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 신문 광고 전쟁(2)
한일권이 다급하게 말했다.
“강태수가 은행에 수작을 부리겠답니다.”
“뭐?”
은행이라면 절대 안 된다.
한청호는 벌떡 일어났다.
“똑바로 말해 봐!”
“그놈한테 했던 짓을 고스란히 되돌려 주겠대요. 은행 대출 막고, 대출금 상환을…….”
“흥!”
한청호는 코웃음 쳤다.
“그까짓 새끼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각하께서 움직이지 않으면 어림도 없어.”
“각하를 움직일 자신이 있다는 눈치였습니다.”
“…그럴 리가.”
강태수가 박정환을?
한청호의 눈동자가 재빨리 움직인다.
머리를 굴리고 또 굴렸다.
결론은 하나다.
“뻥 친 거야. 그럴 능력이 있었으면 진즉에 했겠지.”
한청호는 믿지 않았다.
“헛소리에 놀아나지 말고 하던 일이나 똑바로 해.”
한청호는 한일권을 노려보았다.
“거기까지 찾아가서 땅문서 안 받아 오고 뭐 했어? 꽁지 빠져라 여기까지 달려오는 시간에 그놈 멱살이라도 잡았어야지!”
못난 놈.
* * *
태양 그룹 총괄 비서가 된 송창준은 요즘 무척 바빴다.
동방 일보에서 대대적으로 태양 아파트에 대한 기사를 싣고 나서부터다.
대대적인 신문 광고 이후 각종 언론과 잡지사에서 줄줄이 인터뷰를 요청해 왔다.
“회장님, 이번엔 조석 일보에서 인터뷰를 하고 싶답니다.”
“회장님, 한강 일보에서…….”
“회장님, 경제 전문 월간지 한국 경제 채널에서…….”
“회장님, 한마을 일보는…….”
덕분에 태수는 요즘 하루마다 신문을 번갈아 가며 나오는 유명 인사가 되었다.
태양 아파트에 관한 기사가 쏟아진다.
-최고급 프리미엄 아파트! 32평형에서 64평형까지!
-호텔이 아닙니다! 아파트입니다! 호텔에서 만나던 서비스를 태양 아파트에서 이용해 보세요!
-대한민국 단일 아파트 단지로는 으뜸!
-대한민국 교육의 중심지! 총 여섯 개의 학교와 주민 도서관까지! 모두 도보로 5분 거리에!
-아파트 단지를 둘러싸고 학원가가 들어선다!
신문 광고 처음으로 2면 광고를 때린 효과는 굉장했다.
따로 태양 건설 아파트 홍보 전담 팀을 마련해야 할 정도였다.
따르릉.
“네, 태양 건설 아파트 홍보부입니다.”
-태양 아파트, 언제 준공될 예정인가요? 우선 입주 순위 조건이 있나요?
따르릉.
“네, 태양 건설 아파트 홍보부입니다.”
-태양 아파트 상가에 입주하고 싶은데요.
따르릉.
-태양 아파트, 선분양 가능할까요?
따르릉.
-태양 아파트, 분양권 추첨은 언제 하나요?
따르릉.
따르릉.
홍보부 전화통에 불이 났다.
온종일 울려 대는 전화 때문에 홍보실 직원은 파김치가 되었다.
이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는 본사 홍보실장 홀쭉이.
“나 때는 말이야, 몰리브덴 광산에 주문 전화가 쏟아져서 화장실 갈 틈도 없었지.”
지금 이 상황이 익숙한 사람은 홀쭉이 한 사람밖에 없었다.
따라서 누구보다 능숙하게 상황을 이끌어 갈 수 있는 사람도 홀쭉이었다.
“자, 점심시간입니다. 모두 전화선 뽑고 밥 먹읍시다. 체는 하지 말아야겠죠?”
몰리브덴 광산 사무실에서도 늘 애용하던 방법이었다.
* * *
청일 그룹 본사 회장실.
한청호는 동방 일보를 책상에 탕탕 내려쳤다.
“최고급 아파트? 중산층을 겨냥한 아파트? 웃기고 있네!”
신문 2면이나 통째로 써서 광고를 때리다니.
박 비서가 바닥에 떨어진 신문을 힐끗 보면서 말했다.
“사람들의 관심이 뜨거운가 보더라고요. 청일 직원들도 태양 아파트에 대해서 쑥덕거립니다.”
“이것들이 할 일도 없나! 직원들 단속 제대로 못해?”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
“내가 눈독 들인 곳을 차지해? 강태수!”
벌써 태양 아파트 기초 공사가 다 끝났다는 소리를 들었다.
무려 8만 5천여 평의 기초 공사가 이렇게 빨리 끝나다니.
믿을 수 없었다.
“빈민들이나 사는 아파트라서 일부러 서민 아파트라고 높여 부르는 거야. 이름이라도 그럴싸하면 지들이 정말 서민이 되었다고 착각하는 법이니까.”
