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산 찍고 건설 재벌-86화 (86/230)

86. 협상의 승리자(2)

한청호는 그날 박정환과 독대를 마치고 나오면서 태수에게 말했다.

-넌 쓰레기만 갖게 될 거다, 강태수.

-넌 지금 이 순간을 후회하게 될 거다. 난 호락호락하게 당하지만은 않아.

-그러니까 넌 그걸 끌어안고 같이 죽어.

한청호는 그때 이미 작정하고 그런 말을 남겼으리라.

한청호라면 이리 나올 것이라 짐작하고 있던 태수다.

그래서 태수는 말했다.

-당신이 갖고 있는 것, 빼앗기고 싶지 않은 것. 난 그런 것들을 당신에게서 빼앗아 올 겁니다.”

-그러니 당신이 그걸 쓰레기라고 불러도 상관없습니다.

실제로 청일 정유의 모든 것을 빼내 팔아 치워 빈껍데기가 되더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수가 얻어야 할 것은 충분히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준용은 이해할 수 없었다.

“일부러 한청호를 도발했다고? 이런 더러운 개수작을 부려 주길 바라고? 이건 또 무슨 개소린가?”

“청일 정유 도산이 위에서 결정됐습니다. 한청호는 이를 거부할 수는 없는 처지죠.”

“그렇지. 대통령 각하께서 직접 명령을 내렸으니까.”

“빼앗기고 싶지 않은 청일 정유를 억지로 빼앗긴 한청호예요. 그러니 심술이 나서 할 수 있는 모든 보복 수단을 강구해 머리를 굴릴 게 아닙니까.”

그 욕심 많고, 뒤끝 길고, 추악한 인간이 순순히 청일 정유를 내놓을 리 없다.

“만일 회장님이 한청호의 입장이었다면 어땠을 것 같습니까?”

“으음. 나라면 이 정도까지는 하지 않았을 걸세. 그냥 줘 버리고 말지. 어쩔 수 없는 일에 발버둥 치는 건 내 성미에 맞지 않아.”

장준용은 말했다.

“만약 각하께서 내게 금산 정유를 내어놓으라 하셨다면 난 대신 다른 걸 요구했을 거야.”

“뭘 요구하실 겁니까?”

“이를테면 세금 인하, 다른 사업권, 그린벨트 해제, 간척 사업 허가 같은 거?”

확실히 장준용과 한청호는 다른 타입의 인간이다.

“각하께서 주라는 건 줘 버리고, 차라리 다른 돈 벌리는 사업에서 이득을 보는 게 낫지.”

“그게 한청호와 회장님의 차이입니다.”

태수가 금산의 장준용과 함께 손잡은 이유이기도 하다.

“한청호는 청일 정유를 잃으면서부터 많은 것을 잃게 될 겁니다.”

심지어 그 와중에 얄팍한 수작을 부렸다.

차라리 멀쩡한 청일 정유를 넘겼다면 잃지 않아도 되었을 것들까지 잃게 된 것이다.

한청호가 스스로 자초한 일이다.

“첫째, 평판과 신뢰를 잃었습니다.”

청일이 크게 성장할 수 있었던 건 브랜드가 주는 이미지가 컸다.

청일 아파트는 ‘강남 최고급 아파트의 대명사’가 되어 청일 건설에 날개를 달아 주었다.

청일 랜드는 어린이들의 꿈과 희망의 대표적인 놀이 공원으로 자리매김하며 최고급 브랜드 이미지에 일조했다.

청일 제철소는 청일이 갖던 중공업, 전자 화학 등과 맞물려 엄청난 산업 시너지를 일으켰다.

그 덕에 청일 그룹이 한국 최고 종합 중화학 공업 재벌이라는 인식을 주지 않았던가.

“청일은 청일 정유를 잃으면서 현재 강력하게 내세울 최고급 브랜드가 없습니다.”

최고급 브랜드 평판 대신 다른 평판을 얻게 될 것이다.

-일부러 회사를 도산시키고, 사회 경제에 해악을 끼쳤다.

-상도덕이 없다.

-쓰레기 같은 짓을 일삼는다.

-청일을 인수하면 이런 개 같은 일을 당한다.

기업들의 머리에 이와 같은 사실이 깊게 박힌다.

청일이 어려울 때 누구도 청일을 인수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신뢰를 쌓는 것은 눈덩이 굴리는 것과 같습니다. 쌓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는 만큼 나중에 빛을 보지요. 차후 기업의 행보마다 크고 묵직한 무게를 더해 주는 게 신뢰입니다.”

태수는 웃었다.

“반면 신뢰를 무너뜨리는 건 무척 쉽죠.”

이렇게 쓰레기 같은 얄팍한 수작 하나로 청일이 30년 넘게 쌓아 온 신뢰는 와르르 무너졌다.

사실 쌓은 신뢰라고 해 봐야 지금은 보잘것없다.

