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산 찍고 건설 재벌-96화 (96/230)

96. 박정환의 비밀 금고를 털다(3)

송소리는 말했다.

“오늘 전 금산 호텔 정문 근처에 숨어 있었어요. 한청호가 화가 나서 금산 호텔을 나서는 모습을 봤어요. 속이 다 시원했어요. 한청호의 그런 얼굴, 처음 봤어요.”

한청호는 패배자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기뻤어요. 아빠도 이 모습을 봤으면 참 좋았을 텐데 그런 생각을 했어요. 한청호를 그런 얼굴로 만들어 준 당신이 고마웠어요.”

“별말씀을.”

“그걸 보고서야 알았어요. 당신이 정말로 한청호와 맞서고 있다는 걸. 단순히 아빠의 치부책이 탐나서 우리에게 접근한 게 아니라는 걸.”

송소리는 허리를 들지 않았다.

“제가 할 수 있는 건 감사 인사를 드리는 것뿐이군요. 한청호를 위협하는 데 도움이 되고 싶었어요.”

“감사합니다. 이건 큰 도움이 될 것 같군요.”

송소리는 이를 갈며 말했다.

“한청호가 폭삭 망해 버렸으면 좋겠어요.”

태수도 같은 생각이다.

그러니 혼자라도 이 험로를 걷겠다고 각오했다.

“한청호가 망해야 우리 가족도 한국에 들어와서 마음 편히 살 수 있어요.”

송 비서는 한청호의 비밀을 너무 많이 알고 있다.

“당신이 준 돈다발 덕분에 돈 없어서 쩔쩔매진 않게 됐죠. 하지만 우린 외국을 전전하며 살아야 해요. 평생 그렇게 살고 싶진 않아요.”

송 비서가 살아 있다는 걸 안다면 한청호가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엄마가 향수병에 걸렸어요. 아버지도 내심 한국에 돌아가고 싶어 하세요.”

그녀가 복수를 각오한 이유도 가족이었다.

“한청호는 내가 무너뜨립니다. 한청호가 망하는 꼴이 보고 싶다면 그때 와서 지켜봐도 됩니다. 한국은 아직 위험합니다.”

태수가 바라는 건 송 비서 가족의 행복이다.

송 비서가 전전긍긍 목숨 걱정하지 않고 가족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으면 좋겠다.

그 옛날 태수가 마음에 두었던 그녀가 이번엔 요절하지 않길 바란다.

“아빠한테 은혜를 베풀었다면서요? 28년이나 아빠를 옭아맸던 족쇄를 당신이 끊어 줬다면서요.”

“들었으면 알 텐데요. 정당한 거래였습니다.”

“들었으니 알죠. 일방적인 베풂이었잖아요.”

송소리는 태수를 똑바로 바라봤다.

“우리를 안전하게 사우디까지 올 수 있었던 것도 전부 당신 덕분이라고 들었어요.”

사막에 실종 처리하고, 송 비서의 죽음을 위장한 일을 말하는 거다.

그러니 한청호는 이들 모녀를 인질로 붙잡는 대신, 사우디로 가는 것까지 도와주었다.

“한 가족, 세 명의 목숨을 당신이 살린 거예요. 아무런 대가 없이.”

“대가는 충분히 받았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이렇게 도움을 받고 있고요. 그러니 마음 쓸 것 없습니다.”

한청호의 눈에 띌 각오까지 하면서.

그 마음, 그 각오를 태수가 어찌 모를까.

“사실 이번 물건을 탈취하기 위해 무장 단체를 이용할까 생각했었습니다.”

“그건··· 너무 위험한 일이잖아요.”

“박정환이 한청호에게 비밀리에 밀명을 내렸다. 무척 중요한 극비 사항이다. 이 문서가 공개되면 한청호도, 박정환도, 곤란을 면치 못한다. 내가 손을 쓸 이유는 충분했습니다.”

지금 태수에겐 한청호를 위협할 마땅한 무기가 없다.

가지고 있던 무기는 모두 써 버린 상태다.

아직도 박정환과 한청호는 서로 등을 돌리지 않았다.

그렇기에 각오해야 할 것도 많았다.

“그런데 이렇게 암호를 얻게 되었으니 위험을 각오하지 않아도 됩니다. 사우디에서 이걸 제게 주기 위해 어려운 걸음 해 준 거, 고맙게 생각합니다.”

태수는 씩 웃었다.

“이제 이만 사우디로 돌아가 있어요. 이번에도 좋은 소식을 들려 드릴 테니까요.”

“그럼, 기대하고 있을게요.”

송소리는 활짝 웃었다.

예쁜 웃음이었다.

“부디 뜻하는 일이 모두 잘 풀렸으면 좋겠어요.”

그녀는 그렇게 돌아갔다.

‘저 남자 생각보다 멋진데?’

그녀는 태수의 호텔 방문을 힐끗 보았다.

‘아빠가 왜 저 남자를 잡으라고 그리 신신당부했는지 알 것 같아.’