꿈과 희망을 심어 주기 위해서다.
비참한 현실을 잠시만이라도 잊으라고.
“두고 봐라. 중산층이 그런 아파트를 거들떠나 보나.”
그래서 한청호는 자신만만했다.
“강태수는 곧 쫄딱 망하고 말 거야. 두고 봐. 대출도 내가 다시 틀어막을 테니까.”
최고급 아파트를 짓겠다고 공약하고 나섰다.
그러니 건설 자금이 얼마나 들어갈지 끔찍하다.
고급 재료를 듬뿍 써야 하지 않겠나.
그러니 대출만 막으면 저놈은 돈줄이 마를 것이다.
“중산층 아파트? 누가 망할 곳에 투자하겠어?”
오죽하면 금산의 장준용마저도 소형으로 짓겠다고 했겠나.
* * *
태양 아파트 공사 현장에 금산의 장준용이 찾아왔다.
태수는 손님을 반겼다.
“여기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지나가다가 들렀지.”
김 비서는 황당했다.
‘신문 보자마자 울산에서 달려오신 분이, 지나가다 들리기는 개뿔!’
장준용은 웃었다.
“중산층을 겨냥한 최고급 아파트를 짓겠다고?”
“네, 그러려고 합니다.”
“안전하게 소형으로 시작해 보는 게 어떤가? 아파트 분양은 한 번도 안 해 봤지 않나.”
아파트 분양을 안 해 보기는.
청일 그룹에서 해마다 전국을 돌며 짓는 게 아파트인데.
이렇게 바닥부터 기어올라 온 건 처음이지만 말이다.
“자네 지금 인생을 걸고 도박 한판을 벌이는 거겠지? 그것도 올인…….”
장준용이 걱정스레 태수를 본다.
울산에서 한달음에 이곳까지 달려온 이유였다.
“동맹이란 이름으로 잔소리 딱 한 번만 하겠네.”
장준용이 눈을 감았다.
“한 번 삐끗하면 여태 쌓아 온 모든 것이 한순간에 모래성처럼 무너져 버릴 거야. 대운 건설에 김우진이라고 아는지 모르겠군.”
왜 모르겠는가.
심지어 그 김우진, 사우디에서 주베일 산업항 공사를 맡아서 하고 있다.
태양 그룹 소속으로 들어와서.
“대운 건설 김우진은 무서운 기세로 쭉쭉 치고 올라왔었어. 아주 공격적인 투자에 화끈한 베팅, 연이은 성공으로 순식간에 재벌 순위에 발을 걸치게 됐지. 자네보다 한 10살 많나?”
정확히는 태수보다 13살이 더 많다.
“딱 한 번 삐끗해서 모든 걸 잃고 한국을 떠났다고 하더군. 다시 재기하기 힘들 거야.”
장준용은 씁쓸했다.
“이대로만 잘 컸으면 아마 10년 내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재벌이 될 수 있었을 사람이었어. 각하의 기대도 무척 컸고, 나 역시 주시하던 자였는데 말이야. 이 바닥이 그래.”
많이들 고꾸라진다.
경제가 안 좋아서, 불운한 사고가 터져서, 정권에 밉보여서.
이유는 많다.
하지만 결과는 같다. 실패, 파산, 부도, 아웃.
“자네는 미래가 장밋빛으로 보이겠지? 젊으니까. 성공했으니까.”
장준용도 젊을 때 그랬다.
패기만만하게 밀어붙여서 성공했고, 지금 재벌의 반열에 올랐다.
그러니 태수의 통 큰 아파트 투자가 만용으로 보였다.
“젊어서 거둔 성공은 형편없는 선생이야. 똑똑한 사람들은 인생에서 자신이 절대 패할 일이 없다고 착각하게 되거든.”
장준용은 손가락으로 스스로를 가리켰다.
“나도 그랬어. 그 성공이 전부 내 능력인 줄 알았거든. 하지만 지금 내 처지를 보게. 각하께서 부르면 달려가 엎드리지. 어떻게든 버텨 보려고.”
장준용이 한숨을 쉰다.
“중산층이 사는 아파트라니, 난 듣도 보도 못했다네.”
이 바닥에서 잔뼈가 굵은 장준용이다.
건설에서 승부를 걸어 굵직한 관급 공사를 성공해 내며 금산 건설을 크게 키운 장준용이다.
그러니 더 걱정이 되는 거다.
“자네도 자신이 없으니 광고와 언론에 매달리는 게 아닌가.”
아니다.
그건 덤이다.
제일 중요한 목적은 한청호의 속을 뒤집는 거다.
한청호가 안달이 나야 무리수를 감행할 테니까.
