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산 찍고 건설 재벌-103화 (103/230)

103. 태양 그룹 출범하다(6)

라흐만이 박정환을 향해 우아하게 사우디 왕족의 예의를 갖췄다.

[저로 말할 것 같으면 라흐만 빈 칼리드 빈 압둘 아지즈 알사우드. 사우디아라비아 초대 국왕 폐하이신 압둘 아지즈 알사우드의 다섯 번째 아들이자 사우디 국방부 장관을 임하고 있는 칼리드의 열두 번째 아들인 라흐만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조상을 기억하며 자신의 조상과 제 이름을 자랑스러워했다.

하지만 사우디 문화를 모르는 사람들은 당황스러웠다.

고작 자기 이름을 말하는 데 이리 오랫동안 줄줄이 읊어 댈 줄이야.

[이제 보니 현직 사우디 국왕의 조카이자 사우디 국방부 장관의 자제였군. 반갑네. 나는 대한민국 대통령인 박정환이라고 하네.]

박정환이 두 팔 벌려 국빈(國賓)을 환영했다.

[사우디 왕족이 여기엔 어쩐 일인가?]

박정환은 사우디 왕실에서 연락을 받지 못했다.

더구나 먼저 국빈으로 청한 것도 아니다.

[개인적인 용무로 귀국(貴國)을 방문한 참입니다. 태양 그룹이 출범한다기에 친구의 기쁜 날을 맞아 멀리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사우디 왕족이다.

그것도 초대 국왕의 손자이며 현 국왕의 조카이자, 이번 중동전쟁으로 확고하게 권력을 틀어잡았다는 사우디 국방부 장관의 아들이다.

[강태수, 이 친구가 참 대단한 친구를 두었군.]

[그렇지요. 아버지뿐만 아니라 사우디 국왕 폐하께서도 눈여겨보는 인재가 아닙니까?]

아직 사우디 국왕은 그림자조차 보지 못한 태수였다.

라흐만은 태수를 향해 윙크했다.

[오죽하면 국왕 폐하께서 이 친구의 공을 기려 다섯 장이나 되는 석유 공급 권리증을 발급해 주셨겠습니까? 서방 국가를 지지하는 어느 나라도 이런 권리증을 얻어 내지 못했는데요.]

석유 공급 권리증.

중동 전쟁 중에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서방 세력들에 중동 산유국들이 석유 공급을 거부했다.

사우디는 그중에서도 가장 앞에서 서방 세력 척결을 주장하고, 자원 민족주의를 제창했다.

‘그런데 사우디에서만이라도 석유 공급을 해 주는 권리증이 있었다고?’

‘아, 그러고 보니 다섯 개 대기업에서 석유 공급에 문제가 없다고 들었는데.’

‘이제 보니 그리된 일이었군.’

청일 호텔 착공식에 참석했던 정재계 유명 인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박정환은 태수를 힐긋 보며 라흐만에게 말했다.

[사우디 서쪽 도시에 작은 고속 도로 공사를 맡은 자에게 내어 주기엔 너무 과한 선물이었지. 대체 무슨 공을 세웠기에 그런 권리증을 주었을까? 도통 알 수가 없어.]

박정환의 목소리는 서늘했다.

박정환의 약점을 사우디 국방부 장관에게 넘기고, 그 대가로 받아 온 게 틀림없다.

한청호는 그렇게 주장했다.

반면 강태수는 개인적인 공을 세워 권리증을 받아 왔다고 말했다.

강태수의 말보다 한청호의 말이 박정환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강태수, 이 친구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라흐만은 놀라워하며 태수를 돌아본다.

[이 친구 덕분에 오래도록 이어질 중동 전쟁이 조기 종결되었잖습니까? 고작 3주 만에.]

[뭐라고?]

박정환이 재빨리 태수를 본다.

박정환의 눈이 흔치 않게 마구 떨리고 있었다.

언제나 무표정한 차기범조차도 눈을 크게 뜨고,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중동 전쟁 조기 종결이라니…….’

‘그 정도 공이라면…….’

‘석유 공급 권리증을 받아 올 만했군.’

사람들은 너도나도 입을 떡 벌리고 태수를 보았다.

태수는 피식 웃었다.

‘라흐만이 윙크를 한 이유가 이거였군.’

태수가 사우디 국방부 장관에게 귀띔해 준 일은 그리 거창하지 않았다.

-중동 전쟁이 곧 있을 예정이니 사우디도 몰래 군수물자를 확보하여 이에 대비하라.

‘난 중동 전쟁을 조기 종결할 계책을 알려 준 게 아니라 중동 전쟁을 칼리드가 어찌 이용해서 무엇을 얻을지를 가르쳐 줬을 뿐이다.’

그 공을 인정받아 받아 온 게 석유 권리증이었다.

하지만 라흐만은 대놓고 뻥을 쳤다.

