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산 찍고 건설 재벌-127화 (127/230)

127. 별들의 잔치(4)

전두호가 태수를 데리고 테라스로 나왔다.

홀 안에 있는 사람들은 눈치를 볼 뿐 누구도 따라오지 못했다.

전두호가 테라스 난간에 기대며 물었다.

“나이가 어떻게 되나?”

“26살입니다.”

“너무 젊군. 재벌 총수가 되기엔 풋내나는데.”

말에 가시가 느껴진다.

“운이 좋다고 해야 하나, 백이 좋다고 해야 하나? 벌써부터 VIP룸을 드나드는 것을 보면 백은 확실해 보이고. 각하의 눈에 들었다 이거지?”

태수를 보는 눈이 곱지 않다.

초면인데도 무례하기 그지없다.

“사우디 왕실과 밀접한 인연이 있어 석유를 수월하게 들여와 재벌이 되었다지? 듣자 하니 변방의 고속 도로 공사를 하러 갔다가 중동 전쟁을 조기 완결시키는 공을 세웠다며?”

하나도 궁금하지 않은 얼굴이다.

태수를 떠보기 위한 탐색.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사우디와 한국을 오가며 박쥐처럼 여기저기 들쑤셔서 백으로 장사를 해 먹는 작자라……. 명예 훈장이라 쓰고 연줄이라 읽는다.”

“…….”

“무슨 짓을 한 거냐?”

태수는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애송이가 동요하지 않는군. 이쯤 했으면 어떤 방식으로든 반응이 와야 하는데.’

도발이 제대로 먹히지 않자 전두호가 한쪽 눈썹을 살짝 찡그린다.

“내 말이 말 같지 않나?”

태수의 눈이 점점 깊게 가라앉는다.

전두호는 태수를 날카롭게 살펴본다.

“나는 육사 출신 군인이자 이 나라의 보안 사령관이다. 중동 전쟁에서 전공을 세웠다는데, 내가 모르고 있어서야 하겠나?”

고압적이고 독선적인 태도로 압박한다.

하지만 이만한 일로 쫄 태수가 아니다.

“타국의 극비 사항인지라 쉽게 떠들 이야기가 아닙니다.”

차마 라흐만의 뻥이라고 말할 순 없었다.

실제로 칼리드가 태수에게 전쟁 조기 종결의 공을 내세워 훈장을 줬기 때문이다.

사우디 국왕 부자를 뻥쟁이라고 말하느니 차라리 입을 다물고 있는 게 낫다.

“사우디 왕실과 약속했습니다. 외부에 발설하지 않겠다고.”

“내가 이 나라 안보에 중요한 사항이라고 생각하는 일이다.”

“대통령 각하께서도 용인해 주신 일입니다.”

보안 사령관보다 대통령이 한 끗발 위다.

“그래서 말 못하겠다?”

“전 군인이 아닙니다.”

태수가 전두호를 똑바로 바라본다.

“따라서 보고할 의무는 없습니다.”

도발적인 언사지만 기색은 차분하기 이를 데 없다.

흠잡을 데가 없었다.

‘겁을 먹지 않는군. 배짱 좋은데?’

전두호는 피식 웃는다.

“군인이 아니라 일반인이라 이거지? 내가 널 어찌할 수 없으리라 생각하나?”

태수를 보는 눈이 차갑게 식었다.

하지만 태수 역시 전두호를 가라앉은 눈으로 보는 건 마찬가지였다.

“나중에 중앙 정보부 취조실에서 만나게 되면 그 비밀 얘기를 알 수 있겠지.”

대놓고 시비를 건다.

이건 협박이었다.

태수를 중앙 정보부 취조실에 쳐넣겠다는.

“저희는 초면인 것으로 아는데, 이리 날을 세우시는 이유가 뭡니까?”

궁금했다.

소위 말하는 고위층 사람들은 대놓고 적을 만들지 않는다.

웃는 낯으로 뒤에서 칼로 찌른다.

교언영색(巧言令色), 구밀복검(口蜜腹劍)은 기본 사항이지 않은가.

‘그런데 전두호는 초면부터 나를 압박한다. 그것도 서로 별 상관도 없는 군인이 일반인, 그것도 재벌 사업가를.’

차기범을 만나자마자 싸운 것은 이해가 된다.

박정환을 두고 권력 암투라고 생각하면 되니까.

하지만 태수는 재벌이다.

그것도 갓 재벌에 발을 뗀, 재계 순위 200위권의 재벌에 불과하다.

‘굳이 전두호가 나서서 내게 시비를 걸 필요는 없어. 이해관계 얽힐 일이 없으니까.’

태수가 의아해하는 부분이다.

“사우디 석유 공급을 빌미로 청일 정유와 청일 중장비를 날로 먹고, 부채를 잔뜩 떠넘겼다던데.”

전두호가 대놓고 태수를 노려본다.

“덕분에 이쪽으로 흘러오던 군자금이 끊겼다는 것, 알고 있나?”

군자금.

군대 내 사조직인 오성회를 운영하기 위한 자금이 필요하다.

