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 안 팔아!(3)
종로의 국빈관.
밤마다 쇼가 벌어지는 화려한 유흥업소다.
하지만 낮은 생각보다 조용하다.
한일권은 오랜만에 그곳을 찾았다.
“잠깐만 기다리십쇼. 귀한 댁 도련님이 보실 만한 광경은 아니라서.”
“내가 한두 번 보나. 안내해.”
국빈관 지하실에선 종종 끔찍한 일이 벌어지곤 했다.
바로 지금처럼.
끼익. 끼익.
흔들리는 백열구, 담배 연기로 자욱한 실내.
지하실은 고문실로 안성맞춤이었다.
피투성이가 된 남자를 욕조에 머리를 처박았다 뺀다.
“푸하! 쿨럭, 쿨럭. 케헥!”
젊은 사내, 국빈관 두목은 물었다.
“끈질기게 버텨 봤자야. 너 같은 새끼 하나 죽어 없어져도 아무도 몰라. 굳이 힘 뺄 필요 있어? 곧 불게 될 텐데. 안 그래?”
꼬르륵.
다시 사내의 머리채를 물속에 처박는 국빈관 두목이다.
한일권이 키득키득 웃었다.
“이런 건 언제 봐도 재밌어.”
두목은 그제야 입구에 서 있는 한일권을 발견했다.
“오랜만이야. 나 지금 바쁜데 어쩌지?”
“내가 더 바빠.”
한일권이 품에서 지폐 다발을 들어 보였다.
“아, 나 지금 바쁜데. 어쩔 수 없지.”
젊은 사내가 손수건으로 손을 닦았다.
한일권과 함께 옆방으로 들어선 사내.
한일권이 의자에 앉으며 용건을 꺼냈다.
“애들을 좀 쓰고 싶은데.”
“이번엔 또 무슨 일로 우리 애들이 필요해?”
수고비가 늘 짭짤하지만 간혹 너무 막가는 일이 많아서 꺼려진다.
“땅 주인이 말을 안 들어서 말이야.”
“아, 그런 거라면.”
웬일로 난이도가 낮은 쉬운 일에 손을 벌리나 의아하다.
“잠실 땅 때문에 골치가 아파. 웬만한 어깨들로는 명함도 못 내밀어.”
어깨들을 잔뜩 데리고 갔던 김재학은 두 다리가 깔끔하게 부러져서 들것에 실려 갔다.
“부실한 놈들을 쓰던데. 우리 애들, 얼마나 필요해?”
“한 50명? 연장 들고.”
황당했다.
“땅 주인 만나러 간다면서 무슨 50명씩이나 필요해? 어느 파야?”
“글쎄.”
보통 솜씨가 아니라고 했다.
김재학은 그날을 떠올릴 때마다 학을 떼며 언급조차 피하고 있다.
그놈이 그렇게 겁에 질린 건 처음 본다.
“넉넉히 연장 들려서 10명만 보내지. 우리 애들 실력이면 충분하고도 남아.”
“일곱 명이 갔다가 손도 못 써 보고 당했다. 10명이 가 봤자 어려울 텐데?”
“질문이 잘못됐군. 몇 놈이나 잡아야 돼?”
“한 놈.”
“한 놈? 어처구니가 없네.”
한일권은 두둑한 돈다발을 꺼냈다.
한 개, 두 개.
총 2천만 원이다.
“난 땅문서랑 집문서만 가져오면 돼.”
문서 하나당 천만 원이다.
무려 아파트 세 채 가격이 넘는다.
국빈관 두목의 눈에 탐욕이 어렸다.
“20명. 그 정도면 충분하잖아?”
“고집은. 대신 뒷일은 당신이 책임져.”
“까짓것. 행동 대장 보낼 테니까 염려할 것 없어. 솜씨가 좋거든.”
한일권은 먼저 나와 자동차를 탔다.
“어디 솜씨 한번 구경해 볼까?”
칼 든 조직폭력배 20명을 당해 내진 못하겠지.
