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산 찍고 건설 재벌-91화 (91/230)

91. 청일 중장비가 아닙니다(2)

태수가 중장비 사장을 향해 콕 짚어 가리켰다.

“오늘부터 내가 바로 당신 상사란 뜻입니다.”

인수 합병을 하면 동산, 부동산에 부채와 직원까지 줄줄이 딸려 온다.

청일 정유는 미리 동산과 직원을 빼돌렸을지 몰라도 청일 중장비엔 손도 못 댔다.

그러니 태수가 지금 중장비 사장의 상사가 된 게 맞다.

“헛소리! 난 회장님께 그런 소리 못 들었다!”

그들 입장에서야 당연히 믿을 수 없다.

청일 중장비가 인수된다면 한청호가 진즉 언급했을 텐데 그런 말은 한마디도 없었으니까.

‘그런 황당한 말이 진짜일 리가 없지 않나!’

‘청일 정유는 그렇다 쳐도 청일 중장비까지? 말도 안 된다!’

태수가 씩 웃었다.

“지금 발언으로 석 달 치 월급 감봉.”

이창원이 어이가 없었는지 하, 소리를 낸다.

태수가 품에서 계약서를 꺼내 흔들었다.

“일단 계약서부터 확인하고 다시 말하죠.”

그걸 중장비 사장의 눈앞에 들이댄다.

“청일 중장비, 오늘부로 태양에 인수 합병됐습니다.”

들이댄 계약서, 제목부터가 심상치 않다.

<청일 정유 및 청일 중장비 인수 합병에 관한 계약서>

중장비 사장이 재빨리 낚아채자 정유 사장이 달라붙어 같이 읽는다.

두 사장은 인수 금액과 계약 조건을 보고 기함을 터뜨렸다.

“10원?”

“부채를 청일 그룹에 전액?”

“청일 정유에 청일 중장비까지?”

“그런데도 회장님께서 순순히 사인하셨다고?”

“이런 미친!”

태수는 얼빠진 소리를 내는 두 사장을 보았다.

지금은 인재 영입 시간이 아니다.

부하 직원 정신 교육 시간이다.

‘뚝심 있게 거침없이 일하는 추진력으로 유명한 중장비의 이창원.’

70년대 중장비 공장은 외국의 부품을 들여와서 한국에서 조립하는 형태로 운영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에겐 부러지지 않는 신념이 있었다.

-독자적인 기술 개발만이 살아남을 길이다!

-반드시 청일 중장비를 한국 최고의 중장비 회사로 만들 것이다!

그는 기술 개발에 앞장서서 따로 연구소까지 운영할 정도로 열정이 대단했다.

앞으로 1년 후부터 기술 개발 연구소 준비를 시작하고, 5년 이내에 청일 중장비 품질을 한껏 끌어 올린다.

덕분에 한청호가 그를 매우 중용하였다.

‘하지만 지금은 뜻을 제대로 펴지 못하고 있는 신세지. 한청호와 의견 대립이 꽤 심해서 어려움을 겪던 시절이니까.’

이번엔 눈을 돌려 청일 정유 사장을 보았다.

‘꼼꼼하고 악착같아서 석유 찌꺼기의 찌꺼기까지 팔아먹는다는 정유의 노일국.’

원유를 정제하는 과정에서 공정마다 걸러지는 석유 제품들.

이것을 LPG, 가솔린, 등유, 경유, 증유, 윤활유, 아스팔트, 파라핀 등 여러 가지 이름을 붙여 판다.

‘노일국은 석유를 조금이라도 더 비싸게 팔려고 정제 기술에 매달렸지.’

덕분에 노일국이 사장으로 부임한 후로부터 청일 정유는 정제 능력을 키워 나가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정제된 기름을 많이 팔기 위해 전국의 요지마다 주유소를 세우기 위해 달려들었다.

‘아직 주유소가 많지 않아서 그렇지 중산층에 자동차가 보급된 이후엔 청일 주유소가 전국 곳곳 제일 목 좋은 자리에 위치하지. 전부 이자가 한 일이다.’

그래서 태수는 지금 상황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태수가 사장 자리 위에 올린 명패를 들었다.

“청일 중장비 사장, 이창원.”

“······.”

“계약서를 봤으니 상황이 어찌 됐는지는 제대로 이해했을 테고.”

“······.”

“이 명패, 어떻게 할 겁니까?”

태수가 명패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들겼다.

“선택의 기회를 주겠습니다.”

이창원이 명패를 본다.

“내 밑에서 새로운 명패 파서 쓸지, 아니면 이 명패 들고 청일 본사로 돌아갈지. 선택해야겠군요.”

“선택할 필요조차 없는 제안이로군. 당연히 청일 본사로 돌아갈 거다. 건방진 새끼.”

태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게 하죠. 사표도 필요 없으니까 이거나 갖고 가시죠.”

미련 없이 명패를 이창원에게 던진다.

이창원은 엉겁결에 명패를 받았다.

