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산 찍고 건설 재벌-112화 (112/230)

112. 위조 지폐 대작전(1)

한청호의 서재.

한청호는 텔레비전을 껐다.

“지겨워. 애국가도 1절이면 족해. 뭐 대단한 위인이라고.”

오늘도 어김없이 영부인 피살 사건에 대해 연일 대서특필하고 있었다.

“죽은 사람이 중요해? 산 사람이 중요하지. 하여튼 언론인들 난리법석은. 쯧쯧.”

오영순은 족쇄를 풀고 하늘로 훨훨 날아가 버렸다.

그냥 예쁨이나 받으며 새장 안에서 살 것이지.

‘일본 중앙은행에 숨겨진 빨간 은행. 분명 거기에 있는데, 암호문을 어디에 숨겨 놨을까…….’

오영순은 많은 것을 남기고 떠났다.

그녀에게서 뜯어낸 주식과 부동산, 돈도 한밑천이다.

‘오영순이 풀려나기 전에 박정환의 목줄까지 토해 내고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아쉽다.

오랜 인내의 시간이었다.

한청호는 느긋하게 소파에 몸을 기댔다.

“오영순이 금고 암호문을 토해 내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게서 얻어 내면 그만이지. 난 네가 누구한테 암호문을 남겼을지 알아. 보나 마나 네 딸이겠지.”

한청호는 서재 바깥을 향해 크게 외쳤다.

“박 비서, 일권이는 아직 안 돌아왔나? 출발한 지가 언젠데 여태 소식이 없어?”

박 비서 대신 한일권이 대답했다.

“저 방금 도착했어요. 아버지답지 않게 왜 이리 보채실까?”

한일권이 당당하게 한청호의 서재 문을 박차고 들어온다.

그런데 한일권의 손에는 긴 쇠사슬이 들려 있었다.

“그게 다 뭐냐?”

“보면 모르십니까? 개 목줄이죠.”

개 목줄을 사람에게 채워 끌고 왔다는 소리다.

한일권이 쇠사슬을 당기자 한 중년 남자가 윽 소리와 함께 넘어질 듯 서재로 들어온다.

“아버지가 그때 가르쳐 주셨잖아요.”

-그놈을 완전히 짓밟아 버려. 굴복한 개는 주인에게 짓지 못하는 법이다.

“가르침대로 했더니 과연 효과가 좋더라고요. 야, 짖어.”

“멍멍! 월월!”

피투성이가 된 중년 남자가 재빨리 개소리를 낸다.

한일권을 보는 눈은 공포로 질려 있었다.

한일권이 피가 뚝뚝 떨어지는 말채찍을 든 채 어깨를 으쓱댔다.

“보셨죠? 이렇게 만드느라 시간이 조금 걸렸을 뿐이에요.”

“좋다. 아주 잘했다.”

한청호는 중년 남자를 보았다.

“그래, 사이비 교주 노릇을 하고 있다고?”

“사이비가 아니라 작은 교회를…….”

“내가 네놈 뒷조사도 안 했을 줄 아느냐? 사기 치고, 감방 가고, 개명하고, 사이비 교주 노릇도 했잖아.”

“그, 그건… 과거일 뿐입니다. 지금은 건전하게 삽니다요, 암요.”

한청호는 혀를 찼다.

“건전하게 산다는 놈이 여기저기 씨 뿌리고, 돈 뜯고, 남의 가정 풍비박산 만든다더냐? 널 감방으로 보내면 몇 년이나 썩을까?”

“그, 그건……!”

“난 남의 재산, 남의 약점 터는 건 자신 있어.”

그쪽으로는 한청호가 눈앞의 사기꾼보다 훨씬 윗줄의 고수다.

그렇게 배를 불려 가며 재벌까지 왔으니까.

“네놈이 숨겨 놓은 모든 걸 털어서 먼지 하나 남겨 놓지 않겠어. 네 인생도 풍비박산 내 주지.”

“사, 살려 주십시오!”

초장에 기를 꺾었으면 먹이도 슬쩍 내밀어야 주인 말을 잘 듣는 법이다.

이것이 똥개를 길들이는 방법이었다.

한청호가 은근하게 말했다.

“조금만 털어도 나오는 먼지 묻은 네놈의 과거, 내가 전부 깨끗하게 세탁해 주지.”

“저, 정말입니까?”

“그러니 네놈이 해 줘야 할 일이 있다.”

“그게 뭡니까?”

살길이 보인다.

중년 남자의 눈에서 빛이 번뜩였다.

“지금 어미를 잃고 상심에 빠져 있는 귀한 집 아가씨가 있어. 힘들 때 내미는 손길이 제일 따뜻한 법이야. 네놈의 혓바닥으로 어떻게든 구워삶아라.”

“애라도 뱄다간 경을 칠 텐데요.”

귀한 집 아가씨를 꾀어낼 방법이라면 제일 먼저 떠올리는 건 그런 종류였다.

“그 집 양반이 보통이 아니야. 손가락 한 번 까딱이면 줄초상이 날 거야. 내 손에 죽는 것보다 더 빨리 죽는 수 있어.”

