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 끊을 수 없는 것(1)
태양 그룹 출범식 행사가 열린 태양 중장비 앞 공터.
직원들은 식사를 끝내고 후식으로 과일과 커피 등 다과를 앞에 뒀다.
“재벌 기업 출범 행사가 이리 졸속으로 마무리되다니.”
“회장님 성격상 크게 신경 쓴 행사가 아니긴 해. 그건 준비한 우리가 더 잘 알아.”
“하지만 이리 허무하게 끝나니까 왜 이리 섭섭한지. 괜히 무시 받는 것 같고.”
교장 선생님 아침 조례는 빨리 끝날수록 좋듯, 회사 행사 역시 짧을수록 좋은 법.
하지만 막상 5분 만에 엉망진창으로 그룹 출범식이 끝나자 만족스러운 식사였음에도 직원들 얼굴에는 그늘이 졌다.
중앙 정보국 요원이 들이닥친 후 그 뒤를 따라가던 태수를 봤기 때문이다.
“우리 회장님, 괜찮을까?”
“암만 봐도 보통 일이 아닌 것 같은데…….”
“재벌 그룹 출범 행사에 정재계 인사는커녕 취재진 한 명도 보이지 않잖아.”
태양 그룹이 당한 유례없는 푸대접에 직원들이 한숨을 쉬었다.
직원들 사기가 바닥이다.
그러자 광부들이 혀를 찼다.
“여기가 초상집인 줄 알아? 무슨 그깟 일로 다들 풀이 죽었어?”
“그러게 말이야. 걱정할 사람이 없어서 우리 사장님, 아니 회장님을 걱정한다고?”
“그 양반이라면 중앙 정보국이 아니라 군대에 끌려가도 윗사람을 꼬드겨서 일거리를 따 올 사람인데.”
호탕하게 웃는 광부들은 참 속도 없어 보인다.
청일 정유 및 중장비 소속이었던 직원들은 혀를 찼다.
“청일의 한 회장님이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 줄 모르니까 저런 소리가 나오지.”
“괜히 청일의 호랑이라 불리는 사람이 아닌데. 그 회장님이 작심하고 들쑤셔서 안 망한 기업이 없었어.”
“오죽하면 사업으로 재벌 된 게 아니라, 뇌물과 로비로 재벌 됐다는 소리가 나오겠어.”
청일 소속이었던 직원들은 보고 들은 게 많았다.
하지만 광부들은 오히려 그들을 보며 혀를 찼다.
“반년 동안 우리 회장님 밑에 있으면서도 뭘 모르네.”
“그 무섭다는 청일의 회장님마저 우리 회장님 앞에서 개망신당한 건 소문 안 퍼졌나 보지?”
청일 화학 부사장이 태수의 광산에서 행패 부릴 때 광부들이 직접 어깨들을 잡아다 두들겨 팼다.
그 이후 청일 정유와 중장비 인수 때 태수의 활약을 전해 들은 터다.
오랜 시간 태수를 곁에서 똑똑히 지켜본 광부들은 태수에 대한 믿음이 대단했다.
“두고 보라니까. 우리 회장님은 사지육신 멀쩡한 걸 떠나 금의환향까지 할 테니까.”
반면 청일 소속이었던 직원들은 한청호의 악명에 진저리쳤다.
“청일 그룹에 밉보이면 어떤 꼴이 된다는 걸…….”
청일 소속이었던 직원들의 말은 끝맺지 못했다.
엄청난 자동차 행렬이 줄지어 속속 들어서고 있었기 때문이다.
“뭐야? 이,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뭐긴 뭐야, 우리 회장님이 돌아오신 거지. 저기 회장님이랑 같이 가셨던 왕자님도 돌아오시네.”
자동차 행렬 중에 10대에 달하는 택시가 있으니 바로 알아본다.
돈 많은 라흐만이 전세 낸 택시들이다.
부르릉. 끼익.
자동차 행렬 중에서 태수의 차량도 보인다.
“어? 진짜네?”
“이 많은 자동차는 뭐야? 출범 행사 때는 코빼기도 안 보이더니.”
