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 위조 지폐 대작전(4)
모두가 떠난 파흐드의 저택.
경비원은 대부분 죽거나 다쳤고, 일하던 시종들은 전부 떠나고 말았다.
철통 보안을 자랑하던 파흐드의 저택은 쥐 죽은 듯이 적막했다.
그 대문 앞에 택시 한 대가 섰다.
끼익.
택시에서 내린 건 달러가 가득 든 여행용 트렁크를 끌고 있는 중년 남자, 한청호였다.
한참이나 초인종을 누르자 중년 여인이 얼굴을 비쳤다.
[누구세요?]
우느라 퉁퉁 부은 눈과 훌쩍이는 빨간 코.
초췌한 여자는 손수건으로 연신 눈물을 찍으며 물었다.
[대한민국에서 한청호가 찾아왔다고 전해 주시오. 파흐드 장관님을 꼭 좀 뵈어야겠소.]
[남편은… 아까 이 나라를 떠났어요.]
중년 여인의 눈물샘이 다시 폭발했다.
한청호는 황당했다.
[이 나라를 떠나다니? 어디 출장이라도 가셨소?]
[국외 추방됐어요.]
쿵.
한청호가 너무 놀란 나머지 트렁크 가방 손잡이를 놓쳤다.
믿었던 재경부 장관이 어쩌다가!
곧 사우디 국왕이 될 사람이 뜬금없이?
[아니, 왜?]
[위조 지폐 유통이래요.]
[……?]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한청호는 직감했다.
‘아뿔싸! 당했구나!’
칼리드가 선수를 친 것이 분명하다.
‘그럼 주베일 산업항 공사는?’
거기에 들어간 돈이 대체 얼만데!
* * *
사우디 국립 종합 병원.
그곳의 가장 위층 VIP 병실엔 경호원들로 물샐틈없이 빽빽했다.
칼리드는 병원 침대에 앉아 주치의에게 치료받고 있었다.
젊은 시절부터 칼리드를 따라 전선을 돌아다니던 군의관은 어느덧 국립 병원 원장이 되어 있었다.
[총상 환자가 어딜 그리 싸돌아다녀요? 실밥이 또 터졌잖아요? 이번엔 푸시 업이에요, 풀 업이에요?]
푸시 업도 아니고, 풀 업도 아니다.
[꼭 가야만 했던 일이었어.]
병원장의 눈썹이 한껏 치솟는다.
속 터져 죽겠다.
[사우디엔 인재가 그리 없답니까? 아픈 장관님밖에 일을 볼 사람이 없어요?]
[파흐드를 누구더러 잡으라고.]
[아오, 그 새끼!]
파흐드란 소리에 터진 상처를 꿰매다 말고 뒷목부터 잡는 병원장이었다.
[그 욕심쟁이가 또 뒤통수 쳤습니까? 이번엔 누굽니까? 라흐만? 카두?]
[나를 노렸더군.]
[이 씨#*&$%(%*^*^%#&^#$%*$^&(!!]
거하게 쌍욕부터 들이박는 병원장.
허공에 발차기까지 들어가는 걸 보니 옛날 성질 하나도 안 죽은 모양이다.
칼리드는 껄껄 웃었다.
[재산 몰수, 직위 박탈, 국외 추방.]
병원장의 발차기가 뚝 멎었다.
칼리드를 돌아보는 눈에는 경악이 어렸다.
[진짜예요?]
[지금쯤 지프차에 실려서 사막을 건너고 있을 거야.]
진짜라는 소리다.
그래서 믿기지 않는다.
그 못된 녀석이 얼마나 오랫동안 깝죽댔는데도 형제라는 이유로 허허 웃으며 참던 칼리드가 아닌가.
[대체 무슨 짓을 저질렀기에 국외 추방까지 하셨대요? 설마 반란이라도 일으킨 건 아니겠죠? 아니지 그럼 목이 뎅겅 잘렸겠지.]
[그냥, 그럴 일이 있었어.]