잠시 기다리자 번쩍이는 날붙이를 들고 있는 덩치 20명이 트럭을 나눠 타고 이동하기 시작했다.
“따라가.”
한일권의 명령에 따라 운전기사가 조용히 차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김광록은 따분했다.
“그냥 나만 믿으면 될 텐데 태수 녀석도 참.”
홀쭉이네 집 거실에 드러누워 한가롭게 창밖만 바라본다.
“건달 새끼들 한 트럭이 와 봐라. 내가 무섭나. 그런데 고용주가 하도 단호하니 고집도 못 부리겠네.”
태수가 완강히 못 박은 덕분에 옆집에서 이러고 있다.
이미 이사까지 전부 끝내고 덩그러니 집만 남은 상황.
“왜 이리 유난을 떠는지 모르겠… 알 것 같군.”
김광록의 눈이 가늘어진다.
양복을 입은 덩치들이 날붙이를 들고 있다.
“이런 시팔 새끼들이!”
김광록은 벌떡 일어났다.
그러다가 태수의 주의 사항을 다시 한번 떠올렸다.
“아 참, 전화부터 하랬지?”
태수가 남긴 연락처를 찾아 전화기를 돌렸다.
월급 주는 고용주의 말은 따라야 한다.
* * *
와당탕.
행동 대장이 엉성하게 대충 막아 놓은 대문을 발로 뻥 찼다.
뒤따르는 부하들 모두 손에 날카로운 날붙이를 든 채다.
살기가 풀풀, 흉흉한 모습이었다.
“야, 집주인!”
조용하다.
적막만 흐른다.
“야, 나오라고. 안 나오면 내가 들어간다!”
조폭들이 우르르 마당 안, 집안으로 달려든다.
“형님, 아무것도 없습니다.”
“쫄아서 튀었나 본데요?”
짐 하나 없이 깨끗하다.
“아, 시발, 어쩌지?”
“형님, 그런데 웬 종이가…….”
종이를 받았더니 커다랗게 글자가 보인다.
<안 팔아!>
그때였다.
또로록.
집안으로 뭔가가 마구잡이로 굴러온다.
연기가 엄청 난다.
푸쉬시식-
최루탄이다.
“쿨럭쿨럭!”
“케헥!”
“시파아아알-!”
눈물 콧물을 빼면서 집안에서 뛰쳐나온다.
마당 안도 최루탄과 연막탄으로 연기가 가득하다.
“뭐야!”
연기 때문에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비명 소리가 들린다.
처맞는 소리와 함께.
“누구야!”
순식간에 누군가 행동 대장의 명치에 주먹을 꽂았다.
기억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 * *
“아오, 시팔! 갈비뼈가 부러졌나? 뒤질 것 같네.”
정신을 차렸을 때 행동 대장은 깜짝 놀랐다.
“여기는 또 어디야?”
탕탕!
경찰이 버럭 소리쳤다.
“누가 유치장에서 소란 떨래?”
경찰서 유치장에서 깨어났다.
“주거 침입에 무기 소지에 집단 패싸움까지.”
강력반 반장이 한숨을 쉬었다.
“중앙 정보부 인사는 왜 건든 거야?”
“중앙 정보부요?”
그런 말 못 들었는데?
행동 대장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저, 전화 좀 쓰게 해 주세요!”
두목에게, 한일권에게, 도움을 청해야겠다.
* * *
경찰서 밖에서 손을 탁탁 터는 김광록.
그 앞에서 90도로 허리 굽힌 남자가 있었다.
캡틴이었다.
“오랜만입니다, 김 중령님.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나 전역했어.”
김 중령은 무슨.
이제는 그냥 경호원이다.
“오랜만이다. 넌 이제 중앙 정보부 소속이라고 했던가?”
“네.”
차기범의 뜻이었다.
정보를 손에 쥐고 있는 중앙 정보부에 눈을 심어 놓기 위해서였다.
박태종의 연줄을 잡았다가 끈 떨어진 신세가 됐던 김광록과는 반대였다.
박태종 라인은 대부분 조기 전역해서 포항 철강이나 경호실 등으로 들어갔기에 군에서 끌어 줄 선배가 없었다.
