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산 찍고 건설 재벌-106화 (106/230)

106. 끊을 수 없는 것(3)

금산 호텔 스위트룸.

라흐만이 레드 와인을 잔에 따르고 그 맛을 음미했다.

[자네 덕에 입맛이 고급이 되었어.]

금산 호텔에서 제공하는 와인 중에 가장 비싼 레드 와인이건만 성에 차지 않는 눈치다.

[4만 달러짜리 와인을 따는 게 아니었는데. 한 번 맛을 알고 나니 끊을 수가 없어.]

입맛을 다시는 라흐만이다.

그가 아무리 사우디 왕족이라고 해도 매일 4만 달러짜리 고급 레드 와인을 마시는 건 무리다.

라흐만이 사우디 왕족 중에 아무리 사치스러운 취향이라고 해도 말이다.

[내가 이번에 한국에 온 건 비단 자네의 그룹 출범을 축하해 주기 위해서만은 아니야.]

[그럼 다른 용건이 또 있으십니까?]

[주베일 산업항 공사 입찰일이 결정되었어. 준비할 시간이 촉박할 거야.]

[벌써요?]

빠르다.

태수가 알고 있던 미래 정보와 다르다.

원래 주베일 산업항 공사 입찰은 75년.

입찰을 따낸 사람은 금산의 장준용이고, 산업항 착공은 76년에 한다.

[공사 입찰일이 언제입니까?]

[이번 달 8월 30일.]

대략 보름 후다.

라흐만은 미래보다 1년이나 빠른 공사 입찰일을 말한다.

[아버님께 들었다. 주베일 산업항 입찰을 원한다고 했다지?]

사우디 국방부 장관 칼리드에게 그런 말을 했었다.

그의 앞에서 중동 전쟁을 논하면서.

-그대는 내게 세 가지 전쟁에서 승리하면 내가 얻을 수 있는 것들을 가르쳐 줬다. 나는 그대에게 무엇으로 보답하면 되겠나?

-저는 주베일 산업항 공사를 맡길 바랍니다.

-내 소관이 아닌 일이야. 그것만은 내가 어찌 확답할 수가 없구나.

-미래는 모르는 법이죠. 만일 그때가 와서 힘을 써 주실 수 있다면 그때 부탁드리겠습니다.

-내 힘이 닿는 데까지는 성심성의껏 돕겠다. 확답할 수 없는 일이라도 모른척하지는 않을 것이다.

칼리드는 그렇게 약속했다.

그리고 다음에 석유 공급권을 얻기 위해 다시 만났을 때 칼리드는 말했다.

-라흐만은 동쪽 도시 개발 담당자로 발령 날 것이다. 주베일 산업항 공사를 담당한다는 소리지.

-내 동생 압둘라는 국방부 방위군 사령관에서 이번에 산업부 장관으로 발령이 났지. 주베일 산업항 공사에 힘을 쓸 수 있다는 소리야.

칼리드는 착실하게 태수와의 약속을 지키고 있었다.

‘내가 칼리드에게 주베일 산업항을 원한다고 말했기 때문이구나. 그는 나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물밑에서 힘을 쓴 모양이야.’

미래가 조금씩 바뀌고 있었다.

당장 눈앞의 라흐만만 봐도 그렇다.

전생에선 서쪽 도시 개발 담당자에서 쫓겨나 두바이로 향했던 남자다.

그런데 이번엔 사우디 왕실에 인정받아 사우디 동쪽 도시 개발 담당자가 되었다.

바로 주베일 산업항 공사의 개발 계획 담당자로.

‘75년 사우디 국왕이 칼리드가 될 테니 마음 놓고 안심하고 있었는데. 생각 외로 곤란하게 되었어.’

미래와 똑같이 흘러간다면 75년 3월이 되어서야 칼리드가 사우디 국왕이 된다.

칼리드가 사우디 국왕이라 주베일 산업항 공사는 태수의 몫으로 아주 쉽게 낙찰될 예정이었다.

‘현재 국왕과는 접점이 없어. 더구나 힘이 약해졌다고 해도 사우디 재경부 장관과 건설부 장관이 그 자리에서 버티고 있다. 그들은 전부 한청호의 연줄이야.’