“저보고 그런 집 아가씨를 좆도 안 쓰고 꼬여 내라고요? 어떻게요?”

중년 남자는 하얗게 질렸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꾀어내. 수단과 방법은 중요치 않아. 대신 어떻게든 받아 와야 할 물건이 있다.”

“그게 뭡니까?”

“그년 어미가 남긴 암호문. 숫자와 영문으로 구성된 16자리 암호문이 모두 세 개 필요해.”

한청호는 차가운 눈으로 중년 남자를 보았다.

“네놈이 살길은 오로지 이 길뿐이야.”

눈앞이 깜깜한데, 하늘이 노랗다.

쉽사리 대답을 못하자 한일권이 바로 목줄을 잡아당겼다.

“개새끼가 어디서 머리를 굴려?”

목을 죄어 오는 쇠사슬 때문에 중년 남자는 끅끅대었다.

“대답 안 해?”

새파랗게 질린 중년인이 황급히 대답했다.

“며 명, 명심하겠… 큭!”

“나가 봐.”

“가자.”

한일권이 개 목줄을 잡아당기자 중년 남자가 질질 끌려 나간다.

한청호는 나지막하게 웃었다.

‘오영순, 이것으로 넌 마지막 하나까지 내게 전부 내주게 될 거야. 잘 가게. 그동안 잘 빨아먹었다.’

그러니 단물 빠진 년은 이제 지옥으로 꺼져.

* * *

사우디 수도 리야드의 사우디 국립 종합 병원.

그곳의 가장 위층 VIP 병실엔 경호원들로 물샐틈없이 빽빽했다.

사우디 왕실에서 일어난 총격 사건 때문이었다.

[오셨습니까?]

하지만 비상 경호 체계를 유지하는 경호원들도 한 사람 앞에선 일제히 허리를 굽히며 길을 터 줄 수밖에 없었다.

바로 칼리드의 후계자 라흐만이었다.

[아버님!]

라흐만이 병실 문을 열자 칼리드가 고개를 돌렸다.

[왔느냐?]

[이게 다 어찌 된 일입니까?]

칼리드는 왼팔에 관통상을 입었다.

수술은 잘 끝났지만 표정이 좋지 않았다.

[반란이다.]

칼리드는 이번 암살 사태를 한 단어로 규정했다.

반란(反亂).

반역죄 앞에서는 죄인의 일족을 멸해도 반박하지 못한다.

하지만 문제는 반란을 일으킨 자가 바로 왕의 조카란 점이었다.

[심증은 있는데, 아직 물증이 없어.]

왕을 쏘고, 무려 12명의 사우디 왕족들을 다치게 만든 자.

그가 마지막 탄알로 본인의 머리통을 뚫어 버린 탓이다.

[범인이 목숨을 스스로 버리고 입을 다물어 버렸다.]

살인멸구(殺人滅口).

그것보다 완벽한 증거 인멸 방법은 없다.

[투르키 형님이 그놈을 직접 데리고 왔는데, 정작 형님이 총탄에 맞아 돌아가셨으니…….]

암살당한 사우디 국왕이 3남이었다.

그가 죽은 후 차기 왕위 계승 서열 1위는 4남인 건설부 장관 트루키였다.

그런데 이번 암살에 휘말려 같이 죽고 말았다.

덕분에 초대 국왕의 5남인 칼리드가 왕위 계승 서열 1위가 되었다.

[그놈은 형님 폐하와 함께 날 죽이려고 했었다. 분명 그랬는데…….]

사우디 국왕을 해친 후 총구가 칼리드를 향해 겨눠졌다.

그때 칼리드의 오른팔이자 동생인 압둘라가 칼리드 앞을 막아섰다.

덕분에 칼리드는 왼팔에 총상을 입는 것으로 끝났다.

하지만 압둘라가 죽고 말았다.

[빌어먹을!]

압둘라는 칼리드가 국왕이 되었을 때 국무총리가 될 정도로 심복 중의 심복이다.

그런데 그 역시 이번 암살 사건에 휘말려 일찍 죽고 말았다.

[압둘라까지 죽고 말다니.]

칼리드의 오른팔이자 믿고 의지하는 이복동생이었다.

어릴 때 어머니를 잃고 친형제도 없이 눈칫밥을 먹던 압둘라.

그를 거둔 건 칼리드의 어머니였다.

칼리드가 전공을 쌓으며 입지를 다질 때 함께 전선을 돌며 호위를 자처했던 듬직한 동생이었다.

그놈은 이렇게 어이없이 죽을 녀석이 아니었다.

[절대 용서하지 못한다! 내 반드시 이 일의 원흉을 잡아들일 것이다!]

칼리드가 분을 참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꽉 쥔 주먹은 핏기가 없어 하얗게 보였다.

라흐만은 칼리드의 손을 잡았다.

[아버님, 고정하십시오. 아버님께서 어서 병상에서 일어서야 원흉을 잡을 수 있습니다.]

맞는 말이다.

