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산 찍고 건설 재벌-92화 (92/230)

92. 청일 중장비가 아닙니다(3)

태수가 품에서 뭔가를 꺼내 이창원에게 내민다.

노일국에게는 눈길 한 번을 안 준다.

참다못한 노일국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 사장님, 왜 저한테는······.”

“그쪽은 우리 회사 소속이 아니군요.”

그러고 보니 그렇다.

청일 중장비와 달리 청일 정유는 직원들 전부 인사이동 대기 상태다.

‘우린 청일 정유에서 청일 그룹 본사로 인사이동 처리 되었지만 소속 부서와 직급은 명기되지 않은 처지니.’

한청호가 회사를 빈껍데기만 남기려고 급히 취한 조치였다.

“당신은 청일 정유 소속입니까? 소속 확실히 합시다.”

그 한마디가 의미하는 바는 컸다.

‘청일 정유 소속이라고 인정하면 상사 노릇 하겠다는 뜻이고, 아니라고 하면 축객령밖에 없다는 뜻이군.’

노일국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태수가 손을 들어 문을 가리킨다.

“청일 사람은 청일에 이만 돌아가시죠. 문 열렸습니다.”

노일국은 잠시 어안이 벙벙했다.

돌아가라고 해 봤자 딱히 갈 데도 없다.

안 그래도 갈 곳이 없어서 청일 중장비에 잠시 의탁한 처지가 아닌가.

‘젠장. 발이 떨어지질 않네.’

노일국의 입장은 이창원보다 훨씬 나쁘다.

석유 공급처 뚫기에 실패한 그가 아닌가.

청일 정유가 넘어간 책임을 엄중히 묻겠다고 한청호가 단단히 경고한 바 있다.

‘회장님이라면 날 두고 실컷 화풀이하다가 구조 조정 1순위로 잘라 버리겠지.’

뻔히 예상되는 미래에 노일국은 눈을 질끈 감았다.

‘아니, 그런 문제가 아니야. 구조 조정에서 살아남는다고 해도 청일엔 미련이 없다. 난 저 남자의 리더십에 마음을 빼앗겼으니까. 이대로 나가면 두고두고 후회하겠지.’

머뭇대면서도 문으로 다가가던 그가 갑자기 몸을 홱 돌린다.

“솔직히 말하죠. 전 지금 붕 뜬 상태입니다. 청일 정유를 부도낸 책임에 따른 해고를 목전에 둔······.”

노일국의 하소연이 이어지기 전에 태수가 딱 잘랐다.

“태양 정유로 오시겠습니까?”

그 한마디면 족했다.

노일국은 시원하게 대답했다.

“예, 태양 정유로 가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이미 청일 그룹에서 설 자리를 잃은 노일국은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노일국 역시 허리를 90도로 숙였다.

태수는 그의 뒤통수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노일국은 이창원을 곁눈질로 힐끔댔다.

“제 직위는 어떻게 됩니까?”

“1계급 강등. 그에 따른 설명을 다시 해야 합니까?”

“아뇨. 월급 감봉도 동일합니까?”

태수가 경고한 이후에도 입을 함부로 놀린 건 이창원이다.

노일국은 입 꾹 다물고 몸 사렸다.

태수는 피식 웃었다.

“월급 감봉은 없을 겁니다.”

노일국이 이창원을 보며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는다.

이창원은 떨떠름하게 입맛을 다셨다.

노일국은 우렁차게 대답했다.

“태양 정유 전무 자리, 받아들이겠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좋습니다. 노 전무도 이거 받아요.”

태수는 품에서 뭔가를 꺼내 노일국에게도 내밀었다.

“이게 뭡니까?”

“뭐긴 뭡니까? 고용 계약서죠. 사인하세요.”

“······.”

둘은 새로운 젊은 사장은 철두철미한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또 있습니다.”

이번엔 칼리드가 발급해 준 사우디 석유 공급 권리증을 품에서 꺼냈다.

