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협상의 승리자(3)
넓은 회의실엔 테이블 하나, 소파 의자 넷 밖에 없이 휑하다.
쉽게 옮길 수 없는 무거운 소파라, 자리 배치를 다시 하려 다 체면이 오히려 구길 지경이다.
상석에 앉아 주도권을 쥐려던 한청호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금산의 장준용은 돈이 없나 보군. 회의실 꼴이 이게 뭐야? 동네 슈퍼마켓 앞 평상도 아니고. 쯧.”
아까 장준용을 만났을 때 태수가 미리 언질한 탓이다.
-한청호가 난장판을 만들 테니까, 기물 파손이 우려되는 것들은 싹 다 치워 주십시오.
장준용은 가타부타 말없이 태수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그래서 앉을 겁니까, 말 겁니까?”
“건방진 새끼. 예의는 밥 말아 처먹었나.”
“앉기 싫으면 마시죠. 서서 사인하셔도 무방합니다.”
“쯧.”
어쩔 수 없이 한청호는 소파에 털썩 앉는다.
박 비서가 그 옆자리에 앉아 준비해 온 계약서를 꺼냈다.
한청호가 계약서를 태수에게 집어 던졌다.
“사인해.”
태수는 계약서를 훑어본다.
“개소리를 참 길게도 써 놨습니다.”
태수가 계약서를 테이블 옆에 마련된 휴지통에 처박는다.
한 점 미련도 없는 깔끔한 솜씨였다.
한청호의 눈썹이 꿈틀댔다.
“지금 청일 정유를 거부한 건가?”
“이런 계약서엔 사인 못하겠군요.”
“그럼 사인하지 마.”
한청호가 비릿하게 웃는다.
“난 분명 청일 정유 인수 합병을 제안했는데 강태수 네가 거절한 거다. 각하께서도 더는 뭐라 하지 못하시겠지. 그럼 이만 가지.”
“잠깐. 아직 안 끝났습니다.”
“난 끝났어.”
한청호는 벌떡 일어선다.
홀가분한 얼굴로 회의실 문을 향해 몸을 돌렸다.
하지만 태수의 말이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각하께 우리가 합의했다는 걸 문서로 보여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럴 필요가 있나?”
한청호는 거만한 얼굴로 애송이를 훈계했다.
“어려서 뭘 모르나 본데, 협상이 파투날 때는 원래 자리를 뜨는 것으로 끝나는 거야.”
“평범한 인수 합병이었다면 그걸로 족했겠죠. 하지만 이건 대통령 각하께서 명하신 인수 합병 계약이 아닙니까?”
저 말이 문제였다.
한청호가 회의실을 떠나지 못하게 붙드는 올가미 같은 말.
“전 협상이 시작하자마자 청일 쪽에서 청일 정유 넘기기가 아까워서 도망갔다고 보고드릴 생각입니다.”
“계약서를 집어 던진 건 너야, 강태수.”
“이런 계약서엔 사인을 못하겠다고 말한 건 잊으셨나 봅니다.”
태수는 깍지를 끼며 말했다.
“결과만 봅시다. 이대로 나가면 각하께서 청일에 불호령을 내리실 텐데. 어차피 또 만나게 될 일, 최종 부도 전에 다시 볼 수 있을지······.”
박정환은 최종 부도 전에 인수 합병 절차를 끝내라고 단단히 못 박았다.
1차 부도 상태인 청일 정유는 지금도 최종 부도를 향해 달리고 있다.
시간은 한청호의 편이 아니다.
‘젠장! 이건 피할 수가 없군.’
어쩔 수 없이 한청호는 도로 소파에 풀썩 앉았다.
단번에 체면도, 자존심도, 양복도 구겨지고 말았다.
“인수 합병 무산에 관련된 합의문을 쓰지.”
“생각 없습니다.”
“그럼 왜 날 잡았어?”
“청일 정유, 저한테 제대로 넘겨주셔야죠.”
강태수가 눈짓하자 옆에 앉았던 한수가 서류 봉투를 내놓는다.
강태수가 한 장짜리 계약서를 꺼낸다.
테이블 위로 쭉 밀어 한청호 앞까지 배달한다.
“이건 뭐지?”
“제가 준비한 계약서입니다. 누구 거랑 달리 보기 쉽고, 간편하고, 확실하죠?”
무려 수백억 원짜리 청일 정유의 인수 합병 계약서였다.
관련된 법률 조항만 하더라도 수십 개가 동원되는 빅딜이었다.
당시 물가가 2020년 대비 1/30 정도임을 감안할 때 수조 원짜리 계약이다.
