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 미래가 변했다(2)
성북동 대운각.
고급 요정에서는 청일의 한청호와 초명 은행의 최무룡이 마주 앉았다.
최무룡은 아직도 고개를 옆으로 돌린 채 한청호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는다.
“왜 불렀수?”
“우리 사이에 오랜만에 술도 한 잔 못해?”
“우리 사이는 무슨. 각자도생(各自圖生)하는 사이지.”
삼원 건설이 공중분해되고, 그에 딸린 부하들이 중앙 정보국에 끌려갈 때 한 번 틀어졌다.
그 후 청일 정유가 위험할 때 다시 한번 틀어진 그들이었다.
최무룡이 비취색 도자기 술잔을 한입에 털어 넣었다.
“한 잔 마셨으니까 이만 가겠수.”
“앉아.”
한청호가 서류를 하나 탁, 하고 테이블 위에 올렸다.
서류를 보자 반사적으로 최무룡이 흘깃 눈을 돌린다.
“그게 뭡니까?”
“대운 건설.”
대운 건설이라면 최무룡이 최근 밀어주고 있는 건설 기업이다.
최무룡은 깜짝 놀랐다.
“대운 건설이라면 부도났는데?”
“그 부도, 누가 냈겠냐? 당연히 헐값으로 사들이려고 내가 부도냈지.”
은행장들에게 전부 연락 돌렸다.
대통령의 위세를 등에 업고 태양 그룹을 압박할 때 은근슬쩍 똑같은 조치를 대운 건설에 취하도록 했다.
그 결과 태양 그룹은 버젓이 살아남았고, 대운 건설을 쫄딱 망하고 말았다.
‘둘 다 모두 쫄딱 망해야 했는데.’
지금 생각해도 아쉽다.
하지만 대운 건설은 통째로 싼 값에 얻어 냈다.
한청호는 음흉한 웃음을 흘렸다.
“대운 건설, 내가 인수했다.”
그렇다면 눈앞에 있는 이 서류는?
최무룡이 마른침을 삼키며 입맛을 다셨다.
그러자 한청호가 혀를 찬다.
“청일 대신 택한 곳이 고작 대운 건설이냐? 쯧쯧.”
“청일 건설을 안 주니 어쩝니까? 대운 건설이라도 먹어야지.”
삼원 건설은 최무룡의 자금 세탁 통로였다.
정치인들에게 찔러 주고, 위에 상납하려면 건설사만 한 게 없다.
건설에는 눈에 잘 보이지 않지만 돈 들어갈 일이 많다.
특히 토목 공사 같은 경우엔 원가가 얼마나 들어갔는지 모른다.
그러니 자금 세탁하기에 이만한 업종도 드물다.
“그렇다고 작은 건설사는 영 성에 안 차서.”
“그런 줄 알고 내가 뺏어 왔다. 쯧쯧, 반년 넘도록 침을 흘려 대더니 여태 못 먹었어?”
한청호가 서류를 최무룡의 앞에 쭉 밀었다.
“아쉬운 대로 청일 건설 대신으로 하자.”
청일 정유가 넘어가느냐 마느냐 도와 달라고 찾아왔을 때 최무룡이 말했다.
-청일 정유나, 청일 건설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청일 건설을 내주면 청일 정유 살리는 데 한 힘 보태겠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한청호는 청일 정유를 버리는 대신 청일 호텔을 택했다.
“흐음, 청일 건설에 비하면 대운 건설은 너무 쳐지지 않수?”
“싫으면 내놔.”
“어이-”
한청호가 서류를 도로 가져가려 하자 최무룡이 재빨리 품에 집어넣는다.
“싫긴 누가 싫댔수? 줬다 뺏기 있수?”
최무룡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무슨 작업을 할 생각인데 대운 건설을 내놨수?”
한청호는 공짜로 뭘 내놓는 인간이 아니다.