‘나도 중앙 정보부에 갈 걸 그랬나? 아니지, 태수 옆이 낫지. 더러운 수작질을 꾸미는 건 도저히 체질에 안 맞으니까. 그냥 시키는 대로 따르는 게 속 편해.’
머리를 쓰는 건 김광록 스타일이 아니다.
그냥 몸을 쓰는 게 훨씬 편하다.
김광록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축하한다.”
“별말씀을요. 그런데 전역하시고 강태수 씨와 함께 일하고 계셨습니까?”
캡틴이 김광록의 손을 잡고 악수한다.
“태수를 알아?”
“신세를 좀 졌죠. 덕분에 특진했습니다.”
“이야, 태수가 괜히 네 연락처를 알고 있던 게 아니었구나. 연락하라고 신신당부를 하더라니.”
김광록이 껄껄 웃었다.
“이번엔 네 덕 좀 봤다.”
“덕이라뇨. 조폭은 중령님이 때려잡았는데, 공로는 제가 다 먹게 생겼는데요. 전 다 잡은 놈들 나른 것뿐입니다.”
“여튼 수고했어.”
캡틴은 묘한 표정으로 김광록을 보았다.
“전역하시고 성질이 많이 유해지신 모양입니다.”
성질 더럽단 소리는 많이 듣는데, 성질 유해졌단 소리는 또 처음이다.
“김 중령님 앞에서 칼 든 놈들치고 저렇게 멀쩡한 건 처음 보는 것 같습니다.”
뼈는 확실하게 부러뜨렸다.
깔끔하게.
그런데도 너무 멀쩡하다며 의아해하는 캡틴이었다.
“함부로 칼 든 대가는 치러야 한다면서 최소 어디 하나씩 칼자국 남겨 주시잖아요. 괘씸죄로.”
“북한 간첩 새끼들도 아닌데, 적당히 해야지. 허약한 새끼들 함부로 조졌다가 죽으면 귀찮다.”
김광록은 슬쩍 뒤를 보았다.
검은색 승용차가 눈에 들어왔다.
아까 잠실에서부터 김광록을 따라온 자동차였다.
“하나만 물어보자.”
“예, 선배님.”
“전두호 보안 사령관한테 주기적으로 돈 나르는 인물 말이야. 그 쥐새끼 같은 놈 있잖아.”
“한청호 말입니까?”
김광록은 씩 웃었다.
“어, 한청호.”
그 쥐새끼가 늘 문제다.
“잠깐만 귀 좀.”
고용주인 태수가 부탁한 일이다.
중앙 정보부 힘 좀 빌리겠다나 뭐라 나.
대체 한청호를 상대로 무슨 함정을 파는데, 일본행을 따라가 조사하라고 당부하는지 모르겠다.
‘내가 언제부터 머리 쓰고 살았나. 시키는 대로 하면 장땡이지.’
몰라.
머리 쓰기 귀찮다.
* * *
경찰서 밖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는 차가 한 대 있었다.
한일권이 턱을 쓰다듬었다.
“흐음.”
김광록과 캡틴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간다.
운전기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젠 누구를 따라갈까요?”
한일권이 턱으로 가리켰다.
“큰놈.”
개새끼는 일을 마쳤으면 주인을 찾아가는 법이다.
* * *
대치동 아파트 착공 현장.
포클레인이 수십 대가 달라붙어 8만 5천여 평의 땅을 갈아엎는다.
한쪽에선 불도저가 돌아다니고, 한쪽에선 레미콘과 펌프카가 바닥 기초를 잡는다.
박철완이 지적도와 건축 도면을 들고 태수 옆에 붙어 섰다.
“회장님, 이쪽이 태양 빌딩이 들어설 곳입니다.”
“음.”
아주 좋다.
태양 아파트 정문 상가 한가운데에 태양 빌딩이 우뚝 설 것이다.
14층짜리 거대한 빌딩이 들어서서 태양 그룹의 본사가 되어 줄 예정이다.
