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산 찍고 건설 재벌-107화 (107/230)

107. 끊을 수 없는 것(4)

왜 찾아왔냐는 라흐만의 물음에 영어를 모르는 장말동은 대신 태수가 대답했다.

[사우디에 장수 은행을 개설할까 하여 찾아오신 겁니다.]

장말동이 라흐만을 만나러 온 이유였다.

[사우디에 은행을 세운다라……. 왜? 이 사람도 대통령의 압력을 심하게 받고 있나?]

태수가 부당한 압력을 받고 있는 것을 똑똑히 본 라흐만이다.

[현재는 아니고, 과거에 파산 직전까지 간 적이 있습니다.]

느닷없이 행해진 8.3 사채 동결 조치.

태수가 귀띔해 주지 않았다면 장말동은 망했다.

‘그러고 보니 내가 개입해서 장말동은 장수 은행을 세웠고, 최무령의 초명 은행은 옛날보다 1/4로 쪼그라들었군. 미래가 조금씩 바뀌었다.’

태수가 오일 쇼크를 이용해 최무룡의 초명 은행을 잡아먹기로 작정하고 함정을 팠었기 때문이다.

한청호가 사우디 장관에게 뇌물을 먹인다고 대량의 달러를 인출하지만 않았어도.

최무룡은 구사일생으로 살았단 사실을 알고 있을까?

[한국을 떠나 아예 사우디에서 뿌리를 내릴 생각인가?]

[그건 아닙니다. 본점은 한국에 계속 두고, 해외 1호 지점으로 사우디를 택하셨습니다.]

[우리 사우디를 택한 이유는?]

[앞으로 건설 해외 수주가 활발해질 것 같아서 말입니다. 사우디를 기반으로 한국 인부들을 위한 중동 은행을 마련하시겠다고 합니다.]

이번 세계 제1차 오일 쇼크로 사우디가 중동 최대 산유국으로 급부상했다.

서방 세력들이 점유하고 있던 석유 채굴 시설들을 전부 국유화로 돌렸다.

그 많은 돈으로 사우디는 국가 기반 시설 및 도시 개발과 건설 사업에 투자하려고 한다.

세계적인 중동 붐, 오일 머니 붐이 일어날 조짐이 벌써 보인다.

[한국 기업들이 앞다투어 건설 수주를 맡으러 중동으로 진출할 때 장수 은행이 최전방에서 한국인들이 벌어 온 외화를 국내로 송금할 계획이라 하십니다.]

[사우디 토착 은행이 아니라?]

[외국인 근로자들이 이용하는 뱅킹 서비스를 제공하겠다는 뜻입니다.]

[그럼 사우디 경제에 미치는 타격은 생각보다 적겠군.]

[그래서 드리는 부탁입니다.]

첫발은 사우디, 그다음은 근방의 다른 중동 나라 가 될 것이다.

장수 은행은 해외 근로자의 은행으로 이름을 높일 계획이었다.

해외 자본을 유치하기도 쉽고, 은행 외화 보유액도 늘어나게 되고, 송금 수수료도 먹는다.

또한 자연스레 국내에 남은 가족의 은행 이용도 늘어나게 될 것이다.

[사우디 왕실에서 외국 은행 자본 세력을 배척한다고 들었습니다. 하여 라흐만 님께서 조금 힘을 써 주시기를 청하러 온 겁니다.]

사우디와 중동 국가들은 외국 기업에 대한 배척이 심한 편이다.

태수가 처음 중동 진출을 하게 됐던 것도 외국 기업에 대한 사우디 왕실의 스폰서가 미리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사우디 왕실의 스폰서 따기가 쉽지 않지.’

한청호가 라흐만에게 삼원 건설을 소개했듯, 태수가 라흐만에게 장말동을 소개하게 되었다.

[흐음. 건설이라면 내가 세운 쇼복시를 이용하면 그만이지만 은행이라면 좀 복잡할 텐데.]

라흐만은 도시 개발 담당이기에 건설 쪽과는 관련이 깊다.

하지만 은행과 같은 금융 쪽은 조금 거리가 멀다.

[이것 역시 나 혼자 결정할 문제는 아니다.]

반쯤 거절이다.

하지만 라흐만의 표정을 보건대 성사될 확률이 크다.

‘좋은 계획이 생각난 것 같은 얼굴이로군.’

그렇지 않고서야 저리 즐거워 보이는 표정일 리 없지.

[태수의 두 동맹이 제시한 제안은 잘 들었다.]

둘의 의견은 충분히 먹힐 가능성이 크다.

[외국계 은행에 대한 제약이 심할지 모르나 근로자들의 편의 시설은 제공되어야 할 테니, 내가 이에 대해 심사숙고한 후 결정하겠다.]

