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산 찍고 건설 재벌-111화 (111/230)

111. 미래가 변했다(3)

비행기 안은 널브러진 사람들로 가득했다.

라흐만의 전용기를 함께 타고 모두 함께 사우디로 향했기 때문이다.

라흐만은 쓰린 속을 부여잡고 골골대었다.

[양주는 내 취향이 아닌 것 같아.]

아직도 술이 안 깬다.

그건 태수도 마찬가지였다.

[금산과는 다신 술친구 안 합니다. 위로주고 축하주고 나발이고, 앞으론 국물도 없습니다.]

새벽 동틀 때까지 양주를 스트레이트로 마셨다.

해장국도 못 먹고 바로 비행기를 타고 떠나는 상황이다.

그 옆에서 술 냄새 풍기는 인간들이 무더기다.

태양 계열사 3인방까지 비행기에 실렸다.

“어으, 속 쓰려 죽겠다. 사우디 가서 브리핑한다고 진작 귀띔이라도 해 주시지.”

“그 브리핑이 이 브리핑인 줄 알았나. 브리핑 끝나면 하루 휴무라더니.”

“비행기 타는 동안은 휴무라는 소리였어.”

엉겁결에 딸려 온 김우진은 머리를 부여잡았다.

숙취 때문에 골통이 빠개질 것 같았다.

“아니, 난 왜……. 대체 어쩌다가 왜…….”

장말동이 대뜸 김우진의 여권을 내밀었다.

그것도 공항에서.

-이걸 어떻게! 이거 불법 침입 아닙니까?

-집주인인 자네가 직접 문 따서 가져왔잖아. 기억이 안 나나? 안 그러면 여권을 어떻게 가져왔겠어?

-그런데 제가 왜 공항에 있는 거죠?

-빚쟁이 때문에 여기서는 마음 편히 못 살겠다면서? 사우디까지 따라가고 싶다면서? 열심히 일할 테니 도와 달라면서? 그것도 기억이 안 나나?

-필름이 끊기는 술버릇 때문에…….

-필름이 끊기는 걸 알았으면 술을 끊던가. 필름이 나갔다고 정신까지 나가서야 되겠나?

-…….

-어차피 기억 못하는데 나한테 따지긴 왜 따지나? 죄송한 게 먼저 아닌가?

-…죄송합니다.

장말동 옆자리엔 안정우까지 있다.

둘은 라흐만에게 제안했던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서 사우디로 가고 있다.

한식 재료들을 잔뜩 사 들고서 싱글벙글하고 있는 송소리.

“한국 사람은 역시 한국 음식을 먹고 살아야 해.”

이번에 뼈저리게 느꼈다.

한식이 최고다.

* * *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뜻밖의 소식이 전해졌다.

공항에서 대기하고 있던 송창준이 외무부에서 날아온 소식을 전했다.

“한국에서 난리가 났답니다. 대통령 각하께서 암살 습격을 받고, 영부인이 그 자리에서 피살되셨답니다.”

일행들은 다들 경악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아니, 언제요?”

“서울 국립극장에서 열린 8.15 광복절 기념 경축행사에서 그만 참변이 벌어졌답니다.”

74년 8월 15일 오전 10시 10분 즈음.

박정환이 경축사를 읽는 동안 벌어진 일이었다.

전국 생방송으로 텔레비전과 라디오로 중계되고 있었기에 그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누가 그런 대담한 일을 벌였답니까?”

“범인은 그 자리에서 붙잡았다고 합니다. 재일 동포로…….”

송창준의 설명을 들으면서 다들 안색을 굳혔다.

‘전생과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내가 안정우에게 그만두라고 신신당부했는데…….’

태수는 재빨리 안정우를 바라봤다.

“그때 제가 그만두라고 했던 일, 계속 진행하셨습니까?”

“무슨 일?”

“사우디에서 따님을 제게 부탁할 때 말입니다.”

“문세기와 접촉하지 말라고 만류하던 일이로군.”

안정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위험한 작자라 자네 충고를 따랐지. 그 일은 완전히 포기했네.”

태수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전생에서 박정환 암살을 시도하다 영부인 피살로 마무리한 일의 배후는 안정우로 밝혀졌는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안정우는 골수 독립 운동가 집안에서 태어나 일평생 음지에서 살았다.

안정우가 벌인 대담한 범죄는 크게 3가지였다.

첫째, 박정환 암살 미수로, 영부인을 피살한 문세기의 배후.

둘째, 박정환 암살 성공으로, 10.26 정변 김재국의 배후.

셋째, 전두호 암살 미수로, 청일 그룹 본사 건물 폭탄 테러 미수의 배후.