현재 국왕이 집권할 때 주베일 산업항 공사가 입찰된다면 태수가 이길 확률은 얼마나 될까?

[라흐만 님, 너무 무리해서 공사 입찰 기간을 앞당긴 건 아닙니까?]

[자네를 위해서라면 그깟 무리, 감수하지.]

아, 너무 고마워서 뭐라 할 말이 없네.

그걸 어찌 말하나.

몇 달만 미루면 사우디 국왕은 당신 아버지가 될 테니 그때까지 미루자는 말을.

[카이바-알룰라 고속 도로도 벌써 거의 끝나지 않았나. 슬슬 일거리 떨어지기 전에 주베일 산업항 공사 입찰이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했지.]

칭찬해 달라고 라흐만이 눈을 빛낸다.

[내가 그걸 위해 연일 야근과 과로를 감내했지. 매일 부하들을 닦달하고 독촉해서 쌓인 원성도 감수했어. 그러니 공사 계획을 1년이나 앞당긴 게 아닌가.]

주베일 산업항 공사는 대한민국 국가 예산의 절반에 해당하는 큰 금액이 걸린 대공사다.

그런 대공사 계획을 1년이나 앞당기려면 얼마나 고생했을지 안 봐도 뻔하다.

그걸 아니, 차마 그 고생을 모른 척할 수가 없는 태수다.

[…고생하셨습니다.]

[아주 좋은 소식을 가져왔는데, 어째 영 기뻐 보이지 않는구나.]

[기쁩니다.]

한청호가 사우디 재경부 장관과 건설부 장관에 붙어 있다.

아무래도 주베일 산업항 공사에서 치열한 입찰 경쟁이 벌어질 것이다.

[보나 마나 삼촌 장관님들에게 붙어 있는 한청호 때문이겠지.]

라흐만이 한숨을 쉰다.

[그거까지야 어쩔 수 없는 일이지. 하지만 난 자네를 믿네. 한청호가 아무리 연줄 타령을 해 봐야 자네에게 어찌 능력으로 견줄 수 있겠나.]

부담스러운 믿음이다.

하지만 장준용 혼자서도 입찰 경쟁에서 승리했던 주베일 산업항 공사가 아닌가.

태수는 한청호와 맞붙어 경쟁에서 밀릴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언제부터 편한 길을 찾아 걸어왔다고. 가시밭길도 헤쳐 나가면 그만이지.’

능력으로 찍어 누르면 그만이다.

일이 되도록 상황을 만들면 된다.

연줄이 뭐라고, 그깟 장애물 따위가 태수를 막을 순 없다.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그래서 준비했습니다. 잠시 이걸 봐주시겠습니까?]

태수가 호텔 문을 열자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세 명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태양 그룹 계열사 사장 3인방이었다.

[라흐만 님에게 제일 먼저 소개해 줄 사람은 태양 그룹을 떠받치고 있는 중요 임원들입니다. 그들이 주베일 산업항 개발에 관해 합동 브리핑을 하고자 합니다.]

태수가 한 명씩 라흐만에게 소개해 준다.

[라흐만 님께서 보내 주신 주베일 산업항 공사의 청사진은 잘 받았습니다. 그대로 실현하기 위해 설계 도면과 건설 공정 및 계획을 구체화한 태양 건설의 사장, 박철완입니다.]

박철완이 말린 도화지가 잔뜩 꽂힌 사무용 박스를 들고서 인사했다.

[공사 속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대규모의 중장비가 투입되어야 할 겁니다. 중장비 공급을 책임질 태양 중장비의 사장, 이창원입니다.]

이창원이 생산하는 중장비를 종류별로 기록한 카탈로그를 들고 인사했다.

[주베일 산업항을 세계적인 석유 전진 기지로 만들기 위해선 정유 관련 시설들이 필수죠. 정유 저장 시설 및 유조선과 관련된 제반 사항을 책임질 태양 정유의 사장, 노일국입니다.]

노일국이 정유 공정 시설 도면을 들고서 인사했다.

[이들 셋이 머리를 맞대고 준비했습니다. 주베일 산업항을 세계적인 석유 전진 기지로 만들고자 관련된 건설 및 개발 계획을 브리핑하겠습니다.]