한청호는 정권에 빌붙어 기업을 키웠지 신뢰 경영을 바탕으로 재벌이 된 게 아니기 때문이다.

‘재벌이 된 다음엔 평판과 신뢰가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아직 한청호가 그걸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이야.’

그래서 이런 얄팍하고 더러운 수작을 부렸을 것이다.

결국 한청호는 이번에도 큰 손해를 봤다.

“지금처럼 석유 파동으로 모두가 어려울 때는 신뢰와 평판의 무게가 더 크게 받아들여질 겁니다. 살아남기 위해 택할 곳은 역시 믿을 수 있는 곳뿐이죠.”

그러니 청일이 거둬들일 수 있는 건 빈껍데기뿐일 터다.

“둘째, 청일 그룹의 주가가 일제히 떨어질 겁니다.”

청일 정유는 중화학 공업의 핵심이다.

모든 것은 석유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런 청일이 석유 공급처를 잃었다.

전과 달리 다른 기업에서 석유를 사 와야 한다는 뜻이다.

석유를 싸게 들여오던 때와 달리 마진을 얹은 웃돈을 줘야 필요한 석유를 들여올 수 있다.

“청일의 중화학 공업은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할 겁니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적자는 눈에 띄게 쌓이겠죠.”

이건 청일 정유를 잃었을 때부터 정해진 수순이다.

“중화학 공업에서 힘을 못 쓰는 청일이 과연 재벌 세계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요? 사람들이 과연 청일을 재벌 취급이나 해 줄까요?”

청일의 영향력이 다각도로 약해진다는 뜻이다.

“셋째, 청일 정유가 갖고 있는 땅과 핵심 시설들은 못 팔았습니다. 즉, 부동산은 멀쩡합니다.”

항만과 부두, 정유 저장 시설과 정유 정제 시설들은 옮길 수도, 팔 수도 없다.

청일 정유를 빈껍데기로 만든다고 해 봐야 동산에 해당하는 차, 사무 용품, 혹은 직원 정도가 아닌가.

모두 태수가 쉽게 채울 수 있는 것들이다.

“청일은 엄청난 돈을 뿌려 청일 정유를 특히 목 좋은 곳에 만들어 놨죠. 유조선이 쉽게 오갈 수 있는 곳, 공장과 멀지 않은 곳, 평탄하고 물류 수송이 편한 곳.”

태수가 웃는 이유다.

“그걸 전부 제가 싸게 가져오는 겁니다. 제가 하나부터 열까지 다 만들려면 청일 정유 인수 자금을 가지고는 턱도 없습니다. 거기에 들어가는 시간은 또 어떻고요.”

하지만 장준용은 한숨을 쉬었다.

“자네 말이 전부 맞네. 하지만 한청호가 떠넘긴 적자는 어쩔 셈인가? 거기다가 청일 정유 인수 자금 또한 만만치 않을 텐데. 그걸 다 떠안으면 득보다 실이 많아.”

한청호가 밑 빠진 독에 물은 빼가고 대신 오물을 집어넣었다.

아니, 독을 살포했다는 게 더 맞을 것이다.

태수를 죽이기 위해서.

“아직 재벌 반열에 오르지 못한 자네라면 청일 정유와 함께 침몰할 수 있다네.”

장준용이 걱정하는 이유였다.

‘그렇군. 장준용은 내게 든든한 비자금이 잔뜩 쌓여 있다는 것을 모르지.’

무려 1억 배럴의 석유를 팔아서 마련한 자금을 미국 투자 회사로 빼돌렸다.

아무도 태수가 그딴 일로는 끄떡없다는 것을 모른다.

‘거기에 난 청일의 적자를 떠안을 생각도 없는데.’

태수는 씩 웃었다.

“두고 보십시오. 한청호가 어찌 나오나. 계획대로 되진 않을 겁니다.”

태수는 자신하고 있었다.

“한청호는 청일에서 미리 준비한 계약서가 아닌, 제 계약서에 사인을 하게 될 테니까요.”

장준용이 한수가 들고 있는 서류 봉투를 슬쩍 보았다.

하지만 천하의 한청호가 저 계약서에 사인을 할 것 같진 않다.

“글쎄, 난 한청호가 그리 호락호락하게 넘어갈 것 같진 않군.”

장준용은 한청호를 잘 안다.

그와 오랜 세월 부딪쳐 왔기 때문에 자신할 수 있다.

그런데 태수는 장준용을 더 설득하지 않는다.

대신 다른 말을 꺼낸다.

“내기하실래요?”

믿지 않는 자에게는 설득하는 것보다 이게 훨씬 잘 먹힌다.

라흐만 때도 제법 짭짤하게 석유 맛을 봤다.

* * *

한청호가 금산 호텔에 도착했다.

금산 호텔 정문 앞에는 취재진이 잔뜩 몰려 있었다.

여기저기서 카메라 플래시가 터진다.