한청호의 눈이 깊게 가라앉아 있다.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 * *
금산 호텔 바.
금산의 장준용이 양주를 스트레이트로 따른다.
아이스 바스켓이 버젓이 있는데도, 얼음 하나 넣지 않고 양주잔 가득 넘치도록 따라 준다.
“한 잔 더 해. 넘치는 내 마음이라고 생각하고.”
태양 계열사 사장 3인방은 똥 씹은 표정이었다.
‘대체 몇 잔째야. 그 마음은 정중히 사양하고 싶은데요.’
‘와, 저 인간은 술 배가 따로 들었나.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집에 가는 건데.’
‘상사랑 술자리 부담스럽기는 우리도 마찬가지거든요.’
태양 그룹으로 거듭나며 전 직원 1계급 승진했다.
덕분에 부사장에서 사장이 된 태양 계열사 3인방이다.
도저히 못 마시겠다. 속이 부대낀다.
태수가 슬쩍 사장들의 잔을 제 앞으로 수거한다.
“흑기사도 괜찮죠? 제가 일대일 데스 매치를 신청하겠습니다.”
“응? 좋지, 좋아. 오늘은 기필코 강 회장을 이겨 보지. 하하하.”
드디어 장준용의 마수에서 벗어나는 사장 3인방.
태수를 보는 눈에는 존경이 가득했다.
테이블에 대(大)자로 뻗어 있는, 양주 한 잔에 꿈나라로 간 사우디 왕자랑은 차원이 다르다.
‘재벌 총수의 기본 덕목은 술 접대였던가.’
‘역시 영업의 꽃은 술 접대.’
‘오고 가는 술잔 속에 싹트는 신의라니.’
태양 계열사 사장 3인방이 줄행랑을 칠 때 입구에 금산의 김 비서가 모습을 드러냈다.
라흐만의 경호원들이 서둘러 라흐만을 데리고 호텔 방으로 내려간다.
김 비서는 소매를 걷어붙이며 호탕하게 웃었다.
“오늘은 두 발로 걸어가는 사람 없을 때까지 힘껏 달려봅시다. 2 대 1 팀전을 요청합니다.”
그 소리를 들은 태양 계열사 3인방은 더욱 빠른 속도로 금산 호텔을 빠져나갔다.
다시는 이곳 호텔 바엔 발을 들이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그들이었다.
태양 계열사 3인방이 사라지자 장준용이 양주잔을 흔들며 웃었다.
“자네, 귀여운 놈들을 데리고 있었군.”
“괜찮죠?”
“내가 인재 보는 눈은 썩었는지 몰라도, 저놈들이 인간적으로 괜찮은 놈들이란 건 알겠어.”
이문복에게 크개 개망신당한 정준용.
그가 일부러 태양 계열사 3인방에게 술을 들이부었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술이란 게 참 신기해. 취하면 본성을 숨기지 못하거든.”
술 취해서 개가 되는 게 아니다.
개가 평소에 인간의 탈을 뒤집어쓰고 있던 것뿐이다.
“제 부하 직원들 본성을 확인하셔서 만족하십니까?”
“그러니 괜찮은 놈들이라고 부러워하는 게 아닌가. 내가 진즉 이문복이한테 술을 있는 대로 쳐 먹이고, 그놈 속을 들여다봤어야 했는데!”
일 잘한다고 우쭈쭈.
능력 있다고 우쭈쭈.
피곤한데 들어가서 어여 쉬라고 우쭈쭈.
“내가 그리 아낀다고 아꼈는데 돌아온 건 배신이라니. 술이 절로 땡기는 날이야.”
장준용이 급하게 양주를 들이붓는다.
태수는 말없이 그 잔을 채워 주었다.
“자네 덕분에 큰 피해 없이 이렇게 넘어가는군.”
라흐만 앞에서 당했던 개망신을 생각하면 이가 갈린다.