칼리드가 눈을 감는다.
그러자 병원장도 차마 더 묻지 못했다.
그저 묵묵히 칼리드의 터진 실밥을 다시 꿰맬 뿐이다.
상처에 소독을 하고 붕대까지 제대로 감았다.
병원장은 손을 탁탁 털었다.
[그럼 다시 상처 터질 일은 없겠네요. 잘하셨습니다.]
병원장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병실을 박차고 나갔다.
[건들지 않고 두면 상처는 곧 아물 겁니다.]
병실 문까지 대차게 닫고 떠났다.
칼리드는 잠시 그 말을 되뇌었다.
[이 상처가 아물 날이 오기는 할까…….]
형님과 동생, 조카들이 모두 12명이 죽었다.
2차 반란에 참여한 사우디 왕족이 모두 여덟 명이나 된다.
칼리드의 고민이 깊어질 때다.
똑똑.
[들어와.]
[아버님.]
라흐만이다.
[어찌 되었느냐?]
[두바이 쪽으로 가신다더군요.]
[두바이라…….]
파흐드는 두바이를 선택한 모양이다.
[나머지 가족들은?]
[사우디에 남고 싶다더군요. 어떻게 할까요?]
[그러라고 해라.]
동생은 가족에게도 버려진 모양이다.
멀리 떠난 형제의 가족을 돌보는 일은 남은 형제의 의리다.
[연판장에 서명한 삼촌들을 만나 뵙고 오는 길입니다.]
무장 군인들과 함께 라흐만을 보낸 이유였다.
[만장일치로 아버님의 국왕 즉위를 찬성하십니다. 국왕 즉위 일도 결정되었습니다.]
[언제냐?]
[일주일 후입니다.]
병원장이 들으면 또 펄쩍 뛸 일이다.
상처 또 터질 일 있냐고.
하지만 미룰 수 없는 일이다.
때로는 상처가 터질 것을 각오하고서라도 움직여야 할 때가 있는 법이다.
이번 일처럼.
[강태수는 파흐드의 지하실에서 무얼 가져갔느냐?]
그 똑똑한 놈이 무얼 탐내는지 궁금했다.
현금, 보석, 권리 문서, 비밀문서 등등.
사람의 숨겨진 마음을 알아보는 데엔 그만한 방법이 없다.
-무엇을 고르는가.
-그게 그의 가장 큰 욕망이다.
칼리드가 태수에게 주는 선물이자 시험이었다.
[다 가져갔습니다.]
[음?]
잘못 들은 것 같다.
[뭘 가져갔다고?]
[전부. 모두. 싹. 죄다. 먼지 한 톨 남기지 않고 통째로 긁어 갔습니다.]
[……?]
황당했다.
[파흐드의 재산을… 전부… 말이냐?]
[정확하게는 지하실에 있는 것 전부, 라고 해야겠죠. 선물은 잘 받겠다고 하더군요. 호의는 거절하는 게 아니라면서.]
그 오랜 세월 동안 싹싹 긁어모아 온 그 많은 재산을 전부?
분명히 적당히, 알아서, 대충, 요령껏, 잘 챙겨 가라고 했던 것 같은데?
[아니, 그걸 어떻게 가져갔단 말이냐? 내가 가방 하나 챙겨 주질 않았는데.]
[아버님께서 요령껏 가져가라고 하셨다면서요?]
[그랬지.]
[아버지 부하들을 아주 제 수하처럼 부려서 지하실을 털었답니다. 아버님께서 미리 언질을 해 주셨다면서요?]
그랬다.
[그가 이곳에서 뭘 들고 나가던 제지하지 말라고 했다.]
[그걸 교묘히 써먹었습니다. 아버님의 명령인 줄 알고 열심히도 도왔더라고요.]
[하하하.]
정말 요령도 제대로 부리는 놈이다.
[강태수, 진짜 대단한 놈이구나.]
[적당히 토해 놓으라고 압력을 넣을까요?]