“청일 정유의 1차 부도, 이를 어떻게 해결할 생각이십니까?”

“청일 정유가 다른 기업으로 인수 합병된다는 소문이 사실인가요?”

“청일 그룹 전체가 청일 정유 지분을 매각하고 적자를 전부 몰아넣어 일부러 도산시켰다는데, 이에 대한 입장을 말씀해 주십시오!”

한청호는 입을 꾹 다물고 묵묵부답이다.

박 비서와 운전기사가 서둘러 길을 만든다.

취재진을 뚫고 금산 호텔 로비에 들어서는 한청호.

잠깐의 실랑이 탓에 비싼 양복이 잔뜩 구겨졌다.

한청호는 양복을 탁탁 털면서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누가 저것들 불렀어?”

“내가 불렀지.”

금산의 장준용이 로비에서 한청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만면에 웃음을 띠고서.

“장 회장은 이 시간에 왜 여기 있나?”

“마침 우리 금산 호텔에서 이런 빅 이벤트가 열린다기에. 청일 정유가 넘어가는데 배웅은 해 줘야지. 이별이라도 화려하게.”

화려하게 개망신 준다고 취재진을 잔뜩 불렀구나.

한청호는 와락 표정을 구겼다.

“요즘 한가한가 보지?”

“아니, 요즘 엄청 바쁘지. 우린 석유 수급에 문제가 없잖나. 원유 들여오기 무섭게 공장 돌리느라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야.”

그 바쁜 시간을 쪼개서 굳이 나왔단 말이다.

“청일 정유 직원들, 일자리 잃고 마땅히 갈 곳이 없다던데, 금산 정유에서 받아 줄까?”

안 그래도 청일 정유를 빼앗기느라 열불이 난 한청호의 마음에 기름을 들이붓는다.

“헛소리는 그쯤하고.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일부러 여기까지 나온 용건이 있을 텐데?”

장준용이 고개를 삐딱하게 든다.

“쓰레기 짓을 해 놨던데.”

“남의 일에 신경 꺼.”

“각하께서도 이걸 알고 계신가?”

장준용의 일침에 한청호는 웃었다.

“각하께 청일 정유를 내놓겠다고 했지 ‘곱게’ 내놓겠단 소리는 안 했다.”

진즉에 작심했단 뜻이었다.

장준용이 혀를 찼다.

“쯧쯧, 재벌 회장이란 작자가 새파랗게 젊은 애송이를 상대로 유치하게도 군다. 옆에서 지켜보는 내가 다 쪽팔리다.”

“그럼 배포 큰 금산이 그 새끼한테 금산 정유 내놓던가!”

한청호가 장준용의 어깨를 일부러 치고 지나간다.

“망할 새끼가!”

욱한 장준용을 금산의 김 비서가 뜯어말린다.

“회장님, 고정하세요. 배포 큰 회장님이 참으셔야죠. 밴댕이 소갈머리랑 머리채 잡고 싸워서 뭐하겠어요? 수준 떨어지게.”

욱한 청일의 박 비서가 뒤를 돌아본다.

하지만 금산의 장준용과 눈이 딱 마주쳤다.

박 비서는 어쩔 수 없이 입술을 깨물고 한청호를 따라간다.

뒤에서 금산의 김 비서가 장준용를 달랜다.

“이번엔 회장님이 이해해 주셔야 합니다. 지금 청일 정유를 눈 뜨고 빼앗기는데 속이 얼마나 쓰리겠어요. 그런 데다 소금을 뿌려 대니 얼마나 따가워요?”

도저히 못 참겠다.

박 비서가 돌아보며 눈을 흘겼다.

“안 그래도 저기서 피눈물 줄줄 흘리며 나올 텐데 계약서 사인하기 전부터 울리면 안 되죠. 불쌍한 놈 울린다고 손가락질받아요. 이쯤 하세요.”

말리는 김 비서가 더 밉다.

* * *

인수 합병 장소로 마련된 회의실엔 태수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시간 개념이 좀 부족하시네요.”

한청호는 일부러 늦었다.

협상은 기세 싸움이다.

기다리는 자일수록 초조해지고, 생각이 많아진다.

중요한 자일수록 늦게 도착해 존재감을 뽐내는 법이다.

‘푸틴과 트럼프가 즐겨 쓰던 수법이었지. 결과가 미리 다 정해진 일도 협상이랍시고 한청호가 잔머리를 굴리네.’

한청호의 수작은 뻔했다.

이 바닥에서 닳고 닳은 태수가 어찌 그것을 모를까.

‘애송이 새끼가 동요하지 않은 척 연기하는 게 제법이군.’

어째선지 먼저 자리를 차지한 태수가 훨씬 느긋하고 여유롭다.

마치 주인이 손님 대하듯 말이다.

“앉으시죠.”

태수는 소파에서 일어나지도 않은 채 맞은편 자리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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