[좋은 결과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용건이 끝났으니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안정우와 장말동이 인사했다.

문을 향해 걸어가는 때였다.

똑똑-

라흐만의 호텔 문을 두드리는 자가 있었다.

경호원이 그걸 가만히 두고 볼 리는 없을 텐데 기다리지 않고 방문을 두드릴 수 있는 사람.

그건 아까 라흐만이 태수의 동맹이라고 소개한 자일 것이다.

[들어오라. 기다리고 있었다.]

장말동과 안정우 두 사람이 나가고, 금산의 장준용이 두 사람을 데리고 들어왔다.

[주베일 산업항 공사에 대해서라면 건설 책임자들과 함께 들어야 할 것 같아서 같이 데려왔지요.]

태수는 두 사람을 보고 묘한 표정을 지었다.

‘금산 건설의 사장과 부사장이로군.’

아는 얼굴들이다.

태수가 특히 주목한 사람은 금산 건설 부사장이라는 30대 중반의 젊은 남자다.

‘이자는 금산 건설 사장 부인이 연루된 연예인 불륜 스캔들을 신문으로 터뜨려 금산 건설을 쑥대밭으로 만들었지.’

경찰과 기자들이 함께 현장을 덮치고, 다음 날 신문 1면에 대문짝하게 났던 초유의 스캔들이었다.

당시는 간통죄가 있던 때라 형사 재판까지 갈 뻔했던 사건이다.

그 결과 금산 건설 주가는 폭락했고, 줄줄이 계약은 파기됐다.

책임을 물어 금산 건설 사장은 사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사모님과는 이혼했으며 결혼 직전 파혼당한 딸은 자살했고, 연예인은 방송 정지를 받고 외국으로 도망갔다.

그 배후에는 이 젊은 야심가가 있었다고 청일 그룹 비밀 문서에 적혀 있었다.

‘모략으로 상관을 강제 퇴임시키고, 사장 자리를 찬탈했던 야심가라. 오랜만에 보는군.’

금산 건설에서 능력을 인정받아 초고속 승진을 거듭 고작 30대의 나이에 부사장 직함을 달고 있다.

하지만 전생에선 훗날 청일 건설 사장이 되어 태수와 함께 일했던 남자다.

‘금산 회장 자리를 넘보다 좌절되자 제 손으로 금산 건설을 부도낸 후 청일 건설로 넘어왔지. 능력은 있는 남자였지만 호시탐탐 더러운 짓만 해대던 놈이었어.’

마침 청일 건설의 사장이었던 박철완은 청일 건설의 3대 업적을 완수하고 비명횡사로 일찍 요절했다.

그 후임으로 들어온 남자가 바로 저 남자 금산 건설의 부사장 이문복.

한일권과 유독 쿵짝이 잘 맞아서 결국 정치권으로 흘러가 대권을 노리기까지 했던 남자다.

‘금산의 장준용이 죽을 때까지 이를 갈던 배신자를 여기서 다 보는군.’

이문복과 태수가 허공에서 눈이 마주쳤다.

이문복이 피식 웃었다.

“여기 이 새파랗게 어린 애송이는 누굽니까? 설마 통역사?”

태수를 보고 건넨 첫 마디는 비웃음이었다.

금산의 장준용이 나직하게 경고한다.

“모르면 입조심하게. 지금 자네가 나불댈 자리가 아니야.”

하지만 인생이 늘 성공 가도였던 엘리트는 무섭지 않았다.

“회장님께서도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저기 앉아 있는 사우디 왕자님이 주베일 산업항 담당자이니 제대로 금산 건설을 어필하라고.”

태수와 라흐만의 돈독한 사이를 두 눈으로 확인했더니 일말의 불안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까부터 이 둘에게 연신 당부했다.

-금산 건설 역시 주베일 산업항 공사를 성공적으로 이끌 만한 능력이 있음을 보여 줘야 한다.

“제대로 어필하기 위해 일부러 우리 금산 건설의 사장님과 함께 부사장인 저를 불러들인 게 아닙니까?”

맞다.

-대한민국 건설을 책임질 인재는 태양 그룹의 강태수만 있는 것이 아니다.

-금산 역시 인재가 있다.

-동맹으로서 공동 입찰할 자격은 충분히 차고 넘친다.

어필하고 싶었던 건 이 부분이었다.

그랬는데 금산 건설 부사장은 이를 오해한 것 같다.

“회장님은 지켜보십시오. 제가 어떻게 금산 건설의 유능함을 어필하는지.”

유능함을 어필하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첫 번째 방법은 구구절절하게 읊으며 설득하는 것이요.

