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 난장판을 위하여(2)
결코 금고 밖에 나와서는 안 될 서류를 들고 있었다.
김재국의 손이 가슴팍으로 들어갈 때 태수가 손을 들었다.
“지금 그걸 꺼내면 당신이 뒤집어쓰게 될 겁니다. 각하께서 보여 주고 싶지 않은 극비 서류를 들고 돌아가면 당신은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살인멸구, 입막음.
당연히 뒤따라 떠오르는 단어 때문에 김재국은 멈칫했다.
“제가 준비도 없이 이걸 당신 앞에 들이밀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
김재국은 신음을 냈다.
김재국은 가슴팍에 집어넣었던 손을 빼었다.
총은 없다. 빈손이었다.
“내게 그걸 보여 준 의도가 궁금하군. 왜 이러는 건가?”
“일단 이걸 보고 다시 얘기합시다.”
태수가 들고 있던 서류를 김재국에게 내밀었다.
김재국은 영문을 몰라 하면서도 서류를 넘겼다.
호기심을 이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이런! 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제7 광구에 관한 한국과 일본의 밀약.
그 뒷면에는 말도 안 되는 조건이 오갔다.
박정환이 절대로 밖으로 내보이고 싶지 않아서, 굳이 일본 비밀 금고에 숨겨 둔 이유가 있는 문서였다.
“이게 세상에 나오면 각하께선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폭동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나라를 팔아먹기로 약속한 박정환이다.
그것도 엄청난 석유가 매립되었을지도 모르는 대한민국 자원의 보고(寶庫)를.
일본에서 차관을 들여온다는 빌미로 당장 눈에 보이지 않는 땅을 팔아먹었다.
“그전에 이걸 본 당신과 나,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김재국의 안색이 하얗게 질린다.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봐 버린 대가였다.
태수는 품속에서 은색 라이터를 다시 꺼냈다.
“이게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안다고 하셨죠?”
박정환이 아끼는 라이터다.
함부로 내어 주지 않는 물건이다.
차기범조차도 대신 들고 다니기만 했지 선물로 받아 보진 못했던 라이터가 아닌가.
“저는 라이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어쩌실 생각입니까?”
상상만으로도 두렵다.
‘라이터를 가진 강태수는 죽음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김재국은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 날 협박하는 건가?”
“일단 현재 상황으로서는.”
태수가 김재국이 들고 있는 서류를 다시 빼앗아 서랍에 집어넣었다.
김재국은 믿을 수 없었다.
저런 위험한 서류를 저토록 허술하게 보관할 줄이야.
“당신, 미쳤어? 누가 이 방을 뒤진다면 단번에…….”
“오늘 여러 가지를 준비했죠.”
짝짝.
태수가 손뼉을 치자 반쯤 열렸던 욕실 문이 완전히 열리면서 김광록이 나왔다.
소음기를 단 총을 들고 있었다.
처음부터 내내 김재국을 조준하고 있던 총이었다.
김재국은 두 손을 올렸다.
“두 가지 선택지를 드리겠습니다.”
태수가 의자에 앉아 식어 가는 차를 한 모금 마신다.
“하나, 내 제안을 받아들인다. 둘, 내 제안을 거부한다.”
제안을 거부하면 어떻게 될지는 김재국이 더 잘 안다.
다른 누구도 아닌 김광록의 손에 소음기가 장착된 총이 있다.
그가 군에서 얼마나 대단한 위명을 날렸는지 김재국이 어찌 모를까.
고도로 훈련된 북한 특수 부대를 파리 목숨처럼 죽여 왔던 김광록이 아닌가.
그러니 저 하나 죽이는 건 일도 아닐 터다.
“선택하시죠.”
김재국은 그만 두 손을 축 늘어뜨렸다.
“자네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톡 쏘는 탄산처럼 날카롭던 목소리가 김빠진 콜라처럼 맹맹하게 바뀌었다.
태수의 기세에 눌린 탓이다.
“무슨 제안인지 듣지도 못하고 선택하게 되는 경우는 처음이로군.”
“잘 생각하셨습니다.”
태수는 보통 상대를 이렇게까지 강압적으로 꺾고 대화를 시작하지 않는다.
