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 별들의 잔치(1)
금산 호텔.
오늘은 이곳에서 금산 기업의 30주년 기념행사가 열린다.
사회 각 계층에서 초대장을 받고 속속 모여들었다.
메인 홀에서 장준용 부부가 손님을 맞았다.
“어서 오십시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태수가 메인 홀에 모습을 드러냈다.
“오, 태양 그룹에서 왔군.”
중장비 이창원과 정유 노일국, 그리고 건설의 박철완.
태양 계열사 3인방이 태수의 뒤를 바짝 따랐다.
그 뒤로는 나머지 계열사 13명의 사장단과 이하 임원진들이 함께했다.
가장 뒤에는 다른 사람보다 훌쩍 큰 2미터 장신의 김광록이 있었다.
“금산의 30주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고맙네, 어서 안으로 들지.”
태양 그룹 사람들이 나타나자 홀에 있던 사람들이 전부 관심을 집중했다.
“저기 봐. 태양 그룹이야.”
“계열사 사장님들에 임원진까지 전부 함께 왔나 봐.”
“전체적으로 연령대가 젊다. 다른 재벌 그룹보다 평균 10년 이상 젊은 것 같네.”
태수와 박철완이 20대다.
거기에 중장비와 정유는 초고속 승진을 거듭한 40대.
나머지 계열사의 사장들 평균 연령도 30, 40대로 무척 젊다.
다른 재벌 계열사 임원진 연령이 평균 50 이상인 것을 생각하면 이례적인 일이다.
“요즘 매일 태양 그룹에 관한 기사가 쏟아지던데.”
“이번에 나온 레미콘 차가 대박이래. 지금 없어서 못 판대.”
“태양 아파트가 거의 미쳤다는 속도로 올라가고 있다면서? 어떻게 그렇게 빠르게 짓지?”
요즘 매일 신문에 태양 그룹에 관한 기사가 쏟아져 나온다.
아파트에 관한 기사가 폭발적인 관심을 끌었기 때문이다.
정유, 중장비, 전기, 전자 엘리베이터와 기름 보일러, 개별 전기 계량기까지.
뜨거운 관심에 힘입어 동방 일보는 태양 그룹 특집 기사까지 내보낸 참이다.
그 가운데는 20대의 젊은 재벌 총수, 강태수가 있었다.
“제일 앞에 있는 남자가 최연소 그룹 총수라며?”
“광산 하나로 시작해서 고작 2년인가 3년 만에 재벌이 됐대.”
“신문에서 요즘 난리잖아. 사우디에서 어마어마한 공사를 따내고, 훈장을 받고, 한국 최고 규모의 아파트를 짓고. 대박이지?”
“한번 말이라도 걸어 볼까?”
사람들 수군대는 소리가 들린다.
‘작년에 있었던 금산 조선 중공업 출범식 때와는 분위기가 많이 다르군.’
태수가 초대장을 내밀었을 때 입구를 지키는 안내인이 자제들 모임이 열리는 층으로 잘못 데려갔다.
거기서 한일권 패거리들을 만나 시비가 붙기도 했다.
그때 제일 먼저 나온 말은 이것이었다.
-누구 태양 건설이라고 아는 사람 있어?
듣도 보도 못한 잡놈 취급을 하면서 비웃는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아무도 태수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격세지감이 들 정도다.
“우리 저쪽으로 가서 얘기 좀 할까?”
금산의 장준용이 태수를 데리고 홀 안쪽으로 향한다.
자연히 태양 계열사 사장단들도 슬며시 흩어졌다.
장준용은 말했다.
“자네가 오기 전부터 다들 자네 얘기만 하더군. 관심이 아주 뜨거워.”
그럴 리가.
“요즘 재벌가 사모들이 사윗감으로 자네를 눈독 들인다는 소문, 못 들었나?”
집안과 집안이 혼인으로 맺어져 세를 불리는 것은 기본 중에서도 기본이다.
불과 작년까지만 하더라도 명함도 못 내밀었던 태수다.
집안 따져, 재산 따져, 교육 따져, 인맥 따져.
그 어느 것을 따져도 태수는 사위로 탐탁지 않았을 터다.
“이제 갓 재벌 반열에 든 제가 눈에나 차겠습니까?”
태수는 믿지 않았다.
“대운 건설의 김우진마저 한 번에 고꾸라지는 게 이 바닥입니다. 저 역시 반짝이다 사라지리라 생각하겠죠.”
“김우진이랑 자네는 많이 다르지. 일단 김우진은 잘나가기 전에 결혼부터 했잖아.”
장준용은 주변을 힐끔 둘러봤다.
“우리 마누라도 아주 난리야. 요즘 사모들 모임에 나가면 다들 자네 얘기로 시끄럽대.”
안 그래도 여자들은 태수가 나타나자 웅성대고 있었다.
“20대 나이에 재벌 총수가 되다니. 진짜 대단하지 않아?”
