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산 찍고 건설 재벌-105화 (105/230)

105. 끊을 수 없는 것(2)

그걸 누가 모르겠나.

박정환이 왜 저리 나오는지 태수가 누구보다 더 잘 안다.

재벌로 발돋움하는 태수의 기를 꺾어 제 발아래 꿀리려는 속셈이 아니고 뭔가.

하지만 태수는 압력에 굴복하지도 않았고, 멋지게 자존심을 지켜내 오히려 인정받았다.

“쉽게 갈 수 있었어.”

“쉬운 길로 골라 갈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습니다.”

편한 길을 택했다면 한청호와 부딪치지도 않았을 것이다.

“고집인가? 아집인가? 아니면 자존심인가.”

“신념이라고 봐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누구도 꺾지 못할 태수의 각오다.

“신념이라……. 그것만큼 부러지기 쉬운 것도 없지.”

누구나 가슴에 하나쯤 뜻을 품고 산다.

하지만 이 세상은 신념을 지켜 낼 수 있을 만큼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래서 박정환은 담배를 한 번 더 내뿜었다.

한숨이었다.

“하지만 지켜 낸 신념만큼 빛나는 것도 없다.”

탁탁.

박정환은 손가락을 튕겨 담뱃불을 껐다.

“지켜보지. 자네가 기어이 신념을 지켜 낼지, 아니면 세상 풍파를 못 이겨 신념이 먼저 부러질지.”

박정환이 담배를 털어 내자 태수는 라이터를 다시 차기범에게 건넸다.

그러나 박정환이 손을 들어 막았다.

“넣어 둬.”

태수는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

그런데도 굳이 라이터를 넣어 두라는 이유는 뭘까.

“다음번 담뱃불은 그걸로 붙이도록 하지.”

태수에게 라이터를 맡기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딱 한 번뿐이야.”

박정환은 은으로 만들어진 전용 담배 케이스를 품에 넣었다.

“담배 한 개비와 맞바꿀 게 있으면 그때 말하도록.”

태수는 은으로 만든 라이터를 보았다.

청와대 마크가 찍혀 있다.

“어떤… 것이든 말입니까? 청이든, 죄든 가리지 않고?”

“물론.”

원하는 청을 넣어도 되고, 무슨 잘못을 해도 한 번은 용서해 주겠다는 뜻이다.

금산 장준용의 황금 명함과 같은 것이리라.

아니다. 이쪽은 무소불위의 권력자다.

어찌 일개 기업 회장의 명함과 같으랴.

“강남 개발, 아파트 공사를 하고 싶다고 했던가?”

박정환이 먼저 아파트 공사에 대해 말을 꺼낼 줄은 몰랐다.

“대치동에 땅을 제법 많이 사들였다던데.”

“네.”

“시작해.”

뜻밖이었다.

원래 청일 아파트는 아파트 공사 승인이 나기까지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한청호가 관계 부처를 돌며 위아래 골고루 뇌물로 기름칠을 해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데 박정환의 한마디에 모든 수고를 덜었다.

“오늘 붙인 담뱃불 값이라고 치지.”

담뱃불 값이라기엔 지나치게 비싸다.

“시련을 이겨 내고 스스로 자존심을 지킨 자에게 주는 선물이야.”

오해했다는 말은 한마디도 꺼내지 않는다.

미안한 마음 역시 조금도 비치지 않는다.

한 나라의 최고 통수권자는 쉽게 사과하지 않는다.

그것이 박정환의 자존심이었다.

“감사합니다.”

박정환이 먼저 등을 돌렸다.

그 뒤를 차기범이 따랐다.

“이번에 부린 수완을 다음에도 기대하지.”

칭찬인가 협박인가.

“어디 한번 스스로 꽃길을 만들어 보던가.”

기브 앤 테이크(Give & Take).

동네 깡패도 상납을 받으면 가게를 건드리지 않은 게 상도덕이다.

상납금을 내었으니 당분간 태양 그룹을 건드리지 않겠다는 뜻이다.

“능력껏 올라가 봐. 안 그러면 허리가 휠 테니까.”

어째 상납금 액수 올라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차기범이 태수를 스쳐 지나가며 작게 말을 흘린다.

“잘했다.”

무뚝뚝한 칭찬이었다.

그때 과속으로 주차장 안에 진입하는 검은색 자동차가 한 대 있었다.

포항에서 올라온 박태종과 박철완이었다.

“각하!”

“태종아, 늦었구나.”

박태종이 박정환을 발견하고 부리나케 뛰어온다.

“잘됐다. 자네 나랑 청와대에서 한 잔 같이하지.”

“네? 가, 각하. 저는 태양 그룹의 출범을 축하하기 위해 멀리 포항에서 지금 막…….”

“위스키.”

박태종이 좋아하는 주류를 꼭 짚어 말하는 박정환.

담배를 태운 마음이 허전하던 참이다.

하지만 박태종으로서는 당황스러웠다.

“여기까지 왔는데, 잠깐 축하 인사부터…….”

“지금 내 제안을 거부하는 건가?”