“저쪽부터 태양 아파트 1단지 공사를 시작해, 순차적으로 58개동 이 방향으로 지어질 예정입니다.”
“좋습니다.”
원래 건축의 근간은 기초 공사다.
하지만 이곳은 평탄했기에 산을 깎고, 수평을 맞추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없었다.
더구나 중장비가 엄청나게 많이 투입됐다.
덕분에 태양 아파트는 유례없이 빠른 속도로 지어지고 있었다.
“시멘트 공장이 풀가동되고 있습니다. 포항 철강에서 철근이 올라오고 있고요.”
한쪽 구석에 자재들이 차곡차곡 자리 잡았다.
“한꺼번에 많은 물량이 필요할 텐데, 자재가 부족하지 않겠습니까?”
“그건 문제없습니다. 미리 저쪽에 자재를 쌓아 준비해 놓고 있으니까요.”
“중장비는 부족하지 않습니까?”
“현재는 부족합니다. 하지만 계속 지원해 주고 있으니 조만간 괜찮을 것 같습니다.”
태양 중장비에서 최우선적으로 중장비를 지원해 주고 있다.
박철완은 열일을 해 주는 중장비를 뿌듯하게 보았다.
“이번에 태양 중장비에서 새로 나온 레미콘 차가 끝내주게 뽑혔습니다.”
요즘 가장 두각을 드러내는 중장비는 레미콘 차다.
“기존의 레미콘 차보다 용량은 더 커지고, 믹스 기능은 보강되었습니다. 요게 아주 물건입니다.”
박철완이 엄지를 척 내밀었다.
새로운 레미콘 차 덕분에 공사 속도가 더 빨라졌다.
“다만 중장비 숙련 운전자가 부족합니다.”
중장비를 많이 지원해 줬지만 능숙하게 중장비를 다룰 숙련자가 부족하다.
태수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건 별로 어려운 문제가 아닙니다. 시간과 경험이 해결해 줄 테죠. 하지만 마냥 기다릴 수는 없으니 태양 그룹 차원에서 지원을 좀 해 줘야겠습니다.”
“네? 지원이라고 하면…….”
“업무가 끝나면 공터 한쪽에서 중장비를 다루는 연습 시간을 갖도록 하고, 따로 달마다 자체적으로 기능 시험을 보도록 하죠.”
박철완은 잠시 생각했다.
“직원들이 시험을 보려고 할까요? 추가 근무가 될 텐데요.”
“자체 시험에 통과한 자들에겐 월급과 직급을 올려 주도록 합시다. 그럼 다들 시험에 도전하기 위해 연습에 매진할 겁니다.”
돈은 의욕을 고취시키는 좋은 수단이다.
더구나 시험에 합격하면 그룹 차원에서 더 나은 대우를 약속한다.
“태양 전기에서 배선 까는 문제는 어떻게 됐습니까?”
“확인했습니다. 용량 넉넉하게 전부 220V로 맞춰 준비하고 있습니다.”
“상하수도 배관 문제는요?”
“지하에 엄청난 배수, 배관 시설 및 정화조를 매립했습니다.”
“좋습니다.”
태수는 먼지가 풀풀 피어오르는 현장을 보았다.
“기초가 마무리되었으니 이제 위로 쭉쭉 올라갈 일만 남았군요.”
아주 만족스럽다.
마침 지프차가 현장으로 들어온다.
지프차에서 김광록이 내려 태수에게 다가온다.
“태수야.”
표정이 밝다.
“일은 잘 처리하셨습니까?”
“그래. 마침 아는 놈이 나오더라고.”
“캡틴을 알고 계셨습니까?”
“캡틴? 크하핫, 너 그놈을 캡틴이라고 부르냐?”
김광록이 크게 웃었다.
그러면서 뒤를 가리켰다.
“태수야, 시킨 대로 꼬리는 제대로 달고 왔다.”
검은색 자동차 창문을 내리고 한일권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일권, 정말 오랜만이다.
얼굴 보기가 이리 힘들어서야 쓰겠냐. 안 그러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