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산 찍고 건설 재벌-95화 (95/230)

95. 박정환의 비밀 금고를 털다(2)

“잊으셨습니까? 사우디 장관이 보낸 것. 누구 손에 들려 보내셨습니까?”

강태수의 손에 들려 보냈다.

한청호가 은근하게 속삭였다.

“그놈이 그걸 안 뜯어봤겠습니까?”

분명히 제대로 밀봉되어 있었다.

사우디 왕실의 인장까지 잘 찍혀 있었다.

심지어 인장을 밀랍으로 꾹 눌러 봉해질 정도로 만전을 기한 상태였다.

“으음······.”

하지만 마음속에서 한 가닥 의심이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한청호가 의도한 결과였다.

“각하, 생각해 보십시오. 사우디에서 돌아온 그놈 손에 들린 것이 무엇인지. 편지뿐만이 아니잖습니까?”

사우디 왕실에서 인정한 석유 공급 권리증이 들려 있었다.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서방 세력에게는 석유 단 1리터도 공급할 수 없다는 산유국이 아닌가.

그런데 그걸 무시하고 강태수에겐 석유 공급 권리증을 인정해 주었다.

마음속에서 싹이 튼 의심은 점점 무럭무럭 자라나기 시작한다.

“사우디에선 왜 강태수에게 그걸 들려 보냈을까요?”

사우디에서 개인적으로 공을 세워서 받아 왔다고 했다.

“사우디에 도로 공사하러 간 놈이 공을 세울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설마······.

“강태수가 손을 쓴 겁니다. 제 비서를 잡아다가 얻어 냈겠죠. 그걸 사우디 국방부 장관에게 바친 겁니다. 이게 더 말이 되지요?”

박정환의 미간이 와락 구겨졌다.

“강태수, 이 새끼가······!”

이제 됐다!

한청호는 은근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걸 들이미니 제가 얌전히 두 손 들고 청일 정유와 청일 중장비를 내어놓을 수밖에 없잖습니까. 각하께 누를 끼칠 순 없었습니다.”

“증거는?”

“그 자리에서 태워 버렸습니다. 믿기지 않는다면 금산의 장준용을 불러 물어보십시오. 회의실에서 뭔가 태운 흔적이 있었는지 확인하시면 될 겁니다.”

금산의 장준용을 한 번 불러야겠군.

박정환이 안색을 굳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다.”

“별말씀을요. 당연한 일인 것을요.”

“하지만 치하하진 않겠다.”

박정환이 싸늘한 눈으로 한청호를 보았다.

분노가 듬뿍 담긴 눈이었다.

“애초에 자네가 흘린 일이야. 그러니 수습도 자네 몫이지. 안 그런가?”

“당연히 그렇습니다. 그래서 제가 순순히 정유와 중장비를 내어놓지 않았습니까.”

한청호는 재빨리 뒤로 물러난다.

‘더 뜯어낼 생각이었는데 역시 쉽지가 않군. 하지만 이간질에 성공했다.’

한청호는 일부러 한숨을 쉬었다.

“사우디 쪽은 이것으로 수습했으니 내일은 일본 쪽을 수습하러 가 보겠습니다. 이것으로 각하께선 근심을 완전히 내려놓으셔도 좋을 겁니다.”

박정환이 눈썹을 찌푸린다.

생각만 해도 여러모로 불쾌하다.

“확실하게 처리해.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알았나?”

“물론이죠. 각하, 그래서 말입니다만······.”

한청호가 은근한 목소리로 작게 속삭였다.

“일본에 간 김에 혹시라도 무슨 문제가 없는지 제가 확인할까 하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박정환이 대놓고 미간을 구겼다.

한청호는 긴장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사우디 장관뿐만이 아니라 강태수까지 이미 이 일을 알아 버린 마당이 아닙니까? 이대로 그냥 두는 것보다 다른 곳으로 옮기심이 어떨까 생각합니다.”

들통 난 약점을 그대로 두는 것은 멍청한 짓이다.

“그러기 위해 각하께서 비밀 번호를 알려 주셔야 하는데······.”

박정환의 미간에 더더욱 진한 골이 파인다.

박정환은 단숨에 술을 마셔 버리고, 탁 소리가 나도록 술잔을 내려놓았다.

“경혜를 같이 보내지.”

한청호에게는 절대로 비밀 번호를 알려 주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큰일을 하러 가는 겁니다. 고작 19살짜리 영애보다는 영부인이 낫지 않겠습니까?”

한청호가 은근하게 물었다.

* * *

호텔 방으로 돌아온 태수.

“피곤하군.”

긴 하루였다.

하루에 두 번이나 한청호를 만나 실랑이를 벌였다.

청일의 쌍두마차를 거두었고, 장말동을 찾아가기도 했다.

“그래도 오랜만에 즐거웠어.”

일 잘하는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건 언제나 즐겁다.