그중에서도 청일 그룹 본사 건물 폭탄 테러.

태수가 안정우를 잡기 위해 덫을 놓게 된 이유였다.

안정우는 청일 본사에 폭탄을 설치하고, 혼란한 틈을 타서 청일 그룹 비밀문서를 탈취했었다.

‘나와 한수가 함께 안정우를 잡아서 안기부에 넘겼다. 그 일로 한수가 안기부의 영웅으로 부상했었지.’

그래서 태수는 안정우에게 ‘계획했던 일이 들통났으니 그만두라.’고 충고했다.

그런데 안정우는 그 계획을 그만뒀다고 말한다.

하지만 끝내 영부인 피살 사건은 일어나고 말았다.

“그때 문세기를 만난 이유를 물어봐도 됩니까?”

“김대준 국회 의원 납치에 관한 진상 조사 촉구를 위해 문세기가 일본에서 폭탄 테러를 계획했었어. 난 그걸 말리려고 접촉을 시도했었지.”

이런, 잘못 짚었다.

“그럼 박정환 대통령 암살 시도와는…….”

“무슨 소린가? 내가 아무리 담이 커도 그런 짓을 벌일 이유가 없잖나. 양지로 나온 이상 그에 맞는 방법을 쓰고 있어.”

은행, 용역, 그리고 사우디 무기 공장까지.

안정우는 착실하게 음지에서 양지로 나와 세를 불리고 있었다.

‘그럼 누구지?’

청일의 극비 문서에는 분명 안정우…….

‘청일의 정보가 조작되었나? 아니면 미래가 변했기 때문인가.’

그간 여러 가지 정황이 있었다.

태수가 믿고 있던 청일의 정보는 근본적으로 어딘가 중요한 부분에서 핀트가 벗어난 게 있다.

‘한청호와 연관된 부분만 핀트가 달라져.’

설마 안정우는 누명을 썼던 것일까, 아니면 태수를 만난 후 미래가 변한 것일까.

그런데 송창준은 뜻밖의 소식을 하나 더 전했다.

“사우디 국왕도 같은 날 암살됐다고 합니다.”

이럴 수가.

사우디 국왕의 암살은 75년 3월에 벌어진다.

전생과 다르게 무려 7개월 가까이 앞당겨졌다.

그 결과 차기 사우디 국왕은 사우디 국방부 장관이었던 칼리드가 차지한다.

“사우디 왕실은 지금 전쟁터가 되었다고 합니다. 국왕이 암살됐을 때 근처에 있던 총 12명의 사우디 왕족이 죽고 다쳤다고 합니다.”

전생과는 전혀 다른 일이 일어났다.

전생에선 사우디 국왕은 정신 병력이 있는 조카의 총격으로 암살됐다고 들었다.

12명의 왕족이 죽고 다치지 않았었다.

태수는 급히 물었다.

“칼리드 님은 어찌 되셨지?”

“왼팔에 총탄이 관통하는 부상을 입으셨다고 합니다.”

“혹시 목숨은……?”

“목숨엔 지장이 없다고 하는군요. 운이 좋았습니다.”

다행이다.

송창준은 계속 말했다.

“이번 총격으로 사우디 건설부 장관께서 돌아가셨다는군요.”

초대 국왕의 4남이 죽었다고?

그렇다면…….

“사우디 왕위 계승 서열 1순위는 초대 국왕의 5남이신 칼리드 님이 되겠군.”

암살당한 현직 사우디 국왕이 초대 국왕의 3남이었다.

전생에서도 4남 대신 5남인 칼리드가 차기 국왕이 되었다.

“지금 칼리드 님을 차기 국왕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거셉니다. 다만 9남인 재경부 장관 쪽 사람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지만 곧 진압될 것 같습니다.”

어떤 부분의 미래는 바뀌었지만 어떤 부분은 바뀌지 않았다.

[난 이만 가 봐야겠어.]

라흐만이 허둥지둥 떠나는 것을 보며 태수는 눈을 감았다.

‘예정된 운명인가, 아니면 파생된 결과인가.’

태수로부터 시작된 나비의 날갯짓이 일파만파 커지고 있었다.

* * *

태수 일행은 주베일 공항 근처 호텔에 숙소를 잡았다.

각자 짐을 풀고 모두 태수의 방으로 모여들었다.

다들 안색이 좋지 않았다.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같은 날 두 국가에서 이런 참변이 일어나다니…….”

송창준도 함께였다.

태수는 송창준에게 물었다.

“외무부에서는 어찌한답니까?”

“사우디 주재 대사관께서는 사우디 왕실의 국장에 참여하실 계획이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저도 곧 수도 리야드로 떠날 예정이죠.”