그녀는 태수가 마음에 들었다.

태수는 방에 남아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박정환이 한청호까지 보내서 치우고 싶은 약점, 송 비서가 나른 것만이 전부는 아닐 텐데.’

그것만 있으면 큰 무기가 될 것이다.

‘도대체 거기엔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을까?’

한청호도 연루되어 있는 일이 분명한데.

좀 더 확실한 증거가 필요하다.

송소리가 아주 좋은 물건을 가지고 왔다.

‘한청호가 책임자로 일본에 가는 게 확실하다면 내가 선수 쳐야지.’

고민은 짧았다.

행동은 빨랐다.

태수는 제일 먼저 장말동에게 전화를 걸었다.

정보 상인답게 장밀동이 관련된 일을 술술 알려 주었다.

성북동 요정에도 장말동의 정보원이 숨어 있었다.

태수는 피식 웃었다.

“일이 그렇게 된 거군.”

태수는 일본으로 가져갈 짐을 챙겼다.

* * *

일본 도쿄로 향하는 비행기 안.

남자는 한청호, 여자는 영부인 오영순이 나란히 앉았다.

“이 구역엔 오영순, 당신과 나 단둘뿐이야.”

영부인 오영순이 일부러 비서와 경호원까지 전부 멀찌감치 물렸다.

승무원도 보이지 않는다.

70년대 호화 여객기엔 커튼을 쳐서 구역을 분리하곤 했다.

“별 핑계를 다 대면서 자꾸 날 피하던데. 자꾸 그러면 재미없을 줄 알아.”

“왜 저를 지목했어요? 또 무슨 짓을 하려고 그래요.”

오영순은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박정환이 딸을 보내겠다고 했는데, 한청호가 열심히 설득한 결과였다.

“각하의 비밀 금고와 관련된 일이야. 고작 19살짜리 여자아이가 오갈 일이 아니잖나? 왜? 당신 딸한테도 그 사진을 내밀면 좋겠어?”

오영순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제 협박은 그만해요. 전 정말 살고 싶지 않아요.”

“그런다고 있던 일이 없던 일이 되나?”

“없던 일이잖아요!”

억울했다.

“이게 대체 몇 번째예요? 당신에게 이렇게 질질 끌려다닐 바에야······.”

오영순이 울먹이며 말했다.

“남편에게 솔직하게 이실직고하고, 이 목숨으로 모든 것을 정리하겠어요.”

“고작 당신 목숨으로 이 일을 덮을 수 있을 것 같아? 자식 생각은 안 하나?”

오영순이 멈칫했다.

“말했지? 내 말을 안 들으면 사진을 전국 방방곡곡, 신문사와 방송사에 일제히 뿌리겠다고. 어떤가?”

“안 돼요!”

한청호는 오영순의 귓가에 속삭였다.

“영부인이나 되어서 남자랑 바람났다고 손가락질받게 되겠군. 남편 체면은 구겨질 대로 구겨질 것이고, 딸들은 밖에서 얼굴 들고 다니질 못하겠지.”

지금껏 오영순이 한청호의 협박에 놀아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그건 조작된 사진이잖아요! 난 결백해요!”

“그걸 각하께서도 믿어 줄까? 딸이 믿어 줄까? 국민들은 믿어 줄까? 우리 한 번 결과를 확인해 볼까?”

“그만!”

오영순은 두 손으로 얼굴을 묻고 흐느꼈다.

“당신이 달라는 대로 다 줬잖아요. 더 줄 것도 없어요.”

“없긴 왜 없어? 아직 많이 남아 있는 거 다 알아.”

“친정 재산까지 빌려서 당신한테 줬어요. 아버지가 남겼던 주식과 부동산도 다 처분했어요. 어머니가 남겨 주신 패물까지 전부 팔아넘겼잖아요. 아직도 부족해요?”

오영순은 애원했다.

“그러니 이만 그 사진을 내놔요. 당신이 찍은 사진. 원본 필름까지 전부 줘요. 이렇게 부탁할게요.”

한청호의 운전기사가 찍은 사진이다.

한청호는 그걸로 영부인을 내내 협박하고 있었다.

남자 얼굴만 쏙 빼놓은 사진으로 그럴듯한 장면을 연출해 놓았다.

‘운전기사 이 자식, 따로 내 얼굴까지 같이 찍은 사진을 가지고 있었을 줄이야.’

그 사진은 송 비서가 빼돌려 태수에게 주었다.

덕분에 한청호를 협박해 인수 합병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었다.

이미 사진과 필름까지 전부 태워 버리고 없지만 한청호는 그걸 오영순에게 가르쳐 줄 생각이 없었다.

“내가 왜?”

“이래서야 끝이 없잖아요.”

한청호는 비웃었다.

“끝을 낼 방법은 있나? 남편한테 고자질해 보지그래? 아니면 내가 정말 신문사랑 방송사에 전부 그 사진을 뿌릴까? 왜 자꾸 똑같은 소리 나오게 해?”