“앞으로 석유 공급 걱정은 안 해도 될 겁니다.”

“아······!”

석유 공급 권리증을 들고 있는 노일국의 손이 덜덜 떨렸다.

그동안 전 세계 OPEC 소속 산유국을 돌며 고생했던 기억들이 스쳤다.

암만 두드려도 열리지 않던 석유의 벽.

그걸 태수는 아무렇지 않게 열어 주었다.

“지금껏 하던 대로 내실을 다지고, 석유 정제에 힘쓰고, 주유소 확보에 노력해 봅시다.”

무덤덤하게 말하는 그 말이 노일국의 가슴에 박혀 들었다.

한청호에게선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했던 말이었다.

-이 무능한 놈! 네가 제대로 하는 일이 대체 뭐야? 그러라고 사장 자리 내어 준 줄 알아?

-석유 공급 계약서 받아 오기 전까진 돌아올 생각하지 마!

-거기서 뼈를 묻는 한이 있더라도 석유 공급 계약서부터 가져와!

갈굼과 욕설뿐이었다.

게다가 한청호는 걸핏하면 물건을 집어던지곤 했다.

“석유 공급처를 확보하는 건 제가 해야 할 일인데······. 면목이 없습니다.”

그 탓에 청일 정유가 넘어갔다는 자책감이 있는 노일국이었다.

“오일 쇼크입니다. 평소와 다른 어려움은 윗사람이 뚫어 줘야 하는 법이죠. 아랫사람 닦달한다고 되는 일이겠습니까.”

태수는 덤덤하게 말했다.

“맡은 자리에서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면 됩니다. 능력 있는 분이니 알아서 잘하리라 생각합니다. 지켜보겠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태수는 사장으로서 제대로 된 첫 명령을 내렸다.

“자, 지금부터 두 전무의 능력과 쓸모를 증명할 시간입니다.”

“지금? 당장?”

“갑자기 증명하라고 하시면······.”

태수는 씩 웃었다.

“청일 중장비와 청일 정유의 비밀 서류, 싹 다 옮깁시다.”

“······!”

“한청호 회장이 들이닥치기 전에 서둘러야 할 겁니다.”

“······!”

태수가 이곳 사장실에 온 진짜 목적은 이것이었다.

“마침 이곳은 중장비 회사가 아닙니까. 캐비넷째 들고, 서류함째 털어서 트럭에 싣고 갑시다. 당장 옮깁시다. 간단한 일이니 20분 드리겠습니다.”

“2, 20분이요?”

“뭐합니까? 시간 없습니다. 비밀 장부 찾아야죠, 서류 옮겨야죠, 트럭도 미리 대기 시켜 놓으세요.”

태수는 익숙하게 그들을 재촉했다.

“여기서 뭉그적댈 시간 있습니까? 뛰세요. 방송실에서 방송하던가, 수하를 부리던가, 알아서 처리하세요. 초 단위까지 세야 움직일 셈입니까?”

타임 리미트가 고작 20분이다.

두 전무는 다급해졌다.

“어디로 옮깁니까?”

“명동입니다.”

장말동의 집에 서류 산을 쌓을 예정이다.

‘정보 상인 장말동이 이 일에 제격이지.’

아마 장말동이라면 신나서 달려들 일이었다.

* * *

부르릉.

청일의 비밀 서류를 실은 트럭이 명동 장말동의 집으로 출발했다.

시간이 없어서 캐비넷째, 책상 서랍째 들어 옮겼다.

“겨우 시간 내에 끝냈다.”

“첫 임무가 서류 운반이라니. 황당하네.”

“뭐가 황당합니까?”

태수가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이렇게 놀고 있을 시간 따윈 없습니다. 서류 다 옮겼으면 이제 직원들 고용 계약서를 받아 오세요.”

“네?”

쉴 틈을 안 준다.

방금 트럭 떠났다.