“아직 결혼 안 했지? 약혼자도 없고. 저 외모라면 여자들이 줄줄이 딸렸지 않을까?”
“어차피 아내 자리는 하나뿐이야.”
예전에는 멀찍이서 지켜보기만 했던 영애들이다.
하지만 태수가 그룹 총수가 되며 손에 꼽히는 신랑감 후보로 급부상하자 어떻게든 말이라도 한번 걸어 보고 싶어서 기회를 살피며 슬금슬금 이쪽으로 다가온다.
그때 장준용이 영애들 쪽으로 손짓한다.
“서연아, 이리 와라.”
금산의 금지옥엽 장서연이다.
영애들이 동시에 장서연을 바라본다.
‘금산의 장 회장이 직접 소개해 주다니.’
빼어난 미인이었다.
재벌가 최고의 미인 소리를 듣는 여자다웠다.
한일권이 몹시도 탐내어 안달 내던 여자이기도 했다.
또각또각.
그녀가 이쪽으로 다가온다.
순식간에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여자였다.
청초하고 우아해서 백합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안녕하세요. 장서연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만나게 되어 정말 반가워요.”
“반갑습니다.”
발레인가 무용을 전공했다고 들었다.
몸짓 하나하나마다 묘하게 시선을 끄는 여자였다.
‘이렇게 가까이서 본 건 처음이군. 확실히 대단한 미인이야.’
늘 멀리서만 보곤 했다.
한일권이 태수를 무척 경계하여 그녀 근처에도 가지 못하게 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절벽 위의 꽃이었다.
“아버지께 말씀 많이 들었어요. 신문에 나온 사진보다 실물이 훨씬 근사하시네요.”
예의상 하는 말치고는 호감이 듬뿍 묻어 있었다.
“금산의 금지옥엽께서도 소문보다 훨씬 아름다우십니다.”
장서연이 활짝 웃는다.
기분이 좋아 보이는 웃음이었다.
장준용이 껄껄 웃으며 장서연의 등을 떠밀었다.
“젊은 사람들끼리 대화 나누고 있어. 서연이 네가 직접 강 회장 자리도 안내해 주고.”
태수는 엉겁결에 장서연의 안내를 받게 되었다.
“절 따라오세요.”
장서연은 얌전히 앞장섰다.
그녀가 지나갈 때마다 남자들의 시선이 부담스럽게 쏟아진다.
태수의 자리를 안내하며 장서연이 생긋 웃었다.
“아까 했던 말은 진심이에요.”
어떤 말?
“몰리브덴 광산을 운영하셨다죠? 강원도에 다녀오신 김 비서님을 시작으로, 포항에 다녀오신 아버지도 당신 얘기를 꺼내셨죠. 꽤 오랫동안 당신에 대해 들어왔어요. 한 2년쯤 된 것 같아요.”
장서연이 태수를 본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다른 영애들은 전혀 모르는 젊은 남자. 아버지가 그리 칭찬하는 사람은 처음이었어요.”
태수도 장서연을 보았다.
“늘 궁금했어요. 어떤 남자인지.”
장서연의 호감이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 알게 됐다.
“이렇게 만나게 되어 정말 반가워요.”
처음 만나서 했던 것과 똑같은 말이었다.
그런데 어째 그냥 예의처럼 들리지 않는다.
아까와 달리.
“음?”
갑자기 전체적으로 웅성대기 시작한다.
태수는 뒤를 돌아봤다.
‘박정환, 차기범, 신지수, 김재국에 전두호까지?’
박정환을 든든히 바치고 있는 실세들이 등장했다.
‘신지수 현 중앙 정보부 부장.’
63년 12월에 불과 36살의 나이로 검찰총장이 되었다가, 박정환 대통령 당선의 공을 인정받아 법무부 장관이 되었다.
이후 유신 헌법 작업에 관여해 73년 중앙 정보부 부장 위에 오른다.
‘중앙 정보부 차장인 김재국.’
박정환이 제5 사단장일 때 참모장이 육사 출신 김재국이었다.
46년 조선 국방 사관학교 동기생으로 입교한 박정환과 인연을 맺고, 1.21사태 후 방첩 부대를 개편해 초대 보안 사령관이 된 인물이다.
‘현 보안 사령관 전두호.’
이번에 육군 제1 사단장에서 보안 사령관으로 승진한 전두호.
‘박정환의 실세들이 모두 모였군.’
그들이 금산 호텔로 들어오고 있었다.
박정환이 주변을 한 번 힐끔 둘러보더니 말했다.
“내 초대장 받은 사람들은 전부 7층으로 올라와.”
박정환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7층으로 올라간다.
그 뒤를 따라가는 별들.
장서연이 태수를 보며 생긋 웃었다.
“각하께서 부르시니 올라가셔야겠어요.”
태수는 품에서 초대장을 꺼냈다.
테두리에 금색이 둘린 초대장이다.
“7층까지 안내해 드릴게요.”
* * *
7층에 올라가니 벌써 사람들이 가득 들어서 있었다.