“아, 안 돼요! 그것만은 절대 안 돼요!”

“그러니까 내 일에 고분고분하게 협조해. 알았어?”

오영순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오영순, 당신이 살길은 그것뿐이야. 왜 자꾸 도망가려고 하나.”

“아니. 이제 당신 뜻대로는 안 될 거예요.”

처음이었다.

오영순이 한청호에게 눈 똑바로 뜨면서 대드는 것은.

“사진, 전부 내놔요. 안 그러면 나도 가만있지 않을 테니까요.”

그녀는 귀한 부잣집 딸로 태어나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랐다.

군인이던 남편은 이 나라 최고 실세가 되었고, 그녀는 영부인이 되었다.

그러니 누가 그녀를 짓밟을 일도, 협박받을 일도 없었다.

한청호를 만나기 전까지는.

“나한테는 돌아가신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남겨 주신 게 있어요. 그러니 이 일이 밝혀진다면 죽는 건 당신 혼자일 거예요.”

“까불지 마.”

한청호는 이죽거렸다.

“당신 아버지는 각하를 사위로 인정하지 않았잖아.”

오영순의 아버지는 자기 자신과 가문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당시 박정환은 전쟁으로 난리 통인 상황에서 북한군 제거 대상 1호인 군인이었다.

그것도 이혼 경력에 자식까지 있는 데다 나이마저 8살이나 많았다.

더구나 딸은 사윗감으로 점찍어 놨던 조건 좋은 남자 집안과 혼담까지 오간 상황.

그러니 딸에게 접근한 박정환이 곱게 보일 리가 있나.

“아버지 눈 밖에 나서 연까지 끊겼던 주제에.”

그 시절 신식 교육까지 받은 부잣집 아가씨가 일개 군인의 재취 자리로 들어간다.

자존심 강한 양반이 허허 웃으며 환영할 수는 없었다.

“그런 아버지의 유산? 그거야 각하께는 아무것도 아니야. 손가락만 까딱하면 재벌들이 엎드려 재물을 갖다 바치는 처지가 아닌가. 그리고 아깐 주식과 부동산은 다 팔아 치웠다며?”

“아버지 유산은 돈이 아니에요.”

한청호의 귀가 쫑긋 섰다.

“그럼 뭔데?”

“당신이 알아서 뭐하게요?”

오영순은 작심하고 한청호를 노려봤다.

“아버지가 말씀하시길, 그걸 내보이면 그 사람은 죽어도 날 내치지 못한다고 했어요. 설사 내가 그 인간 눈앞에서 바람을 피우더라도.”

한청호는 마른침을 삼켰다.

이건 박정환의 목줄이다.

그것만 있으면······.

“그게 뭐지?”

“알려 줄 수 없어요. 그러니 이만 사진과 필름을 내놔요.”

오영순은 단호하게 잘랐다.

그러고는 한청호를 똑바로 쳐다봤다.

“내 입으로 그 사람에게 불어 버릴 거예요. 깔끔하게 일을 마무리 짓겠어요.”

“당신이? 잘도 그러겠어. 그럴 수 있었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잖아. 안 그래?”

한청호의 협박에 오영순은 움찔했다.

“가는 동안 잘 생각해. 어떻게 내 입을 다물게 할 수 있을까 고민하라고. 알았나?”

“진짜 더는 못 버티겠어요. 하루하루가 지옥 같단 말이에요.”

“박정환의 목줄, 어디 있지?”

“그만! 제발 그만 좀 해요!”

오영순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눈물을 흘렸다.

‘제발 누가 좀 도와줬으면······. 이 지옥에서 벗어나고 싶어.’

그녀는 일본까지 가는 짧은 비행이 끝나지 않는 긴 시간처럼 느껴졌다.

* * *

또각또각.

저벅저벅.

계단을 타고 내려오는 발소리.

적막한 지하 비밀 금고 안에 사람들이 도착했다.

한청호와 오영순이었다.

“이곳은 나도 처음인데. 신기한 곳이 있었어.”

한청호에 비해 오영순은 이곳에 몇 번 드나든 적이 있다.

자주 온다고 익숙해지는 곳은 아니지만 한청호처럼 신기하게 주변을 둘러볼 정도는 아니었다.

그걸 눈치채지 못할 한청호가 아니었다.

“당신은 여기가 익숙해 보이는데?”

“몇 번 와 봤어요.”

“아버지 심부름이야, 남편 심부름이야?”

“······아버지 심부름이요.”

오영순이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떤다.

한청호는 감을 잡았다.

“네 아버지가 남겨 줬다는 박정환의 목줄, 여기 있구나!”

“······!”

소스라치게 놀라는 저 표정만 봐도 알겠다.

이곳에 있는 게 확실하다.

“내놔.”

한청호가 당당히 요구했다.

오영순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런데 그녀에게 낯선 곳에서 뜻밖에도 구원의 동아줄이 내려왔다.

태수가 보낸 동아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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