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협상의 승리자(4)
태수와 한청호가 들어선 회의실 밖.
우당탕탕 요란한 소리를 들으며 금산의 장준용이 혀를 찼다.
“남의 호텔을 다 부숴 놓는구나, 망할 자식.”
옆에 있던 김 비서는 웃었다.
“그래도 미리 싹 치운 탓에 부술 것도 몇 개 없잖아요.”
저 안에 있는 거라곤 테이블 하나, 소파 네 개, 쓰레기통 하나뿐이다.
넓고 넓은 대회의실을 채우기엔 너무나 초라한 집기들이었다.
그것도 폐기 처분 예정인 것들로 가져다 놓았다.
장준용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강태수, 고 녀석이 참 대단하긴 대단한 놈이란 말이야.”
“그러게요. 한청호가 저리 미쳐 날뛸 걸 미리 내다봤단 뜻이잖아요.”
“한청호가 쓰레기 짓을 해 놨어. 내가 강태수였다면 지금 한청호를 뭉개 놨을걸? 길로틴 초크, 파워 스플래시, 아토믹 드롭, 서머솔트 킥, 숄더 슬러스터, 문 설트.”
프로레슬링 기술 들어가는 시늉을 하는 장준용을 보며 김 비서가 고개를 돌린다.
돼도 않는 소리는 그만하란 뜻이다.
무안해진 장준용이 흠흠, 헛기침했다.
“하여튼 저 안에서 날뛰고 있어야 할 놈은 한청호가 아니라 강태수란 말이야.”
“그건 그렇죠.”
한청호가 무슨 짓거릴 해 놨는지 김 비서가 모를까.
그래서 금산 호텔 로비에서 장준용과 함께 한 소리 거든 터다.
그런데 정작 회의실 안에서 미쳐 날뛰는 건 강태수가 아니라 한청호다.
“청일 정유 빼앗기는 건 정해진 수순이었어. 그러니 이리 시끄러울 일이 없을 것인데.”
“대체 강태수가 무슨 소릴 했을까요?”
“그게 궁금해. 체면 차리는 한청호가 저리 지랄염병을 떨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텐데.”
궁금하기는 김 비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기업의 인수 합병 협상 자리에 끼어들 수도 없는 노릇이다.
금산의 장준용은 슬쩍 입맛을 다셨다.
“이따 끝나고 같이 축하주 한잔하면서 슬쩍 물어보는 게 낫겠지?”
“좋은 생각입니다, 회장님.”
장준용과 김 비서는 마주 보며 웃었다.
한청호 당한 얘기를 안주 삼는다면 유례없이 즐거운 술자리가 될 것 같다.
* * *
태수가 흔들어 대는 사진.
“결정하시죠. 각하께 이거 보내요, 말아요?”
한청호와 박정환의 부인이 나란히 팔짱 끼고 호텔에서 나오는 사진이었다.
그 밖에도 차 안에서 키스하는 사진, 껴안고 있는 사진도 있었다.
“이리 내!”
한청호는 재빨리 태수의 손에서 사진을 낚아챘다.
사진을 든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 이건 절대 박정환 손에 들어가선 안 되는 물건이야! 박정환이 이걸 보면 청일은 끝장이다!’
로비였다.
박정환이 호락호락하게 넘어오질 않으니 어쩔 수 없이 영부인에게 손을 뻗쳤다.
그 대가로 청일은 국가 지원을 받아 청일 중장비를 세울 수 있었다.
‘이 새끼가 그걸 알고 일부러 청일 중장비를 요구했구나!’
미리 한 장짜리 계약서를 준비해 온 놈이다.
상황이 이렇게 될 줄 예상하고 일부러 청일 중장비를 집어넣은 게 틀림없다.
‘박정환이 제 마누라 건드린 걸 알면 나도 죽고, 저 새끼도 죽고, 다 죽어! 제 치부를 알고 있는 놈을 가만히 놔둘 박정환이 아니야!’
한청호는 죽일 듯이 태수를 노려봤다.
“이게 박정환 손에 들어가면 너도 죽어, 새끼야. 네가 나를 죽이자고 네 목숨까지 걸겠다고? 웃기지 마. 넌 절대 못해.”
“글쎄요. 난 모르는 일이라.”
태수는 씩 웃었다.
“제 목숨은 안 걸어도 될 것 같습니다.”
“시치미 떼지 마. 그런다고 박정환이 믿어 줄 것 같아?”
“믿어 줄 겁니다. 그리고 전 당사자도 아니지 않습니까? 죽어도 당사자가 죽겠죠. 안 그렇습니까?”
태수의 말에 한청호는 코웃음 쳤다.
“솔직히 불어. 이건 어디서 구했어?”
“어디서 구했겠습니까? 죽은 사람한테서 구했지.”
짐작 가는 놈이 있다.
그의 동선을 꿰고 있는 놈.
“운전기사, 이 새끼!”