“자네는 능력 있어. 이리 급하게 달려들지 않아도 곧 한 손에 드는 재벌이 될 거야. 그러니 이번만은 다시 심사숙고해 보지 않겠나?”
태수는 조용히 말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번복은 없을 겁니다.”
태양 아파트는 중요한 분기점이 될 전쟁이다.
이번 한 방에 모든 것이 달렸다.
태수가 명실상부한 재벌로 우뚝 서느냐, 아니면 이대로 빌빌댈 것이냐.
“천천히 가세. 자네는 젊으니 시간은 많아. 이번 분양은 너무 위험해. 사람들 인식은 그리 쉽게 바뀌는 게 아니야. 시간을 두고 차근차근, 안전하게…….”
“회장님은 그렇게 재벌이 되셨습니까? 차근차근 안전한 길로만 다니셔서요?”
“…….”
장준용의 말문이 턱 막혔다.
안전한 거 따지면서 재벌 되는 인간이 어디 있나?
이 바닥에서 재벌 되는 인간들은 돈 되는 것만 따져서 기어올라 온 인간들이다.
돈 되는 일에 위험이 따르는 건 아주 당연한 소리다.
“그래도 이건 너무 무모해. 리스크가 너무 크지 않나.”
“무모함과 계산된 위험은 다릅니다.”
“계산된 위험이라…….”
장준용은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의 각오는 함부로 꺾으려 들면 안 되는 법이지.”
장준용은 대신 다른 것을 물었다.
“건설 자금은 부족하지 않겠나?”
남자의 자존심은 주머니에서 나오는 법이다.
장준용은 태수의 각오가 빈 주머니 때문에 꺾이길 바라지 않았다.
“태양이 이번에 큰 공사를 맡았지 않습니까?”
장준용은 바로 알아차렸다.
태수는 무려 10억 달러짜리 공사를 따왔다.
“주베일에서 버는 돈을 이곳에 다 쏟아부을 작정인가?”
“예.”
아파트 공사 자금을 벌려고 중동 건설에 뛰어든 거다.
오일 쇼크를 타고 석유 뻥튀기를 하려 다 보니 별일이 다 생겼지만 애초에 아파트 건설 자금을 벌기 위해 시작한 일이었다.
“이 정도 규모의 아파트 분양이 망하면 재기는 힘들어. 자신 있겠지?”
“대신 성공하면 단번에 10대 재벌 안에 들어갈 수 있는 규모죠.”
“……그렇지.”
무려 대지 8만 5천여 평에 4,824가구나 들어선다.
아파트 건설에 들어가는 돈은 천문학적인 금액이 될 것이다.
따라서 분양이 성공하면 순식간에 재계 순위가 껑충 뛰어오를 것이다.
“이 정도면 도박 한번 해 볼 만하지 않습니까? 아파트 건설 자금이 부족한 것도 아닌데요.”
“……그도 그렇지.”
“긴말 하진 않겠습니다. 결과로 보여드리죠.”
“좋아!”
장준용이 오히려 의욕적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기회가 왔구나! 그럼 달려들어야지! 젊을 때 몸 사려서 뭐해? 기회가 왔으면 잡아야지!”
조금 전까지 위험하다며 말리던 장준용이 아닌가.
하지만 순식간에 재계 서열이 몇백 단계가 훌쩍 뛰게 생겼다.
물론 ‘성공한다면’이란 전제가 붙긴 하지만 말이다.
“내가 늙었나 보네. 괜한 걱정을 했어. 자네가 어련히 알아서 잘하고 있는 것을.”
장준용이 태수에게 손을 내밀었다.
“멋지게 성공해서 내 곁으로 성큼 날아오게나. 내 그날을 기다리고 있지.”
“오래 기다리게 만들지 않겠습니다.”
태수는 씩 웃었다.
“이참에 금산에서도 신문에 대대적인 광고를 내보는 건 어떻습니까?”
“광고?”
아직 기초 공사도 제대로 끝나지 않은 압구정동 금산 아파트다.
그런데 광고라니?
“금산은 직원 사택용 아파트를 지으려 다 각하의 의견으로 규모가 커졌다면서요?”
“그래.”
“차라리 금산 직원 모집 혹은 직원 복지를 함께 홍보하는 게 어떻습니까?”
구미가 당긴다.
안 그래도 대대적인 구조 조정 이후 경기가 조금 살아날 조짐이 보이고 있다.
우수한 인재들이 필요할 때다.
그렇기에 직원의 사택으로 쓸 금산 아파트를 짓겠다는 것이고.
“다들 강남 아파트 개발 관심이 뜨거울 때 숟가락을 올려야 홍보 효과를 제대로 누리는 법입니다.”
밥상은 태수가 차렸다.
요즘 금산에서도 모두 태양 아파트에 대해 말하기 바쁘다.
그걸 아는 장준용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좋은 생각이야.”
장준용의 머리가 팽팽 돌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