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산 찍고 건설 재벌-85화 (85/230)

85. 협상의 승리자(1)

태수는 재빨리 염탐을 멈췄다.

“어··· 우리 사장님 차가 없네. 벌써 갔나 봐.”

“그 남자, 술 마시지 않았어요?”

“어··· 그게··· 아마도 운전기사?”

“아, 그렇구나. 당연한 걸 바보같이 물었네.”

운전기사가 없을 수도 있다는 건 상상조차 하지 않는 박경혜다.

집안끼리 친분이 깊은 탓에 어려서부터 함께 어울렸던 박철완이었지만 상대가 대통령 딸인 이상 쩔쩔매지 않을 수도 없었다.

“우리 사장님은 왜 찾아?”

“잘생겼잖아요.”

“······.”

정윤아가 태수를 돌아본다.

태수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박철완은 안절부절못하다가 좋은 핑계를 찾았다.

“앗, 경혜야, 너 구두에 진흙 묻었다.”

“어? 정말.”

“이만 돌아가자. 구두가 망가지기 전에 빨리 닦아 내야지.”

박경혜가 어쩔 수 없이 호텔 정문을 향해 돌아간다.

그걸 본 태수는 금산 호텔 정문에서 택시를 불러 타고 가려던 계획은 완전히 포기했다.

태수는 정윤아에게 아주 작게 속삭였다.

“혹시 운전할 줄 압니까?”

* * *

태수와 정윤아는 결국 뚜벅이 신세가 되었다.

70년대엔 여자 운전자가 별로 없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금산 호텔에서 제법 멀리 떨어진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왔다.

“버스는 끊겼고, 택시도 영 안 잡히는군요.”

“그러게요.”

정윤아는 별로 걱정하지 않는 눈치였다.

“걱정되지 않습니까? 이러다가 집에 못 갈지도 모르는데요.”

“택시가 안 잡힌다고 저를 길에 두고 혼자 가는 건 아니겠죠?”

그럴 수야 있나.

“집이 멉니까? 걸어갈 수 있는 거리면 바래다줄······.”

“멀어요.”

정윤아가 입을 삐쭉 내민다.

“오빠는 절 집에 들여보내고 싶으신가 봐요. 이렇게 오랜만에 기적처럼 다시 만났는데, 어떻게 같이 맥주 한 잔 마시자는 소리도 안 해요?”

그녀의 귀여운 투정에 태수는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그녀는 금산 호텔 방향을 슬쩍 보며 말했다.

“아까 그분 때문에 그러는 거예요? 인기가 아주 좋으시던데요. 따라다니는 여자도 있고.”

“절대 싫습니다.”

질겁한 태수가 격하게 고개 젓는다.

그러고 보니 이 남자는 그 여자를 피해 도망가고, 자신의 손을 잡고 여기까지 왔다.

그제야 정윤아는 배시시 웃었다.

“사우디 가서 전화 못한 거 맞죠?”

“귀국한 지 며칠 안 됐습니다.”

“제 연락처 잃어버린 거 맞죠?”

“이거 말입니까?”

태수가 지갑에서 그녀의 연락처를 꺼낸다.

벌써 반년이 넘도록 그의 지갑에서 잠들어 있는 연락처였다.

태수의 손에 든 연락처를 보면서, 그녀가 배시시 웃는다.

“이래도 저더러 그냥 집에 거라고 하실 거예요?”

정윤아가 태수의 팔에 팔짱을 끼고 슬쩍 몸을 붙인다.

부드럽고 말캉한 감촉이 태수를 자극했다.

그녀 몸이 태수에게 어떻게 반응하는지 기억났다.

태수는 손목시계를 보았다.

“아주 유감스럽게도 통금 시간이 다 되어 가는군요. 집에 돌아가긴 틀린 것 같습니다.”

통금 사이렌이 울릴 자정이 되려면 한참 남았다.

“어쩔 수 없이 저기서 쉬어 가야 할 것 같군요.”

태수가 저쪽에 보이는 여인숙을 가리킨다.

금산 호텔과 정반대 방향에 있는 여인숙이었다.

정윤아가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태수는 그녀의 허리를 감으며 웃었다.

“이왕 쉬어 가는 김에 같이 맥주나 한잔할까요?”

“그 말이 왜 안 나오나 기다렸어요.”

정윤아가 윙크한다.

“대신 내일 아침은 제가 살게요.”

그녀가 금산 호텔 일일 행사 도우미를 하고 받은 일당을 흔들었다.

* * *

집으로 향하는 한청호, 한일권 부자.

한청호는 차 속에서 내내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러다 처음으로 입을 뗐다.

“강태수를 만나 보니 어떻더냐?”

“이빨이 제법 날카로운 놈이던데요?”

“감상은 그것뿐이더냐?”

그것뿐일 리가 있나.

“뽑아 주고 싶은 눈깔과 주둥이를 갖고 있는 놈이던데요. 대가 세고, 만만치 않은 기세를 풍기고. 보기 드물게 짜릿한 놈이라고나 할까요?”

한일권이 이를 악물었다.