운전기사는 이미 죽고 없다.
지난번 특수 요원이 중앙 정보국에 끌려갈 때 꼬리를 자르기 위해 처리했다.
그런데 그 죽은 놈이 이젠 산 사람을 붙들고 늘어졌다.
한청호가 속마음을 숨기며 은근하게 물었다.
“사진이 이것뿐이야?”
“이것뿐입니다.”
“잘됐군.”
쫙쫙쫙. 좌악. 쫙.
한청호가 사진을 있는 힘껏 찢었다.
잘게 쪼개져서 식별할 수 없을 때까지.
‘젠장! 죽을 뻔했다.’
한청호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한 줄기 식은땀이 차갑다.
한청호는 태수를 쏘아보며 낮게 웃었다.
한고비를 이렇게 넘기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큭큭큭. 이걸 어쩌나? 이것밖에 없는 증거 사진이 사라졌네? 이젠 박정환한테 어떻게 이를 생각이지?”
“다행히 덕분에 전 모르는 일이 됐습니다. 그러니 제 목숨은 멀쩡하겠네요.”
태수의 품에서 다른 게 더 나왔다.
“필름만 가져다 바치려고요. 한청호 운전기사의 유품을 전해 드리는 일인데, 제가 뭘 봤어야 알죠. 안 그렇습니까?”
한청호의 등 뒤로 식은땀이 분수처럼 줄줄 흘러내렸다.
“이 미친 새끼가!”
“각하께서 사진을 뽑아 보시면 누구를 죽일지 이젠 명확해지셨습니까? 거기에 제가 껴있다고 자신할 수 있으십니까?”
한청호가 손을 뻗어 필름 통을 낚아채려 했다.
하지만 사진과 달리, 태수는 이번엔 호락호락하게 내주지 않는다.
“계약서! 아니면 필름! 선택해!”
“으아아아!”
한청호가 눈이 뒤집혀서 빼앗으려 했지만 여의치 않다.
“박 비서! 저거 뺏어!”
“네? 네!”
저쪽 구석에서 벌벌 떨던 박 비서가 겨우 걸음을 뗀다.
하지만 그 앞에는 한수가 막아섰다.
“벽에 붙어.”
“네?”
한수가 주먹으로 박 비서 관자놀이 근처 벽을 때렸다.
쾅 소리가 나자 박 비서는 바짝 쫄았다.
온몸이 사시나무 떨 뜻 떨어 댄다.
“벽에 붙으라고.”
“네······.”
박 비서는 아예 뒤돌아 벽에 이마를 딱 붙였다.
“벽에서 떨어지면 알지?”
“네······.”
박 비서는 덜덜 떨면서 뒤돌아 보지 못했다.
그 꼴을 보자 한청호는 울화통이 터졌다.
똘똘하고 야무진 송 비서와 달리 박 비서는 대가 너무 약한 게 흠이다.
그래서 박 비서를 중용하지 않았었는데, 안일하게 두었다가 중요한 순간에 그 대가를 치르게 됐다.
“강태수! 그게 각하 손에 들어가면 너도 연루될 거야! 내가 어떻게든 널 끌어들일 거야! 그건 내가 장담할 수 있어!”
“불륜 사건에 연루되어 봤자죠. 청일 그룹이 박살 나는 것에 비하면 대수롭겠습니까?”
태수는 웃으면서 필름통을 흔들었다.
“청일 정유와 청일 중장비를 10원씩, 총 20원에 먹으려면 그 정도는 감수해야죠. 안 그렇습니까?”
한청호가 독하게 노려본다.
“이곳에서 필름을 갖고 나간다고 하더라도, 각하께 도달하기까지 갈 길이 멀다! 내가 그 중간에 손을 못 쓸 것 같으냐? 넌 쥐도 새도 모르게 죽어!”
태수는 협박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지금 회의실 문밖에 금산의 장 회장님과 비서가 있을 겁니다. 지금 우리가 계약을 끝내기만 기다리고 있겠군요.”
“뭐?”
그들이라면 아까 들어오면서 호텔 로비에서 만났다.
“필름을 문밖에 전해 줄까요? 금산의 장준용이 청일의 한청호 위협에 굴할 것 같습니까? 각하께 필름을 전달하지 못할 것 같습니까?”
태수의 말이 거짓말처럼 들리지 않았다.
“당신은 잃을 게 너무 많잖아. 안 그래? 한청호, 당장 선택해!”
태수의 말이 벼락처럼 떨어졌다.
“박정환 손에 필름을 넘기고 청일 그룹이 무너지느냐! 아니면 나한테 청일 정유와 청일 중장비를 넘기느냐! 결정할 시간 10초 준다! 10! 9! 8! 7······.”
카운트다운하면서 태수는 저벅저벅 회의실 문으로 걸어간다.
거침없이 문고리에 손을 대 문을 연다.
“2! 1!”
열린 문틈 사이.