-태수는 중동 전쟁을 조기 완결한 공이 있는 자로, 사우디는 이 공을 인정하여 석유 공급 권리증을 주었노라.

‘대체 이 일을 어찌 감당하려고?’

뻥의 규모가 너무 크다!

하지만 라흐만은 뻔뻔하게 말을 계속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사우디 국왕께서 친히 선언한 ‘서방 세력에 일조한 국가에 석유 공급을 금지한다.’는 명을 거두고 특례를 인정하셨겠습니까?]

모두 고개를 끄덕인다.

사우디 국왕의 말은 무겁기 때문이다.

박정환이 태수를 보는 눈길이 묘해졌다.

‘일이 그렇게 되었던 건가?’

강태수가 말했던 ‘사우디에서 세운 개인적인 공’이라는 말에도 부합한다.

박정환은 한청호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그리고 태수를 향해 온화하게 말했다.

“그런 일이 있었다면 제대로 말했어야지.”

“별로 대단한 일도 아닙니다. 중요한 건 결과지 과정이 아니잖습니까.”

태수가 가져온 건 석유 공급 권리증.

태수가 어찌 가져왔느냐보다 박정환에게 무엇을 바쳤느냐가 더 중요한 것이라는 소리다.

박정환이 라흐만에게 말했다.

[이 겸손한 친구는 내게 제대로 사정을 말하지 않았기에 몰랐다네.]

[아마도 그랬을 겁니다. 워낙 겸손해야 말이죠. 입이 더럽게 싸고, 틈만 나면 이간질을 일삼고, 여차하면 배신하는 누구랑은 다르게 말입니다.]

라흐만의 매서운 눈길이 한청호에게 똑바로 꽂혔다.

[그거 아십니까? 저 한청호라는 작자 때문에 사우디 왕국과 남한의 단독 수교가 깨어질 뻔했다는 것을?]

라흐만의 뻥이 또 시작됐다.

‘삼원 건설을 나 몰라라 하고, 라흐만의 뒤통수를 쳤지. 사우디 왕실과 단독 수교가 깨어질 일은 아니었는데.’

하지만 라흐만은 작정하고 말했다.

[여러분들은 모르실 겁니다. 저자 때문에 사우디 왕실이 얼마나 곤란을 겪었는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대통령께서는 알고 계실 테죠.]

알지. 그걸 왜 모르나.

사우디 왕실에서 비공식적 서한으로 박정환을 쪼아 댔는데.

오죽하면 박정환이 포항 철강까지 금산과 청일 회장을 데리고 갔을까.

그때 이 일을 해결하겠다고 나선 것이 태수였다.

‘그런 일도 있었지. 까맣게 잊고 있었군.’

의심이 눈을 가리니 지나간 공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던 박정환이다.

박정환은 물끄러미 태수를 보았다.

담담한 표정으로 가타부타 말없이 묵묵하게 서 있다.

‘억울했을 텐데도 입 한 번을 뻥끗하지 않았군.’

태수가 아무리 면담 요청을 넣어도 박정환 쪽에서 거절했다.

그건 까맣게 잊고 있는 박정환이다.

라흐만이 말했다.

[이렇게 뜻하지 않게 귀국의 대통령을 만나게 되어 무한한 영광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곳에 잠시도 있기 싫으니 이만 작별 인사를 청해야겠습니다.]

[여기까지 온 것은 따로 볼일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

[아닙니다. 그저 제 눈으로 똑똑히 확인하러 온 것뿐입니다.]

라흐만이 한청호와 주변 사람들을 돌아본다.

[석유 파동으로 인해 다들 어려운 이때 개인적인 공을 나라를 위해 헌납한 인재의 뜻을 이 나라는 어떻게 보답하는지, 전 그것을 확인하러 온 것뿐입니다. 그리고 똑똑히 확인했습니다.]

라흐만은 재벌 총수들을 보았다.

[이 중에는 분명 이 친구가 준 석유 공급 권리증으로 사우디에서 석유를 사서 나른 기업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누구도 태양 그룹 출범식에 오지 않았더군요.]

라흐만의 눈길에 몇몇 기업 총수와 관계자가 입술을 깨물었다.

옆에 섰던 금산의 장준용이 재빨리 손을 들었다.

[아닙니다. 제가 갔었지 않습니까?]

[아, 금산은 오셨지. 하지만 나머지 세 개 기업은 확실히 오지 않았습니다. 내가 돌아가면 국왕 폐하께 오늘 본 것을 똑똑히 전할 겁니다.]

재벌 기업 총수들의 안색이 변했다.

[벌써 기한이 다 된 석유 공급 권리증? 그걸 회수하기야 하겠습니까? 과거보다도 미래가 훨씬 긴데.]

앞으로 사우디에서 호락호락하게 석유를 공급하지 않겠다는 뼈아픈 일침이었다.