“…그럴 리가요. 오랜만에 한잔해야죠.”

태수에게 축하한단 말 한마디 못한 채 박태종은 청와대로 끌려갔다.

박철완은 커다란 사무용 박스를 들고 뛰어왔다.

돌돌 만 커다란 도화지 뭉치가 십여 개나 들어 있는 박스였다.

“사장님, 아니 회장님! 부탁하신 일은 모두 끝냈습니다! 조금 늦었습니다!”

박철완이 활짝 웃으며 박스를 들어 보였다.

태수는 아주 만족스러웠다.

“수고했습니다.”

생각보다 빨리 완성본이 나왔다.

일 잘하는 박철완을 보는 태수의 눈길이 따사롭기만 하다.

박정환이 떠나자 지켜보던 이창원과 노일국도 재빨리 태수에게 다가왔다.

“마침 잘됐습니다. 안 그래도 오늘 저녁 합동 브리핑이 있을 예정이거든요.”

유능한 부하 직원 셋이 그동안 태수의 지시로 각자의 분야에서 이를 준비했다.

오늘은 지금껏 준비했던 것을 셋이 함께 합동 브리핑으로 보여 줄 차례다.

“오늘 행사만 끝나면 휴무라고 하시더니…….”

“저희 매일 그 일 때문에 과로로…….”

“저는 지금 막 포항에서 올라와서 멀미가…….”

태수는 딱 잘랐다.

“바쁩니다. 오늘 저녁 브리핑, 준비 시간이 촉박합니다.”

아, 바늘 들어갈 틈도 없다.

셋은 퀭한 얼굴로 태수를 따랐다.

* * *

태양 중장비 사장실.

[요 앞까지 배웅하러 간다는 놈은 북한까지 갔나.]

라흐만이 불만스레 사장실 문을 본다.

벌써 10분이 지났는데도 태수가 돌아오지 않는다.

오일 머니 냄새를 맡고 꼬여 든 똥파리들이 귀찮기만 하다.

[귀국(貴國)의 국왕께서 이 일을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고작 이런 일로 양국의 화합이 무너져서야 쓰겠습니까?]

[앞으로도 귀국과 오랫동안 협력하는 국가와 기업이 되겠습니다.]

태양 그룹 대신 청일 호텔 착공식에 참석했던 세 개 재벌 기업.

삼청, 럭키세븐, 대한 정유 공사의 사장들은 라흐만을 앞에 두고 쩔쩔맸다.

전 세계가 몸살을 앓고 있는 세계 재난급 이벤트인 오일 쇼크.

그 폭풍에서 조금이라도 비껴가고자 하는 몸부림이었다.

[석유 공급에 관한 논의는 이미 끝난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거야 그렇지만 라흐만의 심기가 불편해 보이니 이 난리가 아닌가.

이미 한 번 찍혀서 대놓고 석유 끊겠다는 경고까지 받은 이후다.

[피곤해. 난 이만 호텔로 돌아가 쉬어야겠어.]

더 이상 귀찮게 굴면 얄짤 없다는 뜻이다.

재벌가 사람들은 식은땀을 훔쳤다.

[아, 그러셔야죠. 그러고 보니 오랫동안 붙잡고 있었습니다.]

[장거리 비행으로 피곤했을 텐데 우리가 눈치가 없었습니다.]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그땐 더 좋은 일로 뵙지요.]

재벌가 사람들이 물러간다.

그런데 어째선지 금산의 장준용은 소파에서 엉덩이를 떼지 않는다.

[당신은 왜 안 가고 남았지?]

[라흐만 님을 저희 금산 호텔로 모시기 위해서지요.]

장준용이 두 손을 싹싹 비비며 은근하게 웃었다.

[금산 호텔 스위트룸을 준비했습니다. 술 한 잔 같이 하실까요? 긴히 대화를 나눌 일이 좀 있습니다만…….]

[석유 공급에 관해서는 이미 얘기가 다 끝났다고 말했을 텐데.]

[주베일 산업항 공사에 관해서는 아직 입도 벙긋 못해 봤습니다.]

라흐만이 굳이 태수를 찾아 한국에 온 이유였다.

태양 그룹 출범을 축하하는 겸, 사우디 주베일 산업항 공사에 관해 말해 줄 겸.

라흐만은 턱을 슬쩍 괴며 뾰족하게 대답했다.

[내가 왜 그대와 사우디 공사에 관해 얘기해야 하지?]

대놓고 장준용과는 사우디 주베일 산업항 공사를 논하지 않겠다는 라흐만이다.

[제가 사우디에 유조선을 띄울 때 한 가지 청을 올렸습니다. 그건 주베일 산업항…….]

[그건 국왕 폐하께 직접 고하시게. 내가 아니라. 나는 당신과 얘기를 나눌 마음이 없으니.]

단호박도 이런 단호박이 없다.

칼같이 자르는 단호한 거절에 금산의 장준용은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 사무실 문이 열리며 태수가 들어왔다.

[라흐만 님, 금산의 회장님과도 함께 얘기를 나누면 안 되겠습니까?]

