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태양 그룹 출범하다(3)
“그게 뭐지?”
다들 태수를 주목했다.
“사우디에서 벌어들인 돈과 여유 자금, 한수의 투자 회사에 집어넣으시죠.”
한수가 미국에 세운 투자 회사는 자금 세탁용으로 이미 사용된 바 있다.
사우디에서 무기 밀매와 군수 물자 납품으로 벌어들인 돈이 투자 회사로 흘러들어 갔다.
그 돈은 다시 장수 은행에 투자금으로 들어왔다.
“투자 회사에 돈을 집어넣는다면 모두 세 가지 이점을 가집니다.”
“그게 뭐냐?”
“첫째, 자금 세탁 문제를 깨끗하게 해결할 수 있습니다.”
태수는 설명했다.
“투자금을 계속 먹기만 하고 토해 내지 않는 장수 은행. 위에서 세무 조사 한 번만 해도 들통 날 일입니다. 그걸 박정환이 가만히 두고 볼까요?”
그럴 리 없다.
“박정환이라면 일단 세무 조사부터 시작하겠죠.”
털어서 먼지 안 나오는 사업은 없다.
걸리면 거금을 삥 뜯기듯 갈취당할 것이다.
“하지만 미국 투자 회사가 투자했던 투자금을 회수했다. 누가 봐도 타당합니다. 전혀 이상할 것 없는 비자금이 만들어져 어르신의 운신이 자유로워집니다.”
아주 마음에 든다.
안정우는 흡족하게 웃었다.
“둘째, 박정환의 압박이 줄어들 겁니다.”
현재 장수 은행은 시중 은행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
지하 금융으로 벌어들인 사채의 반 이상을 장말동이 회수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보유한 자금력으로는 장수 은행을 따를 은행이 많지 않았다.
시작부터 위협적인 은행이었던 것이다.
“장수 은행이 규모가 커서 박정환이 예의 주시하며 호시탐탐 노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투자금을 뺀다면 은행 덩치가 많이 줄어들겠죠.”
“그럼 우리 은행의 예치금도 줄어들지 않겠느냐? 자칫 신용 문제로 여겨질 수 있어.”
고객들은 투자 회사가 투자금을 뺐다면 은행에 문제가 있다고 볼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태수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오일 쇼크 여파가 일파만파 퍼진 상태입니다. 미국 역시 석유 파동으로 난리가 났죠. 급한 김에 투자금 회수하는 곳이 어디 한두 군데입니까?”
그도 그렇다.
지금 다른 기업들도 넘어가네, 마네 하는 처지다.
“장수 은행 덩치가 줄어들면 박정환의 감시도 느슨해지고, 압력도 줄어들게 됩니다.”
박정환은 은행을 제 손바닥 위에 올려 쥐락펴락하고 있다.
말 듣지 않으면 강제로 공중분해 시킨다는 협박을 대놓고 꺼낼 정도다.
“박정환이 필요할 때마다 찾는 돈주머니 역할을 하기 싫다면 지금은 적당히 몸집을 줄이는 게 좋습니다.”
“네 말이 맞다.”
안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점점 박정환의 압박이 거세지고 있었다.
음지에서 잘 숨어 있다가 양지로 나오니까 이런 어려움을 피할 수 없다.
“미국 투자 회사까진 박정환도 손대지 못할 것이다.”
“그렇습니다. 어르신은 투자 회사를 통해 원하는 기업을 사냥할 수도, 주식을 얻을 수도, 또 자금 세탁을 할 수도 있습니다.”
“아주 좋은 방법이다.”
태수는 마지막 이점에 대해 말했다.
“셋째, 박정환의 명을 거역하지 않고 우리 태양에 투자할 수 있습니다.”
장말동은 낄낄대며 웃었다.
“결국 이게 네놈의 목적이었구나. 요 맹랑한 놈.”
안정우 역시 빙그레 웃는다.
“박정환의 분노도 각오하고서라도 돈을 내어 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피할 수 있다면 굳이 그놈과 척 지지 않는 것도 좋지.”
기분 좋은 웃음인지라, 태수 역시 기분 좋게 웃었다.
“박정환은 우리 태양의 돈줄을 끊는 것이 목적입니다.”
한청호가 부린 수작이 바로 이것이다.
그러니 지금으로서는 태수가 은행을 통해 대출도, 투자도 받지 못한다.
‘은행을 통해 자금을 조달하려면 내가 직접 박정환을 만나 담판 지어야 한다. 하지만 그게 쉽지 않아.’
고작 태수 정도 위치의 사업가를 대통령이 쉽게 만나 줄 리는 없다.