샤워를 끝내자 개운함이 몰려들었다.

똑똑-

이 늦은 밤 태수의 호텔 방에 찾아올 사람이라곤 한수 정도다.

샤워 가운을 입은 채로 태수가 문을 열었다.

“왜? 인수 합병 기념으로 축하주라도 한잔해?”

“술은 사양하지.”

방문 앞에는 또 뜻밖의 남자가 서 있었다.

대통령 비서실장 차기범이었다.

“아니, 바쁘신 분이 여긴 어쩐 일입니까?”

“들어가도 되나?”

“들어오십시오.”

“이 시간에 자네 차림을 보니 왠지 들어가면 곤란해지는 사람이 생길 것 같은데.”

차기범이 무엇을 말하는지 태수도 안다.

태수는 피식 웃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늦게까지 야근하다가 이제 막 퇴근한 참입니다.”

“이 시간까지?”

“아직 일이 남아서 마저 끝내야 할 일거리를 들고 온 참이죠.”

차기범이 열린 문틈으로 흘깃 보니 과연 책상 위에 서류 더미가 산더미다.

차기범은 혀를 쯧쯧 찼다.

“젊은 남자가 불쌍하게 사는군.”

“젊은이가 열심히 일하는데 불쌍하게 산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마 차 실장님뿐일 겁니다.”

“일하느라 바쁜 사람 오래 붙잡고 있진 않을 테니 염려 말게.”

차기범은 성큼성큼 방으로 들어온다.

태수는 문을 닫았다.

차기범과 태수가 의자에 앉았다.

“자네, 조심해야겠어.”

차기범의 말에 태수는 집중했다.

그는 과묵한 남자지 허튼소리를 하는 남자가 아니다.

“아까 각하께서 한청호와 만나셨다.”

“계약서 일 때문입니까?”

“아니, 그 문제가 아닌 것 같아.”

차기범이 태수를 똑바로 본다.

“금산의 장준용이 계약서를 가져왔을 때 각하께선 자네를 높이 사셨어. 기분이 좋으셨지.”

박정환이 청일 정유를 내놓으라고 했는데, 한청호가 중간에 얄팍한 수작을 부렸기 때문이다.

그러니 태수가 보란 듯이 한청호의 수작을 뒤집었을 때 박정환은 기꺼이 모른 척 눈 감아 주었을 것이다.

이것까지는 태수가 예상한 터였다.

“하지만 한청호와 만난 이후 각하께선 급격히 기분이 안 좋아지셨다.”

“무슨 일 때문입니까?”

“몰라.”

태수는 의아했다.

박정환을 경호하기 위해 늘 옆을 지키는 차기범이 아닌가.

“차 실장님이 동석한 자리가 아니었습니까?”

차기범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독대였다. 하지만 각하께선 자네를 두고 못마땅한 소리를 내셨어.”

“뭐라고 하십니까?”

“괘씸한 놈이라 하셨지. 입심으로 자신을 농락했다고 노하셨고.”

박정환이 갑자기 왜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걸까?

한청호가 수작을 부린 것이 틀림없다.

차기범은 의자에서 일어난다.

“벌써 가십니까?”

“용건은 그것으로 끝이야. 자리를 오래 비울 수 없어. 이만 들어가 봐야지.”

태수는 정중히 인사했다.

“제게 위험을 경고하기 위해 늦은 밤 이곳까지 오셨군요.”

“이것으로 빚은 갚았다. 다음은 없어.”

“바쁜 시간 쪼개어 와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차기범이 태수를 묘한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왜 동요하지 않지?”

이 나라 최고의 권위자이자 거침없이 독재 권력을 휘두르는 박정환이다.

그가 태수에게 노여워한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어째서 이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일까.

“짐작 가는 게 있습니다.”

박정환과 한청호가 무슨 말을 나눴는지 알 것 같다.

태수는 금산의 장준용에게 계약서를 떠넘기며 생각했었다.

-궁금하시면 각하께서 한청호를 직접 불러다 물으시겠죠.

-한청호가 과연 박정환 앞에서 무슨 말로 변명하려나?

-죽었다 깨도 진짜 이유를 대진 못할 텐데.

아마도 한청호는 진짜 이유를 대진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박정환과 태수를 이간질할 수 있는 이유를 댔을 것이다.

‘사우디에서 부친 편지를 가지고 헛소리를 지껄였겠군.’

태수는 피식 웃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어. 한청호, 어째 내 예상에서 벗어나질 않는군.’

태수는 서랍을 열고 안에 든 물건을 차기범에게 주었다.

차기범의 눈이 커졌다.

“이건······!”

“각하께서 이걸 보면 뭐라고 하실까요?”

“어떻게 돌아가는 사정인지 알았으니 내가 각하께 한번 말을 올려 보도록 하지.”

차기범은 호텔을 나섰다.

똑똑.