하지만 상대는 중앙 정보부 차장 김재국이다.
그리고 박정환의 치부까지 까발린 상태다.
태수로서도, 김재국으로서도 뒤는 없다.
공범이 아니라면 죽음뿐인 상황이다.
“강제로 날 공범으로 만든 이유가 뭐야?”
어쩔 수 없이 태수의 손을 잡게 되었으니 당연히 불만이 생긴다.
태수도 이미 그 정도는 각오한 후였다.
“저 역시 어쩔 수 없기에 택한 방법입니다.”
이런 방법이 아니었다면 김재국을 끌어오지 못했을 터다.
김재국은 의심이 많고 신중한 인물이다.
또한 신의가 두텁고 입이 무거운 자이기도 하다.
-영부인이 믿고 부탁했던 유일한 충신.
영부인 집안에서 밀어주어 이 자리에 올라온 인물이기도 하다.
큰일을 도모하는 데 필요한 직책을 갖고 있기도 했으니 태수로서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한청호가 영부인을 협박해 왔다는 건 알고 계시죠?”
“…….”
김재국의 표정이 모든 걸 말해 주고 있었다.
그는 영부인이 협박당해 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영부인은 김재국에게도 자세한 말을 옮기지 않았다.
그저 자신을 도와준 은인을 찾아 달라고 부탁했을 뿐이다.
“은인을 조사하던 와중에 한청호가 영부인을 협박했던 정황을 찾아냈네.”
“각하께서도 영부인께서 협박당하고 계셨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아니, 보고하지 못했네. 영부인이 제발 비밀을 지켜 달라고 신신당부했으니까.”
영부인의 부탁 때문에 박정환에게 영부인이 협박받았던 것을 보고하지 못했을 만큼 우직한 인물이기도 했다.
“영부인께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도 알고 계시겠죠.”
김재국이 그걸 어찌 모르겠는가.
직접 장례까지 참석했고, 그 주동자인 문세기를 끌고 가 고문한 것도 김재국이다.
하지만 끝내 문세기는 배후를 말하지 않았다.
“누군가 이 일을 덮고 있다는 것도 아시겠고요.”
많은 것이 의문이지만 어째서인지 더 깊이 파고들 수 없었다.
무려 영부인의 죽음에 얽힌 일인데도 말이다.
심지어 중앙 정보부 차장인 자신이 나섰는데도, 수사를 방해하는 세력이 있었다.
아주 가까이, 중앙 정보부 내에.
태수는 서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오늘 강제로 공범이 된 이유를 알려 드리죠.”
영부인과 관련된 증거를 하나씩 꺼내 놓는 태수였다.
태수가 그에 관해 말을 덧붙일 때마다, 김재국의 안색은 점점 더 희게 질린다.
마침내 태수가 모든 말을 끝냈을 때.
“당신이 영부인의 은인이라는 것을 믿겠네. 영부인을 대신해 내가 깊이 감사를 표하지.”
김재국이 태수를 향해 90도로 허리를 굽혔다.
“영부인을 끔찍한 협박에서 구해 줘서 정말 고맙네. 영부인께 은인이라면 내게도 은인이야.”
김재국을 밀어주고 끌어 준 건 오영순 집안이었다.
김재국은 오씨 집안 은혜를 많이 입었다.
“그리고 이 서류, 제7 광구에 대한 건, 죽을 때까지 입을 다물겠어. 믿어 주길 바란다.”
“믿겠습니다.”
입을 뻥긋하는 순간 김재국도 죽게 될 것이다.
박정환의 약점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김재국은 결연한 표정으로 먼저 태수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렇게 나를 받아 줘서 정말 고맙네. 자네가 날 이곳까지 강제로 끌고 오지 않았더라면 난 평생을 후회했을 거야. 영부인의 원수를 갚고 싶네.”
김재국은 진심이었다.
시작은 강제였지만 이제는 스스로 태수와 함께하기를 택했다.
태수가 김재국의 손을 잡았다.
“김 차장님, 이번 일은 잠시 입 다물어 주시지 않겠습니까?”
“영부인에 관해서라면 당장 각하께 보고를 올려야 하지 않겠나?”