오히려 이제까지 태수가 운 좋게 박정환을 상대할 기회가 있었다고 봐야 옳다.
‘한청호와 달리 나와 박정환은 끈끈한 사이가 아니니 이리 쉽게 등 돌리는구나.’
애초에 박정환과 끈끈한 관계가 될 생각 따윈 없었다.
태수는 박정환을 이용하고, 박정환은 태수를 이용한다.
그런 얄팍한 관계에 불과하니 지금 상황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아무리 박정환이라도 미국 투자 회사가 태양에 투자하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을 겁니다.”
“그러고 보니 자네도 투자를 빙자해 이번에 기업 인수 자금을 끌어 다 썼지? 그건 아마 석유 판 돈으로 만든 비자금이겠어.”
“맞습니다. 미국 투자자에게서 투자금을 받은 형식으로 이번에 기업들을 몇 개 인수했죠.”
그렇게 일곱 개 기업을 인수했다.
그 정도 꼼수는 가능하다.
박정환의 비밀 금고를 동원하면 발칵 뒤집힐 정도지만.
“단골 투자자가 추가 투자를 한 셈이니까, 자금 세탁이 쉬워서요.”
“자금 세탁을 제대로 하려면 자네가 투자 회사 쪽으로 건네는 게 있을 텐데?”
“있습니다.”
아무리 태수가 한수를 시켜 세운 미국 투자 회사라지만 겉으로는 태수와 상관이 없다.
그러니 태수는 투자 회사에 투자금을 받은 대가를 건네고 있었다.
“그게 뭔가?”
“주식.”
태수가 미국 투자 회사에 집어넣고 있는 건 주식이었다.
이로써 자금과 대가가 들어맞는다.
하지만 기업이 주식 때문에 흔들릴 이유마저 없어진다.
“영악한 짓을 했군.”
“여차할 때 대리인으로 주식을 행사할 수도 있고, 자금 세탁도 깨끗하게 되고, 태양 그룹 재무 상태를 바꿔 비자금 조성하기도 쉬워졌죠.”
주식에 맞게 배당금도 미국 투자 회사에 지불한다.
“기업 덩치가 커져서 어쩔 수 없이 꼼수 좀 부렸습니다.”
“잘했다.”
안정우는 웃었다.
“장수 은행도 미국 투자 회사에 투자금을 뱉어 내지. 그 돈이면 자네 숨통도 트일 거야. 회사 몇 개 더 인수할 수도 있겠군.”
어마어마한 돈을 투자하겠다는 뜻이다.
누구도 태수에게 돈을 빌려주지 않겠다고 나설 때가 아닌가.
동맹이란 이름으로 내놓기에도 버거운 금액이다.
그래서 태수는 진심으로 그에게 감사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태수는 정중히 인사했다.
“하지만 그 돈은 회사 인수가 아니라, 아마 다른 곳에 쓸 것 같습니다.”
“어디에?”
“인수한 기업을 통해 들어온 부채 상환금으로요.”
“이런, 다른 은행 배를 불려 주게 생겼구나.”
“줄도산은 면해야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안정우가 웃는다.
“줄도산을 면하게 해 준 대가를 나 역시 주식으로 받고 싶은데.”
이 정도는 당연히 각오했던 일이다.
“어떤 회사의 주식을 원하십니까? 해외 은행 주식으로 챙겨 드릴까요?”
“아니, 이번에 자네가 인수한 보험과 증권을 원해.”
역시 금융 쪽으로 관심이 돌아간다.
은행, 사채를 하는 사람이니 어찌 보면 당연하기도 하다.
“자네는 믿을 수 있지만 해외 은행을 인수했다는 사람은 못 믿어.”
간단한 이유였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였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얼마나 주겠나?”
“얼마나 투자하시겠습니까?”
“10억.”
2020년으로 치면 300억에 가까운 돈을 투자하겠다는 거다.
‘이 돈이라면 부채를 단번에 일시 상환하는 것은 물론이고, 남는 돈으로 알짜 기업도 하나쯤 더 인수할 수 있는 금액이구나.’
태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보험과 증권 각각 20%씩 드리겠습니다.”
“30%. 그 이하는 거절하겠어.”
현재 은행 빚을 전혀 지지 않은 상황이다.
안정우에게 30%씩 내어 줘도 태수의 주식은 대략 60%에 달한다.
경영권에는 큰 위협이 되지 않는다.
“그럼 그렇게 하죠. 소유주는 누구로 할까요? 차명으로 돌릴까요?”
“미국 투자 회사를 통해 주식을 인수하는 거로 하지. 소유주는 안소정.”
