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금산 호텔 연회장에서(5)
내친김에 태수는 조용히 읊조렸다.
“김광현, 성연재, 이희정, 윤현곤, 양금섭, 황지원, 박영주, 이만종, 홍현경, 최재문, 하재욱, 전우석, 강유신, 조찬익, 박수연, 김수환, 장승완······.”
한일권이 전치 12주 이상으로 만들어 병원에 보낸 사람들 이름이었다.
“난 모르는 이름인데?”
한일권이 어깨를 으쓱한다.
“내가 그런 벌레 새끼들 이름까지 알아야 하나?”
뻔뻔한 놈이었다.
“배수진, 안주영, 이연주, 이현경, 김이숙, 서윤진, 이은지 정유란, 김유지 서희정.”
한일권이 산부인과로 보낸 여자 이름들이었다.
“영 아는 사람이 없네. 넌 시간이 남아도나 봐. 그런 쓸데없는 이름들을 외우고 다니는 걸 보니까.”
벌레 같은 놈들이야 수백 명이 몰려들어도 우습지 않다.
“실망이야, 강태수. 그딴 걸로 날 어찌할 수 있겠어?”
한일권 역시 위스키 잔을 들었다.
‘저 새끼가 어떻게 알았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파고든 거야? 분명 잘 처리했는데?’
겉으론 태연함을 가장했지만 입이 바싹 말라서 목을 축이기 위해서였다.
한일권은 태수에게 바싹 붙었다.
남들이 듣지 못하도록 작게 속삭였다.
“내 아버지가 청일 그룹의 총수 한청호 회장님이야. 그 정도는 얼마든지 덮을 수 있단 소리거든.”
믿는 건 역시 아버지뿐이다.
“증거는 없고, 증인은 매수했고, 귀찮은 말이 나오면 다시 확실하게 밟아 주면 되는데? 내가 그까짓 게 무섭겠냐?”
한일권은 어깨를 떨며 웃는다.
“불쌍한 인생 시궁창 밑바닥으로 처박는 게 뭐 그리 어렵다고. 그놈들 중에 과연 날 단죄할 수 있는 놈이 있을까? 어떻게? 클클클.”
지금이 70년대라서 권력과 돈이면 사건을 얼마든지 덮는다고 여기고 있군.
21세기엔 곳곳마다 CCTV에 스마트 폰에 블랙박스 때문에 한일권도 직접적으로는 많이 몸을 사렸었다.
하지만 지금의 젊은 한일권은 거리낌 없이 날뛰고 있다.
“지금까지는 그랬지. 하지만 한일권, 넌 앞으로 자중해야 할 거야. 내가 널 주시하고 있으니까.”
CCTV에 스마트 폰에 블랙박스 없다고 단죄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범죄자를 단죄하는 건 함무라비 이전 시대에서도 얼마든지 행했던 일이다.
‘이 시대엔 이 시대에 맞는 방법으로 그 값을 치르게 만들면 그뿐이다.’
힘으로 덮을 수 있다면 힘으로 집어넣을 수도 있다.
독재 정권, 군사 정권 시대엔 힘 있는 놈의 세상이니까.
그리고 태수 역시 힘을 만들어 놓고 있었다.
“내가 좋은 데 구경시켜 줄까?”
전생에 한일권은 단 한 번도 구경해 보지 못한 곳이다.
“감방 구경은 아직 못해 봤지?”
넌 이름도 모르는 벌레 새끼들 때문에 감옥에서 썩게 될 것 같은데.
“누가 날 감옥에 보낼 수 있을까?”
“나, 강태수가.”
태수는 위스키 잔을 흔들었다.
“못 믿겠으면 우리 내기할까?”
웃음 속에서 꽃피는 독설이었다.
“난 자신 있거든. 너 감방 구경도 시켜 주고, 밑바닥 생활도 시켜 주지.”
청일 그룹, 내가 박살 내줄 테니까.
“돈 있고, 힘 있고, 빽 있다가 밑바닥 시궁창 생활을 하게 되면 인생이 참 지옥 같을 거야. 안 그래?”
“그런 일은 죽었다 깨도 없을 거야. 나, 청일 그룹 후계자 한일권이야.”
“다들 그렇게 말하더라고. 당하기 전까지는.”
한일권이 주먹을 꽉 쥐었다.
그때였다.
달칵.
문이 열리고 한청호가 나온다.
5층 홀에 모인 사람들이 일제히 한청호를 쳐다본다.
반면 한청호는 오로지 강태수만 보고 있었다.
“강태수······.”
“나오셨네. 안에서 이야기는 잘 나누셨습니까?”
“넌 쓰레기만 갖게 될 거다, 강태수.”
“아, 청일 정유? 난 상관없는데?”
태수는 한일권 대신 한청호에게 눈을 돌렸다.
“앞으로 당신이 갖고 있는 것, 목숨처럼 소중한 것, 빼앗기고 싶지 않은 것. 난 그런 것들을 당신에게서 빼앗아 올 겁니다.”
태수는 위스키 잔을 들며 웃었다.