삼청, 럭키세븐, 대한 정유 공사의 사장이 재빨리 입을 열려 할 때였다.

라흐만이 손을 들어 그들의 입을 막았다.

[전 말은 믿지 않습니다. 제가 믿는 건 행동, 그리고 결과지. 행동으로 보이려면 돈으로 증명해야 할 겁니다.]

태수가 가르쳐 준 가르침을 뼈에 새긴 라흐만이었다.

라흐만이 박정환에게 정중하게 다시 인사했다.

길고 긴 이름을 말하면서 끝을 맺는다.

[…의 아들 라흐만 귀국의 최고 통치권자를 뵙게 되어 무한한 영광이었습니다.]

속이 바짝바짝 타는 삼청, 럭키세븐, 대한 증유 공사 사장의 눈이 따갑다.

‘저자가 이대로 돌아간다면 사우디와 중동 산유국에서 또 석유 공급을 끊어 놓겠군.’

아직도 석유 파동으로 나라가 출렁이고 있다.

강태수 덕에 반년이나마 석유를 들여와서 이 지경이지 석유 공급이 끊긴다면 경제는 심각한 타격을 받을 것이다.

박정환은 어쩔 수 없이 라흐만에게 물었다.

[이렇게 만난 김에 조금 더 함께 있는 것이 어떤가. 내 청와대로 초청하지. 가서 함께 오찬을 드십시다.]

[죄송합니다만 청와대에서의 점심은 함께하지 못할 듯합니다.]

라흐만은 단호히 딱 잘라 거절했다.

태수를 보면서 씩 웃는 라흐만.

[제가 왜 이 먼 타국까지 왔겠습니까? 친구의 행사를 축하하기 위함입니다. 점심은 친구의 행사장에 가서 함께할 생각인지라 그 청을 감히 수락할 수 없군요.]

태수의 행사장에서 밥 먹어야 하니까 청와대엔 못 가겠단 소리다.

[그럼 간단해. 함께 태양 그룹에서 점심을 먹지. 거기서 석유 얘기를 나누면 되겠어.]

[아, 좋은 생각입니다. 그러면 되겠네요.]

[안 그래도 이 나라를 떠받칠 새로운 재벌 그룹의 출범이야. 내가 축사를 직접 못하고 축전만 보낸 것이 마음에 걸렸거든.]

박정환의 말에 한청호가 기겁했다.

“각하!”

박정환은 한청호 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는다.

박정환은 태수를 보며 웃었다.

“어떤가? 조금 늦었지만 내가 가서 태양 그룹 출범의 축사를 할까 하는데.”

“감사합니다. 대신 점심은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태수는 씩 웃었다.

“저희 어머니 손맛이 아주 기가 막힙니다. 청와대 수석 요리사의 요리와는 또 다른 맛을 보실 수 있을 겁니다.”

“기대하지.”

박정환이 태수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쪽으로 가자.”

대통령 경호실장 차기범과 대통령 비서실장 김정림도 당연히 뒤따랐다.

당장 석유 공급이 끊길 위험에 처한 다른 재벌 기업 총수들도 마찬가지였다.

태수에게 급히 다가와 입을 연다.

“나도 함께 가도 되겠나? 태양 그룹 출범식에 초대장을 받아 놓고 참석 못한 것이 내내 마음에 걸렸던 차야.”

“나도 같이 가서 축하해 줘야지. 나도 염치란 게 있는데. 이번 일은 너무 마음에 두지 말게.”

“우리 점심을 함께하면서 석유에 대해 얘기를 나눠 보세나. 국가 경제가 달린 일이 아닌가.”

태수는 씩 웃었다.

“좋습니다. 다만 라흐만 님께서 싫다고 하시면 저로서도…….”

통역을 들은 라흐만은 태수의 말을 자르면서까지 말했다.

[친구가 좋다면 저도 좋습니다. 우리 사우디 왕실은 호의를 내미는 손길까지 일부러 뿌리치진 않는 곳이니까요.]

라흐만은 태수에게 윙크했다.

라흐만 때문에 태수가 재벌 기업 총수들에게 미움을 받는 건 그 역시 원치 않았다.

그러자 삼청, 럭키세븐, 대한 증유 공사의 사장들도 황급히 따라붙었다.

“우, 우리도 갈까?”

“첫 삽도 떴으면 행사 끝난 거지.”

“사우디가 요즘 석유로 떼돈을 벌었다던데, 우리 은행에 투자 유치를 해 주면 더없이 좋을 텐데.”

갑자기 유명 인사들이 슬금슬금 눈치를 보더니 우르르 행사장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서둘러 주차장에 위치한 차를 타고 태양 그룹 출범식으로 향하는 사람들.

사람들로 바글대던 청일 호텔 착공식은 순식간에 썰렁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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