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박정환의 비밀 금고를 털다(4)
“몰라요.”
오영순이 고개를 젓는다.
“당신도 봐서 알잖아요. 여기 암호는 복잡해서 아무나 못 열어요.”
“그래. 암호가 복잡하긴 하더군. 신분 확인을 안 하는 대신 입장할 때 16자리 암호를, 개인 비밀 금고 넘버도 16자리, 금고 개문 넘버도 16자리니까.”
“그래요. 영문과 숫자가 의미 없이 조합된 암호문. 그게 없으면 아무것도 못해요.”
한청호는 야비하게 웃었다.
“그러니까 그 암호문, 내놓으라고 하는 거잖아.”
“당신은 그 복잡한 암호문을 외울 수 있어요?”
못 외운다.
“나도 못 외워요. 그 사람이 내어 주는 종이쪽지 없인 아무도 여기 못 들어와요.”
“각하의 암호문은 그렇다 치고, 당신 아버지가 남긴 암호문은 어디 숨겼어?”
“나한테 없어요.”
“당신 아버지가 줬다면서?”
“정말이에요. 나한테 없어요. 내게 남겨 주신 건 맞지만 암호문은······!”
오영순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한청호가 웃고 있었다.
“이걸 어쩌나. 제 입으로 혼자 빠져나갈 방법이 없다고 이실직고했군그래.”
오영순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 악마 같은 인간은 허점이 드러날 때마다 쉽게 알아낸다.
순진한 그녀로서는 상대할 방법이 없었다.
그러니 이렇게 질질 끌려다니는 것이고.
드르륵. 드르륵.
마침 카트 끄는 소리와 함께 금고지기가 나타났다.
[이용 시간은 5분입니다.]
한청호와 오영순은 벌떡 일어나 서둘러 카트 앞으로 다가왔다.
트레이 안에는 커다란 글씨로 적힌 종이 한 장이 올려 있었다.
“이게 뭐야?”
<금고 안에 든 물건이 사라졌다. 그럼 책임자인 한청호는 어떻게 될까?>
화가 난 한청호가 종이를 구겨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누가 이런 수작을 부렸어! 여기 안에 들었던 건 전부 어디로 사라지고!”
“금고 주인이 가져갔겠죠. 내 남편이요.”
“각하께서 가져갔다면 이런 글을 써 놨겠나? 이 멍청한 여자야!”
“여기 암호문을 누가 아는데요?”
박정환이 암호문을 내준 사람은 모두 죽었다.
송 비서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암호문을 가지고 송 비서와 함께 이곳을 찾아왔던 사람도 죽었다.
“암호문이 적힌 쪽지가 없으면 누구도 여길 드나들지 못해요. 그리고 암호문을 아는 사람은 오로지 한 사람뿐이에요.”
무려 의미 없는 영문과 숫자 조합으로 16자리씩.
도합 세 번이나 순서에 맞게 말해야 금고를 열 수 있다.
그러니 이걸 외우는 사람도, 외울 수 있는 사람도 없다.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결론을 내렸을 뿐이에요.”
“상식은 무슨 상식? 나 한청호한테 세상의 상식 따위는 통하지 않아.”
한청호는 이를 갈았다.
“누가 날 엿 먹이려고 이러느냐. 왜 이런 수작을 부리느냐. 이걸로 무엇을 얻느냐!”
한청호가 오영순을 노려봤다.
“이 세 가지 기준을 만족하지 못하면 사람은 위험을 무릅쓰지 않아. 박정환이 나한테 이런 수작을 부려서 얻는 게 뭐가 있어?”
“남편이 어떤지는 몰라도 하나는 알겠네요.”
“그게 뭐지?”
“지금 당신이 무척 곤란해졌다는 거요.”
갑자기 오영순이 웃기 시작한다.
“어때요? 지금 이 사실을 사진과 필름과 바꿔요.”
“무슨 사실?”
“여기 적혀 있잖아요. <금고 안에 든 물건이 사라졌다.>는 사실이요.”
종이를 보고서야 오영순은 어떻게 해야 할지 깨달았다.
“남편이 이 사실을 알면 어떻게 나올까요? 나도 그게 궁금하거든요.”
오영순은 금고에 서류가 없어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한청호는 머리를 굴릴 필요도 없이 곧 펼쳐질 미래가 떠올랐다.
‘화가 난 박정환이 날 가만두지 않을 거야! 수습을 망친 것으로도 모자라 다른 놈이 박정환의 약점을 손에 쥐게 되었으니까!’
한청호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어떻게든 입을 틀어막아야 해. 오영순이 박정환 앞에서 <금고에는 아무 문제 없었다.>는 한마디만 해 주면 끝나는 일이야!’
그녀의 입을 막는 것만이 살길이다.
“잠깐만! 우리 제대로 대화하지!”