“아직 증거가 부족합니다.”
태수는 서랍에서 차례차례 꺼냈던 조각난 증거들을 보며 말했다.
“지금 이 정도로는 한청호를 옭아맬 수가 없어요. 빠져나갈 구멍이 숭숭 뚫려 있습니다.”
열심히 주워 모았지만 아직 허술한 증거라는 걸 김재국도 안다.
하지만 이로써 심증은 확신으로 굳어졌다.
한청호가 깊이 연루되어 있다.
“심증을 확신시켜 줄 정도면 돼. 각하께서도 그 정도라면…….”
“어설프게 건드렸다가는 괜히 각하의 약점만 들추게 되어 우리가 피를 보게 될 뿐입니다.”
“알겠네.”
“확실한 한 방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를 위해 태수가 쥐 몰이 사냥을 준비하는 게 아닌가.
“한청호가 먼저 움직여 틈을 보이도록 제가 만들겠습니다.”
“어떻게 할 생각인가?”
“이번 아파트 분양 전쟁에서 승리할 생각입니다.”
태수는 아파트 분양 전쟁에 더욱 장작불을 지필 생각이다.
태수가 최고급 브랜드 아파트를 표방한 이상, 같은 포지션을 택한 한청호와 아파트 분양 전쟁은 피할 수 없다.
누가 더 빨리, 더 제대로, 더 잘 파느냐.
“쉴 틈 없이 몰아붙일 생각입니다. 한청호를 궁지에 몰아넣어 어쩔 수 없이 일본에 있는 금고에 손대도록 만들어야죠.”
박정환이 옮기도록 한 비밀 금고에는 오영순의 재산이 잠들어 있다.
그걸 한청호가 쓰는 순간, 빼도 박도 못할 증거가 생긴다.
더구나 박정환의 비밀 금고가 털린 것까지 낱낱이 밝혀질 것이다.
박정환의 분노가 향하면 한청호는 빠져나갈 길이 없다.
“그러니 김 차장님께서 확실한 증거를 잡아 주십시오.”
“언제든 말만 하게. 최선을 다해 자네를 돕겠어.”
아주 든든한 동료를 영입했다.
무려 중앙 정보부의 차장을 말이다.
“내년 5월 18일 결혼식장에서 이걸 터뜨리겠습니다.”
태수는 그날을 디데이로 정했다.
결혼 선물로 영부인이 선물하는 폭탄을 안겨 줄 생각이다.
“저와 함께 준비하시겠습니까?”
아주 마음에 드는 제안이고, 거부할 수 없는 이유였다.
* * *
김재국이 돌아가는 것을 배웅한 태수.
김광록이 홀을 돌아보고 와서 보고했다.
“태수야, 장말동 어르신은 집으로 돌아간 것 같고, 차기범 경호실장은 각하를 보좌하느라 바쁘다. 어떻게 할래?”
태수는 팔짱을 끼고 잠시 눈을 감았다.
“전두호와 한청호는 어쩌고 있습니까?”
“모두 돌아갔다.”
김광록이 물었다.
“왜 그런 표정을 하고 있냐?”
태수의 표정이 가라앉아 있었다.
“아닙니다. 송소리 기획 조정실장과 김용식 홍보실장을 좀 불러 주실 수 있겠습니까?”
송소리와 홀쭉이 역시 금산 호텔에서 묵고 있다.
홀쭉이는 한일권 패거리들 때문에 금산 호텔로 옮겼다.
송소리는 태수 근처에서 살고 싶다고 집을 알아봐 준다고 하는데도 호텔을 택했다.
“잠깐만 기다려.”
“가능하다면 박철완 건설 사장에게도 연락해 주시길 바랍니다.”
김광록이 태수를 힐끔 보고는 방을 나섰다.
태수는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잠시 후 송소리 기획 조정실장과 홀쭉이가 태수의 방으로 들어왔다.
송소리 실장이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아파트 건설 속도를 조금 올려야 할 것 같습니다.”
“목표는 어느 정도로 잡고 계십니까?”
“내년 4월까지 분양 광고가 들어가면 좋겠습니다.”
“너무 촉박합니다.”