“그러니 당신이 그걸 전부 쓰레기라고 불러도 상관없습니다. 쓰레기 눈에는 쓰레기만 보이는 법이니까. 이해합니다.”
한청호가 주먹을 꽉 쥔다.
너무 꽉 쥔 나머지 핏기가 하나도 없을 정도다.
“강태수··· 넌 지금 이 순간을 후회하게 될 거다. 난 호락호락하게 당하지만은 않아.”
한청호가 이죽거린다.
“그러니까 넌 그걸 끌어안고 같이 죽어.”
한청호는 그 말을 끝으로 태수를 지나친다.
그러자 태수 역시 한청호에게 말을 되돌려 준다.
“당신이 아무리 쓰레기라고 우겨도 본질은 변하지 않죠.”
태수는 웃었다.
“억지로, 강제로, 어쩔 수 없이. 당신은 청일 정유를 내게 빼앗겼습니다. 당신이 졌어요. 아무리 부정해도 결과는 바뀌지 않습니다.”
한청호가 이를 간다.
“나중에 웃는 사람이 승자다. 지금은 네가 웃고 있지만 두고 봐라. 청일 정유를 갖고 가도 넌 결코 웃지 못할 테니까. 내가 그렇게 만들어 주지.”
패자의 추악한 발버둥이었다.
한일권을 향해 한청호가 외쳤다.
“가자! 앞으로 네가 바빠지게 될 게야. 배워야 할 것도, 해야 할 것도 많다!”
한일권을 중히 쓰겠다는 선언이었다.
최악의 선택을 알아서 해 주는 한청호를 보며 태수가 비웃었다.
반대로 한일권은 감격해서 웃었다.
‘아버지가 드디어! 난 이제 청일 그룹에 다시 복귀한다!’
한일권 역시 몸을 돌려 제 아버지를 따라갔다.
그들 부자가 그렇게 가고 난 후 5층 홀은 술렁거렸다.
“저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청일의 한청호가 저렇게 가네.”
룸에서 나오자마자 석유 공급 권리증을 두고 계열사 사장단들과 머리를 맞댔던 삼청 그룹의 총수 이병춘.
그가 태수에게 다가왔다.
“자네 덕분에 삼청이 수월하게 위기를 넘기게 되었어. 고맙네.”
“별말씀을요.”
“하지만 청일의 한 회장을 보아하니 보통 독이 오른 게 아닌 것 같으이. 조심하게.”
이병춘이 품에서 푸른색 명함을 하나 꺼내 태수에게 건넸다.
하늘, 바다, 숲처럼 넓고 높고 울창하겠다는 뜻.
삼청(三靑)을 상징하는 푸른색이었다.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고.”
“감사합니다.”
명함이라고 부르기도 아까울 정도로 화려하다.
재질부터 디자인, 글씨, 크기까지 명함을 벗어났다.
이 정도면 고급 초대장에 가까웠다.
하나부터 열까지 명품만 취급한다는 이병춘다운 명함이었다.
금산의 황금 명함과 견줄 만한 귀한 것이다.
그때 차기범이 문을 열고 나왔다.
“삼청의 이 회장님, 각하께서 부르십니다.”
“그럼 난 이만 들어가 봄세.”
이병춘은 명함을 전하고 등을 돌렸다.
차기범이 럭키세븐의 구자겸에게도 말을 전한다.
“럭키세븐의 구 회장님, 각하께서 부르십니다.”
구자겸 역시 품에서 눈처럼 하얀 명함 한 장을 꺼낸다.
럭키세븐 치약과 동동구리무 화장품 등 화학에서 두각을 나타내 시작하였기에 상징하는 색은 흰색.
그룹 총수의 명함이라기엔 너무나 소박한 명함이라, 삼청이나 금산과 대조되었다.
구자겸이 명함을 태수에게 내밀었다.
“긴말은 않겠네. 필요할 때 요긴하게 쓰게.”
“감사합니다.”
차기범이 이번엔 포항 철강 박태종을 향해 몸을 돌렸다.
“포항 철강 박 사장님, 각하께서 부르십니다.”
“음. 나도 이만 들어가네. 나중에 다시 보지.”
박태종도 룸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차기범도 박태종의 뒤를 따라 룸으로 들어간다.
그렇게 문은 닫혔다.
‘이만 가 볼 시간이로군.’
태수는 등을 돌려 5층 홀을 빠져나왔다.
5층 홀 입구에선 박철완이 웃으며 기다리고 있었다.
“사장님, 제가 화장실 간 사이에 3층을 발칵 뒤집어 놓으셨더군요?”
“글쎄요. 별로 그런 기억은 없습니다만.”
머문 시간도 얼마 되지 않는다.
대뜸 쓰레기를 주기에 그걸 쓰레기통에 버린 것뿐이다.
“재벌가 영애들이 내내 사장님 얘기만 떠들던데요? 스타가 따로 없던데요.”
박철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내가 태양 건설 부사장인 걸 아는 애가 있어서 나까지 둘러싸여 들들 볶이다가 이렇게 도망 나온 거예요.”
