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 난장판을 위하여(1)
테라스를 나와 메인홀로 향하는 태수.
머리가 쉴 새 없이 돌아가기 시작한다.
‘제대로 난장판을 만들려면 만나야 할 사람이 제법 되는군.’
어떻게 판을 짤까.
어떻게 궁지로 몰아갈까.
전두호랑 한청호를 어떻게 엮어서 엿을 먹일까.
‘경호실장 차기범, 장말동과 안정우, 동방 일보 기자들, 그리고 중앙 정보부의 차장 김재국, 육군에서도 전두호의 반대 세력.’
태수가 판을 짜는 데 필요한 사람들이다.
‘누구부터 만나야 하나. 역시 장말동이나 차기범부터 만나야겠지? 김재국과는 접점이 없는데…….’
태수의 눈이 점점 더 깊어진다.
전두호가 끼어들어서 태양 그룹을 노리고 깽판을 예고할 줄이야.
‘전두호, 아직은 몸을 낮춰서 군에서 세력을 더 확보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을 줄 알았는데. 슬슬 이빨을 드러내려는 건가.’
미묘하게 전생과 달라진 부분이 눈에 들어온다.
‘전두호가 제1 사단장에서 보안 사령관으로 승진한 시기도 조금 빨라진 것 같고.’
차기범과 맞서는 것도 그렇다.
‘전생에서는 지금보다 몸을 더 사린 것으로 아는데, 왜 갑자기 전면에서 존재감을 과시하는 거지?’
태수를 불러 훈계하는 모양새를 취하는 것도 그렇다.
존재감을 과시하려는 쇼맨십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전두호라는 인물을 똑똑히 각인시키기 위해서.
‘나를 건든 것을 후회하게 만들어 주지, 전두호.’
태양 그룹을 박살 내겠다고 했다.
태양 그룹을 빼앗아 동생의 결혼 예물로 한청호에게 주겠노라고 약속했다고 했다.
전생과는 다르게 한청호의 사돈으로 등장한 전두호.
‘한청호, 이번 생엔 왜 전두호를 택했지?’
전두호의 자식들과는 나이가 맞지 않는다고, 전두호의 동생을 사위로 맞을 생각을 하다니.
혼인을 이용해 연줄을 공고하게 굳히는 것을 비겁하다고 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의문이 든다.
‘박정환에게도 딸이 있어. 한일권과 결혼시키면 지금보다 더 끈끈한 관계를 맺을 수 있을 텐데 박정환이 아니라 전두호라니?’
전생과 딸을 결혼시키는 대상도, 시기도 맞지 않는다.
더구나 전두호의 승진과 존재감 과시도 전생과 조금씩 다르다.
‘박정환에서 전두호로 갈아타려는 것인가?’
그게 아니고서야 지금의 선택을 할 리가 있나.
‘왜? 박정환과는 지금까지 끈끈한 사이를 잘 유지하고 있는데.’
아니면 또 다른 이유가 있는 걸까?
‘흐음, 이건 따로 정보를 확인해 봐야겠군.’
이런 일엔 정보 상인 노릇을 겸하는 장말동이 최고다.
아마도 금산 호텔에 참석한 사람 중에 장말동이 있을 것이다.
장수 은행 은행장으로 초대받았을 테니까.
태수는 장말동을 찾기 위해 홀을 뒤졌다.
‘7층에는 없어.’
마침 복도에서 대기하던 김광록이 태수 뒤에 따라붙었다.
“누굴 찾는데?”
“장수 은행 은행장님이요. 못 보셨습니까?”
“아까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것 같던데.”
태수는 바로 아래층으로 향하는 계단으로 간다.
김광록이 태수에게 다가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갑자기 장수 은행 은행장은 왜 찾는 거야?”
“물어볼 말이 있어서요.”
5층으로 향하는 계단에서 태수는 익숙한 사람을 발견했다.
박경혜였다.
태수는 본능적으로 자리에서 멈췄다.
‘똥 밟았다.’
튀자.
무조건 튀자.
태수가 몸을 돌릴 때였다.
“당신 뭐야?”
“난 중앙 정보부 차장 김재국이다. 최태문, 여기가 어디라고 당신이 들어온 거지? 영애의 손을 놔라.”
도로 계단을 올라가려던 태수가 걸음을 멈췄다.
김광록도 걸음을 멈추고 아래를 주시한다.
‘최태문과 김재국이라고?’
최태문이라면, 설마 그 사이비 목사를 말하는 건가?
어머니를 여의고 실의에 빠진 박경혜에게 접근해 이권을 뜯어먹던 희대의 사기꾼?
박경혜가 김재국을 노려보았다.
“이게 지금 무슨 무례죠?”
“이자는 초대장이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영애.”
“내 파트너예요. 이분은 우리 어머니를 도와주신 은인이기도 해요.”
은인?
최태민이 오영순을 도와준 은인이라고?
‘전생에선 그런 얘기는 없었는데?’
흥미로웠다.
최태문은 어떻게 영부인의 은인으로 둔갑한 것일까?