“압니다. 그래서 계획을 조금 바꿔야 할 것 같습니다.”
태수가 테이블 위에 놓인 아파트 도면을 넘기며 말한다.
“우리도 단지별로 지어 순차적 분양에 나서는 게 좋겠습니다.”
“한꺼번에 분양한다고 하시지 않았나요?”
“그 경우 아파트 분양 시작은 언제가 될 것으로 예상합니까?”
“아마도 내년 말 혹은 내후년 초는 되어야 하겠죠.”
“안 됩니다. 시간이 부족해서 그럽니다.”
태수가 급히 그들을 모은 이유였다.
“58개 동 중에 12개 동을 먼저 올립시다.”
“알겠습니다.”
“시간에 맞출 수 있겠습니까?”
“아마 가능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조금 촉박한 일정이기는 합니다.”
“시간을 단축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 좀 더 의견을 나눠 보도록 하죠.”
태수는 홀쭉이를 바라봤다.
“신문 홍보와 방송 홍보를 더 자주 할 생각이야.”
“여기서 더?”
“아직 오일 쇼크 여파에서 벗어나지 못했어. 주식은 폭락했고, 유가는 급등했고, 사업은 도처에 부도가 났어. 안전 자산에 대한 수요가 아주 크지.”
홀쭉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태수는 말했다.
“프리미엄 아파트를 분양하는 거야. 돈 많은 중산층의 투자 의욕을 고취시켜야 해.”
“신문엔 충분히 광고했어. 그럼 이번엔 방송으로 알아볼게.”
“좋아. CF 광고를 넣고, 방송 프로에 협찬을 넣자.”
“협찬?”
홀쭉이와 송소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다.
“프로그램 끝날 때 협찬사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는 부족해. 차라리 상류층이 사는 아파트 전경이 나오도록 드라마를 기획하는 방송사가 있는지 알아봐.”
“이해했어. 알아볼게.”
“아니면 건설로 성공하는 드라마나 영화가 있으면 그것도 알아봐. 우리 태양 건설이 장소를 제공한다고.”
“드라마 촬영지를 제공한다고?”
“일단 12개 동만 지을 테니까 공터도 많고, 장소를 제공할 수 있는 여력도 있어. 홍보 효과를 생각해야지.”
전화위복이 될지 모른다.
“방송 프로그램의 힘이 생각보다 커. 그러니 열심히 찾아봐.”
“알았어. 안 그래도 그런 드라마를 준비한다는 소리를 들은 것 같으니까.”
안방에서 TV를 시청하는 사람들이 많다.
21세기와 달리 방송 프로그램도 몇 개 안 될 때다.
애국가가 나오면서 방송 시간 규정도 있다.
그러니 오락거리로 TV와 라디오 시청하는 사람들이 많다.
“김 실장은 당장 내일부터 CF 광고 찍을 계획을 올려 줘.”
“바로 준비할게.”
태수가 송소리를 돌아봤다.
“송 실장이 많이 바빠질 겁니다. 중장비에 연락해서 엘리베이터와 중장비 조달을 독촉하고, 전자를 닦달해서 개별 계량기와 기름 보일러 개발을 서두르도록 하세요.”
“알겠습니다.”
태수는 손뼉을 짝짝 쳤다.
“밤이 늦었습니다. 늦은 시간 불러서 미안합니다. 이만 돌아가 쉬십시오.”
송소리가 허리를 굽히고 호텔 방에서 나간다.
홀쭉이는 태수를 돌아보며 말했다.
“태수야, 너 표정이 오늘 왜 이래?”
김광록과 똑같은 소리를 하고 있었다.
태수는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얼굴을 쓸었다.
“왜? 이상해?”
“많이.”
홀쭉이나 태수를 보며 물었다.
“술 한잔할래?”
이놈은 어찌 된 게 기승전술이다.
하지만 태수는 오늘만큼은 거절하고 싶지 않았다.
착잡한 마음이 표정으로 드러날 정도로 마음이 영 좋지 못했다.
“좋지.”
태수와 홀쭉이, 그리고 김광록.
그들이 금산 호텔 바를 찾았을 때 태수는 뜻밖의 사람을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