“괜한 불똥이 그쪽으로 튀었군요. 전 이만 가 보려고 합니다.”
“저도 같이 가요. 여자애들 등쌀에 못 버티겠어요.”
박철완이 치를 떨며 몸을 부르르 떤다.
둘이 함께 복도를 지나쳐 내려가려는데, 계단에서 누군가가 태수를 불렀다.
“잠깐만요.”
여자 목소리였다.
돌아보니 6층으로 향하는 계단에서 숙녀 한 분이 난간에 팔을 기댄 채 태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태양 건설 강태수. 아버님께 들은 적 있어요. 사우디에서 돌아오셨나 보죠?”
박철완이 그녀를 알아보고 급하게 태수의 귀에 속삭였다.
“대통령 각하의 따님이세요.”
그 정도는 태수도 알고 있다.
그녀가 훗날 무엇이 되는지까지 아는 마당에 저 얼굴을 모르려야 모를 수가 있나.
박경혜가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계단을 내려온다.
“나랑 잠시 얘기 좀 해요.”
태수는 딱 잘라 말했다.
“제가 술이 좀 과한 것 같습니다. 그러니 다음을 기약하죠.”
태수는 정중히 인사한 후, 냅다 튀었다.
“저, 저기요! 잠깐만요!”
“제가 속이 안 좋아서 이만!”
태수는 전력 질주로 계단을 내려간다.
“저기요! 화장실은 이쪽······! 이봐요!”
다다다닷.
순식간에 1층까지 내려온 태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금산 호텔을 빠져나왔다.
“식겁했네.”
지금 누구 신세를 망치려고.
저 여자랑은 절대로, 죽어도, 무슨 일이 있어도, 단 한 순간도 엮이고 싶지 않다.
태수는 재빨리 호텔 주차장으로 향했다.
“아, 위스키를 마셨지.”
이대로 운전할 수는 없다.
이 밤에 금산 호텔로 택시를 부르려면 다시 돌아가야 한다.
그제야 급히 내빼느라 박철완까지 떼어 두고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기, 태수 오빠?”
여자 목소리에 등에서 식은땀부터 흘렀다.
박경혜가 설마 여기까지 따라온 건가?
태수는 억지로 몸을 돌려 목소리를 확인했다.
“저예요. 정윤아.”
정윤아가 그곳에 서 있었다.
태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여기 어쩐 일입니까?”
“일일 도우미로 나왔어요. 일당이 제법 세다고 해서요.”
아르바이트를 했다는 뜻이다.
“연기 수업은 잘 받고 있습니까?”
“그럼요. 누구 덕분에 실력파 연기자 선생님을 모시고 매일매일 연기 배우느라 바쁘게 지내고 있어요. 저 그동안 제법 늘었어요.”
그녀가 말갛게 웃는다.
“오빠 말이 맞았어요. 그때 데뷔했다면 발연기 소리를 면치 못했을 거예요. 연기 수업 때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몰라요.”
찰랑이는 단발을 귀 뒤로 수줍게 넘기는 그녀.
다시 봐도 다람쥐 같다.
“혹시 오빠가 여기에 오지 않을까 하고 자원한 거예요.”
금산 호텔에서 열리는 대규모 기념 행사 및 축하 연회에 각계각층의 유력 인사들이 모두 모인다.
연예인과 모델들도 자리를 빛내 주기 위해 초대받는 자리가 아닌가.
“금산 호텔에서 연기 선생님을 통해 행사를 도울 일일 도우미를 모집했거든요.”
연기 수업을 받는 학생들이나 연극 단원 중에는 미모가 뛰어난 자들이 많다.
금산 호텔은 미모의 도우미들이 행사를 돕길 원했다.
아직 스타가 되지 못한 연극 단원이나 학생들은 두둑한 일당에 혹해 너도나도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중에 단연 압도적인 미모 1순위에 빛나는 정윤아도 있었다.
“그런데 외국 나가신다는 일은 다 끝났어요? 완전히 귀국하신 거예요?”
“아뇨. 잠깐 중요한 일이 있어서 들어온 겁니다.”
무려 청일 정유를 도산시켜 꿀꺽 먹는 일이다.
“아······.”
그녀가 아쉬운 기색을 감추지 못한다.
“오빠, 이렇게 헤어지기 아쉬운데 맥주라도 같이 한 잔······.”
“쉿!”
저쪽에서 또각대는 구두 소리가 들려왔다.
신경질적인 소리였다.
“사람을 앞에 두고 어쩜 그렇게 도망갈 수가 있어? 무례한 작자 같으니라고.”
박경혜였다.
태수는 재빨리 정윤아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녀의 머리를 푹 눌러 억지로 자세를 낮춘다.
그리고 자동차 뒤로 재빨리 숨었다.
박철완이 넥타이를 잡힌 채 질질 끌려오고 있었다.
“경혜야, 숨 막힌다. 이것 좀 놔라.”
“철완 오빠, 그 남자 차는 어디 있어요?”
박철완이 눈을 돌리다가 자동차 뒤에 숨어 있는 태수와 눈이 마주쳤다.