태수가 자동차에서 내렸다.
사지육신 멀쩡할 뿐만 아니라 자신만만한 표정이 여전하다.
“다들 점심은 맛있게 드셨습니까?”
“회장님!”
“이거 미안해서 어쩝니까? 아까 마무리한 행사를 다시 시작하게 생겼으니.”
직원들은 태수를 반겼다.
“옆 동네 호텔 행사장에 가신다더니 가신 일은 어떻게 됐어요?”
태수 분위기만 봐도 갔던 일이 잘 풀린 건 알 것 같았다.
“이러려고 의도한 건 아니었는데, 어쩌다 보니 손님들을 줄줄이 달고 오게 되었습니다.”
“네?”
이게 다 라흐만의 과한 오지랖과 뻥 덕분이다.
태수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대통령 각하께서 태양 그룹 출범식 축사를 해 주신답니다. 다들 서두릅시다.”
“네? 대, 대통령 각하께서요?”
까맣게 줄지어 속속 들어오는 차량 중에는 태극기를 꽂고 있는 행렬도 있었다.
라흐만과 박정환이 차에서 내렸다.
다른 차에선 대통령 경호실장 차기범과 비서실장 김정림이, 그 뒤로 경호실 소속 경호원이 구름처럼 쏟아져 들어온다.
직원들이 입을 떡 벌렸다.
“설마 진짜로?”
“전부 일어서! 여기서 퍼질러 먹고 놀 때가 아닌 것 같다.”
직원들이 헐레벌떡 일어나서 부랴부랴 공터에 모인다.
아까 치워 뒀던 의자를 꺼내 서둘러 행사 준비를 갖춘다.
일하는 속도가 가히 경이롭도록 빨랐다.
“매일 뛰어다니면서 단련된 일 처리 속도가 여기서 빛을 보네.”
“우리 사장님, 아니, 회장님 모시려면 전력 질주하면서 일할 때가 워낙 많아서.”
“빠릿빠릿하지 못하면 살아남을 수 없는 기업, 태양 그룹이잖나.”
반년 동안 태수 밑에서 착실히 교육받은 직원들은 일 처리가 남달랐다.
광부들이 청일 소속이었던 직원들에게 의기양양해서 외쳤다.
“어때? 우리 말이 맞지?”
“거 봐, 내 이럴 줄 알았다니까.”
청일 소속 직원들은 광부들에게 엄지를 척 내밀었다.
그때 취재진이 직원들을 향해 조심스럽게 질문을 퍼붓기 시작했다.
“태양 그룹 회장님이 중동 전쟁을 조기 종결시킨 공로를 세웠다던데요,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취재하려고 합니다. 협조 부탁드립니다.”
“사우디 왕족께서 친우인 강태수 회장님을 축하하기 위해 전용기까지 타고 내한하셨는데요. 혹시 그 전부터 왕래가 잦았나요?”
“태양 그룹 강태수 회장님께서 사우디의 석유 수출 금지 선언의 예외 특례로서, 석유 공급 권리증을 받아 각 재벌 기업에 전달했다던데요. 이에 대한 구체적인 지시 사항을 알고 싶은데요.”
취재진들의 질문이 쉬지 않고 쏟아진다.
이에 청일 소속이었던 직원들뿐만 아니라 광부들과 이후 인수 합병된 직원들까지.
모두 한마음 한뜻으로 입을 떡 벌렸다.
“에엑? 우리 회장님이요?”
“맙소사. 그 양반이 사우디에 가서 그런 짓을 하고 다녔다고요?”
“으하하하, 그 양반이라면 그러고도 남지. 거 봐, 어딜 가서든 일거리를 따오고 금의환향하는 양반이라니까!”
태양 그룹 직원들이 일제히 회장 강태수를 보았다.
아주 자신만만하게 연단에 올라 마이크를 켜는 태수.
태수가 마이크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아아, 마이크 테스트. 다들 거기서 뭐 합니까? 행사 준비 안 할 겁니까? 의자 정렬 똑바로 못 합니까? 손님들 땡볕에 세워 둘 겁니까? 음식 준비 안 합니까? 뛰세요!”