[됐다. 그냥 둬라.]
칼리드는 빙그레 웃었다.
[알아서 제 몫을 챙겨 간 것이다. 배포가 큰 것을 누가 탓하겠느냐?]
진짜 마음에 든다.
사내라면 그 정도 배짱은 있어야 하지. 암!
* * *
수도 리야드의 사우디 왕실의 궁전.
오늘은 칼리드의 즉위식이 있는 날이다.
이 소식을 들은 전 세계 각국에서 취재진이 잔뜩 몰려들었다.
그중에 한국에서 파견 나온 취재진도 있었다.
“규모가 어마어마한데요?”
“중동 최대의 산유국이잖아. 이번 중동 전쟁의 주역인 명장 칼리드의 즉위식인데, 어련하겠어?”
촤촤촤촤촤촤.
연신 쏟아지는 플래시 세례.
중동 최대 산유국의 파워를 여실히 보여 주는, 아주 화려한 즉위식이었다.
지루한 즉위 절차는 길기도 길다.
“선배, 그런데 저 사람은 누구죠?”
“누구?”
“저기 젊은 동양인 말이에요. 왜 사우디 왕실 행사에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죠?”
그러고 보니 이상하다.
사우디 왕족들이 자리하고 있는 자리 중 말석이나마 차지한 것이다.
그의 옆에는 유별나게 화려하게 치장한 멋쟁이가 한 명 앉아 있었다.
“저 남자 옆에 앉아 있는 사람, 혹시 그 사우디 왕자 아니에요?”
그러고 보니 아는 얼굴이다.
“지난번에 한국에 한 번 방한했지 않나? 박정환 대통령과 함께 찍은 신문 1면에서 본 것 같은데.”
“그때 한창 떠들썩했었죠? ‘사우디 왕자와 석유 공급에 대한 비공식 회담’이 열렸다고. 맞죠?”
“덕분에 한국만 오일 쇼크에서 벗어나 경제 성장하게 생겼다고 다들 좋아했었지.”
그때였다.
[명예 공훈의 훈장 수여식이 이어지겠습니다.]
여러 이름이 호명한 가운데, 익숙한 한국 이름이 하나 들린다.
[…강태수. 이상입니다.]
한국 기자들이 화들짝 놀랐다.
“강태수? 설마 태양 그룹의 젊은 총수?”
“이, 이게 어찌 된 일일까요?”
“일단 찍어! 특종이다!”
촤촤촤촤.
[…강태수는 중동 전쟁을 조기 종결하는데 크게 기여하였고, 또한 이번 사우디 위조 지폐 유통범을 잡는데 지대하게 공헌했으며 이밖에 사우디와 대한민국 양국의 화합을 다지는 가교 역할을 한 바, 이를 높이 사서 훈장을 수여한다.]
강태수가 늠름하게 가슴을 폈다.
사우디의 새로운 국왕 칼리드가 태수의 가슴팍에 번쩍거리는 훈장을 달아 주었다.
[잘 어울리는군.]
[감사합니다.]
촤촤촤촤촤.
강태수의 명예 훈장 수여식은 5분도 되지 않았다.
신문의 귀퉁이에 작게 실리거나 말거나 할 작은 사건이었다.
-사우디 국왕이 즉위식 연설에서 대한민국을 언급하다! 협력을 약속하다!
-즉위식을 빛낸 한국인은 따로 있었다!
하지만 다음 날 한국에서 출간되는 모든 신문 1면은 강태수로 도배되었다.
-한국인 최초의 사우디 명예 훈장의 주인공!
-강태수, 그는 누구인가?
-태양 그룹, 사업을 시작한 지 2년 만에 재벌 그룹의 반열에 들다!
다음 날엔 강태수의 다른 이야기로 한국의 신문 1면이 일제히 도배됐다.
-사우디 주베일 산업항 공사를 따내다! 한국인이 일을 냈다!