라흐만이 무척 만족하며 레드 와인 잔을 들어 올렸다.

[기대하지.]

태양 계열사 사장 3인방이 라흐만 앞에서 브리핑을 시작했다.

* * *

태양 계열사 사장 3인방의 브리핑이 끝났다.

라흐만은 감탄을 금치 못하며 박수를 쳤다.

[대단하군. 이 정도로 구체적이고 혁신적인 세부 계획을 들을 수 있으리라고는 기대하지 못했는데 말이야.]

짝짝짝.

[태양 그룹의 계열사 사장들이 일을 아주 잘하는군.]

라흐만의 칭찬에 계열사 3인방의 표정이 밝아진다.

그들은 라흐만이 아니라 태수만 바라보고 있었다.

과연 태수는 이 브리핑을 듣고 어떤 평가를 내릴까 궁금했다.

‘괜찮은 것 같은데.’

‘다들 잘 준비한 것 같은데.’

‘우리 회장님이 워낙 날카롭고 꼼꼼해야 말이지.’

이 브리핑을 준비하기 위해 각자 태수에게 얼마나 쪼였던가.

이건 단시간에 준비할 수 있는 업무량이 아니라며 그들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때마다 돌아오는 태수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할 수 있습니다.

-당신 스스로가 능력을 못 믿으면 어떡합니까? 해낼 수 있습니다. 스스로를 믿고 나아가십시오.

-못하기에 안 하는 게 아닙니다. 안 하기에 못하는 겁니다. 해 보세요. 제가 보기엔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기다려 주겠습니까. 멈추지 않으면 얼마나 천천히 가는지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진짜로 할 수 있었다.

들들 볶이고, 쪼이고, 쥐어짜였다.

온몸을 불살라 영혼까지 하얗게 불태우며 일하니까 되긴 되더라.

-시야를 보다 넓게 두면 다른 길이 보일 겁니다. 이런 건 어떻습니까?

-음, 어째서 이런 결정을 내렸는지 이유가 궁금하군요.

-확신합니까? 스스로 납득할 수 없는 일을 다른 사람에게 납득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다시 처음부터 천천히 짚어 봅시다.

방향을 잡는데 태수가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아마 미로 속을 헤매다가 포기하고 말았을 것이다.

한청호는 태수와 달랐다.

방향을 잃고 헤매고 있을 때 방치한다.

결과를 들먹이며 욕만 했고, 질책만 쏟아 냈다.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제시도, 칭찬도, 성취감도 기대할 수 없었다.

그래서 한청호 밑에서는 현재도, 미래도 없었다.

그저 과거만 있었을 뿐이다.

-잘했습니다.

태수의 저 말 한마디를 듣기 위해서였다.

그 작은 칭찬이 주는 쾌감과 성취감이 그들의 피를 들끓게 만들었다.

여기까지 쉬지 않고 달려올 수 있는 이유이자 목표였다.

“잘했습니다.”

이번에도 여지없이 태수의 담담한 칭찬이 들려온다.

저 담담한 한마디가 주는 쾌감을 도저히 끊을 수가 없다.

계열사 사장 3인방은 숨길 수 없는 성취감에 주먹을 꽉 쥐었다.

‘해냈다!’

‘아, 기분 최고다!’

‘그래, 이거지!’

태수를 알고 난 후 필연적으로 과로에 시달린다.

하지만 성취감은 인생 최고를 연일 찍는다.

능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고, 그럴 수 있도록 태수가 물심양면으로 돕는다.

태수를 믿고 따르게 된 이유였다.

[이 정도 수준의 입찰 계획이라면 주베일 산업항 공사는 따 놓은 것 같은데 그래.]

라흐만이 만족하는 이유였다.

[한청호가 아무리 삼촌 장관님들을 잡고 별 수작을 부려도 이거라면……!]

역시 태수다.

[준비가 철저해. 아무렴, 이래야 강태수지.]

라흐만은 한시름 놓았다.

가슴 한구석에 드리웠던 걱정이 싹 날아간 기분이었다.

[자네랑 일한 이후엔 다른 누구도 성에 차지 않아. 자네와 같이 일하는 기쁨을 알아 버린 게 죄지.]