그 자금 조달이 태수 때문에 끊겼다고 말한다.

“여기 있는 누군가 때문에 피해를 본 당사자가 여기 있어. 내 밑에 딸린 수많은 군인이 네놈 하나 때문에 배를 곯고 있단 말이지.”

한청호는 군인들에게까지 뇌물을 뿌리고 다닌 모양이다.

‘그렇다면 전두호의 의도는 둘 중 하나다.’

한청호를 들먹이며 압박하는 의도 말이다.

굳이 태수의 기세를 꺾고 굴복시키려는 시도를 하는 이유.

‘한청호의 편을 들어 나에게 선전 포고를 하는 것, 아니면 내게 부족한 군자금을 채워 달라는 노골적인 요구.’

전두호가 뜻하는 바는 무엇일까.

“이 피해를 어찌 갚아 줘야 하나. 내가 그냥 넘어갈 정도로 성질이 좋은 편이 아니라서 말이야.”

“제가 어떻게 하길 바랍니까? 부족한 군자금을 채워 드리면 되겠습니까?”

차라리 돈을 요구하는 것이라면 상대하기 쉽다.

전두호는 탐욕스러운 눈을 번뜩였다.

“듣자 하니 각하께 10억을 상납했다던데, 그렇다면 내게도 10억은 진상해야지.”

“그 말은 각하와 보안 사령관께서 동급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

허를 찔린 듯 순간 전두호가 움찔한다.

바로 그것 이상으로 사납게 으르렁댄다.

“건방진 새끼.”

“10억. 적은 돈이 아닙니다.”

무리한 요구였다.

지금 10억이라면 2020년엔 300억에 가까운 돈이다.

오죽하면 태수가 선뜻 내어놓을 때 박정환도 놀랐겠나.

더구나 박정환에게 상납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시점이다.

‘갓 재벌 반열에 오른 내가 들어 줄 수 없는 요구란 것을 전두호는 누구보다 잘 알 것이다.’

그런데도 전두호는 일부러 태수를 도발했다.

“돈 없어? 그럼 다른 거라도 내놓던가.”

태수는 말없이 전두호를 보았다.

전두호는 대놓고 말했다.

“청일에서 뜯어낸 것 전부, 도로 토해 내. 그럼 봐주지.”

조폭도 이렇게까지 막무가내로 굴지는 않을 것이다.

이건 숫제 싸우자는 말이었다.

“그렇겐 못하겠습니다.”

다짜고짜 시비를 걸어올 때 호락호락 물러설 생각은 없다.

그것이 아무리 전두호라고 해도.

“제가 정당한 가격에 인수한 것들이거든요.”

청일 중장비가 10원, 청일 정유가 10원.

도합 20원이나 주고 사들인 회사가 아닌가.

더구나 청일 타운이 될 상가 부지도 잠실 농가 주택이랑 바꿨다.

“군자금이 끊겨 유감스럽다면 제가 그 주머니 대신 채워 드릴 수 있습니다. 원한다면 한청호 이상으로.”

돈은 태수에게 충분히 있다.

못 줄 것도 없다.

하지만 굳이 줘야 할 필요도 못 느끼겠다.

전두호의 태도가 지나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차라리 처음부터 군자금을 달라고 말씀하셨다면 대화가 편했을 텐데요. 굳이 날을 세우는 이유가 뭡니까?”

“이 건방진 새끼, 지금 날 취조하려는 거냐?”

“10억. 적은 돈이 아닙니다.”

아까 태수가 말했던 것과 똑같은 말이 다시 나왔다.

하지만 그 무게가 다르다.

전두호의 눈썹이 요란하게 꿈틀댄다.

태수는 그 눈썹을 보면서 말했다.

“10억이나 요구하는 이유는 알아야 돈을 내어놓든가 말든가 결정하지 않겠습니까?”

태수는 피식 웃었다.

“내가 호구도 아니고.”

전두호와 태수 사이에 보이지 않는 불꽃이 튀었다.

전두호는 한참이나 태수를 노려보다가 입을 열었다.

“한청호가 왜 자네를 보면서 이를 갈았는지 알 것 같군.”

전두호는 웃고 있었다.

“차라리 호구로 살았다면 비참한 결말은 피할 수 있었을 텐데.”

전두호가 난간에서 몸을 떼어 낸다.

“넌 지금 스스로 마지막 기회를 날린 거야.”

태수 역시 입을 떼었다.

“군자금은 필요 없으십니까?”

“네깟 놈 돈 없어도 어디서 꿀릴 전두호가 아니야.”

“10억. 적은 돈이 아닐 텐데요?”

그렇기에 흔들리는 전두호였다.

과한 돈을 요구해 태수를 짓누르려고 했는데, 오히려 자존심은 전두호가 다치고 말았다.

전두호가 주먹을 쥐고 태수를 노려본다.

“건방진 놈.”

10억도 싫다니 별수 있나.

선전 포고를 받아들이면 그만이다.

“차라리 솔직하게 돈을 요구했다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텐데.”

태수의 눈은 더할 수 없이 차가웠다.