두 번째 방법은 이미 증명된 실적과 브랜드 등을 이용하는 것이요.

세 번째 방법은 남과 비교해 눈앞에서 보여 주는 것이다.

“제가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금산 건설의 유능함을 어필하겠습니다.”

백문이 불여일견(百聞 不如一見)이다.

옛부터 모든 방법 중에 가장 확실하고 효과적인 방법은 ‘보여 주기’라 했다.

‘저 새파랗게 어린놈을 제물로 써야겠군.’

물론 저기 저 석유 왕자님을 설득하는 데는 세 가지 방법을 모두 쓸 생각이다.

이문복의 눈은 야심만만하게 빛났다.

“이봐, 통역사.”

“저 말입니까?”

태수가 스스로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럼 여기 너 말고 누가 있어?”

“아, 잘못 아셨습니다. 전 통역사가 아닙니다. 라흐만 님은 영어를 잘하시기 때문에 그냥 영어로 대화를 진행하시면 됩니다.”

이문복이 태수를 보며 피식 웃었다.

“통역사도 아닌 주제에 눈치 없이 굴면 안 되지.”

이문복이 주변 사람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자네가 생각하기에 지금 이 자리에 스스로가 낄 자격이 된다고 생각하나? 볼일 다 봤으면 이만 꺼지시지?”

태수가 이문복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이건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군요. 금산 건설에서 따로 라흐만 님과 대화를 진행하고 싶다는 뜻입니까?”

동맹을 물리고 단독 입찰을 진행하겠냐는 뜻이었다.

금산의 회장 장준용이 황급히 말했다.

“아니, 오해하지는 말게. 우리는 공동 입찰을 생각하고 있으니까.”

장준용이 뒷말을 덧붙이기 전에 이문복이 영어로 말했다.

[금산은 단독 입찰로 사우디 주베일 산업항 공사에 나설 생각입니다.]

핵폭탄 발언이었다.

태수는 황당했다.

‘아니, 대뜸 배신이라니…….’

반면 라흐만은 기뻐하며 박수를 쳤다.

이런 상황, 라흐만이 꿈에도 원했던 바로 그 상황이 아닌가.

[브라보.]

안 그래도 태수 입에 혼자 넣어 주고 싶은 주베일 산업항 공사였다.

그런데 금산 측에서 단독 입찰을 생각하고 있다니 아주 마음에 든다.

[계속해.]

라흐만이 뒷말을 재촉한다.

새하얗게 질린 금산의 장준용이 벌떡 일어나 급히 말했다.

[아닙니다.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금산은 단독 입찰이 아니라 공동 입찰을…….]

입맛에 딱 맞게 흘러가는 상황이다.

라흐만은 일부러 장준용의 말을 단호하게 끊었다.

[당신에게 발언권을 주지 않았어.]

[라흐만 님!]

[언성 낮추지. 나와 대화하기 싫다면 그대로 밖으로 나가도 좋다.]

장준용이 매서운 눈으로 이문복을 노려봤다.

“미쳤나? 내가 언제 단독 입찰을 입에 담았나? 공동 입찰이라고 내 누누이 일렀거늘! 어서 발언을 철회하고 사과해. 영어가 서툴러서 단어를 헷갈렸다고!”

장준용은 한국어로 몰래 말하는데, 이문복은 영어로 당당하게 떠든다.

[회장님, 잘 판단하십시오. 저기 계신 분이 왜 회장님이 아니고 제게 발언권을 주셨는지. 그만큼 제 제안이 흥미로웠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게 아니야! 모르면 닥치라 하지 않았나!”

[회장님, 이건 기회입니다. 무려 10억 달러짜리 기회란 말입니다.]

이문복은 야심을 숨기지 않았다.

[10억 달러라면 대한민국 국가 예산의 절반이에요. 이것만 우리가 혼자 따내면 금산 건설은 대한민국 최고의 건설 기업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물론 전 입찰 경쟁에서 이길 자신이 있고요.]

이문복은 자신 있었다.

수많은 입찰 경쟁을 물리치고 관급 공사를 무수히 많이 따낸 실적이 이를 증명한다.

[이리 좋은 기회를 저 듣도 보도 못한 애송이와 함께 나눠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야! 이문복이!”

장준용이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삿대질을 했다.

그러자 라흐만이 손을 들었다.

[마지막 경고다. 더 이상 내 앞에서 언성을 높였다간 금산의 모든 발언 기회를 박탈하겠다.]

[라흐만 님, 이건 아닙니다! 저자가 제멋대로……!]

[경호원을 부를까? 이대로 끌려 나가고 싶나?]

장준용은 입술을 깨물며 자리에 앉았다.

이문복은 장준용을 보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배신자의 미소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