그런데 계약서가 달랑 한 장이다.
“무려 수백억짜리 청일 정유가 오가는 계약이야! 지금 나랑 장난해?”
“말 똑바로 합시다. 장난질은 청일에서 친 거고.”
그 얄팍한 수작을 모를 것이라 생각하는 건가?
“이딴 게 계약서라고?”
“보시다시피. 한 장짜리 계약서도 계약서는 계약섭니다.”
계약서가 별건가.
내용에 서로 합의하고 이름 쓰고, 도장 찍으면 그만이지.
“고작 한 장입니다. 얼마 되지도 않는 계약서, 일단 읽어나 보시죠.”
“읽어 볼 필요도 없다.”
“그럼 그냥 거기에 사인하고 도장 찍고 도로 나가시던가요.”
한청호는 계약서를 와락 구겨 쓰레기통으로 처넣었다.
태수가 했던 것과 똑같이.
“너랑 나랑 피차일반이다. 이번엔 비긴 것으로 치자.”
“저랑 달리 한 회장님께선 그 계약서, 쓰레기통에서 도로 꺼내셔야 할 것 같군요.”
태수는 소파에 기대며 웃었다.
“아까와 상황이 조금 달라지신 거, 모르시겠습니까?”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다. 우린 똑같이 상대가 제시한 제안을 거절했다. 이게 전부야.”
한청호는 다시 벌떡 소파에서 일어섰다.
제안했다 퇴짜당한 계약이 둘이니 이번엔 발목 잡힐 것도 없을 터다.
하지만 태수는 고개를 저었다.
“강태수가 청일에 인수 합병 계약을 제안했다. 하지만 청일에서는 계약서를 읽어 보지도 않고 고의적으로 거절했다. 각하께서 어떻게 받아들이실까요? 불호령이 더 확실해졌군요.”
문제가 생겼다.
한청호의 얼굴이 와락 구겨진다.
체면 자존심, 양복, 얼굴, 계약서까지 죄다 구겨졌다.
“강태수!”
“앉아서 차분하게 계약서부터 읽어 보시죠.”
“그래, 어디 한번 읽어 보기나 하자!”
어쩔 수 없이 한청호는 다시 소파에 앉았다.
기세 싸움에서 번번이 밀렸다는 생각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다.
“계약서!”
한청호가 태수에게 손을 내밀어 계약서를 요구했다.
태수는 쓰레기통을 슬쩍 가리켰다.
“진작 드렸잖습니까. 꺼내서 읽어 보시죠.”
한청호가 주먹을 꽉 쥐었다.
이가 절로 바득바득 갈렸다.
박 비서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쓰레기통에서 잔뜩 구긴 계약서를 꺼냈다.
열심히 박박 펴서 한청호에게 건넨다.
“회, 회장님. 여기 이거······.”
“줘.”
한청호는 그제야 계약서를 받아 읽는다.
고작 몇 줄밖에 안 되는 내용이다.
그런데 읽을수록 한청호는 눈을 점점 더 크게 부릅뜬다.
“이런 개새끼가!”
한청호가 다시 계약서를 와락 구겨 쓰레기통에 도로 처넣었다.
화를 참지 못하고 쓰레기통을 구둣발로 뻥 찬다.
와그작! 데구루루.
요란한 소리와 함께 쓰레기통이 부서지며 회의실 바닥을 나뒹군다.
그 안에 들었던 쓰레기도 자연히 바닥에 어지럽게 흩어졌다.
“지금 나 보고 저 계약서에 사인을 하라고?”
“네.”
“미쳤냐?”
“회장님은 그래 보입니다.”
“강태수, 너 미쳤냐고!”
“보다시피 전 멀쩡합니다.”
태수는 태연하기만 하다.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씩씩대는 한청호와는 완전히 대조적이다.
“미치지 않고서야 저런 걸 나한테 들이대? 사인? 죽어도 못해!”
“하게 될 겁니다.”
쾅!
한청호는 화가 나서 테이블을 걷어찼다.
내친김에 이번엔 소파까지 밀어 넘어뜨렸다.
와당탕탕!
너무 화가 나다 보니 없던 힘도 절로 난다.
옆에 앉았던 한수도 잔뜩 긴장해서 형과 한청호를 번갈아 본다.
박 비서는 벌써 회의실 구석으로 도망가 벌벌 떨고 있다.
“이런 날도둑놈 새끼를 보았나! 각하의 비호를 믿고 지금 나랑 해 보자는 거야?”
상황이 이 지경인데도, 태수는 너무나 편안하다.
동요는커녕 표정마저 은은한 미소 띤 그대로다.