-사우디 최고의 석유 전진 기지 한국의 태양 건설이 만든다!
-무려 20여 개국의 치열한 입찰 경쟁을 종식시킨 승리자! 바로 한국의 태양 건설!
-자랑스러운 한국 기업! 사우디에서 그 이름을 크게 떨치다!
-오일 머니를 타고 중동에서 건설 붐이 시작되었나!
신문을 접으며 박정환은 크게 웃었다.
“하하하, 강태수, 이 친구가 결국 일을 해냈군. 내 그럴 줄 알았지.”
차기범이 옆에서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박정환은 드물게 기분이 좋았다.
“사우디 국왕의 즉위식에서 명예 훈장까지 받다니. 석유 공급 권리증만으로도 충분했는데 말이야, 하하하.”
중동 전쟁의 조기 종결이라니.
사우디 위조 지폐 유통범 검거에 협력했다니.
그 공을 인정받아 외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사우디 명예 훈장을 받다니.
그 외국인이 바로 대한민국의 국민이다.
생각할수록 마음에 든다.
“사우디 왕실에서 정식으로 감사의 서한을 보내왔어. 앞으로 양국의 협력을 강화해 보자는데, 내가 어찌 외면할 수 있겠나.”
덕분에 박정환의 체면이 크게 살았다.
이것만큼 기분 좋은 소식이 없다.
박정환에게 아쉬운 것은 단 하나, 국제적 위상이었다.
“더 많은 일로 대한민국을 널리 알려야 할 텐데.”
아직도 세계에서 한국은 미국과 서방 국가의 원조를 받는 가난한 나라 중 하나란 인식이 있다.
아프리카의 나라보다도 못 사는 전쟁 국가!
박정환이 기를 쓰고 경제 개발에 전념하는 이유였다.
“장 회장은 많이 아쉽겠어.”
박정환은 장준용을 보며 혀를 찼다.
“공동 입찰하겠다더니 어째서 포기했나?”
“협력사로 입찰에 참여했습니다. 그것으로 만족해야지요.”
공동 입찰과는 엄연히 다르다.
“답지 않게 어디서 겸손이야?”
“아시지 않습니까? 금산 건설의 얼간이 한 명이 일을 망쳐 놨지요.”
이문복 때문이다.
박정환도 이문복이 어떤 식으로 장준용의 뒤통수를 쳤는지 안다.
“그놈 요즘 정치에 기웃댄다지? 한청호를 자주 만난다던데.”
“한청호가 지원해 주기로 약속했던 모양이겠죠.”
“영악한 놈이 욕심에 비해 계산이 서툰 모양이군.”
금산의 장준용이 아니라 청일의 한청호의 손을 잡고 정계 진출이라.
“계산이 빠른 한청호가 순순히 도와줄 것 같은가?”
“그러려고 공을 들인 것 아니겠습니까?”
“진짜로 그리 생각하는 건 아니지?”
박정환은 웃었다.
“한청호는 말이야, 오랜 시간 공들여 인재를 키울 만큼 성질이 느긋한 자가 아니야. 차라리 지금 당장 쓸모를 증명하는 자를 일회용으로 쓰고 버리지.”
한청호가 어떤 자인지 박정환이 더 잘 안다.
재벌 총수 자질보다 정치인 자질이 더 뛰어난 한청호가 아닌가.
“두고 보게. 그놈이 어찌 버려지는지.”
그래서 박정환은 장담했다.
장준용을 배신하고 한청호에게 들러붙은 그놈은 곧 버려질 것이라고.
지금 그깟 조무래기 일이 중요한 게 아니다.
박정환은 턱을 괴고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사우디에서는 훈장을 주는데, 우리가 입을 씻어서야 되겠나?”
국제적으로 체면을 올려 줬는데, 모른 척할 수는 없지.
사우디 왕실에서 보낸 친서에도 특별히 강태수에 대한 언급이 있었다.
그래서 고민이다.
“강남 개발이라…….”
마침 좋은 게 생각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