“대화는 없어요. 사진과 필름을 내놔요. 그게 아니라면 나도 가만히 있지 않아요.”
사진과 필름은 이미 강태수 앞에서 태웠다. 없다.
오영순이 내놓으라고 요구해도 내놓을 수 없는 것이다.
“사진과 필름을 가져오지 않으면 난 남편에게 전부 사실대로 말할 거예요. 금고 안에 든 물건이 모조리 사라졌다고. 당신이 책임자인데 어떡하실 거냐고.”
“오영순!”
“먼저 갈게요. 호호호.”
오영순이 한청호의 그물에서 빠져나갈 기회가 생긴 것이다.
‘누가 이런 고마운 도움을 준 거지?’
반드시 그에게 보답해야 한다.
계단을 올라가는 오영순의 발걸음은 날아갈 듯 가벼웠다.
“젠장!”
한청호의 목이 갑갑해져 왔다.
한청호는 거칠게 넥타이를 잡아 풀었다.
그때 금고지기가 조용히 말했다.
[이용 시간 끝났습니다.]
여기에 이어지는 말.
[이용 규정에 어긋난 행동을 반복하여 앞으로 이곳 이용 자격을 영구 박탈하겠습니다. 사용하던 금고는 깔끔하게 비워 주시길 바랍니다.]
한청호의 다급한 일본어가 들려온다.
[잠깐만! 이용 자격 영구 박탈이라니? 사용하던 금고를 비우라니?]
박정환이 알면 경을 칠 일이다.
[안녕히 가십시오.]
[잠깐! 아직 내 말은 다 안 끝났어!]
[출구로 이동할 시간은 5분 드리겠습니다. 5분 후에도 이곳에 남아 있으면 무장 보안대가 출동해 진압할 예정이니 그리 알아주시길.]
[젠장!]
한청호는 이를 갈았다.
‘누가 이런 개수작을 부린 거지? 박정환이라면 날 불러 한마디만 하면 끝나는 일을.’
박정환은 아니다.
그랬다면 한청호더러 직접 처리하라고 딸을 붙여 준다는 소리는 꺼내지 않았을 테니까.
‘하나씩 생각해 보자. 내가 상식이라고 믿는 기준으로!’
-누가 날 엿 먹이려고 이러느냐.
‘내게 악감정이 있는 놈, 오영순과 내 관계를 알고 있는 놈, 내가 이곳에 반드시 올 것이라고 확신하는 놈.’
강태수!
그놈이다!
‘사우디에서부터 이 금고의 존재를 이용해 박정환을 들쑤셔 놓았다. 놈은 어떻게 암호문까지 알고 있었지?’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왜 이런 수작을 부리느냐.
‘나를 곤란에 처하게 만들려는 수작.’
그건 아주 훌륭히 성공했다.
다른 것도 아니고 박정환의 약점이자 비밀인 금고의 책임 문제로.
강태수가 작심하고 그런 종이를 써 둔 게 틀림없다.
‘그놈은 이 모든 걸 어떻게 알고 계획했을까? 대체 무슨 수로?’
한청호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금고지기가 바닥에 집어 던진 종이를 가리켰다.
[전부 가져가십시오. 안 그러면 이쪽에서 폐기 처분할 겁니다.]
[쓰레기통에 버려!]
쿵쿵쿵쿵.
한청호가 화가 나서 계단을 올라간다.
‘두고 보자 강태수! 이 빚은 반드시 되갚아 주겠다!’
한청호는 마지막 물음의 답을 확실히 알 것 같았다.
-이걸로 무엇을 얻느냐.
‘차도살인(借刀殺人). 오영순을 이용해 박정환이 날 죽이도록 만들었다. 종이 한 장으로 아주 간단하게!’
무서운 수작이다.
한청호는 치를 떨었다.
“내가 그리 호락호락하게 당할 것 같아? 나 한청호야! 절대 이대로 무너지지 않아!”
어떻게든 방법이야 다시 생각하면 그만이다.
“일본 귀국 일정을 늦춘다. 그동안 오영순의 새로운 약점을 잡아야 해! 그렇게 그년의 입을 틀어막는 거야!”
마음이 급하다.
한청호는 서둘러 계단을 뛰어올랐다.
* * *
태수는 한국으로 돌아오자 곧장 명동으로 향했다.
장말동은 태수를 반겼다.
“일본에서의 일은 잘 끝났느냐? 무장한 놈들을 붙여 준다는데 왜 그걸 마다해? 중간에 물건을 탈취할 생각이었잖느냐?”
“더 좋은 방법을 찾았으니까요.”
사우디에서 가져온 암호문 덕분이었다.
‘박정환의 금고에서 얻은 게 정말 짭짤한데?’
달러 뭉치와 무기명 채권, 양도성 예금 증서, 순금으로 만든 금붙이 등등.
자금 추적이 쉽지 않은 것들이 박정환의 비밀 금고에서 잔뜩 나왔다.