아직 흙먼지도 채 가라앉지 않았다.

“오늘 태양 중장비, 태양 정유. 전 직원 고용 계약을 끝냅시다.”

“오늘?”

“전 직원?”

딸린 직원이 다 몇 명인데!

계약서도 아직 준비 안 됐습니다만!

“그, 그건······.”

“할 수 있습니다. 당장 가서 사인 받아 오세요.”

“기한을 좀 넉넉하게······.”

태수가 시계를 슬쩍 확인한다.

“이건 1시간 드리겠습니다.”

“네? 1시간?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안 될 것 같습니까?”

“······.”

태수는 방금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당신들 손발이 되어 줄 부하 직원들이 아닙니까? 곧 한청호 회장이 들이닥칠 겁니다. 이대로 눈 뜨고 부하 직원들 뺏길 셈입니까?”

“하지만 딸린 직원이 몇 명인데, 그건 너무······.”

태수는 딱 잘라 말했다.

“마음대로 하십시오. 고르고 골라 몇 명만 추려 데려가는 것도 말리진 않겠습니다.”

“그럼 적당히 골라서······.”

“아까 말했듯이 우린 사업을 확장할 계획입니다. 인원 확충 계획? 당분간 없습니다.”

“······.”

“부하가 부족하면 두 전무님의 업무량이 늘어나게 되겠죠. 본인들이 부하 직원 못 챙긴 걸 누굴 탓하겠습니까. 지금 열심히 하던가, 나중에 열심히 하던가. 알아서 하시죠.”

“······!”

앞일이 예상되자 머리가 핑 돈다.

두 전무는 입이 바싹 말랐다.

“직원들 전부 태양에 데려가겠습니다. 다만 시간이 너무 촉박······.”

“시간이 촉박하면 머리를 굴려야죠. 몸이라도 쓰던가. 어물쩍댈 시간 없습니다. 사내 방송 뒀다 뭐합니까? 다단계 조직 체계 뒀다 뭐합니까? 부하들 부릴 줄 모릅니까? 아직도 여기 있습니까? 뛰세요.”

둘이 허겁지겁 사무실 문을 박차고 방송실로 뛰어간다.

둘은 새로운 사장이 무지막지한 업무량을 요구하는 지독한 타입이라는 걸 깨달았다.

* * *

청일 중장비 건물이 저기 보인다.

한청호는 목이 답답해 넥타이를 풀었다.

“적자를 우리가 떠안게 될 줄이야. 은행장들 만나는 것도 피곤한 일이야.”

청일 정유에 묶였던 대출 금지는 풀렸다.

박정환이 한청호를 압박하고자 했던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순 뻔뻔하고 매가리 없는 새끼들. 대통령 한마디에 벌벌 떨면서 이랬다가 저랬다가. 믿을 수가 없어, 쯧.”

그도 그럴 것이 박정환의 손짓에 추풍낙엽처럼 이리저리 쓸려 다니기 때문이었다.

조수석에 앉았던 박 비서가 말했다.

“그래도 다행입니다. 정부에서 공사 대금을 선불로 두둑하게 지불해 주기로 했잖습니까. 은행장들이 지급을 보증했고요.”

을지로의 샤를롯 호텔 건설을 낚아챈 덕분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축구장 건설할 부지 및 건설 자금 일부를 대출 지원해 주셨다니 덕분에 급한 불은 껐습니다.”

“다행이지. 덕분에 청일 그룹 줄도산을 막았으니.”

“잘하면 계열사를 매각하지 않고, 구조 조정 정도로 일을 막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야지. 그러려고 내가 이리 뛰어다니는 게 아닌가.”

한청호가 급히 은행장들을 만난 이유였다.

덕분에 청일 중장비로 오는 발걸음이 늦어졌다.

“이창원이에게도 소식이 들어갔나?”