저 쏟아지는 잔소리 폭탄!
‘그래, 저래야 우리 회장님이지.’
‘정신이 번쩍 든다.’
태양 그룹 직원들은 취재진을 뒤로하고 후다닥 행사 준비에 나섰다.
직원들 얼굴에는 하나같이 뿌듯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 * *
태양 그룹 출범 행사가 끝났다.
취재진들은 연일 카메라 플래시를 터뜨렸다.
대통령 비서실장 김정림이 경호원들에게 말했다.
“취재진들 입 막아.”
“어디까지 막을까요?”
“사우디 왕족이 뱉은 말을 단 한 줄이라도 실은 곳은 각오하라고 해. 사진 찍은 거로 만족해야지.”
신문과 방송에 사우디에서 태수가 했던 일이 드러나면 곤란하다.
밀약으로 맺은 석유 공급 권리증의 존재가 수면 위로 드러나는 순간, 양국의 관계는 악화될 것이다.
라흐만의 경고를 김정림은 무시할 수 없었다.
“알겠습니다.”
대통령 직속 경호원들이 몸을 돌려 취재진에 다가갔다.
삽시간에 카메라 플래시가 일제히 멎었다.
내내 큰소리로 질문하던 취재진이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그들은 위에서 내린 경고를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모두 태양에서 준비한 식사를 드시죠.”
박정환을 따라온 유명 정재계 인사들도 태양 그룹에서 준비한 점심을 먹었다.
태양 그룹에서 준비한 음식에 대해 연이어 극찬이 쏟아졌다.
“석유와 관련되어 논의하기엔 사장실이 좋을 것 같습니다.”
라흐만과 박정환, 재벌 총수들이 중장비 사장실로 향했다.
이미 그곳엔 먹을 음식과 주류에 다과까지 마련되어 있었다.
라흐만이 소파에 앉아 덤덤히 말했다.
[이번 일은 솔직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나라가 은행 대출을 막고, 자기 것도 아닌 부채를, 그것도 당장 일시 상환하라 통보하고, 투자도 막고. 이곳에선 사업하기 힘들겠습니다.]
예의 바르고 점잖은 돌려 까기다.
박정환더러 들으라는 소리다.
태수를 이딴 수작질로 괴롭혔냐는 못마땅함을 포장한 것이다.
박정환은 가만히 라흐만을 본다.
라흐만은 아랑곳 않고 태수에게 말했다.
[강태수, 사우디에선 석유를 팔아 달러가 남아돈다. 이 돈으로 도시를 건설하고, 기반 시설을 확충하고, 나라를 발전시킬 것이다. 사우디로 오지 않겠나?]
대놓고 태수를 스카웃 하겠다는 뜻을 내보인다.
[사우디라면 네 앞길을 나라가 막지 않아. 오히려 장려금을 지원하고, 국가 기반 산업을 육성시킬 권한을 주겠어. 우리는 능력 있는 자를 원해.]
라흐만이 한청호를 떠올리며 코웃음 쳤다.
[한청호 같은 쥐새끼가 나라를 좀먹는다. 한데 다들 그 수작에 놀아나서 한마음 한뜻으로 너를 밟아 죽이려 했지. 이런 좀스러운 나라에서 큰 뜻을 펼치기엔 강태수, 네가 너무 아깝다.]
태수에게 모두의 시선이 집중됐다.
박정환이 태수를 어떻게 괴롭히는지 전부 본 사람들이다.
그러니 지금 사우디 왕족의 제안이 태수에게 얼마나 달콤하게 들릴지도 안다.
박정환도 태수를 가만히 보고 있었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그 뜻은 제가 정중히 사양해야겠습니다.]
하지만 태수의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태수는 라흐만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왜? 우리 사우디가 이 나라보다 자네에게 훨씬 많은 것을 베풀어 줄 수 있다.]
이런 취급을 당하면서 이 나라에 붙어 있으려는 이유를 모르겠다.