여자 이름이 나왔다.
안정우는 씩 웃었다.
“내 딸일세.”
소정이란 이름.
익숙한 이름이다.
* * *
1974년 8월 13일 오전 9시 45분.
태양 그룹 출범 기념식이 있는 날이다.
태양 그룹 식구들이 이제는 태양 중장비가 된 건물 앞 공터에 모두 모였다.
태수와 한수는 양복을 빼입었고, 부모님은 한복을 곱게 입었다.
아버지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왜 기념식 행사 시간이 다 됐는데 손님들이 오질 않는 것이냐?”
“외부 손님들이야 안 와도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우리 태양 식구에게나 의미 있는 행사니까요.”
태수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실제로도 아무렇지도 않았고.
부르릉. 끼익.
차에서 내린 반가운 얼굴들이 보인다.
금산의 장준용 회장과 김 비서였다.
“어서 오십시오. 이렇게 와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장준용이 재빨리 말했다.
“아니, 사업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재벌을 넘보나? 나 때는 죽을 둥 살 둥 해 가며 여기까지 기어오르는 데 얼마나 걸렸는지 아나? 자네는…….”
김 비서가 재빨리 회장의 팔을 붙들고 말린다.
“회장님, 지금 축하하러 오셨어요, 질투하러 오셨어요? 작작 좀 하세요.”
“흠흠, 대견해서 그러지. 대단한 일이 아닌가. 고작 2년 만에 재벌이라니.”
“그냥 ‘나보다 유능하구나.’ 이 한마디만 하시면 되는 걸 길게도 말씀하십니다.”
“아니, 김 비서, 그건 아니지!”
“사실이 그렇잖아요. 솔직히 말해서 회장님이 재벌 되기까지 20년도 넘게 걸린 건 다들 아는데.”
장준용과 김 비서가 투닥대며 걸어온다.
김 비서가 커다란 꽃다발을 태수 어머니께 전한다.
“대단한 아드님을 두셨습니다. 태양 그룹이 번영하길 금산이 축원합니다.”
“그, 금산이요?”
“금산의 회장님이십니다. 저는 그분 비서고요.”
“아이고, 세상에나!”
태수 어머니가 깜짝 놀라서 어쩔 줄 모른다.
말로만 듣던 재벌 총수가 태수를 축하해 주기 위해 직접 오다니.
그것도 꽃다발을 들고.
믿기지 않아서 어쩔 줄 모르는 어머니였다.
대신 태수 아버지가 재빨리 앞에 와서 인사했습니다.
“금산의 회장님이 여기까지 와 주셔서 자리를 빛내 주시는군요. 이거 정말 감사합니다. 가문의 영광이 따로 없습니다. 허허허.”
“조만간 아드님과 함께 큰일 좀 해 볼 예정입니다. 사우디에서 말이죠.”
“아이고, 그렇습니까? 그럼 우리 아들을 잘 부탁드립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어련히 잘하고 있는 강 사장, 아니 강 회장이 아닙니까?”
태양 그룹이 출범하면서 태수의 직함이 사장에서 회장으로 올랐다.
다른 차도 한 대 더 주차장에 진입했다.
이번엔 안정우와 장말동이다.
“태양 그룹 출범을 축하하네.”
“앞으로 더욱 번영하길 기원하겠어.”
장말동이 태수에게 난 화분을 건넸다.
“이렇게 와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전 장수 은행 설립할 때 가 보지도 못했는데요.”
“됐다. 내가 초대장을 보낸 것도 아닌데 네놈이 무슨 수로 강원도에서 명동까지 찾아왔을꼬?”
“다음에 한국 은행 협회장이 되실 때는 제가 제일 먼저 축하 인사드리러 가겠습니다.”
“일없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입꼬리가 올라간 장말동이었다.
“여행용 트렁크에 가져왔다. 약속한 대로 10억이야.”
“감사합니다.”
한수가 장말동과 안정우에게 다가와 인사했다.
시계를 보자 벌써 9시 50분이다.
“형, 출범식 행사 시간이 다 됐어.”
“그래, 시작하자.”
“형, 그런데 다들 왜 안 오지? 초대장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거 아닐까?”
금산의 장준용이 말했다.
“초대장에는 문제가 없네. 한청호가 수작을 부렸을 뿐이지.”
역시 한청호라면 이렇게 나올 줄 알았다.
태수는 피식 웃었다.
‘그럴 줄 알고 나도 따로 멀리서 부른 사람이 있지.’
미리 원군을 요청한 태수였다.
한청호라면 이를 가는 그가 이번에 제대로 깽판을 쳐주기로 약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