“자네가 이문복을 끌어내지 않았더라면 난 그 자식 멱살 잡고 따귀부터 갈겼어.”
사우디 왕자고 뭐고, 장준용이 눈 돌아가면 개싸움 나는 거다.
“역시 한청호가 수작을 부린 거겠지?”
“그건 모르는 일입니다만…….”
말과 다르게 태수는 확신하고 있었다.
장준용은 한청호라고 생각하면서 쥐포를 야무지게 물어뜯었다.
“한청호, 대체 뒤통수를 몇 번이나 치는지. 그놈만 생각하면 이가 갈린다니까.”
“몇 번… 이나 말입니까?”
“몰랐나? 그 새끼 수작질에 놀아나지 않은 이 바닥 인간이 몇이나 되겠나.”
장준용이 손가락을 꼽기 시작한다.
“내가 한청호 수작질로 당한 게 벌써 다섯 번째로군. 그중에 세 번은 진짜 도산 직전까지 몰린 적이 있었어. 오늘은 약과야.”
많이도 당했다.
“박태종이는 한청호 때문에 포항까지 쫓겨난 거잖아. 각하 옆에 알짱거리는 게 눈에 거슬린다고. 제철소를 지으라고 보내 놓고, 정치엔 발도 못 붙이게 만들었지?”
“각하의 숙원 사업을 위해 제철소를 맡으신 거잖습니까?”
“눈에서 멀어지면 권력에서 멀어지는 거지.”
옛날에 괜히 정적을 유배 보내고, 귀향 보내는 게 아니다.
왕의 눈앞에서 알짱대어 신경을 끌지 못하면 관심을 끌지도 못한다.
그만큼 권력에서 멀어지는 것이다.
“각하 옆에 박태종이의 자리가 아직도 남아 있을 것 같은가?”
박태종이 한청호를 보면 이를 가는 이유가 있었다.
“럭키세븐과 삼청은 원래 사업하기 전부터 친했어. 사돈까지 맺을 정도로. 그런데 그놈들이 서로 등을 돌렸지. 누구 때문일 것 같나?”
“사업 때문에 사이가 틀어진 거 아니었습니까?”
“동업까지 같이했던 사이가 고작 사업 때문에 틀어진다고?”
“그럼 한청호 때문입니까?”
장준용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양주를 마신다.
“삼청도 한청호 때문에 기둥뿌리 흔들리기 직전까지 간 적이 있어.”
“설마…….”
“그래. 한 10년 전쯤이었나? 사카린 밀수 사건이라고.”
사카린 밀수 사건.
1966년 5월 24일.
삼청 그룹 계열사 한국 비료 산업이 일본 미쓰이와 공모하여 사카린 약 55톤을 건설 자재로 꾸며 들여와 판매하려 다가 들통 난 밀수 사건이다.
이 결과 한국 비료 산업과 대국대를 국가에 헌납했다.
또한 책임을 통감하여 총수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한청호가 신문 기자를 부추겨서 대대적으로 방송에 때린 거야. 세상이 발칵 뒤집혔지. 그러니 아무리 삼청이라고 해도 수습할 방도가 있나.”
청일 그룹 비밀 문서에는 그저 그런 사건이 있었다고만 기록되어 있었다.
한청호가 연관되었다는 글자는 단 한마디도 없었다.
“한청호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지. 삼청의 장남과 차남 사이를 이간질하고, 차기 회장 자리엔 누가 앉겠냐면서 아버지를 몰아내라고 종용했지. 왕자의 난이 일어난 거야.”
삼청 그룹 왕자의 난.
1969년 말, 차남이 박정환에게 아버지를 회장 자리에서 축출해야 한다고 투서를 날렸다.
박정환은 이를 패륜으로 여겨 받아들이지 않았고, 훗날 이 회장이 이걸 알고 차남을 완전히 내쫓고 만다.