사우디 대사관의 일이 그런 것이니 어쩔 수 없다.

송창준도 태수에게 물었다.

“저희야 그렇다 치고, 재벌 회장님께선 고민이 되겠네요. 귀국해서 국장에 참여하실 겁니까? 아니면 사우디 왕실의 국장에 참석하실 겁니까?”

“귀국할 예정은 없습니다.”

주베일 산업항 입찰이 코앞이다.

“한국에 전보를 넣을 생각입니다. 저 대신 한수가 국장에 참석하게 되겠죠.”

“그럼 사우디 국장에 참여하실 겁니까?”

“아뇨, 제가 사우디 정재계 유명 인사도 아닌데 국장에 참석할 자격이 되겠습니까?”

“그럼……?”

태수는 벌떡 일어섰다.

“모두 여기에 남아 주베일 산업항 입찰 준비를 완벽하게 마무리해 놓길 바랍니다.”

“회장님은 어쩌시려고요?”

“저는 라흐만을 따라가 봐야겠습니다.”

칼리드를 만나려고 한다.

“저 없이도 입찰 준비에 소홀함이 없어야 할 겁니다.”

태양 계열사 사장 3인방이 우렁차게 대답했다.

“걱정하지 말고 다녀오십시오.”

“한 번 브리핑한 내용이니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면 됩니다.”

“차질 없이 준비해 놓겠습니다.”

아주 만족스러운 대답이었다.

“좋습니다.”

태수는 장말동과 안정우를 돌아봤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여기에 머물다가 상황이 안정된 후에 자리를 마련할까요?”

“아니.”

안정우가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자네를 따라가지.”

“그럼 그렇게 하시죠.”

태수가 김우진을 보며 눈썹을 긁적였다.

“당신 말인데… 술 취하면 필름이 끊긴다면서요?”

“네! 죄송합니다!”

장말동에게 단단히 혼쭐이 난 김우진이 태수의 눈치를 본다.

안 그래도 태양 계열사 사장 3인방에게 자신의 술주정을 전해 들은 후였다.

“당신은 앞으로 어쩔 생각입니까?”

“……모르겠습니다.”

“어제 술 취해서 사우디까지 함께 가고 싶다면서 여권까지 가져왔기에 모른 척 비행기는 태워 드렸습니다.”

“죄, 죄송합니다.”

“오는 건 라흐만 님의 덕분에 쉽게 왔다고 해도, 가는 건 당신이 알아서 가야 할 겁니다.”

태수는 김우진을 물끄러미 보았다.

“당신에게 두 가지 제안이 있습니다.”

첫째 제안이다.

“이대로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

“싫습니다.”

김우진이 고개를 저었다.

“한국에는 아무것도 남은 게 없습니다. 은행 대출이 막히면서 회사도 넘어갔고, 담보도 넘어갔고, 가족도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남은 건 빚과 절망밖에 없습니다.”

빚쟁이에 쫓겨 숨통이 막힌다고 울부짖었던 김우진이다.

한국에선 미래도 꿈도 희망도 없다던 남자.

그러니 술에 취해 사우디에 같이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을 것이다.

“금의환향하고 싶습니다. 전 해외에서 재기에 성공하고 싶어요. 필름이 끊겼다고 머리까지 망가진 건 아닙니다. 줄곧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태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두 번째 제안을 건넸다.

“태양 그룹 밑으로 들어오는 것.”

“태양 그룹 밑으로요?”

“싫으면 마십시오.”

태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우진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웠다.

꽤 큰 건설 기업 사장까지 했던 김우진이다.

그런 그에게 다른 기업 밑에 들어가 월급쟁이 생활을 감수하라는 제안이라니.

“다른 제안은 없습니까?”

“제안은 여기까지입니다.”

태수는 손을 털었다.

김우진은 멍하게 태수를 보았다.

“혹시 제가 좋은 사업 아이템을 가져오면 투자를 고려하실 수는…….”

태수는 김우진을 차가운 눈으로 보았다.

“투자자가 필요하면 은행에 가. 나한테 들러붙지 말고.”

“그건…….”

“당신 일은 당신이 해결해. 당신이 내 앞에서 결정할 수 있는 건 단 두 가지뿐이야. 내 밑에 들어오던가, 말던가.”

김우진은 입을 다물었다.

“전 바빠서 이만 가 봐야겠습니다. 충분한 시간을 갖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태수는 등을 돌렸다.

장말동과 안정우, 그리고 송창준이 그 뒤를 따랐다.

“우리는 수도 리야드로 갑시다.”

칼리드를 만나러 갈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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