이해할 수 없었다.

[왜? 난 강태수 한 명이면 족해. 내겐 굳이 이자와 함께할 이유가 없는데?]

[먼저 공동 입찰에 대한 제안을 받았고, 제가 그 대답을 했습니다.]

[내가 그자 좋으라고 주베일 산업항 공사 계획을 앞당긴 건 아니야.]

태수의 입에 넣어 주기 위해 불철주야 주베일 산업항 공사 계획에 매달려 온 라흐만이다.

오로지 그 이유로 공사 계획을 무려 1년이나 단축했다.

그간 야근과 과로, 무수한 어려움을 전부 뿌리치고 여기까지 온 건 모두 태수를 위해서였다.

결코 금산의 입에 넣어 주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제 동맹입니다. 부디 함께할 수 있길 부탁드립니다.]

[10억 달러가 걸린 일이야. 좋은 건 혼자 먹는 거야.]

무려 한 나라의 국가 예산의 절반에 해당하는 금액이 아닌가.

이 수익을 기업 혼자 먹으면 저 앞으로 치고 달려가는 건 당연하지 않나.

라흐만이 장준용을 못마땅하게 보았다.

[끊어 내면 그만이지. 동맹이 별거라고.]

태수는 고개를 저었다.

[먼저 저쪽에서 신의를 저버리지 않는 이상, 제가 먼저 버리는 일은 없습니다. 우린 끝까지 함께합니다.]

[어리석은 고집을 부리지 마라. 10억 달러짜리 공사라면 갈라서기 충분한 금액이 아닌가?]

태수를 위한 조언이었다.

[제 믿음은 고작 10억 달러짜리가 아닙니다. 그런 얄팍한 믿음이었다면 애초에 손을 내밀지도 않았을 겁니다.]

“자네…….”

금산의 장준용이 감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돈은 동맹을 맺을 이유도, 끊을 이유도 안 됩니다.]

[이해득실이 중요한 게 아니라면 동맹을 맺을 이유가 있나?]

[이해득실이 중요했다면 거래를 하면 그만이죠. 굳이 동맹을 맺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럼 자네가 동맹을 맺는 이유는 뭔가?]

[신의(信義).]

라흐만의 얼굴엔 웃음이 감돌았다.

[강태수, 이제 보니 낭만적인 남자였군.]

라흐만이 깍지를 낀 채 몸을 앞으로 숙였다.

[이 바닥에 의리가 어디 있다고. 의리와 믿음만큼 부질없는 단어가 없지. 나를 봤으니 알 텐데.]

라흐만은 믿었던 한청호에게 버려져 벼랑 끝까지 몰린 바 있다.

[의리와 믿음이 흔치 않은 곳이니 지켜 낼 가치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태수는 라흐만에게 손을 내밀었다.

[라흐만 님이 보시기에 저와 한청호가 같습니까?]

[그럴 리가.]

[제 손을 잡은 걸 후회하십니까?]

[전혀.]

라흐만이 태수의 손을 잡았다.

꽉 잡은 두 손을 라흐만이 먼저 놓을 생각은 없었다.

[자네를 믿었으니 생사를 함께했지.]

중동 전쟁을 함께 논하고, 병참 기지를 같이 짓고, 고속 도로 완공의 기쁨을 같이 나눴다.

강태수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면 아버지 칼리드를 소개시켜 주지도 않았다.

[이 바닥에 의리가 어디 있냐고 하셨습니까? 의리와 믿음만큼 부질없는 단어가 없다고요? 그렇다면 우리는 어째서 함께하는 겁니까?]

[그야… 믿으니까.]

라흐만이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신의는 부질없다고 아무리 외쳐도, 라흐만 본인부터가 태수와 신의를 지키고 있었으니까.

[라흐만 님이 그렇듯,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금산의 장 회장님도 그렇고요. 신의가 함께하는 한 동맹은 끝까지 갑니다.]

라흐만이 묘한 눈으로 장준용을 본다.

라흐만은 진지하게 묻는다.

[이자도 친구인가?]

라흐만이 장준용을 위아래로 살펴보며 물었다.

[설마 이 나이에 친구는 아니겠지?]

아무리 봐도 아버지뻘 이상 할아버지뻘 이하는 족히 되는 것 같은데.

[아무리 친구의 친구는 친구라지만 나는 좀 부담스러운데 말이야.]

왜 안 그렇겠나.

[친구와 동맹은 엄연히 다르죠.]

[그렇지?]

봤나? 장준용, 당신과 나는 달라.

나는 강태수의 친구라고.

의기양양해진 라흐만이 소파에 느긋하게 등을 붙인다.

[라흐만 님이 이번에 오신 김에 제 동맹을 한 명씩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함께 일을 도모해도 좋을 사람들입니다. 금산 호텔로 가실까요?]

라흐만이 눈을 빛났다.

[아주 좋다.]

강태수가 믿는 사람들을 소개해 주는 자리라…….

사우디에서 한국까지 멀리 찾아온 보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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