“그 새끼를 짓밟고 싶어졌어요. 그 도도한 눈깔을 얌전히 내리깔게 만들고 싶어졌어요. 목줄을 채워서 내 발밑을 기어 다니게 만들고 싶어졌어요.”

“내 자식이라면 그렇게 나와야지.”

한청호가 흐뭇하게 웃었다.

“그 새끼, 그건 어떻게 알았을까······.”

“뭘 말이냐?”

“명단을 줄줄이 읊던데요. 깨끗하게 덮은 일들을 알고 있었어요.”

한청호는 눈썹을 구겼다.

“그러니 내가 자중하라고 하지 않더냐? 그게 네 발목을 잡을 거라고 누누이 일렀거늘.”

“그딴 벌레 새끼들은 하나도 안 무서워요.”

“벌레 새끼들은 나도 안 무섭다. 그깟 놈들은 물어봐야 따끔하지도 않아.”

한청호도 힘없는 놈들은 피해를 끼치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기에 여태 한일권의 망나니짓을 묵인해 주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그걸 건드리는 놈이 강태수니까.

“약점도 누구 손에 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

“개미 눈물만 한 약점도 힘 있는 놈에게 잡히면 네 목을 조를 올가미가 될 것이고.”

명분이라는 이름하에 무기가 된다.

“코끼리만 한 약점도 힘없는 놈에게 잡히면 스치는 바람처럼 지나가는 법이지.”

그런 경우엔 오히려 힘없는 놈들에게 외려 뒤집어씌울 수 있어 더 좋지.

뒤탈도 없고, 후환도 없으니 두려울 게 없다.

“명심해라. 그러니 그놈이 냄새를 맡았으면 네가 당분간 자중해야 하는 게 맞아.”

“아버지, 지금 저더러 평생 그놈 눈치나 보고 살라는 겁니까?”

“아니. 난 사고 치는 자식은 용서해도, 남 눈치 보고 사는 자식은 용서 못한다.”

한청호는 딱 잘랐다.

“네가 그놈보다 힘을 키우면 될 일이 아니냐.”

그제야 한일권이 씩 웃었다.

“역시 우리 아버지. 아주 간단한 해결 방법이네요.”

“그놈을 완전히 짓밟아 버려. 굴복한 개는 주인에게 짓지 못하는 법이다.”

마음에 쏙 드는 조언이었다.

* * *

밤이 깊어 간다.

금산 호텔 5층 홀에는 유명 인사들도 하나둘씩 자리를 뜬다.

술 냄새를 풍기며 홀을 나오는 30대 후반의 젊은 남자를 누군가가 잡았다.

“대운 건설의 김우진 사장님이시죠?”

“네, 그렇습니다만.”

“초명 은행의 최무룡입니다.”

최무룡이 명함을 건네며 웃고 있었다.

“우리 따로 술 한잔하지 않겠습니까? 드릴 제안이 있는데.”

한청호가 아니라도 손잡을 인간은 많다.

돈은 부족하지만 성장 가능성이 큰 인물에겐 지금 이 손길이 오죽 반가울까.

가뭄의 단비처럼, 개국을 도운 공신처럼, 지금의 작은 도움을 큰 은혜로 되갚는 법이다.

* * *

1974년 1월 8일.

박정환 대통령은 긴급 조치 1호와 2호를 선포했다.

개헌 논의 금지 비상 군법 회의 설치에 대한 긴급 조치였다.

박정환 대통령은 이 조치로 지난해부터 시작된 유신 헌법 개정 운동을 불법화시켰다.

태수는 신문을 접었다.

“독재 정치가 점점 극에 달하고 있군. 다시 봐도 참 끔찍한 시기야.”

며칠 후 1월 14일.

박정환 대통령은 제1차 오일 쇼크를 계기로 ‘국민 생활 안정을 위한 긴급 조치 3호’를 선포하였다.

다음 날부터 긴급 조치 위반 혐의로 구속되는 사람들이 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잔뜩 긴장해서 숨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했다.

“이런 끔찍한 시기를 지나 찬란한 21세기 대한민국을 만든 건 전부 민주화를 위해 투쟁한 국민들 덕분이었지. 많은 희생을 치르고 쟁취한 자유였어.”

1월 18일.

마침내 경제 신문 1면을 장식한 기사가 떴다.

<청일 정유 1차 부도!>

<청일 정유 당좌 거래 정지!>

<청일 정유 주식은 휴지 조각!>

청일 정유가 부도 수순을 밟는다.

태수는 신문을 접으며 씩 웃었다.

“이제 부도난 청일 정유를 인수 합병하러 가 볼까?”

최종 부도가 나서 법정 관리에 들어가기 전에 청일 정유를 인수하는 쪽으로 미리 합의가 된 상태였다.

무려 박정환 대통령의 명령이니 잡소리가 끼어들 여지는 없다.

“이제 인수 계약서에 사인만 하면 청일 정유는 태양 정유가 되겠군.”

태수는 몸을 일으켰다.

준비는 끝났다.

태수는 한수와 함께 금산 호텔로 향했다.