해외에 빼돌리는 것인 만큼 환금이 쉽고 뒤탈이 없는 것들로 주로 채워 넣은 것이다.
하지만 조금 번거롭게 세탁해야 하는 것들도 당연히 들어 있었다.
“이걸 좀 보십시오.”
태수는 서류 가방을 열었다.
미리 추려 놓은 서류를 내밀었다.
“일본에서 가져온 겁니다.”
“이게 무엇이냐?”
“친일파 명단과 몰수한 재산 목록입니다.”
“뭐라?”
장말동이 펄쩍 뛰었다.
서류를 받아넘기는 손길이 다급했다.
“맞구나. 이놈들 친일에 앞장서서 제 배를 불리던 놈들이야.”
“명단에 줄 쳐 진 것들도 보이시죠?”
“죽은 놈들이구나.”
장말동은 눈가를 파르르 떨었다.
“박정환이 한청호와 이쪽으로 손을 잡았었나 봅니다.”
“한청호가 골수 친일파였지. 옛날엔 독립 운동가들을 밀고하더니 이번엔 옛 친일 동료들을 밀고했구나.”
장말동은 똑똑히 기억했다.
그들은 구한말부터 독립 운동 세력을 도운 사람들이 아닌가.
그들에게 정보를 주기 위해 정보 상인이 되었고, 무기를 공급하기 위해 무기 상인이 되었다.
“한청호, 그 자식은 옛날엔 일본 순사랑 같이 돌면서 독립 운동가 집안 기둥뿌리까지 털어먹었지. 이번엔 박정환이랑 친일파 놈들을 털어먹고 있었다니.”
태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서류를 대조해 봤더니 친일파들에게서 차명 주식, 차명 부동산, 차명 계좌 같은 것들을 받아 챙기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 그런 모양이구나.”
“일본으로 넘어간 놈들의 재산도 꽤 빼앗아 챙겨 놓은 것 같고요.”
“광복이 되면서 후환이 무서운 놈들이 일본으로 꽤 넘어갔지. 한 재산 단단히 챙겨서.”
빼돌린 재산이 많고 많았다.
목록까지 작성해서 관리할 정도로.
“어차피 박정환은 이 많은 걸 다 기억하지 못할 겁니다.”
“그렇겠지. 박정환이처럼 오랫동안 뒷돈을 많이 받으면 제 금고에 얼마나 쌓였는지 확인하기도 힘든 법이야. 에잉!”
그렇지 않고서야 굳이 명단과 재산 목록까지 만들어 둘 필요가 있겠나.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물며 차명 주식과 차명 부동산인데요. 당장 이 골드바만 팔아도 제법 두둑하게 한밑천 나올 겁니다.”
“여차할 때 쓰려고 빼돌려 놨을 게야. 해외 은닉 재산을 마련해 두는 건 있는 놈들이면 전부 하는 짓이니까. 에잉!”
장말동은 조심스레 물었다.
“금고가 털렸다는 말이 새어 나올까? 네놈은 어찌 생각하느냐?”
“아마도 높은 확률로 안 나올 겁니다. 한청호가 그 정도 수완은 있는 놈이 아닙니까?”
“이런 대담한 짓을 어찌할 생각을 했누? 네놈 배짱도 참.”
이게 다 장말동 덕분이었다.
-한청호가 일방적으로 오영순을 뜯어먹고 있다.
그런 경우 둘 중 하나다.
‘한청호가 정말로 기둥서방 노릇을 하거나, 오영순이 협박당하고 있거나.’
빠져나갈 길은 미리 만들어 두었다.
‘바람난 것이라면 입도 뻥긋 못할 것이고, 만일 오영순이 협박당하고 있다면 내 덕분에 한숨 돌린 오영순이 적극적으로 내 편을 들어줄 거야.’
장말동은 크게 웃었다.
“이것으로 한청호가 무척 곤란해졌겠구나.”
아마도 그럴 것이다.
“목적을 완수했으니 이것들은 도로 금고에 넣어 둘 게냐?”
“비밀 금고를 옮기려고 한청호와 영부인이 나선 겁니다. 다시 가져간다 한들 바뀐 비밀 금고가 어디 있는지 모릅니다.”
“그럼 어찌할 생각이냐?”
태수는 씩 웃었다.
“당연히 제가 먹을 겁니다.”
박정환이 비밀 금고에 숨겨 놓은 재물들은 먹는다.
그리고 이번에 박정환이 꽁꽁 숨겨 뒀던 약점도 얻었다.
송 비서가 날랐던 그 서류들이다.
<제7광구에 관한 한일 양국 협정 계획서:1970>
이 계획서엔 후세에 알려지지 않은 한일 양국의 밀약이 담겨 있었다.
칼리드가 공책 한 장을 보냈을 때 박정환이 펄쩍 뛴 이유였다.
박정환의 약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