라흐만의 말을 누구보다 절실히 느끼는 태양 계열사 3인방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태수는 태양 계열사 3인방에게 말했다.

“그동안 준비하느라 고생 많았습니다. 라흐만 님께서도 만족하신 것 같으니 오늘은 이만 들어가서 푹 쉬셔도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계열사 사장들이 만족스럽게 웃는다.

그간 쌓인 피로가 눈 녹듯이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상쾌하고 홀가분했다.

“아니면 여기 호텔의 바에서 한잔하고 가시겠습니까? 제가 한턱 사죠. 오늘은 실컷 마셔도 좋습니다.”

태수가 법인 카드를 내밀자 다들 싱글벙글했다.

법인 카드가 없다고 술값 못 낼 사장들이 아니지만 태수가 저리 나오니 기분 째진다.

“좋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태양 그룹 계열사 사장 3인방이 기분 좋게 돌아갔다.

문 앞에는 장말동과 안정우가 기다리고 있었다.

“오셨으면 기척이라도 해 주시지. 오래 기다리셨습니까?”

“경호원들이 못 들어가게 막더구나. 에잉!”

라흐만의 경호원들이 복도와 문 앞을 지키고 있었다.

“들어오시죠.”

태수를 따라 둘이 들어왔다.

태수가 라흐만에게 둘을 소개했다.

[이 두 분은 태양 그룹 출범식 때 보셨죠? 이분은 저와 돈 거래를 제법 많이 하신 분입니다.]

장말동이 중절모를 들어 올리며 인사했다.

[이분은 사우디에서 몇 번 보셨을 겁니다. 무기 상인. 아시죠?]

한복 차림의 안정우가 인사했다.

다들 라흐만이 권하는 자리에 앉자 태수가 안정우를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먼저 라흐만 님께 의논할 일은 이분과 관련된 사업입니다.]

[무슨 사업?]

[사우디에 무기 공장을 짓고 싶다는데, 어찌 생각하십니까?]

[무기 공장?]

라흐만이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이번 중동 전쟁 때 느끼셨을 겁니다. 믿고 거래할 무기 공급처가 필요하지 않으셨습니까?]

오일 머니로 부유해진 사우디는 21세기에도 무기 구매 금액이 세계에서 손꼽히는 나라다.

미국, 중국에 이어 세계 3위에 해당할 정도다.

석유 때문에 지킬 것도 많고, 탈도 많은 지정학적 위치 때문이다.

안정우가 말했다.

[세계적인 무기 공장을 짓겠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저 사우디의 수요를 감당할 수 있는 규모면 족합니다. 은밀하게 말입니다.]

라흐만의 고민이 깊어졌다.

[이건 내가 결정할 문제가 아닌 것 같군. 아버님께 물어보도록 하지.]

라흐만의 아버지는 사우디 국방부 장관이다.

무기 공장이 들어서고 말고를 결정할 권한도 칼리드에게 있었다.

[중동 전쟁이 끝난 지금, 이제야 내게 슬쩍 귀띔하는 이유는 뭐지?]

[사우디 서쪽의 얀부 항에서 공사할 때 병참 기지가 같이 건설되었잖습니까. 그럼 이번에는 동쪽 항구 공사할 때 같이 짓는 것이 어떨까 해서 드리는 제안입니다.]

[주베일 산업항을 지을 때 슬쩍 무기 공장까지 짓겠다? 병참 기지까지?]

라흐만도 척하면 척하고 알아듣는다.

[무기 공장까지는 아니어도 병참 기지라면 제법 괜찮을 것 같긴 하군.]

구미가 당긴다.

사우디 서쪽 도시 얀부 항에 병참 기지가 건설하고 그 덕을 톡톡히 본 사우디가 아닌가.

마침 동쪽 도시 개발 담당자가 라흐만이고, 태수가 이번에 주베일 산업항을 라흐만의 감독 아래 지을 가능성이 크다.

[강태수가 주베일 산업항 공사를 입찰해야 할 이유가 또 늘었는데? 하하하.]

라흐만이 시원하게 웃는다.

그리고 눈을 돌려 장말동을 본다.

[그럼 당신은 왜 나를 찾아왔지? 은행에서는 나를 찾아올 이유가 없을 텐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