김재국은 최태문을 노려보았다.
“영애를 앞세워 이상한 활동을 한다지? 사이비 종교 활동을 하려면 해. 사기를 치려거든 혼자 해. 하지만 영애까지 끌어들이면 안 되지.”
박경혜가 김재국 앞에 섰다.
“내가 누구와 무얼 하든 당신과는 상관없어요. 이상한 활동도 아니고. 아버지가 왜 아무 말 안 하시는지 아시잖아요.”
박경혜는 턱을 들었다.
“도쿄행 비행기를 알아봐 주세요. 어머니의 유산을 찾으러 가야겠어요.”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최태문의 눈을 번뜩였다.
희열에 찬 그 눈빛이 탐욕스러웠다.
태수는 단번에 알아봤다.
‘최태문의 목표가 영부인이 남긴 유산이로군.’
그렇지 않고서야 저 남자의 눈이 저리 탐욕스럽게 변할 리 없으니까.
“방금 보셨습니까? 저자의 눈빛이 변했습니다. 함부로 꺼낼 물건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럴 리 없어요. 잘못 보신 거예요.”
박경혜는 완강했다.
“어머니께서 일본에서 돌아오신 후 내내 은인을 은밀히 찾으셨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시잖아요.”
“물론입니다. 제가 그 임무를 맡아서 일본과 한국을 뒤졌으니까요.”
김재국은 최태문을 노려보며 말했다.
“그래서 확신할 수 있습니다. 최태문, 저자는 일본에 다녀간 적이 없습니다. 영애를 속이고 있는 겁니다. 저자는 한청호의 집을 들락거리는 하수인입니다.”
한동안 김재국과 박경혜 사이에 실랑이가 계속됐다.
김재국이 만류하려 했지만 박경혜는 완강했다.
“말리지 마세요. 저는 어머니의 마지막 부탁을 꼭 들어드릴 생각이니까요.”
박경혜가 떠나갔다.
태수는 계단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장말동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직접 보니까 느낌이 다르군. 최태문과 김재국이라.’
그들에 대해서는 청일 그룹에서도 정보로밖에 보지 못했다.
‘최태문이 박경혜를 이용하는 일로 김재국이 분개했었다더니. 박정환에게 보고를 올려도 매번 묵살당했다고 하던데.’
태수가 청일에 갓 입사할 때의 일이었기에 자세한 사정은 모른다.
‘김재국, 영부인 오영순이 가장 신뢰하던 인물로 오영순 집안에서 밀어주는 사람이라고 했던가.’
박정환과도 인연이 닿았지만 인연의 뿌리는 오영순 집안과 더 깊이 얽혔다.
만일 박정환의 인연이 더 강했다면 지금 중앙 정보부 부장은 신지수가 아니라 김재국이었을 것이다.
심지어 신지수는 군에서 김재국의 부하였지 않은가.
‘아까 들었던 상황을 요약해 보자.’
1. 오영순은 도쿄에 다녀온 후 은인을 찾았다.
2. 오영순은 은인에 대해 딸에게 말했고, 김재국을 시켜 일본과 한국을 뒤졌다.
3. 최태문은 오영순의 유품이라는 물건을 노리고 있다.
4. 한청호와 최태문은 작당하고 있으며 최태문이 은인이라고 우기고 있다.
5. 박경혜는 은인에게 어머니의 유품을 넘기려고 한다.
6. 이대로라면 최태문의 손을 거쳐 한청호의 손에 오영순의 유품이 넘어갈 것이다.
머릿속에 퍼즐이 하나씩 맞물린다.
결론이 나왔다.
‘한청호가 최태문을 은인으로 둔갑시켜 오영순의 유품을 빼내 오려는 것인가.’
그렇다면 이렇게 손 놓고 볼 순 없지.
태수는 김광록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김광록이 바로 알아차리고, 고개를 끄덕이며 계단을 올라간다.
‘좋아.’
태수는 계단을 내려갔다.
일부러 발걸음 소리를 내면서 말이다.
저벅저벅.
김재국이 계단 위를 본다.
태수와 눈이 마주쳤다.
“누구냐?”
“태양 그룹의 강태수입니다.”
김재국은 태수를 면밀히 살핀다.
혹시 박경혜와의 대화를 들었는지 탐색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태수는 슬쩍 청와대 마크가 찍힌 은색 라이터를 꺼냈다.
은색 라이터를 알아본 김재국의 눈이 커졌다.
“이건 각하의……!”
“알아보시는군요.”
태수는 품속에 라이터를 다시 넣었다.
김재국의 눈이 깊게 가라앉는다.
“함부로 내놓는 물건이 아닌데, 내게 보여 주는 이유가 뭐지?”
태수를 보는 눈빛이 변한다.
호기심과 감탄이 깃들어 있는 눈이었다.
저 은색 라이터의 가치를 알고 있는 게 분명하다.
“잠시 이야기를 나눴으면 합니다.”
“흐음.”
“영부인이 은인을 찾으라고 말씀하셨을 때 혹시 이런 말은 남기지 않으셨던가요?”