태수가 청일 정유 인수 합병 계약서에 사인을 하는 곳으로 금산 호텔을 지정했기 때문이다.

* * *

한청호의 서재.

한청호도 준비를 끝냈다.

“가자.”

“예.”

박 비서가 미리 준비한 계약서를 마지막으로 검토하다가 눈을 들었다.

한청호는 외투를 챙기며 서재를 먼저 나간다.

박 비서는 재빨리 계약서를 챙겨서 그 뒤를 따라붙었다.

밖엔 운전기사가 미리 시동을 켜두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금산 호텔로.”

결전의 시간이 다가온다.

* * *

금산 호텔의 회의실.

어째서인지 장준용이 먼저 와 있었다.

회의실에 들어서는 태수를 두 팔 벌려 반기는 장준용.

“어서 오게. 기다리고 있었네.”

“바쁜 회장님께서 이 시간에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청일 정유가 쫄딱 망해서 넘어가는데, 그게 또 마침 내 호텔에서 인수 합병 계약을 한다네? 돈 주고도 못 볼 재밌는 순간인데 없는 시간 쥐어짜서라도 와 봐야지.”

한청호, 그 자식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내가 꼭 좀 봐야겠어.

금산의 장준용이 만사를 제치고 달려 나온 이유였다.

“청일의 한청호가 계약서를 준비한다던데······.”

“계약서라면 저 역시 준비했습니다.”

한수가 서류 봉투를 들어 보인다.

태수는 피식 웃었다.

“한청호가 이번에 수작을 부려 놨더군요. 혹시 아십니까?”

정보 상인을 자처하는 장말동이 화가 나서 버선발로 달려 나와 알려 준 소식이었다.

장말동은 한청호가 있는 청일 그룹을 향해 허공에 삿대질을 하며 한참이나 욕설을 내뱉었다.

장준용도 그에 대한 소식을 들었다.

“알지.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자네를 만나기 위해 기다리고 있던 참이야.”

장준용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번 청일 정유 인수 합병은 그만 포기하는 게 어떤가?”

박정환이 은행 대출을 막아 주고, 다른 재벌 기업들에 손대지 말라고 경고한 청일 정유다.

태수가 청일 정유를 먹으려고 칼리드에게 석유 공급 권리증까지 얻어 가며 마련한 기회다.

그런데 장준용은 태수를 걱정하기에 말렸다.

“한청호가 더러운 짓을 해 놨어. 치사하게 빼돌리기라니.”

그랬다.

청일 정유를 박정환에게 내놓겠다는 말을 하기 전부터 한청호가 작심해서 자행한 일이다.

청일 정유에 근무하는 직원을 전부 다른 계열사로 인사 인동 시켰다.

청일 정유에 딸린 각종 시설 중에 다른 곳에 쓸 수 있는 것들은 전부 빼돌렸다.

팔 수 있는 것들은 죄다 팔아 치웠다.

그렇게 최선을 다해 청일 정유를 빈껍데기로 만들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한청호 이놈이 청일 정유에서 난 적자뿐만이 아니라 다른 계열사의 적자까지 전부 청일 정유에 몰아넣었어. 일부러 부도내려고 작정한 거야.”

이미 박정환에게 말을 꺼낼 때부터 청일 정유 도산은 정해진 일.

밑 빠진 독에 물을 부었던 걸 전부 회수하고, 있던 물도 빼간다.

그 대신 채워 넣은 것은 오물이었다.

한청호가 할 법한 짓이었다.

“청일 정유 주식도 휴지 조각이 되기 전에 전부 팔아 버렸고.”

한청호와 청일 그룹은 보유한 청일 정유 지분을 전부 매각해서 돈을 챙겼다.

덕분에 청일 정유 주식 하락폭이 며칠 만에 엄청나게 커졌다.

개미 투자자들만 피눈물을 흘리게 된 것이다.

“상도덕도 없는 놈. 아주 쓰레기 같은 놈이야.”

남이랄 수 있는 장준용이 저리 분개하는데, 정작 태수는 태연히 웃고만 있다.

장준용은 벌컥 화를 냈다.

“자넨 지금 웃음이 나오나? 분하지도 않으냔 말일세! 어렵게 얻은 청일 정유가 쓰레기가 되었는데!”

“겉으로 보기에 청일 정유가 빈껍데기가 되었다고 해도, 그게 정말 쓰레기는 아닙니다.”

정준용이 미친놈 보듯 태수를 본다.

“적자를 잔뜩 끌어안은 데다, 시설 대부분을 처분해 버린 청일 정유야. 빈껍데기를 지나 이젠 쓰레기가 되었다고.”

그렇기에 한청호는 의기양양하게 나타나 거들먹거릴 것이다.

태수에게 역으로 크게 한 방 먹였다고 신날 것이다.

하지만 한청호가 모르는 게 있다.

“그때 일부러 도발한 겁니다. 한청호가 이런 얄팍한 수작을 부리길 바랐으니까요. 그런데 정말로 이리 쉽게 넘어가 주었군요. 제가 더 고마울 지경입니다.”

태수가 웃고 있는 이유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