‘이 사람들이 전부 각하의 초대장을 받고 온 사람들인가?’
많아도 너무 많다.
장서연이 작게 귀엣말을 한다.
“이곳에 온 사람 중에 당신 같은 금색 초대장을 받고 온 사람은 거의 없어요.”
“그럼 이 사람들은…….”
“궁금해서 기웃거리는 사람들이겠죠. 아시잖아요.”
박정환은 이미 VIP룸에 들어간 모양이다.
밖에 차기범과 전두호가 있었다.
그런데 둘 사이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보안 사령관으로 승진한 걸 축하하네.”
“축하는 무슨. 당신이 일부러 손썼다는 걸 다 아는데. 상당히 뻔뻔해.”
전두호는 웃고 있지만 말에는 뼈가 들었다.
“육군 제1 사단장에서 빈껍데기만 남은 보안 사령관이 됐어. 이쯤 되면 승진이 아니라 좌천 아닌가?”
당시 보안 사령부의 위상과 파워는 최악이었다.
전임 보안 사령관이 몸을 사리는 데만 급급했기 때문이다.
“대통령 각하께 직접 하던 정보 보고를 왜 당신이 받는 거지? 그거 월권 아닌가?”
전임 보안 사령관이 박정환을 무척 부담스러워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일이긴 했다.
하지만 차기범은 당연한 듯이 차기 보안 사령관인 전두호의 보고도 자신이 받겠다고 나섰다.
“권력 기관의 장이 대통령과 자주 만나 특별한 임무를 받으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는 법이지. 내가 두렵나, 차기범?”
전두호를 못마땅하게 생각한 차기범이 중간에서 보고를 차단했다.
전두호는 그것을 꼬집고 있었다.
“호가호위도 정도껏 해야지. 차기범, 당신이 대통령 각하라도 됐다고 착각하는 건가?”
“말조심해.”
차기범이 코웃음 쳤다.
“사단장 경력 1년 3개월 만에 중장이 지휘하는 군단장급 직위에 보직됐다. 실질적 권력은 더 막강하지. 그런 자리에 올랐으면서도 불만이라니, 욕심이 끝을 모르는군.”
실질적인 권력 서열은 차기범 경호실장, 김정림 비서실장, 신지수 중앙 정보부장에 이어 보안 사령관이 4위에 해당한다.
그 막강한 권력을 이용해 군을 통제하려고 하는 야심가.
전두호를 바라보는 차기범의 눈에는 못마땅함이 가득했다.
“호가호위하는 건 내가 아니라 너야, 전두호.”
차기범과 전두호 사이에 보이지 않는 불꽃이 튀었다.
“각하의 비호를 등에 업고 전권을 휘두르는 것도 정도껏 해야지. 군에 사조직을 만드는 의도가 뭔가? 쿠데타라도 벌이려는 참인가? 그건 반역이야.”
“반역?”
술을 마시던 전두호는 웃음기를 지웠다.
술잔을 든 손에 힘줄이 불거졌다.
“각하께서 오성회를 모른다고 생각하는 얼간이는 아니겠지? 반역이라고? 각하께서 누구 말을 믿으실까? 나? 아니면 당신?”
전두호는 비아냥댔다.
“차기범, 육사에 떨어져서 육사 출신에게 콤플렉스를 심하게 느낀다는 건 나도 잘 알아. 하지만 열등감은 스스로 삭여야지. 이렇게 겉으로 드러내면 꼴사납잖아. 안 그런가?”
차기범은 육사 시험에 떨어졌다.
이후 육군 포병 간부 시험에 합격하여 군 생활을 시작했다.
5.16 군사 정변 때는 공수 특전단 대위 계급으로 쿠데타에 적극 참여해 박정환의 신임을 샀다.
“전두호. 보안부대에 오성회 소속 육사 16, 17, 18기를 모아 참모진을 꾸렸더군.”
차기범의 눈빛이 매서웠다.
“보안사 근무 경력이 있는 허평화 대령을 비서실장에, 허수삼 대령을 인사처장에, 대공 수사 업무에 이봉학 대령을 대공처장에 기용했어. 거기에 수도 경비 사령부의 장동세 대령과 김영진 대령을 합해 5인방을 구성했다지?”
“내가 참모진을 꾸리는 데도 대통령 경호실장의 인가를 받아야 하나? 이거야말로 월권이지.”
차기범이 턱을 들고 전두호를 내려다보았다.
“계엄 선포 시 보안사가 어떻게 정국을 바로잡고 수습할 수 있을지에 대한 ‘시국 수습 방안 연구’를 시켰다던데. 왜 계엄 선포 이후를 연습하는 거지?”
차기범은 돌직구를 날렸다.
“마치 각하께 무슨 일이라도 생긴 이후를 대비하는 것처럼.”
술잔을 든 전두호의 손이 바르르 떨린다.
차기범은 전두호를 삐뚜름하게 보았다.
“이래도 반역 모의가 아니라고 잡아뗄 셈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