“돌아간다고 해도 청일에 당신 자리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난 청일의 이창원이다. 회장님께서 아끼시는 청일 그룹의 중요 임원진이지. 중장비 사장 자리가 아니어도 자리 걱정할 처지는 아니란 소리다.”

“그건 당신 생각이고.”

태수는 피식 웃었다.

“계약서 봤으면 알 텐데. 청일 그룹이 떠안은 적자가 얼만지.”

계열사의 적자까지 전부 끌어모았더니 어마어마하긴 했다.

청일 정유에 중장비 적자까지 떠넘기며 액수를 확인한 이창원이 아닌가.

“지금 청일 그룹은 어떤 상태일까?”

두 사장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말하나 마나 심각한 상태일 것이 뻔했다.

태수는 요목조목 짚었다.

“목돈 나오던 중장비는 뺏겼고.”

“기존의 부채에 더해 이번 석유 파동으로 쌓인 어마어마한 적자까지 전부 떠안게 됐군.”

“당장 공장은 돌려야 하는데 석유는 없어.”

“수백억짜리 회사의 인수 금액으로 받은 돈은 고작 20원이지.”

들으면 들을수록 기가 막힌다.

상상 이상으로 상황이 심각하다.

“결국 청일 그룹은 줄도산 할까, 아니면 대대적인 구조 조정을 할까, 어쩔 수 없이 다른 기업에 계열사를 처분해 부채를 줄일까?”

두 사장은 안색이 바뀌었다.

“셋 중 하나는 필수인 상황입니다. 그 정도는 알고 있겠죠?”

모를 리가 있나.

태수의 말대로 흘러갈 게 당연하다.

“뭐가 됐든 연봉 삭감에 구조 조정은 당연히 뒤따르겠군요. 이번 구조 조정 때 잘릴 사람은? 직원이야 당연하고, 연봉 많이 주는 임원진까지도 대거 쓸려 나가겠습니다.”

청일에 피바람이 불 것이다.

계약서에 사인한 순간부터 예고된 수순이었다.

“지금 사장단엔 청일의 공신들이 대거 포진해 있고. 그들은 한청호의 말만 떨어지면 감옥까지 대신 간다고 나서는 청일의 오랜 충신들이고.”

일제 치하에서부터 한청호와 함께 그룹을 키워 온 자들을 말하는 거다.

그들은 한청호의 말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청일에선 없어선 안 될 한청호의 강력한 지지 세력이다.

“반면 당신은 어떻습니까?”

태수가 사장 책상을 탕탕 두드린다.

“고작 40대 후반으로 고속 승진을 거듭해 이 자리에 올랐지. 한청호의 충신 중 하나로 이 자리에 앉은 게 아니야. 안 그렇습니까?”

능력을 증명하여 실력으로 쟁취한 자리다.

충성을 증명하여 믿음으로 하사받은 자리가 아니다.

“청일이 휘청거릴 때 계열사들이 잘려 나갈 때 피눈물을 머금고 청일을 반 토막 낼 때. 한청호라면 누구를 곁에 둘 것 같습니까? 충신? 아니면 당신?”

답은 정해져 있다.

그룹이 커 나갈 때면 능력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하지만 어려울 때는 함께 동고동락할 믿을 만한 사람이 필요한 법이다.

“한청호에게 당신은 어떤 존재입니까? 장담할 수 있습니까? 청일 그룹이 어려울 때도 몇 자리 안 남은 요직을 당신에게 줄 거라고.”

이창원은 입술을 깨물었다.

“당신의 그 믿음만큼 한청호도 당신을 믿어 주면 좋겠는데. 실상은 어떻습니까? 믿는 건 둘째 치고, 당신 말이라도 들어주기는 하나?”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다.

그랬다면 중장비 기술 개발 연구소 설립은 진즉에 이뤄졌겠지.

태수는 이창원의 책상에 엉덩이를 걸치며 웃었다.

“반면 우리는 이번 인수 합병으로 인해 준비했던 인수 자금이 고스란히 남았습니다.”

청일 그룹과 완전히 반대다.

적자는 하나도 없이 고작 20원에 수백억짜리 청일 중장비와 청일 정유를 거져 얻었다.

“난 그 돈으로 중장비 기술 개발 연구소를 세우고, 자체 생산 부품 공장을 인수하고, 외국 기업과 기술 제휴도 할 생각입니다.”

기술 개발 같은 건 한청호로서는 꿈도 안 꾸는 일이다.

당장 외국산 부품을 들여와서 누더기처럼 중장비를 조립해 팔아먹는 실정이니까.

“청일의 충신들이 차지하고 있는 요직? 아마도 그들이 은퇴하기 전까지 당신 자리는 없을 겁니다.”

요직까지는 어쩔 수 없다며 체념한 이창원이다.

텃세뿐만이 아니라 견제까지 너무 심하다.

위로 가는 길은 막혀 있다.

“반면 이제 막 발돋움하는 태양엔 빈자리가 많습니다. 얼마든지 위로 올라갈 수 있죠. 고작 중장비 사장 자리가 끝이 아닙니다.”

태수는 마지막으로 물었다.

