오자마자 박정환에게 끌려가느라 박태종은 태수와 말 한마디 섞지 못했다.
“아, 인사들 하지. 이쪽은 내 옛 전우들이라네. 오랜만에 만나서 반갑게 한잔하는 중이었어.”
박태종이 장군들을 가리키며 웃었다.
하지만 평소와 달리 한마디를 꼭 덧붙인다.
“그런 이유로 오늘은 자네와 오랫동안 함께하기 힘들 것 같네.”
불청객은 받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태수도 각오한 바였다.
“인사부터 올리겠습니다. 안녕하십니까, 태양 그룹의 강태수입니다.”
태수가 90도로 반듯하게 허리를 접어 인사했다.
박태종의 오른쪽으로 육군 참모 총장 이세후, 제1 야전 사령관 정승환, 수도 경비 사령부 참모장 장태원이 앉아 있었다.
그들은 태수를 반기지 않았다.
대신 다른 이를 반겼다.
“김 중령, 오랜만이야.”
“오, 김 중령, 자네를 여기서 볼 줄이야.”
“김 중령이 여기까지 웬일인가?”
다들 태수보다 김광록을 더 반기고 있었다.
김광록은 군인 자세로 돌아가 경례를 올렸다.
“퇴역 군인 김광록, 장군들께 인사 올립니다.”
김광록이 태수를 정식으로 소개했다.
“제가 이번에 경호를 맡게 된 태양 그룹 총수이십니다.”
세 명 장군들의 시선이 일제히 태수에게 쏠린다.
저 흉폭한 간첩 사냥꾼 김광록이 얌전해서 놀라는 중이었다.
그 고삐를 틀어쥐고 있는 고용주를 보게 되니 조금은 신기한 모양이다.
박태종이 슬쩍 한마디 보탰다.
“내 아들의 직장 상사이기도 해.”
그러자 태수를 보는 눈에 흥미가 더한다.
“아들? 철완이 말인가?”
“아버지가 포항 철강 사장인데, 남의 회사에 들어갔단 말입니까?”
박태종이 군인들의 호기심을 끌 만한 말을 추가했다.
“다들 사우디에서 중동 전쟁을 조기 종결하게 만든 주역에 대해 들어 봤겠지? 바로 여기 이 사람이 사우디 국왕에게 친히 명예 훈장을 받은 자라네.”
장군들의 시선이 매우 호의적으로 변했다.
특히 육군 참모 총장 이세호가 호기심을 드러낸다.
“그 얘긴 나도 들었네. 자세히 들을 수 있겠나?”
맨 끝자리에 앉았으며 이들 중에 나이로도, 계급으로도 가장 아래인 장태원이 제 옆자리를 팡팡 두드렸다.
“일단 앉지.”
“감사합니다.”
태수가 장군들을 돌아보며 웃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장군들을 처음 만난 기념으로 제가 골든 벨 한 번 울려도 되겠습니까?”
박태종이 크게 웃었다.
“울려!”
장군들의 얼굴이 활짝 폈다.
“앉아서 한 잔 마시고 가.”
골든 벨을 울릴 이유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 * *
육군 참모 총장 이세후가 묻는다.
“무려 중동 반도에 있는 국가들이 전부 참가한 전쟁이 벌어졌는데 고작 3주 만에 끝났다니 믿기지 않을 정도였어. 자세히 좀 말해 주게.”
태수가 간략히 사우디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말한다.
차마 라흐만의 뻥과 이를 묵인한 사우디 국왕에 대해서는 말 못하겠다.
그저 사우디 국왕에게 세 가지 계책을 알려 준 이야기를 꺼냈을 뿐이다.
“그렇게 도로 공사 끝내러 갔다가 사우디에서 병참 기지까지 짓게 됐다고? 하하하.”
“석유 회사를 몰아내고 사우디 왕실이 석유를 틀어쥐게 되어 석유 권리증을 받아 왔어?”
“그야말로 국위 선양이 아닌가.”
장군들은 무척 좋아했다.
“그 정도 준비를 했으니 사우디 국방부 장관이 단숨에 권력을 틀어쥐게 된 것이로군.”
“각하께서 석유 파동 중에서도 석유 공급이 끊어지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하셨는데, 이제 보니 자네의 공이 컸어.”
“오죽하면 아까 나한테 그러시더군. 자칫하면 탱크 몰 기름이 없어서 군사 훈련 취소할 뻔했다며 농을 던지시는 게 아닌가.”
박태종이 위스키를 마시며 웃었다.
“사우디 주베일 공사 수주액이 10억 달러나 된다지?”
장군들이 저마다 입을 떡 벌렸다.
1년 국방비 예산보다 많은 돈을 공사 한 번으로 벌어 온다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네 덕분에 오늘 술값 걱정 없이 실컷 마실 생각이야.”
“실컷 드십시오. 원하신다면 호텔 방도 잡아 드릴 수 있으니까요.”
장군들이 크게 웃었다.
“젊은 친구가 아주 화끈한 게 마음에 들어.”
“자네가 진즉에 육사에 들어왔다면 내가 크게 키워 줬을 텐데 말이야.”
장군들이 태수를 유심히 본다.
육군 참모 총장 이세호가 물었다.
“그런데 아까 전두호가 따로 불렀다는 자가 자네인가?”
다른 장군들은 깜짝 놀란다.
“전두호가 따로 불러?”
“아니, 전두호가 일반인에게 무슨 볼일이 있다고?”
금시초문이라는 반응이다.
박태종도 마찬가지였다.
“강 회장, 그게 무슨 소리인가? 전두호가 왜 자네를 불러?”
그들은 조금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박정환과 같이 입장하지 못했다.
이세후가 위스키를 한 모금 마시며 물었다.
“전두호가 새파랗게 젊은 재벌 총수를 따로 불러 훈계했다던데. 암만 봐도 젊은 재벌 총수라면 자네밖에 없는 것 같단 말이지.”
태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전두호 보안 사령관께서 절 따로 부르셨습니다.”
“설마 김광록이 때문인가?”
옆에 있던 김광록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김광록이 오성회 가입을 거부하면서 소란을 피웠던 일을 우리가 모르겠나?”
그 일로 영창까지 갔다 왔다.
김광록은 머리를 긁적였다.
“저 때문이 아닙니다.”
전두호는 김광록은 안중에도 없었다.
태수는 말했다.
“용건은 두 가지였습니다.”
“초면에 용건이라니……. 전두호와 따로 인연이 있었나?”
“전혀요.”
“그럼 무슨 일로? 용건이 뭔가?”
“군자금을 요구했습니다.”
장군들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세호가 다시 물었다.
“얼마를 요구하던가?”
“10억입니다.”
“……!”
장군들의 눈이 동그래진다.
10억이라니, 지금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의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