그 와중에 장남이 이 사건에 깊이 연루되었다는 의혹이 번졌고, 그 결과 삼남이 후계자가 되었다.
“삼청의 경우엔 결과적으로 전화위복이 되긴 했어. 장남과 차남에 비해 삼남이 워낙 똘똘했거든.”
알고 있다.
그 삼남이 삼청을 어찌 키워 내는지 태수가 어찌 모르겠나.
청일을 대한민국 재계 1순위로 올리기 위해 가장 오랜 시간 동안 경쟁해 왔던 기업이 삼청이었다.
그런데 삼청의 왕자의 난이 한청호와 깊이 연관되었단 건 몰랐다.
‘청일 그룹 정보실 극비 문서에도 한청호가 연루되었단 말은 없었다. 그저 오래된 신문 기사처럼 정보로서 남아 있었을 뿐이지.’
어쩌면 한일권만 가지고 있는 치부책에는 그런 모든 것이 기술되어 있을까?
“삼청의 삼남이라면 지난번 금산 조선 중공업 연회 때 만나지 않았나?”
“글쎄요. 못 본 것 같습니다만.”
“그래? 삼청의 후계자가 내게 직접 와서 자네에 대해 묻던데.”
그런 일이 있었나.
“각하를 만나 뵙고 바로 돌아가는 바람에 누구와 인사를 나눌 겨를도 없었습니다.”
“아쉽게 되었어. 듣자 하니 그날 자네 인기가 최고였다던데.”
장준용은 양주잔을 들며 씩 웃었다.
“오죽하면 내 딸도 내게 자네에 대해 물었겠나.”
금산의 꽃.
장준용의 외동딸은 금산의 금지옥엽으로 불린다.
한일권이 그토록 탐냈지만 넘볼 수가 없던 절벽 위의 꽃이었다.
“각하의 따님마저도 자네에 대해…….”
거기까지!
박경혜가 나오자마자 태수는 재빨리 양주잔을 털어 버리고, 새 술을 따른다.
“한청호 얘기를 좀 더 해 주십시오. 그렇게 분탕질을 치고도 어째 아직 멀쩡한 겁니까?”
지금 나온 얘기만으로도 금산, 포항, 삼청까지 줄줄이 건드렸다.
이 셋이 힘을 합치면 한청호라고 별수 있을까.
하지만 장준용은 고개를 저었다.
“이 바닥에 영원한 친구도, 적도 없다는 걸 모르나?”
장준용의 웃음이 씁쓸하다.
“이해득실(利害得失), 오월동주(吳越同舟), 전략적 제휴(戰略的 提携). 사업하는 사람들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말이지.”
사업에는 인정이 없다.
이득이 되는 것을 쫓아야지 감정을 쫓아서는 성공할 수 없다.
“우리는 폭풍에 출항하는 고기잡이배와도 같다네. 정권의 파도에 휩쓸리지 않으면서 고기를 잡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하지.”
지금 재벌의 힘은 21세기만큼 강대하지 않다.
군사 독재 정권이 모든 패권을 장악할 때다.
“각하의 비호를 등에 업은 한청호에 비해 다른 재벌들은 각하께서 조금 꺼리는 감이 있지.”
“왜요?”
“보면 모르나? 입안의 혀처럼 구는 간신배와 총애 다툼에서 우리가 어찌 이기나?”
태수는 말없이 양주를 마셨다.
장준용이 새삼스럽다는 듯이 태수를 보았다.
“그런데 새파랗게 어린 애송이에게 그 한청호가 번번이 발렸어. 나로서는 그게 더 신기한 일이야.”
장준용이 태수를 높이 사는 이유다.
박정환이 태수를 인정하는 이유기도 하다.
“자네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한청호는 거물이야. 다른 의미로는 괴물이고.”
장준용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대담하고 잔인하지. 필요에 따라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 조심하게.”
장준용의 눈에는 걱정이 흘러넘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