“청일이냐 태양이냐. 선택은 당신 몫입니다.”

이창원은 눈을 낮추고, 허리를 낮추고, 욕심을 버려야 할 때가 왔음을 직감했다.

“만일 청일이 아니라 태양을 택한다면 직위는······.”

“아까 말 못 들었습니까? 1계급 강등.”

태수가 사장이니 원래 이창원에게 떨어질 직위는 부사장이었다.

“그럼 설마 전무입니까?”

“싫습니까?”

당연히 싫다.

사장에서 전무까지 떨어지는데 10분도 안 걸렸다.

하지만 전무에서 사장까지 오르는데 10년도 넘게 걸렸다.

“난 아직 당신의 능력을 모릅니다.”

솔직히 태수는 그의 능력을 익히 알고 있다.

더 윗자리를 내놓으려면 얼마든지 내놓을 수 있었다.

지금 태양엔 덩치가 커진 것에 비해 인재가 극심하게 부족한 처지니까.

하지만 태수는 일부러 전무 자리를 제안했다.

“난 능력 있는 자를 원합니다. 내게 충성과 자리를 구걸하지 마십시오. 대신 당신의 능력과 쓸모를 증명하십시오. 그런 건 스스로 쟁취하는 겁니다.”

태수의 요구는 간단했다.

“중요한 일을 처리하는 대가로 내게서 발언권을 얻어 내십시오. 연봉과 신임을 당당히 받아 내십시오. 원하는 자리까지 스스로 올라와야죠.”

태수는 씩 웃는다.

“그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은 당신뿐이라고, 그때 내게 제대로 요구해야죠. 그게 순서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이창원은 마음이 복잡했다.

‘자존심을 지키고 백수가 되느냐, 자존심을 버리고 전무가 되느냐. 그런데 참 이상하지. 오히려 그동안 차게 식었던 가슴이 뛴다.’

태수는 무언으로 선택을 강요하고 있었다.

청일에 충성할 생각이면 이대로 곱게 꺼지라고.

‘나한테 이런 제안을 건넨 사람이 존재하기는 했나?’

이창원은 유능한 남자다.

당연히 주변에 그를 얻고 싶어 하고, 탐내는 사람이 부지기수다.

그들이 하는 소리는 대개 비슷하다.

-내게 충성을 바쳐. 그럼 좋은 일이 있을 거야.

-나만 믿고 끝까지 가자. 라인 좋은 것을 왜 몰라.

-열심히만 해. 그럼 자네 자리는 내가 끌어올려 주지.

모두 지키지 못할 부도 수표만 남발한다.

‘그런데 이 남자는 내게 스스로 능력을 증명하라고 요구하는군.’

이창원은 태수가 색다르게 느껴졌다.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아. 오히려 자신에게서 능력껏 얻어 내 보라고 부추기고 있질 않나.’

능력만 있으면 뭐든 내어 주겠다는 포부까지 엿보인다.

젊은 친구가 생각보다 화끈하고 대범하다.

‘보고 있어도 믿기지 않아. 다른 재벌 기업 총수 이상의 압박감과 무게감이다. 회장님보다도 묵직하군.’

이창원의 마음이 울렁였다.

‘어차피 청일에 돌아가도, 다른 회사로 옮겨도 내 한계는 정해져 있어. 월급쟁이 사장은 얼마든지 갈아 치울 수 있지. 좋아, 한번 새로운 도전을 해 보자.’

연줄과 사내 정치가 아닌, 능력껏 재주껏 모든 것을 얻는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격하게 뛰어 댄다.

마침내 그가 허리를 90도로 숙였다.

“태양 중장비의 전무 자리, 맡아서 열심히 해 보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사장님.”

“좋습니다. 함께 잘해 봅시다.”

태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를 옆에서 지켜보던 노일국은 숨을 들이마셨다.

‘이창원이 이 작은 회사의 전무 자리를 넙죽 받아들이다니. 다른 기업으로 가도 요직에 앉을 수 있을 만한 놈인데.’

이창원을 간단히 손에 넣는 태수를 보는 눈이 새삼스럽다.

‘하긴. 저런 소리를 들으니 나까지 절로 주먹이 쥐어지는데. 왜 안 그렇겠어.’

라인과 충심에 의지한 권모술수가 아닌, 능력으로 자신을 증명해 온 건 노일국도 마찬가지였다.

노일국은 저도 모르게 꽉 쥐었던 주먹을 쥐었다 펴길 반복했다.

얼마나 긴장했던지 손에 땀이 흥건했다.

‘가슴이 뜨겁다. 마치 처음 입사해서 창창한 미래를 그리며 흥분했던 그때처럼.’

노일국은 왠지 혼자만 소외된 것 같았다.

입사 동기이자 인생의 라이벌만 스카웃 제의를 받으니 어째 기분이 참 그렇다.

‘나도 저놈 못지않게 능력 괜찮은데. 스스로 증명해서 쟁취할 자신도 있는데. 왜 나한텐 묻지를 않아.’

그때 태수는 품에서 뭔가를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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