정말로 문밖에 금산의 장준용과 김 비서가 서 있다.
순간 그들과 한청호는 눈이 마주쳤다.
“0!”
“그만!”
한청호는 마침내 두 손을 들었다.
“계약서에··· 사인하지······.”
“좋은 결정을 내리셨습니다.”
태수가 도로 회의실 문을 닫는다.
다급한 얼굴의 장준용이 손을 뻗고, 그걸 김 비서가 황급히 말리는 모습이 문에 가린다.
달칵.
문은 완전히 닫혔다.
털썩.
긴장이 풀린 한청호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품에서 펜을 꺼낸다.
구겨질 대로 구겨진 계약서를 주섬주섬 편다.
바닥에 엎드린 채 사인을 한다.
‘사인하는 폼이 딱 석고대죄하는 죄인 같군.’
태수는 그 모습을 멀리서 내려다보았다.
한청호의 숙인 고개와 움츠린 등이 참 마음에 든다.
“끝났다.”
“아직 계약서 2부 더 있습니다. 제 것과 각하께 바칠 것. 사인해야죠.”
“어디 있나? 줘. 마저 사인할 테니까.”
“당신이 날린 거, 당신이 주워서 해.”
테이블 위에 올린 계약서였다.
한청호가 테이블을 발로 차는 바람에 멀리 날아가 버렸다.
한청호가 바닥에 떨어진 계약서를 주워서 마저 사인한다.
한청호는 기운 빠진 얼굴로 태수를 봤다.
“이제 만족하나?”
아직 멀었다.
고작 청일 정유에 청일 중장비를 빼앗아 왔을 뿐이다.
하지만 한청호의 저 체념한 얼굴을 보는 건 매우 만족스러웠다.
“계약서에 사인했다. 그러니 필름을 다오.”
태수가 한청호에게 필름통을 던졌다.
한청호는 통에서 필름을 빼 형광등 불빛에 비쳐 본다.
“원본이 확실하군.”
“난 그런 거로 장난 안 칩니다.”
빛이 들면 필름이 망가져서 제대로 현상되지 않는다.
한청호는 그에 만족하지 않고, 필름 끝에 라이터를 가져다 대 불을 붙였다.
화르륵.
인화성 물질이라 그런지 잘도 탄다.
멍하니 필름이 타오르는 것을 보던 한청호.
사진 쪼가리도 쓸어 다 불에 집어넣는다.
순식간에 다 타서 재만 남았다.
한청호의 얼굴도 그새 하얗게 재만 남은 표정이었다.
“청일 정유, 청일 중장비. 잘 쓰겠습니다. 이건 약속했던 인수 금액.”
태수는 품에서 10원짜리 동전 두 개를 꺼내 적선하듯 던졌다.
쨍그랑. 데구루루.
20원이 한청호를 향해 굴러갔다.
정확하게도 잘 굴러 한청호의 앞에 들어간다.
“하, 하하, 하하하.”
한청호가 허탈하게 웃는다.
하지만 가슴속 깊이 끓어오르는 증오가 느껴지는 웃음이었다.
“강태수, 이번엔 네가 이겼다.”
한청호는 눈을 들어 태수를 노려보았다.
아까와 달리 다시 독기가 가득 들어찬 눈이었다.
“하지만 아직 난 끝나지 않았다. 승자는 맨 마지막에 웃는 사람이야.”
“그럼 내가 마지막에 웃겠군요.”
태수는 등을 돌렸다.
그 뒤를 한수가 따랐다.
한청호는 태수의 뒷모습을 보며 말했다.
“후환이 두렵지 않으냐?”
“후환? 무슨 후환?”
“너도 이제는 지켜야 할 게 많아졌다.”
“회사? 나랑 내 가족의 안전?”
태수는 등을 돌렸다.
한청호를 향해 걸어온다.
저벅저벅.
태수가 한청호의 앞에 섰다.
바닥에 주저앉은 한청호를 내려다보는 태수.
“아비나 자식이나 하는 말이 참 똑같아. 누가 교육했는지 알 것 같은 집안이로군.”
태수의 눈 역시 한청호 이상의 독기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해 봐. 당신이 할 수 있는 건 나도 할 수 있어.”
싸늘한 목소리였다.
“이것만 알아 둬. 나랑 내 가족이 변을 당하는 순간, 각 신문사와 방송사, 그리고 대통령 각하께 들어갈 물건이 하나 더 남았어.”
한청호의 안색이 변했다.
그날 서재에서 6시간이나 고민했던 그 세 가지.
그것이 모두 존재한다는 게 드러났다.
‘젠장!’
하나는 송 비서 터뜨렸고.
하나는 운전기사가 터뜨렸고.
나머지 하나는······.
“청일 그룹은 내가 아니어도 대통령 각하 손에 산산이 박살 날 거야. 난 그거면 돼.”
마지막 남은 하나가 제일 치명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