당연히 한청호는 독이 오를 대로 올랐다.
“청일 정유 인수 금액이 10원?”
한청호가 열 받은 첫 번째 이유였다.
“10억도 아니고 10원? 이게 장난이 아니면 뭐가 장난이야!”
그뿐만이 아니다.
“인수 합병에 사인하는 시를 기준하여 이전에 발생한 청일 정유 적자에 관해선 전액 청일 그룹이 부담한다?”
그룹 내 모든 적자를 일부러 청일 정유에 때려 박은 한청호였다.
그런데 그걸 도로 청일 그룹이 갚아야 한다니.
“내가 왜 그걸 갚아! 인수 합병의 기본도 모르는 새끼가 어디서 개수작이야!”
원래 인수 합병은 해당 기업의 부채까지 함께 떠안는다.
부채와 자산, 순이익 및 발전 가능성 등을 따져 보고 타당성 검토까지 끝나 결정되는 게 인수 금액이다.
“청일 정유에 부채가 많으니까, 그래, 인수 금액 10원까지는 내가 이해한다고 쳐! 그런데 인수 금액 10원을 제시한 주제에 부채는 마다하겠다고? 이게 말이야 막걸리야?”
한청호가 환장하는 두 번째 이유다.
한마디로 태수는 지금 부채는 마다하고 청일 정유를 공짜로 삼키겠다고 대놓고 말하고 있었다.
한청호가 열 받는 대목은 또 있었다.
“게다가 상도덕을 무시하고, 사회 경제 질서에 해악을 끼친 점을 심히 반성하여 청일 중장비 역시 10원에 넘기는 것으로 사과를 구한다?”
박정환이 넘기라고 지시하지도 않은 청일 중장비까지!
그것도 역시 10원!
이쯤 되니 한청호가 눈깔을 뒤집고 게거품을 무는 게 당연했다.
“이게 미친 게 아니면 뭐가 미친 짓이야! 이 또라이 새끼야!”
암만 생각해도 상식 밖이다.
자신이 제대로 읽은 건지까지 의심스럽다.
이젠 1분 전 기억조차 믿을 수 없다.
“미치려면 혼자 곱게 미쳐야지! 어디서 이딴 걸 계약서라고!”
급기야 한청호는 바닥에 나뒹구는 구겨진 계약서를 다시 펴 봤다.
한 장짜리 계약서, 그것도 몇 줄 없다.
몇 번을 봐도 똑같다.
그러니 천하의 한청호도 돌지 않고 배기랴.
“으아아아-!”
한청호가 분에 겨워 팔딱팔딱 뛰었다.
미친놈이 따로 없었다.
“청일 정유가 최종 부도 나도! 각하께서 나한테 불호령을 내려도! 절대로 사인 안 해! 이건 안 되는 일이야!”
한청호가 파들파들 떨면서 외쳤다.
손에 들린 구겨진 계약서를 태수의 얼굴에 들이밀며 분통을 터뜨린다.
“각하께서도 이 계약서를 보신다면 더는 날 나무라시지 못할 거다! 강태수, 넌 선을 넘었어!”
한청호가 등을 돌렸다.
박정환에게 들이밀 계약서를 움켜쥔 채다.
그때 태수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선을 넘은 건 내가 아니라 당신이지, 한청호.”
태수가 품에서 뭔가를 꺼냈다.
“대통령 각하께서 이걸 보면 어떻게 나오실까?”
한청호는 멈칫 걸음을 멈추었다.
태수가 너무 자신만만한 게 걸린다.
‘강태수 저 새끼가 대체 뭘 믿고?’
자신감의 이유를 모르니 무시할 수도 없다.
그렇다고 돌아서기엔 정말로 자존심이 밑바닥까지 드러날까 봐 싫다.
순간 오만 감정이 다 들었다.
‘박정환과 관계된 일이다. 결코 작은 일이 아닐 거야.’
한청호는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에 짙게 밴 패배감과 굴욕감.
전생에선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 눈을 보며 태수는 쐐기를 박았다.
“계약서에 사인 해. 나한테 청일 정유, 청일 중장비를 10원씩에 팔아. 거부하면 난 이걸 각하께 보낼 거야.”
태수의 손에 들린 건 사진이었다.
그걸 본 한청호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손이 벌벌 떨리기 시작했다.
“서, 설마······!”
서재에서 6시간이나 고민하며 박정환이 마음 돌린 이유를 찾았을 때.
총 세 가지 점이 마음에 걸렸었다.
그런데 그중 하나가 태수의 손에서 튀어나온 것이다.
“안 돼!”
한청호는 비명을 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