“10억짜리 군자금도 마다하시니 저로서도 어쩔 수 없군요.”

청일을 들먹이며 시비를 건다면 굽힐 생각은 없다.

“보안 사령관의 뜻은 잘 알았습니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태수는 등을 돌렸다.

그러자 전두호가 태수에게 엄중한 목소리로 마지막 경고를 날렸다.

“내가 태양 그룹을 산산조각 낼 수 있을까, 없을까. 내가 군인이라서 일반인을 건들 수 없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그랬다면 그건 오판이고, 오만이고, 오산이야.”

전생에서 봤다.

전두호에게 밉보인 재벌 그룹이 어떻게 순식간에 산산이 조각났는지.

“내가 마음먹어서 안 되는 일은 없어. 앞으로도 그럴 거고.”

전두호는 씩 웃었다.

“어디 태양 그룹 잘 꾸려 봐.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조만간일 거야.”

명백한 협박이었다.

태양 그룹을 박살 내겠다는 말을 듣고 고이 넘길 태수가 아니다.

그때였다.

“아이고, 예비 사돈. 한참을 찾았습니다.”

한청호가 전두호를 발견하고 두 팔을 뻗어 환영한다.

VIP룸에서 나온 모양이다.

“사돈?”

태수가 한청호와 전두호를 보았다.

둘은 웃고 있었다.

‘아직 전두호의 자식들은 나이가 어린데?’

큰아들이 16살밖에 안 됐다.

큰딸도 12살이던가.

그런데 한청호와 사돈이 된다니.

“형님, 거기서 뭐 하십니까?”

전두호의 동생이었다.

전두호와 10살 이상 차이가 나는 늦둥이 막냇동생이다.

전두호가 대통령이 되면서 대통령 경호실 보좌관이 되는 인물이 아닌가.

그 옆에는 한청호의 딸이 함께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알 것 같군.’

전생과 달라졌다.

전생에서 한청호의 딸은 전두호의 동생과 결혼하지 않았다.

한청호가 딸을 이용해 사돈으로 엮은 정치권 인사는 따로 있다.

‘어째서 미래가 바뀌었지?’

한청호가 딸을 전두호의 동생에게 준 이유가 뭘까.

한청호가 태수를 보며 이를 으드득 갈았다.

“꺼져라. 사돈 뵙는 자리에 너 같은 것과 말 섞고 싶은 생각 없으니까.”

어째서 전두호가 초면에 태수를 보며 대놓고 시비를 걸었는지.

얽힌 이해관계 하나 없이 어째서 태양 그룹 박살을 운운했는지.

너무나 깔끔한 이유라 태수는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전두호는 태수를 보며 웃었다.

“태양 그룹을 잘 다듬어 내 동생의 결혼 예물 선물로 사돈께 드리겠다고 이미 약속했지요. 그 약속, 제대로 지킬 생각이 들었습니다. 두고 보십시오.”

“하하하, 아이고, 예비 사돈. 정말 더할 나위 없는 예물입니다. 기대하겠습니다.”

제 딸의 몸값이 태양 그룹 정도는 됩니다.

한청호가 크게 웃는다.

태수의 눈이 점점 더 깊어진다.

‘내가 민족 열사도 아니고, 민주화 운동에 핏대를 올릴 생각은 없었는데.’

미래를 안다.

어떤 비극이 벌어질지도 안다.

하지만 태수는 오랜 시간을 망설이고 고민해 왔다.

과연 어디까지 개입해서 어떤 미래를 만들어 나가야 할지에 대해서.

‘솔직히 내가 정치에 뜻을 둔 것도 아니고. 난 그저 내 개인의 복수를 할 생각이었을 뿐이지만…….’

태수의 가족을 죽이고, 끝내 태수까지 죽인 한일권 일가를 향한 복수.

태수를 노예처럼, 청일의 개로 키웠던 청일 그룹에 대한 복수.

‘전두호가 한청호와 손을 잡고 내 앞길을 막겠다고 선전 포고를 한 이상, 나도 제대로 응해 줄 수밖에 없군. 시비는 전두호, 당신이 먼저 걸었어.’

한청호 일가를 무너뜨리는 데 방해가 되는 장해물은 모조리 치워 낼 것이다.

‘한청호 치우는 김에 전두호, 당신도 함께 치워 주지.’

고민은 짧았고, 결심은 빨랐다.

태수는 전두호 동생에게 물었다.

“결혼식이 언제입니까?”

“내년 5월 18일입니다.”

전두호의 동생은 머리를 긁적이며 쑥스러워한다.

“여자들은 5월의 신부가 되고 싶어 한다기에 그렇게 결정했습니다. 제 결혼식에 참석하여 자리를 빛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날짜가 기가 막히는군요.”

5월 18일이라니.

마치 하늘에 있는 누군가가 그날의 한을 대신 풀어 주라고 계시를 보내는 게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다.

전생에선 같은 날, 다른 해 전두호 때문에 생떼 같은 목숨이 한꺼번에 사라졌었다.

‘전두호가 완전히 몰락하는 날로 더없이 좋은 날이군.’

그렇게 디데이는 정해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