잠시 뒤 호텔 문 두드리는 소리가 다시 들렸다.

태수는 의아해하며 문을 열었다.

‘깜빡 잊고 못한 말이 있나?’

그런데 뜻밖에 태수의 호텔 방문 앞에 서 있는 건 젊은 여자였다.

태수의 눈이 동그래졌다.

“당신이 여긴 어떻게······!”

태수는 얼떨떨했다.

이번에도 뜻하지 않은 손님의 방문이었으니까.

“일단 들어오시죠.”

그녀는 태수의 호텔 방으로 들어왔다.

“송 비서님은 잘 지내십니까?”

“그럼요. 한청호 밑에서 들들 볶이고 살다가 28년 만에 자유롭게 풀려났잖아요. 천국이 따로 없다며 얼마나 좋아하시는데요. 살이 통통하게 오르셨어요.”

그녀는 송 비서의 딸이었다.

“한국엔 어떻게 왔습니까?”

“청일 정유를 인수한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가만히 있을 수가 있어야죠.”

고작 그런 이유 때문에 사우디에서 날아왔다는 건가.

“한청호가 무섭지 않습니까?”

“아빠는 공식적으로 이미 실종된, 아니 돌아가신 상태잖아요.”

하지만 사실은 무섭다.

정말로 무서워서 이렇게 몰래 숨어 다니는 그녀였다.

“아빠가 말했어요. 약점을 들킨 자는 둘 중 하나를 한다고 하셨죠.”

“약점 자체를 치우던가, 약점을 알고 있는 자를 치우던가.”

“정확해요. 어떻게 그걸 알고 있어요?”

그야 저도 송 비서님께 그렇게 배웠으니까요.

하지만 태수는 이번 생에선 송 비서에게서 그런 가르침을 배울 시간은 없었다.

“한청호라면, 박정환이라면 어떻게 나올 것 같아요?”

“약점을 알고 있는 송 비서님은 이미 제거됐죠.”

“하지만 처음부터 깊이 연루된 한청호는 지금에 와서 치울 수 없는 존재고요. 나중이라면 몰라도.”

“그렇다면 약점 자체를 치워야겠죠. 이제 보니 그것 때문에 오셨군요.”

“아빠가 왜 입에 침이 마르도록 당신을 칭찬하는지 알 것 같아요.”

송 비서의 딸이 예쁘게 웃었다.

“한국엔 왜 왔냐고 물었죠? 당신에게 이걸 전해 주기 위해 온 거예요. 중요한 물건이라 편지로 보내면 혹시라도 중간에 사라질까 봐 직접 가져왔어요.”

태수에게 내미는 것을 보니 찢어진 공책 한 장이었다.

“혹시 이게 뭔지 알아요?”

“압니다.”

태수가 모를 리가 있나.

“송 비서님의 치부책 맨 마지막 장이 찢겨 있더군요.”

“맞아요. 제가 찢었어요.”

“왜 그랬습니까?”

“혹시나 당신이 우리를 해칠까 봐 무서워서 그랬어요.”

그럴 줄 알았다.

“만일 아빠를 잡아간 놈이 공책을 원한다면 암호문을 얻기 위해서일 거란 생각이 들었어요. 암호문이 없으면 금고까지는 못 열 테니까요.”

“제가 송 비서님을 속였다고 생각했군요. 갖고 있는 치부책을 털 심산으로 접근했다고 여겼나 봅니다.”

“네, 지금은 오해란 걸 알지만 당시엔 모든 게 의심스러웠어요.”

그럴 만도 했다.

송 비서의 죽음이 위장된 채 가족들에게 알려졌다.

송 비서는 유품으로 금고 비밀 번호를 남겼고, 그녀는 금고 속을 털어 사우디로 향했다.

그녀는 사우디까지 오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미안해요. 살고 싶어서 잔머리를 굴렸어요. 이게 있으면 협상에서 훨씬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으니까요.”

“이해합니다.”

“만일 이게 당신에게 있었다면 이번 인수 협상을 지금보다 수월하게 진행했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한국으로 온 거예요. 한발 늦고 말았지만.”

송소리는 태수에게 찢어진 공책 한 장을 내밀었다.

“받아요. 너무 늦게 전해서 미안해요.”

“고맙습니다.”

공책에는 숫자와 영문이 조합된 16자리 암호문이 세 개 있었다.

-도쿄 일본 중앙은행 아카징코 출입 방법

<입장 암호: K938 L24S 5024 J167>

<금고 암호: P930 H228 3C87 09QW>

<금고 개문(開門) 암호: Y764 M358 9G23 X32A>

“아빠가 이것만 있으면 비밀 금고에 들어갈 수 있을 거라고 했어요. 아빠가 심부름할 때 몰래 따로 적어 둔 것이랬어요.”

뜻밖에 아주 좋은 선물을 들고 왔다.

태수는 기회가 왔음을 직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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