[나를 따라 사우디로 가면 부귀영화가 보장될 것이다. 내가 직접 꽃길을 깔아 주지. 그러니 굳이 이리 힘든 가시밭길을 걷지 않아도 돼.]
사우디 왕족이 깔아 주는 꽃길이라니.
말 한마디마다 향기로운 돈 냄새가 줄줄 풍긴다.
[10억 달러짜리 제안이지. 어떤가?]
인정한다.
이 정도 돈 냄새라면 머리가 핑 돌 정도로 좋은 제안이다.
오랜만에 태수는 돈 냄새에 정신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이 악물고 노력해야 했다.
[이해득실만 고려한다면 사우디를 마다할 이유가 없죠.]
태수라고 그런 생각을 안 해 봤을까.
능력 있는 자라면 어디에서든 뜻을 펼칠 수 있고, 태수는 능력 있는 남자다.
하지만 태수는 이 길을 선택했다.
[지금 그 말은 이해득실을 포기하고서라도 이 길을 택한 다른 이유가 있다는 소리로 들리는데?]
태수는 빙그레 웃었다.
[여기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더 이상 태수는 별다른 말은 하지 않는다.
대신 라흐만에게 다른 것을 권할 뿐이다.
[이건 우리 어머니가 직접 만드신 한국의 전통주입니다.]
막걸리였다.
[한번 드셔 보세요.]
라흐만은 물끄러미 태수를 보았다.
[사우디에선 술 금하는 거 모르나? 이래 봬도 난 사우디 왕족이야.]
[아, 그럼 사우디 문화를 존중하겠습니다.]
[…자네 어머니께서 손수 만드셨다기에 성의를 무시할 수 없었다는 것만 알아 둬. 로마에 가면 로마 법을 따르는 게 예의니까.]
사우디 왕족으로서 외국 공식 석상에서 막걸리를 마시는 이유를 구차하게 변명하는 라흐만이다.
하지만 태수에게는 구차하게 굴지 않았다.
굳이 이유를 알려 주지 않는데, 구태여 캐묻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대신 라흐만은 태수가 건네주는 막걸리 사발을 들었다.
[난 그대의 뜻을 존중하겠다. 건배.]
라흐만이 막걸리 사발을 들자 박정환과 재벌 총수들도 잔을 들었다.
* * *
석유 공급에 대한 논의는 끝났다.
라흐만은 한청호 앞에서 엄포를 놓았던 것과는 다르게 부드럽게 응수하며 얘기는 술술 풀렸다.
석유 공급을 일부러 막겠다는 의지를 철회한 것이다.
박정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이만 일어나지.]
[이 나라의 최고 통수권자에게 작별 인사를 건넵니다. 부디 좋은 하루를 보내시기를.]
라흐만이 멋들어지게 인사한다.
박정환은 손을 들어 올리는 것으로 인사를 받았다.
박정환이 몸을 돌리자 경호실장 차기범과 비서실장 김정림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태수 역시 주인 된 도리로 박정환을 따라 배웅에 나섰다.
“식후엔 아무래도 입안이 답답해.”
계단 앞에서 박정환이 담배를 입에 물었다.
차기범이 라이터를 꺼내는데, 박정환이 손을 들어 막는다.
박정환은 태수에게 담배를 슬쩍 권했다.
“자넨 담배 안 하나?”
“안 합니다.”
“그래, 애초에 이런 건 발 안 담그는 게 좋지. 백해무익하다는 걸 알면서도…….”
차기범이 태수에게 라이터를 건넨다.
태수가 박정환의 담뱃불을 붙여 주었다.
박정환은 담배를 한 모금 빨고 계단 아래를 내려다본다.
“한번 이 맛을 보면 끊기가 힘들거든.”
후-
한숨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담배 연기는 눈에 보인다.
담배 연기가 마치 박정환의 한숨처럼 보였다.
“권력도 그래.”
박정환이 담배를 문 채 웃는다.
“그자의 제안을 왜 거부했지?”
아주 달콤하게 들리더군.
박정환은 태수를 지그시 바라본다.
“내가 찍어 누른다는 걸 모르진 않았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