칼리드가 회복하지 못하면 반란을 꾀한 놈들 배만 불러진다.

칼리드를 제치고 언제 왕위를 찬탈해 갈지 모른다.

칼리드는 아직 국왕위에 오르지 못했다.

[선왕 폐하의 원수를 갚고, 돌아가신 삼촌 장관님의 원수를 갚으려면 아버지께서 일어나셔야 합니다.]

[…알았다.]

그제야 주먹에서 힘을 푸는 칼리드였다.

[강태수가 왔습니다.]

[그자가?]

[저와 함께 왕실 전용기를 타고 왔습니다. 지금 병실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죠.]

[불러와라.]

라흐만이 재빨리 강태수를 불렀다.

병실 문이 열리면서 태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칼리드는 손을 들어 태수의 인사를 막았다.

[상황이 급박하니 인사는 생략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지.]

[좋습니다.]

[자네에게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다.]

[무엇입니까?]

[파흐드의 동정을 살펴 주게.]

파흐드라면 사우디 재경부 장관으로, 초대 국왕의 9남이다.

[대가는 내가 섭섭하지 않게 챙겨 주겠네.]

칼리드가 호언장담하는 대가라니.

돈 냄새가 코를 찌른다.

역시 오일 머니의 파워란!

‘그냥 동정을 살피는데 뭐 이리 돈 냄새가 폴폴 날까?’

의아하다.

하지만 당긴다.

아주 맛있는 냄새가 난다.

칼리드가 말하는 대가는 섭섭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겠는데?

‘이건 대박이다! 잡자!’

기회는 언제나 오는 게 아니다.

태수가 군침을 삼킬 때였다.

[그놈이 의심스러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몇 가지 있다.

[처음엔 투르키 형님이 암살범을 사주한 줄 알았지.]

사우디 국왕이 암살되고, 자신에게 총구가 겨눠졌을 때.

투르키의 입에 걸린 미소.

칼리드는 그 비열한 웃음을 잊을 수 없다.

[그런데 그놈은 곧이어 투르키 형님까지 쐈어. 망설임 없이.]

오발탄에 맞은 게 아니었다.

그건 정조준한 거였다.

당황하던 투르키 형님의 마지막 얼굴이 떠올랐다.

-네가 배신… 커흑!

그것이 마지막 유언이 되고 말았다.

원한에 사무쳐 부릅뜬 눈이 마지막으로 쳐다보던 인물.

처음엔 암살범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쪽 방향에 누가 또 있던가.

거기엔 동생 파흐드 재경부 장관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이번 암살 사건에서 가장 큰 수혜자는 나야.]

왕위 서열 1위가 칼리드다.

[하지만 거기서 나까지 죽었다면 파흐드에게도 기회가 와.]

초대 국왕의 3남, 4남, 5남이 죽었다면?

나머지 형제들은 재경부 장관인 파흐드와 권력 싸움으론 상대가 안 된다.

심지어 6남과 7남은 이미 죽고 없다.

8남은 지방에서 한직을 맡고 있고, 그다음이 9남인 파흐드다.

여기까지 말하자 태수는 칼리드 대신 뒷말을 받았다.

[심증은 있는데 물증이 없으니 저더러 재경부 장관님 댁에 다녀오라는 소리군요.]

개떡 같이 말했는데 어찌 이리 찰떡같이 알아듣는가.

칼리드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발길이 묶였어. 지금은 사우디 왕실 전원 비상사태니까.]

다친 칼리드는 움직일 수 없다.

파흐드보다 서열이 낮은 라흐만도 가 봤자 소용없다.

경호원이나 비서 등은 경계 대상 1호가 되기에 근처에도 못 간다.

[마침 전 재경부 장관 집에 드나들 이유가 충분하니까요.]

칼리드가 말을 제대로 꺼내지도 않았는데, 태수는 이미 앞뒤 상황뿐만 아니라 칼리드의 의도까지 전부 파악한 후였다.

칼리드가 태수를 좋아하는 이유였다.

긴말이 필요 없다.

이 얼마나 똑똑한 놈인가.

[뇌물을 싸 들고 가죠.]

재경부 장관의 집에 드나들려면 뇌물수수와 부정 청탁만 한 일이 없다.

뇌물을 한 아름 싸 들고 가면 재경부 장관은 맨발로 달려 나와 태수를 맞이할 것이다.

시국이 아무리 이 모양이라고 해도 말이다.

[사우디 주베일 산업항 공사를 핑계로 대면 의심하지 못할 겁니다. 제가 입찰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다 알고 있을 테니까요.]

재경부 장관이 한청호에게 같은 이유로 뇌물을 받았다고 태수의 뇌물을 마다할까?

절대 아니다.

돈 받고 입을 씻으면 씻었지 돈 거절할 인물이 아니다.

돈에 환장해서 재경부 장관 자리에 올랐다는 인간이 아닌가.

[이번 기회에 사랑니 뽑듯 칼리드 님의 모든 근심을 한 번에 뽑아 드리겠습니다.]

태수의 호언장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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