“아마 모르고 있지 않겠습니까? 회장님이 미리 틀어막은 덕분에 아직 신문과 방송은 잠잠합니다. 저 역시 따로 연락을 넣지 않았습니다.”

한청호는 눈을 감았다.

“곤란하게 되었어. 여러모로.”

이게 다 강태수 그 자식 때문이다.

그 사진, 그 필름만 없었어도!

그랬다면 일이 이 지경까지 되진 않았을 터다.

‘강태수, 그 자식은 어떻게 내 운전기사와 접촉한 걸까? 언제? 어떻게 매수한 거지?’

이해가 안 가는 건 그 부분이었다.

‘등잔 밑이 이리도 어두웠을 줄이야.’

한청호가 주먹을 꽉 쥐었다.

매일 얼굴을 맞댄 심복이 배신했다.

한데 배신의 기미조차 감지하지 못했으니 문제였다.

‘내가 등 따시고 배부르니 감각이 많이 무뎌졌던 모양이지.’

그러니 그 새파란 애송이에게 이리 뼈아픈 일을 당하는 것이 아닌가.

‘강태수 손에 비밀이 하나 쥐어져 있다. 그러니 그놈을 섣불리 건들면 외려 청일이 박살 난다. 여러모로 짜증 나는 상황이군. 어떻게 엿을 먹여 줄까.’

끼익.

청일 중장비 건물 앞에 도착했다.

한청호는 차에서 내렸다.

후다닥.

다다다닷.

어째 반응이 이상하다.

회장이 모습을 보이는데도 달려 나와 맞이하지 않고, 다들 허겁지겁 바쁘게 뛰어다닌다.

“거래처 리스트는 아직이야?”

“수량 체크는 끝났나?”

“보고서! 오타 검수할 시간 없어! 뛰어!”

평소와는 전혀 다른 그 모습에 당황스러울 지경이다.

“이것들, 분위기가 왜 이래?”

“그, 글쎄요. 아무래도 청일 정유 직원들로부터 시작된 동요가 중장비 직원들까지 퍼진 게 아닐까요?”

“일도 없는 것들이 바쁜 척하네. 왜들 이 난리야?”

청일 정유 직원들을 급히 빼내 오면서 제일 가까이에 있는 청일 중장비 건물로 옮겼다.

인사이동이 제대로 되지 않아 사무실과 책상조차 배당받지 못했을 터.

그러니 직원들이 우왕좌왕하는 것도 이해는 간다.

“빨리 수습해야겠군. 대대적인 인사이동을 조만간 마무리해야겠어.”

아마도 피바람에 불 것이다.

구조 조정은 피할 수 없다.

여기 모인 이 중 대부분이 잘려 나가게 되겠지.

한청호는 발걸음을 옮겼다.

“사장이란 놈들이 나서서 직원들 동요를 수습해야 하는 법이거늘. 이 쓸모없는 것들.”

한청호는 못마땅한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 청일 중장비 사장실로 향했다.

* * *

사장실 문을 연 한청호는 눈살을 찌푸렸다.

“강태수, 네가 왜 여기서······!”

사장실 책상을 차지하고 있는 건 태수였다.

심지어 업무를 보고 있기까지 하다.

“치매기가 있나 봅니다. 병원에 한번 들려 보시죠. 인수 합병 계약서에 사인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잊으셨습니까?”

“오냐, 이제 네 회사라 이거지?”

“알면 됐습니다.”

한청호가 주먹을 꽉 쥐었다.

“생각보다 많이 늦으셨습니다. 길도 별로 막히지 않던데.”

“강태수!”

“손님 오셨는데, 차라도 한 잔 내올까요? 여긴 옥수수차는 없습니다만 커피는 있더라고요.”

한청호가 예전에 몰리브덴 광산에 찾아왔을 때 태수는 옥수수차를 내준 적이 있다.

한청호가 차를 요구했을 때 태수는 5분 독대를 허락했었다.

‘이 지긋지긋한 놈!’

한청호는 이를 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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