태수가 김재국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금고 안에 든 물건이 사라졌다. 그럼 책임자인 한청호는 어떻게 될까?”
“……!”
일본 도쿄의 박정환 비밀 금고에 넣어 두었던 종이에 그렇게 썼었다.
‘오영순이 은인을 찾았다면 단서는 저 말밖에 없었겠지.’
짐작은 사실로 드러났다.
그 반응으로 김재국의 눈가가 잘게 떨렸다.
“그걸 어떻게 당신이……!”
“이 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태수는 씩 웃었다.
“잠시 이야기를 나눌 이유는 충분하지 않습니까?”
거부할 수 없는 이유였다.
* * *
금산 호텔에서 연회가 열린 것이 다행이다.
왜냐하면 태수는 금산 호텔에서 묵고 있었으니까.
태수의 호텔 방에 김재국이 들어왔다.
“이곳은…….”
“제가 잠시 묵고 있는 방입니다. 자리에 앉으시죠.”
태수처럼 누가 엿듣기라도 하면 곤란하다.
태수가 김재국을 이끌고 호텔 방으로 들어온 이유였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다. 그 말은 어디서 어떻게 들은 거지?”
“어디서 어떻게 들은 말이 아닙니다. 제가 종이에 써 둔 말이죠.”
김재국이 주먹을 꽉 쥔다.
아까부터 잘게 떨리던 눈이 격동으로 더욱 크게 떨린다.
“그럴 리가!”
김재국이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잠시 방 안을 서성대면서 생각을 정리한다.
태수는 그의 생각이 정리될 때까지 내버려 두었다.
물을 끓여 차를 우려내면서.
쪼르륵.
찻잔에 잘 우려낸 차를 따른다.
의자에 앉아 차를 마시며 김재국을 본다.
마침내 결심이 끝난 듯, 김재국이 태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최태문도 똑같은 말을 꺼냈다. 하지만 난 믿지 않았지.”
“그랬을 겁니다. 영애를 속이려면 그럴듯한 말을 꺼냈겠죠.”
괜히 희대의 사기꾼이라 일컬어지는 게 아니다.
김재국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웃는다.
“난 지금 널 믿지 않겠다고 말하고 있어.”
“최태문이란 남자와 한청호, 둘이 같이 작당을 했다고 의심하시고 있잖습니까. 하지만 제가 한청호의 집에 들락거리던가요?”
한청호가 강태수에게 이를 간다는 건 중앙 정보부 차장인 김재국이 더 잘 안다.
“중앙 정보부 차장님께서 보시기에 제가 한청호와 작당하는 것으로 보이십니까?”
“으음…….”
차라리 원수 사이라고 하면 믿겠다.
김재국은 태수가 한청호의 뒤통수를 어떤 식으로 갈겨 대는지도 안다.
다른 재벌들을 농락하던 한청호가 번번이 손도 못 쓰고 당하는 유일한 인물이 바로 강태수다.
김재국의 눈앞에 있는 이 젊은 남자 말이다.
“한청호가 최태문을 사주하여 영애를 들쑤시는 이유, 제가 당신 앞에 지금 나서는 이유. 무엇 때문인 것 같습니까?”
김재국이 태수를 보며 신음처럼 말을 내뱉었다.
“당신이 바로 영부인의 은인이라고 주장하는 건가?”
“맞습니다.”
김재국이 눈을 감았다.
“영부인과 한청호는 일본에 함께 있었지. 그때 영부인이 봤던 글은 한청호도 봤어.”
“하지만 전 그 자리에 없었죠.”
“당신 역시 한청호와 똑같은 것을 노리고 있나?”
모든 것을 의심하니 중앙 정보부 차장이라는 직함에 어울리기도 한다.
“최태문이 어떤 말을 들먹이며 아카징코에 다녀왔다고 했는지 짐작합니다.”
태수를 탐색하는 김재국의 눈빛이 날카롭다.
“한청호도 아카징코에 다녀왔으니 그에 대해 똑같은 얘기를 해 봤자 소용이 없겠죠.”
예의 주시하는 눈이 태수의 일거수일투족을 훑어 내린다.
“이번엔 당신이 나서서 영애를 들쑤시겠다는 뜻인가? 똑같이 은인이란 단어를 내세워서, 한청호가 했던 것처럼.”
“영애 앞에 나서기 싫으니 당신을 만난 겁니다.”
내 인생에 똥물 튀길 일 있나.
박경혜와 엮이면 똥 밟는 거다.
“증거를 보여드리죠.”
태수는 저벅저벅 걸어가서 서랍을 하나 열었다.
“금고 안에 들어 있던 친일파의 명부와 재산 목록은 애초에 한청호가 만든 것이었으니 최태문도 가지고 있을 겁니다. 그러면 이건 어떻습니까?”
태수가 손에 들고 있는 단 한 부의 서류.
<제7 광구에 관한 한일 양국 협정 계획서:1970>
“최태문도 이걸 가지고 있던가요?”
김재국은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